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말라야에서 몽골과 시베리아까지, 티베트 불교의 길
티베트는 다른 불교권 국가에 비해 비교적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티베트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7세기부터 16세기까지 약 900년 간 지속적으로 역경작업이 이루어져 현재 티베트역 경전에는 산스크리트어 원전이나 한역본에는 남아 있지 않은 후기 불교 경전들이 존재한다. 몽골 라마교 사원과 불상이 청나라 시대 때의 것부터 나온다는게 이를 반증한다. 라마교 불상을 보면 마치 도교의 도상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인구 37만이나 되는 러시아 치타 시(市)에서 9만 명의 부라야트인들에게는 ‘러시아 불교’의 흔적에서 티베트에서 건너 온 라마불교와 토착 샤먼 문화의 혼재를 발굴하게 된다.

몽골 울란바토르 시내에 위치한 몽골 라마 불교의 총본산, 간단테그치늘렌 사원(Gandantegchinlen Monastery, 줄여서 간단 사원)의 메인 전각인 맥지드 잔라이식 스님(Megjid Janraisig Temple) 건물,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부리야트 공화국 수도 울란우데에서는 도시 절반 사람이 황인종 부리야트족이고, 종교의 60%는 라마불교이다. 따라서 현지인들은 부리야트를 동북아시아 문명의 발원지로 보고 있다. 라마교가 쇠락의 길을 이끌었던 내용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이 결혼하는 신부의 혼전(婚前)에 고령의 라마승과 동침을 하여 순결을 바쳐야 했던 초야권이라는 관습이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정말 어이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생활을 조금만 엿보면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몽골에서는 나이가 어리고 성(性)에 대한 경험 없는 초심자에게 신체적 손상을 주지 않고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성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을 해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인구가 곧 나라의 힘 즉, 전사(戰士)의 숫자에 의해 결정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이었고, 좀 작게 보자면 유목생활에 많은 자식들이 도움이 되었기에 이러한 전통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성(性)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 있는 라마교는 인도 사상사 중 탄트라적 발상과 유사한 모습을 띠게 된다. 즉, 인간의 욕망과 몸을 긍정하여 남녀 간의 성적결합도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불상의 형태에서도 이러한 모습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라마불교의 초야권과 같은 몸 부정의 철학과 몸 긍정의 철학이 공존해온 모든 사상사에서 조금씩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정치, 종교 등의 사회 내생환경과 맞물려 여성의 지위문제나 불교의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만들어낸 철학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융성했던 몽골의 라마교 또한 극심한 탄압을 받은 적이 있다. 몽골에 공산정권이 들어 선후 약 700여 개의 라마교 사원이 파괴되었고, 승려들의 지위 또한 박탈되었다. 그러나 1990년에 몽골에도 민주정부가 수립된 후 라마교도 이전의 화려한 모습으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와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법맥을 이어받았고 티베트어는 그 창제의 목적부터 불경번역의 용이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현재 티베트어 경전은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티베트 불경에는 현재 다른 언어 번역본에는 남아 있지 않은 경전들도 찾아볼 수 있다. 송첸캄포 왕 시대에 인도의 불교를 완벽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퇸미삼보다를 인도로 보냈다. 그는 이후 불경을 완벽하게 티베트어로 번역하기 위해 현재의 티베트어를 만들었다. 닝마빠를 비롯한 모든 티베트 학자들은 퇸미삼보다가 만든 티베트어가 최초라고 주장했지만 티베트 전통의 뵌교를 따르는 이들은 그 전에 티베트어 문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현재 그 이전에 문자가 있었다는 근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이와 별개로 티베트어는 현재 인도 불경을 가장 잘 번역할 수 있는 언어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토번의 송첸캄포 왕은 당시 뵌교에 따르는 사람들로 인해 방해가 많았지만 왕과 법을 좋아하는 몇 명의 노력으로 후대에 불경을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는 기초를 심었다. 1400년 전 퇸미삼보타는 처음 역경을 시작했다. 수많은 역경사들이 오랜 시간 동안 번역작업에 힘을 쏟았다. 부뙨린뽀체가 오기 전까지 퇸미삼보타 등 192명의 역경사들이 수차례 티베트어로 경과 논서를 번역했다. 부뙨린뽀체는 1200년대 말~1300년대 초의 위대한 학자로 깐규르를 결집하고 목차를 만들었다. 수많은 역경사들은 오랜 노력 끝에 삼장 즉, 율장, 논장, 경장을 번역했다.

- 히말라야에서 몽골과 시베리아까지, 티베트 불교의 길
티베트는 다른 불교권 국가에 비해 비교적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티베트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7세기부터 16세기까지 약 900년 간 지속적으로 역경작업이 이루어져 현재 티베트역 경전에는 산스크리트어 원전이나 한역본에는 남아 있지 않은 후기 불교 경전들이 존재한다. 몽골 라마교 사원과 불상이 청나라 시대 때의 것부터 나온다는게 이를 반증한다. 라마교 불상을 보면 마치 도교의 도상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인구 37만이나 되는 러시아 치타 시(市)에서 9만 명의 부라야트인들에게는 ‘러시아 불교’의 흔적에서 티베트에서 건너 온 라마불교와 토착 샤먼 문화의 혼재를 발굴하게 된다.
몽골 울란바토르 시내에 위치한 몽골 라마 불교의 총본산, 간단테그치늘렌 사원(Gandantegchinlen Monastery, 줄여서 간단 사원)의 메인 전각인 맥지드 잔라이식 스님(Megjid Janraisig Temple) 건물,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부리야트 공화국 수도 울란우데에서는 도시 절반 사람이 황인종 부리야트족이고, 종교의 60%는 라마불교이다. 따라서 현지인들은 부리야트를 동북아시아 문명의 발원지로 보고 있다. 라마교가 쇠락의 길을 이끌었던 내용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이 결혼하는 신부의 혼전(婚前)에 고령의 라마승과 동침을 하여 순결을 바쳐야 했던 초야권이라는 관습이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정말 어이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생활을 조금만 엿보면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몽골에서는 나이가 어리고 성(性)에 대한 경험 없는 초심자에게 신체적 손상을 주지 않고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성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을 해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인구가 곧 나라의 힘 즉, 전사(戰士)의 숫자에 의해 결정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이었고, 좀 작게 보자면 유목생활에 많은 자식들이 도움이 되었기에 이러한 전통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성(性)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 있는 라마교는 인도 사상사 중 탄트라적 발상과 유사한 모습을 띠게 된다. 즉, 인간의 욕망과 몸을 긍정하여 남녀 간의 성적결합도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불상의 형태에서도 이러한 모습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라마불교의 초야권과 같은 몸 부정의 철학과 몸 긍정의 철학이 공존해온 모든 사상사에서 조금씩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정치, 종교 등의 사회 내생환경과 맞물려 여성의 지위문제나 불교의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만들어낸 철학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융성했던 몽골의 라마교 또한 극심한 탄압을 받은 적이 있다. 몽골에 공산정권이 들어 선후 약 700여 개의 라마교 사원이 파괴되었고, 승려들의 지위 또한 박탈되었다. 그러나 1990년에 몽골에도 민주정부가 수립된 후 라마교도 이전의 화려한 모습으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와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법맥을 이어받았고 티베트어는 그 창제의 목적부터 불경번역의 용이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현재 티베트어 경전은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티베트 불경에는 현재 다른 언어 번역본에는 남아 있지 않은 경전들도 찾아볼 수 있다. 송첸캄포 왕 시대에 인도의 불교를 완벽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퇸미삼보다를 인도로 보냈다. 그는 이후 불경을 완벽하게 티베트어로 번역하기 위해 현재의 티베트어를 만들었다. 닝마빠를 비롯한 모든 티베트 학자들은 퇸미삼보다가 만든 티베트어가 최초라고 주장했지만 티베트 전통의 뵌교를 따르는 이들은 그 전에 티베트어 문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현재 그 이전에 문자가 있었다는 근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이와 별개로 티베트어는 현재 인도 불경을 가장 잘 번역할 수 있는 언어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토번의 송첸캄포 왕은 당시 뵌교에 따르는 사람들로 인해 방해가 많았지만 왕과 법을 좋아하는 몇 명의 노력으로 후대에 불경을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는 기초를 심었다. 1400년 전 퇸미삼보타는 처음 역경을 시작했다. 수많은 역경사들이 오랜 시간 동안 번역작업에 힘을 쏟았다. 부뙨린뽀체가 오기 전까지 퇸미삼보타 등 192명의 역경사들이 수차례 티베트어로 경과 논서를 번역했다. 부뙨린뽀체는 1200년대 말~1300년대 초의 위대한 학자로 깐규르를 결집하고 목차를 만들었다. 수많은 역경사들은 오랜 노력 끝에 삼장 즉, 율장, 논장, 경장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