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길 위에 세워진 쉼터, 실크로드의 카라반사라이

알렉세이 정
2026-09-01

자연지리적인 입지측면에서 정착지대와 유목지대를 모두 존재하고 있는 중앙아시아에 세워진 카라반사라이는 세계 동서간 교역이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에는 단순한 숙소 이상의 인적교류, 문화교류가 진행되는 교류의 길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근대 이후 실크로드를 관통하는 카라반을 통한 당대의 세계교역이 감소하면서 중앙아시아의 카라반사라이를 통한 교역 네트워크도 동서간 교역 수준에서 중앙아시아 역내 교역 수준으로 축소됨에 따라 카라반사라이들은 그 입지에 따라 기능과 활용 형태에 변화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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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저명한 오리엔탈리즘 화가 구스타프 바우어른파인트(Gustav Bauernfeind, 1848~1904)가 그린 《야파의 시장(Market at Jaffa)》이라는 작품, 출처 : Wikimedia Commons


중앙아시아에 제정러시아 통치가 끝나고 소련체제가 형성되면서 입지에 따라 일부는 새로이 개축되어 오늘날에도 과거 카라반사라이가 했던 상업과 관련되는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거나, 이와 관련된 시설들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정착문명지대의 도시들이라 할 수 있는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 등의 도시 가운데에 설립되고 운영되었던 카라반사라이들은 당시 수행했던 상업적인 기능과 연관된 기능을 현재에도 수행하고 있는 형태로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 


반면 유목지대의 실크로드 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키르기스스탄의 타쉬라밧 카라반사라이나 정착지대 도시들 간의 중간에 위치한 길 선상의 카라반사라이에 해당되는 사마르칸트 교외의 라바티말릭 카라반사라이, 타지키스탄의 두샨베 인근 산악지대의 히사르 요새에 위치하고 있는 키스틴 카라반사라이 등은 소련시기를 거치면서 고유의 용도가 폐기된 채 단순한 역사유적의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특히 부하라는 주로 12세기와 16세기의 건축물이 풍부하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3000년 된 도시이기 때문에 더 오래된 층이 있다. 물론 발굴은 건축 기념물 아래에 있어 수행되지 않은 상태다. 멀지 않은 약 50m 거리에는 모래에서 파낸 6세기의 기념비도 있다.  이 기념비는 광장 아래에 있다.


과거 실크로드를 실제로 오갔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은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는지를 웅변한다. 1세기 후반, 중국 후한 시대에 나온 『한서(漢書)』를 보자. 중앙아시아 파미르 산맥을 넘어가는 험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대두통(大頭痛)과 소두통(小頭痛)의 산, 적토(赤土)와 신열(身熱)의 비탈길을 지나면, 사람들은 몸에서 열이 나고 창백해지며, 두통과 구토를 일으키는데 나귀와 가축도 모두 마찬가지다. 길이 좁은 곳은 1척 6~7촌(50㎝)이고 길이는 30리(1.2㎞)나 뻗어 있다. 험악하고 측량할 수 없는 심연에 닿아 있어, 행인들은 말을 탄 사람이건 걷는 사람이건 서로 붙잡고 끈으로 서로 끌면서, 2000여리(800㎞)를 지나서야 비로소 인도에 도착한다.”


실크로드가 이토록 지난한 길이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동서 문명 가교의 역할을 해낼 수 있었을까. 왕명을 받고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선 사신들이나, 죽음을 각오하고 진리를 구하러 떠난 승려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돈벌이를 위해 길을 나서는 상인들은 왜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며 원거리 무역을 감행했을까. 물론 그들이라고 지리적 거리와 자연적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교역을 위한 기본 조건은 갖춰져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과거 실크로드 노상에는 비교적 안전한 여행과 숙박을 위한 시설들이 마련돼 있었다. ‘카라반사라이’(caravansaray)라고 불리는 대상숙(隊商宿)이 가장 대표적이다.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각지의 주요 교통로를 따라 널리 분포했다. 오늘날의 호텔이나 모텔에 비견될 수 있는 곳이다. 낙타나 나귀에 상품을 싣고 이동하는 상인들이 해가 지면 짐을 부리고 가축에게 꼴을 주며, 자신들은 휴식과 숙박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흔히 이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에는 가축들이 묶여 있고 사람들은 회랑으로 연결된 이층에 머물렀다.


지중해에서부터 당나라 장안(長安)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 연변에 위치한 크고 작은 도시에는 수많은 대상숙이 세워졌다. 지방 유력자나 부호가 운영하는 곳도 있었지만 때로는 나라의 군주가 많은 자본을 투여해 지은 크고 화려한 곳도 있었다. 터키나 이란에서는 현재까지도 그 유적을 볼 수 있다. 부하라 중심 시장을 통과하면 마드라사들이 나오고 부하라 칼란 미나렛까지도 연결된다. 사막을 가로지르던 대상들이 쉬어 가던 옛 여관의 터가 이렇게 곳곳에 남아 있다. 지금은 거의 다 파괴됐지만 목욕탕 터, 숙소 터 등이 남아 있어 이곳을 가로지르던 대상들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건너편에는 물 창고로 사용되던 지붕이 둥그런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다. 


일부는 대규모 거류지로 발전해 교역의 핵심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3~9세기 유라시아 내륙 교역을 장악했던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국 각지에 이러한 거류지를 형성했다. 당 제국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 상인이 급격하게 증가하자, 그들 가운데 대표 격인 인물에게 ‘살보’(薩寶)라는 정5품 관직을 줘서 감독하도록 했다. ‘살보’는 ‘대상단의 우두머리’라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소그드 상인 다수는 사마르칸트나 타슈켄트 같은 대도시에 있는 고용주가 파견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외지에서 장사해서 수입을 올리면 그것을 본국으로 송환하고 이윤의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받았다. 4세기경 소그드 상인 한 사람이 본국으로 보낸 편지가 발견됐는데, 순품 사향 800g을 사서 보내니 그것을 팔아서 남는 이익의 일부는 고향에 두고 온 자기 자식의 교육비로 써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사향의 가치는 당시 은 27㎏, 현재 시세로 치자면 4000만원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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