독일령 동아프리카 식민지의 생성 : 뒤늦게 뛰어든 독일의 제국주의 정책

알렉세이 정
2026-07-15

아프리카 내에서 독일 식민지 역사의 시작은 독일 식민지 협희(Society for German Colonization)의 모험가 카를 페터스(Carl Peters)가 잔지바르에서 바다를 가로 질러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 들어가 원주민 족장들과 조약을 맺으면서 독일의 식민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 베를린 회의가 종료된 후, 1885년 3월 3일 독일 정부는 독일 보호령 동아프리카를 설립할 의향이 있다는 것과 카를 페터스의 독일 식민지 협회에 2월 17일 비밀리에 독일 보호령 동아프리카 통치를 위탁하는 면허를 허가해 주기로 공표했다. 카를 페터스는 그 이후 현지를 종단하여 남쪽 르피지 강(Rufiji River) 및 북쪽 연안 부 비투(Witu), 부근의 라무(Lamu)라고 불리는 스와힐리란드(Swahililand)에 전개하는 여러 명의 전문가들을 모집했다. 잔지바르의 술탄은 아프리카 대륙 인도양 연안부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그는 독일의 진출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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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반식민지 무장 투쟁인 마지마지 반란(Maji Maji Rebellion, 1905~1907) 당시, 독일 제국의 식민 부대(Schutztruppe)가 탄자니아(당시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웅고니(Ungoni) 부족 추장들 앞에서 맥심 기관총 등 현대식 화기를 발사하며 군사적 위력을 시위하는 모습, 출처 : Amazon.com


이와 같은 시기,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는 5척의 군함인 슈트슈(Stosch), 그나이제나우(Gneisenau), 프린츠 아델베르트(Priz Adalbert)를 포함하여 동아프리카에 파견했다. 독일의 함대는 8월 7일 현지에 도착해 포구를 술탄의 궁전을 향해 전진하여 위압했다. 대영 제국은 잔지바르에게서 지원을 요청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자신들도 동아프리카에 진출했다. 독일 및 프랑스가 협의한 결과 1886년 대륙 부를 분할해 각자의 경계선에 따라 잔지바르의 지배 영역도들을 정하고, 영국은 훗날 영국령 동아프리카라 불리는 케냐를, 독일은 훗날 탕가니카를 영유하기로 하여 잔지바르의 지배 영역은 잔지바르 섬 등 동아프리카 해의 도서부 및 대륙연안에서 10마일(16km) 내륙까지로 정해졌다. 프랑스는 코모로 제도 영유하는 것에 대해 영국과 독일을 승인하는 것과 뒤이어 그 때까지의 경계를 승인했다. 영국의 지원을 얻지 못한 잔지바르는 동의를 얻지 못했다. 


독일은 빠르게 바가모요(Bagamoyo), 다르에스살람(Dares Salaam) 및 키르와(Kilwa) 지구를 지배하에 두었다. 그리고 1888년 아브시리의 반란(Abushiri Revolt)이 발생해, 다음 해 영국의 지원을 받아서 진압했다. 1890년 영국과 독일은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을 체결해 잔지바르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고, 북해의 헬골란트 섬은 독일령이 되었으며, 잔지바르의 지배 영역이던 연안 부를 매수해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권한 범위를 정했다. 그 영역의 경계선은 1910년까지 불명확한 채 유지되었다. 1891년부터 1894년 사이에 족장 무크와와(Muqwawa)가 이끄는 헤헤 족(Hehe Tribe)이 독일의 진출에 저항했으나, 결국 다른 부족이 독일 측에 가담했기 때문에 패배했다. 게릴라 활동을 계속한 후 무크와와는 끊임없이 추격을 당하던 끝에 1898년 자살했다. 


1905년에는 마지 마지 반란(Maji Maji Rebellion)이 발생해, 식민지 총독 구스타프 아돌프 폰 겐첸(Gustav Adolf von Genzen) 백작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얼마 안 가 부패와 잔학 행위의 불상사가 밝혀지게 되어 1907년 독일 재상 베른하르트 폰 뷔로(Bernhard von bürow)는 식민지성을 설치해 베른하르트 데르부르크(Bernhard Derburg)를 장관으로 임명해 식민지 통치의 개선을 지시했다. 이는 식민지 통치의 시범 기반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 중 원주민의 경이적인 충성으로 그 결과가 나타났다. 독일인 식민지 관리관은 질서를 유지하고, 징세에 관련한 것은 원주민 부족의 족장에게 맡겨 신뢰를 얻었다. 1914년 1월 1일 현지 경찰 이 외에도 보호령 군대인 슈츠트루페(Schutztruppe)는 11명의 독일인 장교와 42명의 군의관을 포함해, 126명의 부사관 및 2,472명의 원주민병 아스카리(Askari)로 편성되어 다르에스살람, 모시(Moshi), 이린가(Iringa) 및 마헨게(Mahenge)에 배치되었다.


독일이 동아프리카에 진출할 때 많은 지역에서는 그 때까지 잔지바르의 술탄이 이용했던 통치 조직을 물려받았다. 이것은 각 촌에 준베(Junbe, 촌장)을 배치하고, 몇 개의 촌을 다스리는 아키다(Akida, 군장)라고 부르는 중간 통치자를 정부가 임명한 형태였다. 아키다는 읽고 쓰기가 가능한 주로 아라비아인 및 스와힐리인이 선택되었으나, 뒤에는 교육을 받은 기타 아프리카인들도 다수 채용되었다. 다만 내륙부의 대규모 부족에 대해서는 부족의 족장을 중간 통치자로써 정식이나 혹은 암묵 속에서 승인했다. 이들 중간 통치자는 도로 및 다리 등의 토목 공사에서 노동부역, 정부의 캐러밴대의 하역, 독일인의 경영하는 농원에서의 노동자 등의 공급, 혹은 가옥세의 징세 등을 대신했다. 족장 혹은 촌장은 징수하는 세금의 5%을 보수로써 받았다. 납세는 금납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환금 작물의 재배가 시작되지 못한 지역에서는 강제노동으로 대용하는 제도도 준비되었으나, 이것은 주민에게는 불평하였다. 


부역에 응하지 않은 주민에 대해서는 아키다 및 족장에 의해 가옥이 불에 태워지거나 가축이 몰수되었다. 1905년 이와 같은 무보수의 노동 부역에서 임금 노동의 제도로 고쳐져, 임금 중에서 납세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인두세가 도입되어 가옥 세에서 서서히 전환되게 되었다. 가옥 세와 인두세를 합친 세수는 1909년에는 311만 마르크나 되었고, 식민지 세수의 34%를 차지했다. 내륙의 하야 족이 거주하는 부코바(Bukoba) 지역, 르안다 왕국 및 부룬디 왕국의 3개 지역은 인구가 집중되어 중앙 집권적인 제도를 가진 대규모 부족이 지배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정부는 간접 통치 방식을 사용해 3개 지역을 자치구로 삼아, 왕, 혹은 족장은 내정에 관련한 권한을 주었다. 각 자치구에는 독일인 주재관이 배치되어 경제개발의 조언자가 되는 것과 더불어 외국인 및 현지 주민의 출입국을 감시했다. 이러한 자치구에서는 경제개발이 뒤처져, 징세가 실시된 것은 191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동아프리카 일대에서 상업과 그 성장은 독일의 지도하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0,000헥타르(100,000 에이커) 이상을 넘는 사이잘삼(Sisal)이 재배되어 가장 큰 수입원이 되었다. 대규모 면화의 플랜테이션의 기타, 200만 개의 커피나무와 80,000헥타르(200,000 에이커)를 넘는 고무나무가 심어지게 되었다. 당초 독일은 유럽인 이주자를 대우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마지 마지 반란 이후, 독일 식민지성 초대 장관인 데르부르크 및 게첸에서 교체되어 동아프리카 총독에 취임한 게오르크 아르비레히트 폰 레헨베르크(Georg Arbirrecht von Rehenberg)는 식민지 정책의 중점을 소수의 유럽인들의 보호에서 현지 아프리카인에 의한 농업 개발로 옮겨졌다. 동아프리카 지역의 빠른 경제 발전은 신뢰할 수 있는 수송 수단에 의존한 것이란 이해가 있으나, 이와 같은 농업 생산품의 시장으로의 유통은 탄카(Tanga)에서 모시(Moshi)에 이르는 우산바라 철도(Usambara Railway) 혹은 북방 철도(Northern Railroad)가 개통한 1888년에 시작되었다. 


가장 노선이 긴 탄자니아 중앙 철도는 다르에스살람에서 모로고로(Morogoro), 타보라(Tabora)를 경유해 키고마(Kigoma)에 이르는 전장 1,250km (775마일)에 달했다. 레헨베르크는 내륙부에서 환금 작물 도입을 재촉하기 위해 철도 건설을 우선 시켜 최종적으로 탕가니카 호수 동쪽 연안까지 개통한 것은 1914년 7월로써 이것을 기념해 대규모의 화려한 축전과 더불어 농산물의 견본 시와 무역박람회를 수도에서 개최했다. 철도 개통과 독일인 상인의 움직임 등으로 인해 내륙부에서 환금 작물이 급속히 보급되었으나, 철도 건설은 독일 국고에서 건설 차관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식민지 정부는 차관 변제에 큰 부담을 안고 있었다. 1914년 식민지 정부 세입의 32%가 차관 변제에 사용되었다. 항만 시설은 전기 크레인, 철도 부설, 창고 등이 건설 혹은 확충되어, 탄가, 바가모요 및 린디(Lindi)에는 부두가 개축되었다. 


1912년에는 다르에스살람 및 탄가에 356척의 증기 화물선 및 여객선 등 1,000척이 넘는 연안선과 역내 무역선이 입항했다. 1914년까지 다르에스살람 및 주변 지역의 인구는 166,000명이 되었으며 이들 중 1,050명의 유럽인을 포함해, 독일인은 그 중 1,000명이나 되었다. 더불어 동아프리카 보호령 전역에서는 3,579명의 독일인이 있었다. 그 자체로써 다르에스살람은 전 열대 아프리카의 모범적 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조국을 위해 이익을 올리지는 못하고, 본국 재무성으로부터 조성금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 소유자 벨기에, 영국, 프랑스 및 포르투갈과는 다르게 독일은 초등학교, 중등학교 및 직업 훈련학교를 개설하여 아프리카인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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