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만 바다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존재했던 바다

알렉세이 정
2026-08-04

핀란드만 바다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존재했던 바다로 라도가 호수를 돌아 유럽으로 들어가는 모든 병참선을 끊었던 잔인한 900여 일의 사투가 시작되었던 곳이다. 독일군과 핀란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레닌그라드 시는 시민들을 동원해 도시를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1941년 8월 30일경 독일군이 레닌그라드 외곽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목재장애물 190km, 철조망 635km, 대전차호 700km, 토치카 5,000개소, 참호 25,000km에 달할 만큼 말그대로 요새화 된 상태였다. 그러나 독일군이 예상 외로 너무 빨리 쳐들어왔다. 시민들은 미처 소개할 틈이 없었고 그 결과 320여 만에 달하는 시민들은 꼼짝없이 도시에 갇혀버렸다. 독일군은 8월 30일까지 레닌그라드로 통하는 모든 도로망과 철도망을 차단하고 9월 4일부터 포병대를 동원하여 시가지에 대한 포격을 개시, 8일에는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완성하고 대규모 공습을 시작했다. 첫날의 공습만으로도 180여 개소에 화재가 발생하여 도시는 불바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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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3년 1월 초,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주변의 군사 작전 상황을 나타내는 역사 지도,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독일군도 너무나 잘 요새화된 레닌그라드를 치고 들어가기에는 너무 큰 피해가 예상되어 직접적인 대규모 공격은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히틀러는 10월 7일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것을 지시한다. 독일군은 명령에 의거하여 직접적인 공격을 자제하면서 포위망을 강화하여 레닌그라드를 말려죽이는 것으로 포위전을 감행한다. 이로서 900여 일에 걸친 레닌그라드 공성전이 시작된 것이다. 9월 2일자로 시민에 대한 배급량은 육체노동자 600그램 노동자 400그램 그밖의 시민과 아이들 300그램이었지만 계속된 공습으로 식량고가 불타는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곡물 등과 육류는 30여 일 분 밖에 남지 않았고 유재품은 45일 분 가량, 과자등은 60일 가량의 비축량이 남아있을 뿐이었다.결국 9월 12일 배급량은 육체노동자 500그램, 노동자와 아이 300그램, 그외 시민 250그램으로 줄어들게 된다. 


소련의 발틱함대는 도시에 접해있는 라도가 호수를 통해 도시에 보급품을 전달하려 애를 썼으나 제공권을 장악한 독일공군의 공습에 수송선들은 격침되었다. 9월 말이 되자 도시 안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석유와 석탄은 동이 났고  이제 남은 연료수단은 나무 밖에 없었지만 그나마 벨만한 장비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10월이 되자 식량도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밀가루가 떨어지자 소맥분을 먹기 시작했고 소맥분이 떨어지자 말 먹이용으로 쓰이던 귀리를 먹기 시작했으며 귀리가 떨어져지 격침된 수송선에서 썩은 밀을 인양해 먹고 그나마 없어지자 톱밥과 목화씨, 셀롤루스까지 먹기 시작했다. 11월에는 전력부족으로 방공부대와 군사령부, 지역위원회를 제외한 모든 전력공급이 중단되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독일군의 포격과 폭격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 있었다. 1941년 레닌그라드에 겨울이 돌아왔다. 연료도 전기도 식량도 없는 상황에 냉혹한 북구의 겨울이 다가온 것이다. 


이렇듯 식량부족으로 이미 아사자가 나오고 있던 상황에서 겨울은 잔인한 학살자였고 도시외곽에는 굶어죽고 얼어죽은 시민들의 사체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식량부족은 이미 참혹할 정도라 한 역사학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새 모이에서 카나리아까지 모든 것을 먹었다. 벽지를 벗겨내서 거기에 발라져 있는 감자로 만든 벽지 풀을 먹었다. 책 제본에서도 풀을 찾아 햝아먹었다. 풀을 그대로 마셔버리기도 했다. 가죽 벨트와 가죽 가방을 끓여서 먹을 수 있는 젤리를 만들었다. 풀과 잡초를 뽑아서 절였다. 바셀린, 립스틱, 향신료와 약, 모피코트, 가죽모자를 먹었다. 어떤 이들은 화장용 분으로 팬케이크를 만들어 먹었고, 독일군의 소이탄에 맞아 무너진 설탕 창고 밑에서 파낸 더러운 설탕덩어리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그 외에도 역사가들은 당시 사람들이 돼지 가죽으로만 22가지 요리를 만들었다고 기록했으며, 군대식당 메뉴 기록을 보면 고사리 잎 수프, 쐐기풀 퓨레, 고체 기름으로 만든 팬케이크도 있었다. 비타민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소나무 잎에서 비타민 C를 추출하고, 담배공장의 지붕 밑 층과 환기 갱도를 쓸어서 비타민 B를 함유하고 있다는 담배진을 모아서 먹기도 했다. 또한 종자를 모아둔 식물학연구소에서의 어느 연구원은 20만종에 가까운 식용식물 모종을 지키다 굶어죽기까지 했다. 12월이 다가오자 배급량은 비누만한 크기에 불과한 125그램까지 떨어졌으며 도시 안에서 고양이나 개는 물론이고 쥐마저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 나이든 미술가는 자신의 애완용 고양이를 목졸라 죽여서 먹었다고 했으며 얼마 후 그는 목매어 자살하려했으나 줄이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졌고 결국 다리가 부러져서 얼어죽었다 한다. 


결국 굶주림에 못이긴 시민들은 죽은이의 살을 먹기 시작했다. 물론 식인행위는 적발시 총살이 원칙이었지만 겉으로는 쉬쉬하면서 행해졌다. 시민들의 정신은 황폐화되어 미쳐가기 시작했고 굶주림으로 미쳐버린 한 어머니가 제 정신을 잃고 딸을 죽인후 토막내고 고기를 갈아서 고기 파이를 만든 사건도 있었다고 당시의 한 생존자는 회고하기도 했다. 또한 어느 생존자는 남편이 아내를 먹은 경우들, 아내가 남편을 잡아먹은 경우들, 부모가 아이들은 잡아먹은 경우들에 대해 알고 있다고 주장했고 그가 살고 있는 건물에서도 경비가 아내를 죽여서 그녀의 머리를 잘라 뜨거운 스토프에 집어넣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또한 다른이의 배급카드를 빼앗기 위한 살인도 심심찮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래 전부터 레닌그라드 중심부에 있던 시장인 헤이마켓은 이제 헝그리 마켓으로 불리워졌으며 이곳에서 인육을 판다는 소문은 꽤나 널리 알려진 소문이었다.


피스카 레프스키, 세라피모프 등의 큰 묘지에 죽은 시민들을 묻기 위해 공병들이 동원되어 폭약을 폭파시켜 구덩이를 파곤 했는데 공병들이 시체들을 구덩이속으로 밀어넣는 중 훼손된 시체들을 목격했다는 목격담도 꽤 남아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헤이마켓에서 어떻게든 육류를 손에 넣은 시민들은 그것이 개나 고양이 고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사람 고기일수도 있다는걸 인정하면 최소한 남은 마지막 인간성마저도 무너질까봐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겨울을 날 연료도 없어서 사람들은 도서관의 장서를 가져다 불을 때거나 문화제와 미술품, 골동품가구들까지 모두 때서 겨울을 버텨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얼어죽는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 당시의 참상을 어느 시인은 이렇게 시로 남겼다.


"우리는 모든 것을 겪었네.

러시아 말에는

그 광기어린 전쟁의 겨울을 표현할 단어가 없다네.

에르미타주 궁전이 폭격 아래 무너졌을 때,

집들이 서리로 덮히고, 관이 얼어서 터졌을 때,

100그램의 배급을 타러 갔다네. 네브스키(레닌그라드의 거리)의 시체들을 타넘으며.

그리고 우리는 사람을 먹는 것도 배웠다네.

우리는 모든 것을 겪었네."

- 다닐 안드레예프(Даниил Андреев, 1906~1959), 해리슨 샐리즈버리의 『포위된 레닌그라드의 900일』중에서 


레닌그라드가 포위된 이후 1941년 11월 20일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다. 바로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를 통해 보급품이 조금씩이나마 들어오게 된 것이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그 보급로를 바로 "생명의 길" 이라 불렀다. 이 길을 통해 보급품이 들어오고 도시의 시민 52만 명 가량과 부상병 3만 5천이 도시 밖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며 이 길은 얼음이 녹은 1942년 4월 24일까지 152일동안 시민들의 생명을 유지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이 길은 위험도가 매우 높아서 독일군의 포격이나 공습에 많은 이들이 탈출 도중 희생되었다.


특히 보급품을 운송하던 트럭운전사들에게는 "죽음의 길"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험한 루트였다. 그리고 1942년 여름, 라도가 호수의 물밑으로 석유 파이프 라인이 개설되었다. 시민들은 이를 "생명의 동맥"으로 불렀으며 도시는 겨우 살아나기 시작했다. 1942년 겨울이 되자 다시 "생명의 길"은 열렸고 1943년 1월 드디어 소련군의 반격으로 포위망의 한 축이 탈환되어 본국과 연결되었다. 물론 4면 포위에서 3면 포위로 바뀐것 뿐이라 여전히 포격과 폭격은 계속 되었지만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그리고 1944년 2월 소련군의 동계공세로 드디어 도시는 포위상태에서 900일만에 해방되었다. 레닌그라드의 저항은 전쟁 초반 연전연패하고 있던 연합국들에게 승리의 신념을 주는 상징이었으며 스탈린은 레닌그라드에 "영웅도시"의 칭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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