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스의 시원지, 스따라야 라도가 지역 발굴의 필요성
소련과학아카데미 V.O. 키리코프 교수의 감독아래 드젠코, 카렙, 부브노프, 샤드린 등의 1952년 여름부터 1962년 12 월까지 복원했고 이후 2010년부터 2015년까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고리고레예브나 박사를 중심으로 이곳을 발굴하여 구석기 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증명해냈다. 고리고레예브나 박사를 비롯한 라도가 성 발굴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우랄 분소 류리크 왕조 발굴팀들의 사진이 있다. 바이킹(Viking)이라는 이름의 노르만 인들은 서유럽과 이탈리아의 해안을 약탈하여 북유럽으로 이동했고 비잔틴 제국으로 통하는 육상 교역로를 개척하고자 러시아의 강들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두고 바랑키아 인들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그들은 핀란드 만에서 네바(Neva) 강, 라도가(Radoga) 호, 볼호프(Bolhov) 강, 일멘(Ilmen) 호, 로바트(Robat) 강, 발다이(Baldai) 구릉, 드네프르 강을 거쳐 흑해로 통하는 지역과 이른바 바랑키아(Varangkia)에서 그리스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오늘날 러시아 영내로 공격해 들어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4년 7월 러시아의 역사적 고도인 스타라야 라도가(Staraya Ladoga) 요새 고고학 발굴 현장을 방문했을 당시의 모습, 출처 : 스따라야 라도가 성 박물관에서 필자의 직접 촬영
그 무렵 부족 간의 알력으로 약해져 있던 루시의 후손들은 그들을 방어할 수 없었다. 바랑키아 인들은 회유와 정복책을 병용하면서 루시의 영토를 정복해갔다. 860년경 북쪽 일멘 호 근처에 살던 노브고로드가 바랑키아 인들에게 함락되었고 이어 남쪽에 있던 키예프도 바랑키아 인들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러는 도중 882년에 류리크의 친척이라고 전해지는 올레그가 마침내 키예프에 입성하여 종전의 지배자들과 바랑키아 세력들을 축출한 이후 스스로를 키예프 대공이라 불렀다. 그리고 주위의 슬라브 부족들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굴복시켜갔다. 고리고레예브나 박사를 비롯한 라도가 성 발굴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우랄 분소 류리크 왕조 발굴팀들은 2005년부터 발굴프로젝트를 시작했다.바랑기아는 주로 9세기에서 10세기에 동쪽 및 남쪽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일대에 정착한 바이킹족의 일파를 말한다. 주로 통상업, 노략질, 용병으로 활약했으며 카스피 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살았다.
비잔틴 제국에서 용맹스러운 용병 그리고 제국 황제의 근위대로 활약했으며 13세기에 이르러 스칸디나비아와는 단절되었다. 올레그가 마침내 키예프에 입성하여 종전의 지배자들과 바랑키아 세력들을 축출한 이후 스스로를 키예프 대공이라 불렀다. 그리고 주위의 슬라브 부족들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굴복시켜갔다. 이것이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키예프 루시의 시작이다. 초창기의 키예프 루시는 통합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사실 그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몇몇 공후국들과 도시국가, 부족들이 키예프 대공의 종주권과 조세 징수권을 인정하면서 느슨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특히 동슬라브인 거주 지역의 한쪽 중심을 형성한 노브고로드의 자주성은 강했고 드레블랴닌(Drevlyanin) · 세베르(Sever) · 라디미치(Radimich) 등의 부족들도 여러 차례 저항을 해왔다. 게다가 초원지대의 하자르 제국과 이제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한 페체네그 인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이는 키예프 공국의 군사력이 상당히 약했고 결집력 역시 지역 집단의 이익에 따라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키예프 대공들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대규모 원정을 감행함으로써 권력을 굳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 각 종족들과의 이해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했다. 올레그는 키예프 주변의 슬라브 계통 민족들에게 전리품이나 약탈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제안했고 대부분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협력 군들을 불러 모으니 순식간에 20만 대군이 모였다. 올레그는 이렇게 모여진 20만 대군을 이끌고 907년 비잔틴 제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올레그는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발칸 지역까지 밀고 들어가를 이를 격퇴했고 비잔틴 제국 황제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으로만 통상조약일 뿐 키예프 공국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조공이나 다름없었다. 이후에도 비잔틴 제국의 공략을 계속되었고 올레그의 후임자인 이고르(Igor) 역시 카프카스와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북쪽 해안 지역에까지 원정군을 파견하여 약탈을 감행함으로써 슬라브 연합의 세력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세력 회복에 성공한 키예프 루시의 슬라브인들은 향후 350년간 러시아의 대지를 지배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과 성화로 유명한 중세 초기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키예프 루시의 초기 지배자로 등장한 바랑키아는 2세기도 지나지 않아 러시아의 역사에서 그 민족적 자취가 사라지게 된다. 슬라브인의 당시 남부 러시아의 문화수준에 미치지 못하던 바랑키아인의 이국적 요소들을 모두 흡수해 슬라브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류리크 왕조의 키예프 루시는 초창기 지배자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루시 가문의 나라이자 가장 슬라브 적인 나라였으며 새롭게 탄생한 슬라브 제국 치하에서 동슬라브족 전체는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드님 박사와 연구팀들이 2003년도에 이곳에 대한 지표조사를 하고 고리고레예브나 박사팀과 함께 이곳 발굴의 서전을 열었다. 라도가의 발굴은 푸틴 대통령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만큼 대대적인 국책 사업이었다.
1990년대의 암혹기를 거쳐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한 푸틴은 그게 대한 일환으로 슬라브 민족주의를 앞세워 소련 이후 침체되어 있던 러시아 국민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세워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마침 이 시기에 시작된 류리크의 발굴 및 복원 프로잭트는 푸틴에게 있어 정치적인 행보 및 러시아 민족주의의 중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그 기치를 확립할 수 있었던 좋은 구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루스의 시원지, 스따라야 라도가 지역 발굴의 필요성
소련과학아카데미 V.O. 키리코프 교수의 감독아래 드젠코, 카렙, 부브노프, 샤드린 등의 1952년 여름부터 1962년 12 월까지 복원했고 이후 2010년부터 2015년까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고리고레예브나 박사를 중심으로 이곳을 발굴하여 구석기 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증명해냈다. 고리고레예브나 박사를 비롯한 라도가 성 발굴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우랄 분소 류리크 왕조 발굴팀들의 사진이 있다. 바이킹(Viking)이라는 이름의 노르만 인들은 서유럽과 이탈리아의 해안을 약탈하여 북유럽으로 이동했고 비잔틴 제국으로 통하는 육상 교역로를 개척하고자 러시아의 강들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두고 바랑키아 인들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그들은 핀란드 만에서 네바(Neva) 강, 라도가(Radoga) 호, 볼호프(Bolhov) 강, 일멘(Ilmen) 호, 로바트(Robat) 강, 발다이(Baldai) 구릉, 드네프르 강을 거쳐 흑해로 통하는 지역과 이른바 바랑키아(Varangkia)에서 그리스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오늘날 러시아 영내로 공격해 들어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4년 7월 러시아의 역사적 고도인 스타라야 라도가(Staraya Ladoga) 요새 고고학 발굴 현장을 방문했을 당시의 모습, 출처 : 스따라야 라도가 성 박물관에서 필자의 직접 촬영
그 무렵 부족 간의 알력으로 약해져 있던 루시의 후손들은 그들을 방어할 수 없었다. 바랑키아 인들은 회유와 정복책을 병용하면서 루시의 영토를 정복해갔다. 860년경 북쪽 일멘 호 근처에 살던 노브고로드가 바랑키아 인들에게 함락되었고 이어 남쪽에 있던 키예프도 바랑키아 인들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러는 도중 882년에 류리크의 친척이라고 전해지는 올레그가 마침내 키예프에 입성하여 종전의 지배자들과 바랑키아 세력들을 축출한 이후 스스로를 키예프 대공이라 불렀다. 그리고 주위의 슬라브 부족들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굴복시켜갔다. 고리고레예브나 박사를 비롯한 라도가 성 발굴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우랄 분소 류리크 왕조 발굴팀들은 2005년부터 발굴프로젝트를 시작했다.바랑기아는 주로 9세기에서 10세기에 동쪽 및 남쪽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일대에 정착한 바이킹족의 일파를 말한다. 주로 통상업, 노략질, 용병으로 활약했으며 카스피 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살았다.
비잔틴 제국에서 용맹스러운 용병 그리고 제국 황제의 근위대로 활약했으며 13세기에 이르러 스칸디나비아와는 단절되었다. 올레그가 마침내 키예프에 입성하여 종전의 지배자들과 바랑키아 세력들을 축출한 이후 스스로를 키예프 대공이라 불렀다. 그리고 주위의 슬라브 부족들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굴복시켜갔다. 이것이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키예프 루시의 시작이다. 초창기의 키예프 루시는 통합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사실 그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몇몇 공후국들과 도시국가, 부족들이 키예프 대공의 종주권과 조세 징수권을 인정하면서 느슨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특히 동슬라브인 거주 지역의 한쪽 중심을 형성한 노브고로드의 자주성은 강했고 드레블랴닌(Drevlyanin) · 세베르(Sever) · 라디미치(Radimich) 등의 부족들도 여러 차례 저항을 해왔다. 게다가 초원지대의 하자르 제국과 이제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한 페체네그 인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이는 키예프 공국의 군사력이 상당히 약했고 결집력 역시 지역 집단의 이익에 따라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키예프 대공들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대규모 원정을 감행함으로써 권력을 굳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 각 종족들과의 이해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했다. 올레그는 키예프 주변의 슬라브 계통 민족들에게 전리품이나 약탈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제안했고 대부분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협력 군들을 불러 모으니 순식간에 20만 대군이 모였다. 올레그는 이렇게 모여진 20만 대군을 이끌고 907년 비잔틴 제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올레그는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발칸 지역까지 밀고 들어가를 이를 격퇴했고 비잔틴 제국 황제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으로만 통상조약일 뿐 키예프 공국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조공이나 다름없었다. 이후에도 비잔틴 제국의 공략을 계속되었고 올레그의 후임자인 이고르(Igor) 역시 카프카스와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북쪽 해안 지역에까지 원정군을 파견하여 약탈을 감행함으로써 슬라브 연합의 세력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세력 회복에 성공한 키예프 루시의 슬라브인들은 향후 350년간 러시아의 대지를 지배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과 성화로 유명한 중세 초기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키예프 루시의 초기 지배자로 등장한 바랑키아는 2세기도 지나지 않아 러시아의 역사에서 그 민족적 자취가 사라지게 된다. 슬라브인의 당시 남부 러시아의 문화수준에 미치지 못하던 바랑키아인의 이국적 요소들을 모두 흡수해 슬라브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류리크 왕조의 키예프 루시는 초창기 지배자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루시 가문의 나라이자 가장 슬라브 적인 나라였으며 새롭게 탄생한 슬라브 제국 치하에서 동슬라브족 전체는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드님 박사와 연구팀들이 2003년도에 이곳에 대한 지표조사를 하고 고리고레예브나 박사팀과 함께 이곳 발굴의 서전을 열었다. 라도가의 발굴은 푸틴 대통령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만큼 대대적인 국책 사업이었다.
1990년대의 암혹기를 거쳐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한 푸틴은 그게 대한 일환으로 슬라브 민족주의를 앞세워 소련 이후 침체되어 있던 러시아 국민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세워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마침 이 시기에 시작된 류리크의 발굴 및 복원 프로잭트는 푸틴에게 있어 정치적인 행보 및 러시아 민족주의의 중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그 기치를 확립할 수 있었던 좋은 구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