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발발 87주년 -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알렉세이 정
2026-09-02

9월 1일은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본격적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86주년 째 되는 역사적인 날이다. 그리고 이틀 뒤인 9월 3일은 중국의 80주년 전승절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시작과 끝이 8~9월에 몰려 있다. 참 묘한 날이 아닐 수 없다. 1930년대 뉴욕발 대공황은 당시 독일 국민들이 기존 정계에 대해 실망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히틀러가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후일 케인스 방식이라 평가 받은 국가 주도로 하는 경제 정책으로 대공황으로 인해 침체된 위기를 돌파하려 시도했다. 이는 군수 산업을 팽창시키고 이를 배경으로 하기 위해 많은 사회 기반 시설들에 대한 건설에 매진하게 된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들어 독일의 대공황은 거의 극복된 것 같이 보여졌다. 이러한 나치의 시도는 미국이 뉴딜 정책으로 민간 인프라 건설에 집중하게 되면서 최악의 뉴욕발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한 것과 완전 대조된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갔든, 결과는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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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0월 5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직후 아돌프 히틀러가 함락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우야즈두프 거리, Aleje Ujazdowskie)를 방문하여 독일 국방군(Wehrmacht)의 승전 기념 사열을 받는 장면, 출처 : The National WWII Museum | New Orleans


그러나 적자 예산을 편성하면서 생산성이 거의 없던 군수 사업에만 모든 경제 정책을 치중한 결과는 경기 회복은 그저 잠시였을 뿐, 장기적으로 볼 때 독일의 재정은 악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러한 군수 정책의 초반에는 대규모의 메포어음(Mefo-Wechsel), 6개월짜리 단기 어음을 발행하는 것을 통해 화폐 발행을 통한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덮으면서 재정 적자를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는 더 이상 메포어음으로 인한 단기간 속성의 정책으로 인해 재정 적자가 누적되었고 파산의 위기가 닥쳐오게 된다. 미국처럼 뉴딜 정책으로 민간 인프라에 투자하면 그로부터 수익이 나와 선순환을 기대할 수도 있었지만 군수 산업으로 투자에 올인하게 되면 이러한 민간 인프라 투자 구조의 정책은 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무기를 해외에 수출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물론 메포어음 발행의 아이디어를 제시했던 중앙은행 총재 얄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 1877~1970)는 군비를 줄이는 것이 경제가 회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오히려 샤흐트에 분노해 그를 중앙은행 총재에서 해임시켰다. 이 때부터 다른 국가를 침공하여 원자재들을 약탈하고, 그로 인한 경제적인 흑자를 쟁취하지 않는 한, 정부 재정은 붕괴되고 히틀러 자신도 권좌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는 구도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히틀러에게 있어 전쟁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으며 이것이 영국-프랑스가 개입할 것이 우려되는 상황이었음에도 폴란드에 대한 침공을 단행하게 된 이유였다. 이 때 히틀러에게 있어 전쟁 수행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됐던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소련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벌일 전쟁 계획에 소련이 처음부터 개입하게 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는 소련이 개입할 경우, 향후 계획에 있어 매우 중대한 차질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히틀러는 소련과 일시적인 화해를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스탈린 또한 대공황과 대기근으로 인해 국가 경제에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던 시기였기에 독일의 군수 산업 팽창에 대한 부담을 갖고 있었고, 나치당 집권 후에 독일이 반소련 정책을 취하게 되니, 독일이 어떤 형태로든 군사적인 도발을 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집단 서방의 집단 안보 체제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스탈린은 외무장관이었던 막심 리트비노프(Максим Литвинов, 1876~1951)를 서방 국가들에게 파견하야 협상을 시도했고 리트비노프는 폴란드와 영국, 프랑스를 방문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적백내전의 혼란기 때, 소련-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가 승리, 당시 획득한 동부 지역 영토를 소련이 다시 장악할 것을 우려한 폴란드는 소련군이 폴란드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극렬히 반대했고, 소련의 모든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나치 독일 못지 않게 소련을 경계했던 영국과 프랑스 역시 소련의 제안을 거절했고 리트비노프의 협상은 모두 실패했다. 결국 스탈린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자구책은 나치 독일과의 협정 밖에 없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리트비노프를 협상의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해임했고, 이를 히틀러에게 리트비노프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해임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이자 외교전문가인 뱌체슬라프 몰로토르(Вячеслав Молотов, 1890~1986)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스탈린의 자신의 정권 유지에 방해가 되는 모든 유태인들을 숙청했고 이를 히틀러에게 통보함으로써 반유태주의라는 상호 간의 공감대를 형성했고, 결국 그러한 인연으로 불가침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맺어진다. 한편 폴란드는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 외에도 영국과 상호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했으며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독일을 비난했고 독일 또한 폴란드를 비난했다. 1939년 4월 28일 독일은 1934년에 체결한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과 1935년에 맺은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잇달아 파기했다. 히틀러는 소련과 협정을 맺은 이상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와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1938년에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할 때, 이를 그냥 두고 보기만 했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군부에게 폴란드 침공을 명령했으며, 백색 작전(Fall Weiß)이라는 침공 계획 안이 세워졌다. 따라서 8월 26일 새벽 4시에 침공 작전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8월 25일에 폴란드-영국이 상호 간 군사 동맹 조약이 체결되자, 영국의 반응을 보기 위해 작전 실행은 한 차례 미뤄진 후, 9월 1일을 시작으로 침공 개시 작전에 돌입했다. 


8월 31일, 밤 폴란드 국경에 있는 독일 도시 글라이비츠(Gleiwitz)의 한 방송국을 폴란드 육군으로 추정되는 소규모 병력이 기습적으로 침투한 다음, 방송국을 점거하고 직원들을 강압적으로 위협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독일에 대한 전쟁 선언을 낭독하게 하였으며 이같은 조치 후, 이들은 철수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의 부하였던 알프레트 나우요크스(Alfred Naujocks, 1911~1960) SS 소령의 지휘로 이루어진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나치 독일의 철저한 자작극이었다. 이들은 폴란드 육군으로 위장해 방송국을 습격해, 선전포고를 조작한 다음 국경 부근에는 사전에 차출된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폴란드 육군 군복을 입힌 채, 사살한 다음 그 시신을 버리고 떠났다. 후일 이 자작극을 통조림(Konserve) 작전이라 불렀다. 이와 같은 자작극은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나치 전범을 심문하여 밝히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된다. 그 이전까지는 연합국 내에서도 폴란드가 먼저 독일을 자극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여겼었다. 이어 폴란드 정부가 이것이 독일의 자작극임을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 진영에서는 폴란드가 먼저 전쟁을 유발한 것으로 여겼다. 


9월 1일, 새벽 독일은 위와 같은 통조림 작전으로 인한 폴란드의 선제 공격에 대한 반격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한다. 당시 독일군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폴란드를 기습했고 새벽 4시 45분경, 친선우호를 목적으로 그단스크에 기항한 독일 해군의 도이칠란트급 전함 슐레스비히 홀슈타인(Schleswig-Holstein)이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 요새를 11인치 주포로 기습 포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개막을 알리는 공격이었으며 뒤이어 독일군은 베스테르플라테 요새를 공격하면서 갑작스러운 기습공격에 폴란드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전투 과정에서 폴란드 군의 보이치에흐 나이사레크(Wojciech Najsarek) 하사가 독일군의 기관총에 맞아 전사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발생한 첫 번째 전사자였다. 그리고 폴란드 북부 해안 지역을 공격하기 직전인 새벽 4시 40분, 독일 공군은 폴란드 도시 비엘룬(Wieluń)에 기습적으로 공습을 감행했다. 베스테르플라트의 포격 5분 전에 이미 독일 공군이 비엘룬에 대한 폭격을 감행한 것이다. 당시 독일 공군은 비엘룬 시의 75%를 파괴하고 시민 1,200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이 때부터 6년 동안의 참혹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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