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과 캄보디아 국경 분쟁의 중심, 쁘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

알렉세이 정
2026-08-12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분쟁의 중심에는 쁘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이라는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이 사원은 캄보디아의 원주민은 크메르족이 건국한 크메르 제국에 의해 9세기 초, 힌두교의 시바 신을 모시기 위해 본래 힌두교 사원으로 건국했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목조건축물로 지었지만 다른 국왕들이 통치하면서 조금씩 개조했으며 10세기 초에는 석축으로 지었다. 11세기 초에는 메콩 강 일대의 사암을 이용하여 사원을 재건했고, 이 때부터 불교 사원이 된다.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이 침공했을 때, 이 사원만큼은 무사했었다. 이어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접수하고 태국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 사원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관할에 들어왔다가 캄보디아가 독립한 이후, 크메르 루주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론 놀의 정부군과 크메르 반군의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사원의 일부가 파괴되었고, 이후 론 놀의 정부군에 밀리게 된 크메르 루주의 군대는 쁘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을 거점으로 하여 최후의 저항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원을 중심으로 한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결국 크메르 루주의 잔당들은 모두 전멸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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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와 태국 국경 지대인 당레크 산맥 절벽 정상에 위치한 고대 크메르 제국의 힌두교 유적인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Temple of Preah Vihear), 출처 : Tripadvisor


1974년 4월, 론 놀의 캄보디아 정규군은 프놈펜의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미군 국방무관과 CIA 공작원들의 지원을 받아 프놈펜 수도권과 씨엠립, 오다르 메안제이(Odar Mranjei)와 새로이 크메르 루주를 전멸시키고 장악한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과 시아누크빌, 캄포트 및 콤퐁톰과 콤퐁치낭의 해안가 지역에서 여전히 크메르 루주에 저항하고 있었다.그러나 1975년 1월 1일부터 프놈펜 교외로 진격한 크메르 루주의 공세를 맞이하여 111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병력과 물자가 매우 빠르게 고갈되어 갔다. 결국 론 놀의 정부군은 더 이상 반격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끝까지 살아남은 정부군들이 우방국인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로 탈출하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후의 전투를 벌였다. 론 놀의 정부군들 중, 남베트남으로 탈출하려는 선택지가 존재했으나 이는 북베트남군이 사이공에 대힌 총공격에 집중하면서 크메르 루주와 합작했고, 메콩 강의 항로를 봉쇄해 버렸기 때문에 전혀 소용이 없었다. 한편 라오스 왕국은 라오스 내전에서 공산세력인 쑤파누봉의 파테트라오에게 패배하면서 북베트남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따라서 당시에 론 놀의 군대는 육로로 태국으로 탈출하는 것 외에는 전혀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 1990년대에 이르러 캄보디아가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이후 캄보디아 정부는 사원의 관리와 보호를 재개했으며 결국 2008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쁘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은 캄보디아의 최대 유적지인 앙코르와트와 비교하면 비록 작은 유적이지만, 남북으로 800m나 이어져 있고, 사원에 이르는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어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적으로 평가 받고 있는 실정이다. 앙코르와트의 사원과는 구조가 전혀 다르게 나타나지만, 메루 산을 묘사하려는 사원의 건축 목적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사원으로 진입하려면 총 163개의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하며, 사원 위로 올라오면 절벽 아래로 캄보디아 평원의 전망이 넓게 펼쳐져 있다. 캄보디아와 태국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당그레크 산의 페이 타디 절벽 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사원 내부로의 접근이 쉽지 않으며 대부분이 평지인 캄보디아에서는 꽤 높은 고원에 위치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현재 이 사원을 방문하려면 관광 목적으로 방문은 가능하다. 다만 원래 드나드는 입구 쪽이 태국-캄보디아 간의 영토 분쟁으로 인해 태국 쪽에 위치해 있는 상태에 있어 진입할 때마다 여권을 제시해야 한다. 캄보디아 쪽에서 간다하면 이 사원만 방문하는 조건으로 여권을 보여주면 태국 입국 도장을 찍을 필요 없이 관람하고 캄보디아로 돌아갈 수 있다.


이와 같이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은 유적 그 자체보다 사원과 그 주변에 대한 캄보디아와 태국의 영토 분쟁으로 더욱 유명한 사원이다. 이와 같은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에 태국과 맺을 조약을 필두로 무책임하고 캄보디아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영토 분할을 한 폐해로 시작되었고, 영토를 정상적으로 취득하기 위한 주장의 시효를 정확히 해야 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자리 잡은 셈이 되었다. 이 사원의 영토 분쟁 시작은 1904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를 정복할 때 프랑스-태국의 국경조약으로 인해 이 사원을 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계약한 것이 있기 때문에 발생했다. 그러나 1907년에 캄보디아를 보호국으로 관할하고 있던 프랑스가 캄보디아의 영토의 측정을 잘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이는 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계약했던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캄보디아 영토로 편입시켜버린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문제는 태국 왕실이 이러한 프랑스의 결정적인 오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었고 크게 관심도 두지 않았다. 당시 태국 짜끄리 왕실은 서쪽 미얀마와 남쪽 말레이 연방을 식민지로 두고 있던 영국과 동쪽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두고 있던 프랑스 사이에서 자국을 연명하는 것조차도 힘겨웠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의 영유화 문제를 태국 짜끄리 왕실이 빠르게 발견하고 프랑스 측에 수정을 요구했다면 본래의 계약대로 사원은 태국의 소유가 될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프랑스의 실수를 발견하지 못한 태국 왕실은 1908년 그대로 프랑스의 측량을 승인하고 말았다.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도 있었지만 태국 측이 땅에 대한 측량 인식에 대한 부재, 그리고 측량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던 태국 왕실의 근대적 지식과 사고의 무지, 영토 측정에 대한 관심의 전무가 불러온 재앙덩어리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태국 왕실은 프랑스 측의 측량을 승인한 지 무려 26년 만인 1934년에 대해서야 이와 같은 프랑스 측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국 왕실은 발견은 했지만 여전히 측량에 대해 무지했기에 프랑스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태국 왕실은 프랑스가 영원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었을 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을 때는 별 문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 침공하고, 프랑스의 지배력이 눈에 띄게 약화되면서 태국은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1950년 마침내 태국은 사원 지역에 국경수비대를 배치하게 된다. 


이어 1954년 캄보디아가 프랑스에게서 독립하게 되자 캄보디아는 태국에게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두고 해당 사원이 과거 프랑스령이었다는 점을 들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태국 국경수비대의 철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를 태국 정부가 받아들일리 만무했다. 태국 입장에서는 앞서 언급한 이유들을 들어 본래 태국 영토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캄보디아는 1959년 국제사법재판소에 정식으로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 영유화 문제에 대해 제소하게 된다. 당시 태국의 입장에서는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 지역이 역사적으로 태국의 관할 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제사법재판소는 태국 측이 프랑스의 측량 착오를 인지하고도 오랜 기간동안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 프랑스의 영토 이전을 묵인했다 판단했다. 결국 국제사법재판소는 1962년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캄보디아의 소유로 인정하게 된다. 판결문에서 국제사법재판소는 50년 동안 태국은 해당 영토인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에 대하여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었으며 이는 영토에 대한 권리의 포기이자 캄보디아의 영토로서 묵인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태국의 권원 주장은 국제법상Estoppel's principle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시하였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이 떨어졌으니 태국은 국경수비대를 즉각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태국 정부는 이와 같은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에 불만이 컸다. 그런데 캄보디아는 이 사원을 단독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하려고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자 태국은 사원을 캄보디아와 태국 공동의 세계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며 캄보디아에 항의했다. 그러나 결국 캄보디아의 단독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면서 태국의 발언은 크게 힘을 잃게 된다. 결국 2008년에는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의 캄보디아 유네스코 문화유산 단독 지정에 불만을 가진 태국 시위대 3명이 캄보디아를 침입하게 된다. 그러자 캄보디아군은 이들을 체포하고 억류하자 태국군이 캄보디아 영역에 진입하여 대치를 벌이며 긴장이 조성되었다. 이후 2009년 4월에는 태국군이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원의 66개 돌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이어 2011년 4월에도 교전이 발생하여 12명이 사망하고 40,000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대피했다. 계속 분쟁이 발생하자 국제사법재판소는 2011년 7월 쁘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비무장 지대로 지정하고 양군의 철수를 결정했다.그러나 2012년 4월까지 태국은 군 병력을 계속 주둔시켰다. 


2013년 국제사법재판소는 1962년의 판결을 재확인하였고 태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후 양군이 모두 철수했지만, 국경에서의 교전은 지속되었으며 2025년에는 태국-캄보디아 국경 분쟁이 발생하면서 이 사원이 재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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