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의 지배를 끊어낸 땅, 타인호아 : 베트남 독립의 요람

알렉세이 정
2026-08-30

타인호아는 베트남 북부에서 마지막 지역으로 과거에는 일남군(日南郡)에 속했다. 원래 참파의 영토였다가 한(漢) 나라 무제(武帝) 시대에 남월(南越)이 멸망하고 이곳에서 교지 9군(交趾九郡)이 만들어지면서 타인호아 지역도 한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후한(後漢) 시대에는 8군에 속했으나 쯩 자매에 반란이 일어나고 잠시 독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에게 쯩 자매의 난이 평정되면서 이곳은 다시 후한의 지배를 받게 된다. 후한 말기에는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여 중원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중앙 정부의 세력이 약해짐에 따라 군소 군웅들이 자립하여 혼돈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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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ản đồ cổ tỉnh Thanh Hóa vào cuối thế kỷ XIX, thời Nhà Nguyễn. 출처 : "Dự kiến chi tiết diện tích, dân số, quy mô kinh tế của 34 tỉnh, thành mới". Báo Dân Trí. Bản gốc


그러나 화북 지역에는 조조가 위왕(魏王)이 되고 그의 아들인 조비가 후한의 헌제에게서 양위를 받음으로써 위(魏)나라가 건국되었다. 한편 서남쪽에서는 유비가 발흥하여 파촉, 한중을 장악하여 촉(蜀)나라가 건국되었고 동남쪽에는 손권이 일어나 오(吳)나라가 건국되었다. 당시 일남(日南)은 오(吳)나라에 속해 있었다고 하지만 직접적인 통치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三國志』「魏志東夷傳-倭人傳」에서는 일남 지역이 왜(倭) 지역임을 간주하고 서술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왜(倭)의 세력 범위는 오늘날 일본열도에까지 미친 것으로 사료된다. 사실『三國志』「魏志東夷傳-倭人傳」의 내용이 일본열도를 말하는 것인지 양자강 이남의 왜인(倭人)을 말하는 것인지는 현재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日本書紀』에도 직접적인 인용을 통해 열도의 역사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만 왜인전 사료에 의하면 열도라 보기에는 판단하기에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왜(倭)라는 것의 단어에 대해 속칭과 범칭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왜(倭)라는 것은 한자의 뜻 그대로 왜소하다는 것이다. 당시 북방 사람들은 키가 큰 반면에 남방에서 쌀농사를 짓고 있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키가 왜소했다. 그리고 습한 기후의 환경적 요인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습도가 높은 기후는 의상과 머리 모양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그들의 의상은 신발을 거의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으며 의상은 반팔과 반바지, 아니면 상의를 탈의하고 하의는 훈도시(褌, ふんどし)를 착용했다. 머리 모양도 앞머리는 자르고 뒷머리와 정수리 부분의 머리숱을 묶어 생활했다. 


이러한 생활모습은 중원으로 하여금 문화적으로 많이 후진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이들을 남왜(南倭) 오랑캐라 했으며 북방 민족인 흉노와 같은 민족들 보다 더 후진적으로 인식했다. 중원 주류 세력의 이러한 남방 인식은 사회적 신분 계층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이는 현재에도 중국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탄 호아는 당나라 때 일남(日南)에서 애주(愛州)로 명칭이 바뀐다. 이곳은 두 명의 베트남 위인을 탄생시킨 도시로 유명하다. 한 명은 지긋지긋한 중국의 천년 지배를 뿌리치고 독립한 영웅, 응오꾸옌(Ngô Quyền, 呉権, 897~944, 재위 : 939~944)이고 다른 한 명은 중국 명(明)나라의 침공과 지배에게서 독립에 성공한 레 로이(Le loi, 黎利, 1385~1433, 재위 : 1428~1433)다.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은 중국과의 전쟁 영웅이자 저항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응오꾸옌은 5대 10국의 혼란기 중국 남방의 국가 남한(南漢)을 두 차례 싸워 격퇴하고 중원 세력을 일소했다. 그는 939년 3월 하노이에서 왕위에 올라, 꼬 로아(Co Loa)를 도읍으로 정했다. 응오 꾸옌은 북방 봉건 조정의 1000년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중원 국가들로부터 독립해 베트남 최초의 왕조를 세웠고 이 왕조를 응오 왕조(吳朝)로 명명하게 되었다. 레 로이는 1400년대 초부터 베트남이 명나라의 식민지가 되자 그는 의병을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였으며 1428년 명나라군을 베트남에서 몰아내고 독립에 성공하였다. 항명전쟁이 끝난 후 레씨(黎氏) 일족은 대월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레 로이는 하노이에서 레 왕조(黎王朝)를 세우고 연호를 순천(順天)이라 하여 황제에 등극했다. 


응오꾸옌의 박당 강 전투와 박닌 전투에서 중국 세력에 대한 대승은 1년 전 응오꾸옌이 교공선을 격퇴하고 애주(愛州)를 확고히 장악했을 때의 결과를 재확인시켜주었다. 이로써 북베트남은 다시 응오꾸옌이 건국한 오나라의 영토로 굳어졌고 남한은 박당 강 전투와 박닌 전투 이후 다시는 남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오나라와 일시적으로 전쟁을 했더라도 남한보다 더 강력한 북방의 후진(後晉)과 이제 막 건국한 남당(南唐), 기존의 강소, 절강을 장악한 오월(吳越), 사천성의 후촉(後蜀)이 남진을 노리며 영토 확장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분명한 적으로 설정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남한 정권으로써는 남쪽과 북쪽의 적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남방에서 패배했지만 남한의 유엄이 사망한 이후 3대 황제가 된 유성(劉晟)은 오히려 베트남의 신생국 오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다시 오월, 후촉과 전쟁을 벌이는데 주력하였다.  인구도 많지 않은 상태에서 5만이 넘는 군사를 잃은 남한으로써는 박당 강과 박닌 전투에서의 피해를 만회하는데 여러 해를 허비해야 했다. 948년에 남한은 물자가 풍부한 운남(雲南) 지방을 정벌하여 그나마 피해를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었고, 950년에 전쟁준비를 시작하여 951년에 오월을 공격하여 수도인 복주(福州)로 출격했다. 이에 비하여 응오꾸옌의 오나라는 북베트남을 확고히 차지했다. 박닌 전투에서 승리한 이듬해인 940년에 응오 꾸옌은 라오까이의 산간 지대에 자리한 묘족을 정벌한다. 


묘족 정벌에 성공한 오나라는 북베트남에서 그 입지가 확고해졌고 이는 후일 북베트남에 딘 왕조(丁朝), 전 레 왕조(前黎王朝), 그리고 장기 국가인 이 왕조(李王朝) 등이 들어서는 발판이 되었다. 한편 애주 남쪽 중부 베트남 지역은 오나라와 참파 왕국이 나누어 차지하였고 오늘날 라오스 일대에 자리 잡은 몬-크메르 계통의 남방 민족들은 중부 인도차이나 산악지대에 고립되는 역사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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