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나라에 세워진 성당, 인도네시아 기독교의 역사

알렉세이 정
2026-09-01

자카르타 성당은 이스티클랄 모스크의 건너편에 있는 대형 카톨릭 성당이다. 원래 인도네시아의 카톨릭은 포르투갈 인들에 의해 들어왔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인도네시아 동쪽과 북쪽에 머물렀을 뿐이다. 초기 자바 섬을 장악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총독부는 반(反) 카톨릭인데다가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였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 이후 네덜란드 본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가 프랑스로 넘어가면서, 인도네시아의 반(反) 카톨릭의 재제도 풀리게 된다. 그 후, 네덜란드 카톨릭 선교사들이 대거 인도네시아에 들어왔고, 이들에 의해 1901년, 자카르타에도 성당이 지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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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대성당,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경비실 같은 곳에서 방문증을 받을 수 있다. 거대한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이곳이 소음 공해가 일상인 자카르타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성당에서 나오면 바로 앞에 성당 문화원(Museum Katedral)과 외부 기도장소 등이 있다. 성당 문화원은 단촐하지만, 인도네시아 카톨릭의 유품 및 역사 기록 등을 보유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설 때, 자신의 연락처와 종교 등을 적고 들어간다. 기독교는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종교이지만, 지역별 소수 만이 형성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약 10%는 현재 기독교로 간주되고 있다. 이는 약 2,350만 명을 차지하는 비율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카톨릭과 기독교를 분리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다. 


인도네시아인에게 기독교라는 용어는 개신교를 지칭하는 반면, 카톨릭은 다른 종교로 취급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서양 전통에 따라 개신교와 카톨릭의 분모로 기독교 또는 기독교인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두 종교의 본질을 동일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기독교인들의 대다수는 개신교 신자들이다. 2,350만 명의 인도네시아 기독교인들 중 약 1,650만 명이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나머지 700만은 카톨릭 신자이다. 이 기독교 공동체는 인도네시아의 전국 곳곳에 퍼져 있다. 그러나 기독교 지역 사회의 대부분은 인도네시아의 인구가 적은 동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인도네시아의 기독교 첫 출현은 12세기에 살았던 이집트 기독교인 아부 살리 알 알 미니(Abu Salih Al-Armini)가 백과 사전 작업을 하면서였다. 


그의 글에 따르면,그 당시 수마트라 서부에는 수목 나무가 생산된 곳 가까이에 수 많은 네스토리안 교회(Nestorian churches)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학자들은 알 미니가 이 위치를 현재 인도의 도시와 혼동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포르투갈이 1511년에 말라카를 점령한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테르나테의 술탄이 지배하고 있는 몰루카의 원하는 향신료들의 심장부를 찾기 위해 동쪽으로 더 항해했다. 그곳에서 포르투갈인은 작은 정착촌을 세웠다. 처음에는 카톨릭계 포르투갈인과 테르나테인들의 무슬림들 사이의 관계는 양측이 무역에 있어 좋은 협력의 이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화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1534년 이후 포르투갈의 성직자가 현지인들에게 포교하여 카톨릭으로 전환시키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고 16세기 말까지 남부 몰루카 주민의 약 20%가 카톨릭으로 분류되었다. 


포르투갈인이 작은 카톨릭 정착촌을 설립한 동부 인도네시아의 두 곳은 라란투카(Larantuka)의 플로레스(Flores) 섬과 티모르의 딜리(Dili)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은 향신료 무역 독점을 원했었고 테르나테인들은 몰루카에서의 카톨릭 성당들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기독교가 포교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성상(聖狀)과 현지 문화를 흡수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인 칼뱅파 개신교인들은 1607년 Ternate에서 첫 번째 정착촌을 세웠다. 그들은 또한 향신료 무역을 독점을 원했고 포르투갈인들보다 야망을 성취하는 데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이후 2세기 동안 테르나테의 술탄은 점차 권위를 잃으며,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이 지역에 기독교의 확산이 초래되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거의 관심이 없었다. 


이 지역의 일부 지역에서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로 약칭 함)가 선교 활동을 지원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미 기독교인인 유럽인을 주로 포함한 공동체를 위한 지원이었다. 네덜란드 지배하에 있는 지역에서는 대규모 원주민 개종이 지원되지 않았으나 한 가지 정책은 분명했다. 기독교에 이르렀을 때 네덜란드 칼뱅주의 개신교 만이 허용되었다. 이전에 현지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가톨릭 사제들은 해산되었으므로 포르투갈인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화 과정은 VOC 기간(1602~1798) 동안 네덜란드인들이 통제 할 때 거의 완전히 멈춘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19세기에 네덜란드가 이전에 VOC의 지배하에 있었던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을 때 선교 활동은 여전히 식민지 당국에 의해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했다. 네덜란드 개혁 교회는 이미 개신교인들의 종교적 필요에만 봉사하는 정부 기관이었다.


그러나 회원 중 일부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전파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인도네시아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토착민 개종을 위한 대규모 단체는 18세기와 19세기 후반에 유럽에서 새로 도착한 많은 단체들로부터 왔다. 네덜란드 선교사 협회 (Nederlandsch Zendeling Genootschap)와 독일의 라인 선교사 협회 (Rheinische Missionsgesellschaft)와 같은 기관은 네덜란드 인도 제도에서 그들의 메시지를 전파 할 수 있었다. 유럽의 네덜란드 국가가 세속화 되기 시작하면서 가톨릭 선교가 인도에서도 활동하지 못하게 막을 수 없었다. 교회와 주의 분리는 종교적 문제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선교 활동이 사적 부문에 맡겨 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체와 수마트라와 같은 무슬림 지역을 제외하고는 1900년에 걸친 선교 활동이 식민지 전역에 수립되었지만 기독교인의 수는 100년 전에 비해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미나 하사(북 술라웨시)와 타파눌리(북 수마트라) 두 개 지역 만이 원주민 개신교인의 수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 주민을 대규모로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반적인 ‘실패’는 재정적 수단의 부재, 인력의 부족, 사용 된 방법의 부적절함에 주로 기인하고 있다. 1900년 이후 이 상황은 네덜란드 정부의 새로운 정치적인 접근 방식으로 인해 변경되었다. 1900년 이후 영토 확장이 크게 이루어졌고 원주민의 생활 수준 향상을 목표로 도입되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정책은 원주민 사회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네덜란드에서 왔다. 인력과 재정적인 수단이 다가올수록 카톨릭 선교 활동은 새로운 영토로 옮겨졌고 그에 따라 토착 카톨릭인의 수도 증가했다. 개신교인들은 20세기 전반기에 네덜란드 인디족들에게 온 북미 여러 단체들의 후원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네덜란드 식민지에서의 선교사 적 접근은 상당히 단편적이었다. 1938년에는 국가 기독교위원회 (National Christian Council)를 설립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지만 제2차 세계 대전과 인도네시아의 후속 독립은 그 시도를 종식시켰다. 인도네시아에는 명확한 기독교 다수 지역 공동체가 포함 된 지역이 많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기독교는 소수 민족 종교만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다수인 소수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그 나라에서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다소 약하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기독교인들은 소수 민족의 지위를 의식하게 되고 따라서 무슬림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열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국가와 관련하여 기독교인들은 인도네시아 이슬람교도의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민족주의에 대해 큰 자긍심을 갖고 있으며 통일 된 인도네시아 국가를 유지하는 데 매우 적극적인 것으로 나타나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분쟁에 대한 모범 답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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