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이 왕조의 태종은 친히 군 4만을 거느리고 홍 강 델타 지역에 이르러 남하를 방어했고 양혼의 군대와 교전을 벌였다. 결국 홍 강의 여러 수로들을 이용하여 수성한 태종의 군대가 양혼의 군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했고 양혼은 홍 강에서 배를 타고 광저우로 도주했다. 그러자 양혼의 패배 소식을 들은 강위는 랑선을 침공할 의도가 없었다. 이는 황제의 직위를 남용하는 태종에게 단순한 위협을 통해 동남아시아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이 왕조의 위세를 누르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력의 군대와 랑선의 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지리한 대치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우회했던 양혼의 군대가 대패하였고 상당한 수의 베트남 병력이 강위의 송군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었다.

중국 북송 왕조와 베트남 리(Lý, 李) 왕조 사이에서 벌어진 송-대월 전쟁(또는 리-송 전쟁, 1075~1077년)의 주요 군사 이동 경로와 전역을 나타낸 역사 지도, 출처 : Military Wiki | Fandom
적어도 랑선에서 대치하고 있는 강 위의 송군들이 베트남군의 접근에 대비하고 적어도 수성 가능한 범위를 광서지역까지 대규모로 확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강위의 송군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베트남 병력은 5만 명, 이 베트남 병력에 맞서는 송군 병력은 민간인과 부상병을 포함하여 약 3만 명 정도였다. 대치 상태를 책임지고 있던 강위는 운남성 대리국 국왕에게 도움을 줄 것을 요구했으나 곤명에서 지원 병력 형식 으로 오기로 했던 대리국의 군대가 오지 않자 강위는 이들 대리국에 좀 더 강한 압박을 위해 광서군을 라오까이와 하지앙 지역의 산간 지대로 보낸 상태였다. 강위는 랑선의 대치 진을 떠나 하지앙을 이동하면서 휘하의 부장들에게 임시로 지휘권을 맡겼는데 강위가 떠난 이후 이를 알고 있던 맞 대치하고 있는 이력의 군대가 전면전을 걸어와 결국 랑선의 송군은 대패하여 광서성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이에 하지앙에 도착하여 대리국을 압박하려던 강위는 랑선의 부장들에서의 패전의 보고를 받게 되었다. 강위는 마침내 송군 전체의 철수를 결정했고 결국 송나라의 이 왕조 공격을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송나라를 격파한 이 태종은 이 트엉 끼엣이라는 영웅의 맹활약으로 남쪽 냐짱에 이르기까지 쉽게 판도를 획득하고 개선했다. 이후 참파는 태조 생전에 다시 침공하지 못했다. 이는 참파의 세력이 꺾인 것도 있지만 부족장 나드라가 참파 내부에서 발생한 내분으로 인하여 앙코르 제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참파의 내분은 상당 기간 지속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중부 베트남은 이 왕조의 발달된 문화를 이식하여 북베트남과 마찬가지로 문명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한편 동남아시아에서 제국을 이루었던 이 왕조의 기마, 보병 군단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있다. 이는 당시 베트남 인들의 생활 자체를 곧 군사훈련으로 변모시켰기 때문에 다른 정착 국가의 군대처럼 별도의 격리와 훈련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 왕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청소년들이 일정 기간동안 군사집단인 딘 쯔엉(Dihn Trung)에서 공동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정식 훈련이 있다기보다는 딘 쯔엉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곧 훈련이었다. 이 태종은 동생 이력(李力)으로 하여금 딘 쯔엉의 지원병력을 이끌고 1032년 1월 22일 이른 오후에 송나라의 광동자사 강위(姜委)가 주둔하던 랑선에 도착하자 또 다른 황하 지역의 송나라 군 지원 부대가 도착했다. 그러나 강위의 부장인 황치(黃稚)가 선봉군 3천의 군대가 이 왕조의 군대를 공격하다가 전멸 당했고 부장 황치 또한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강위는 본 군의 방어를 위하여 남았고 그와 함께 왔던 거기장군 양혼(梁琿)이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랑선을 우회하여 오늘날의 하이퐁으로 향하게 된다.
태조는 참파의 도발을 중대한 영토 침략으로 간주하고 아들인 이불마(李佛瑪)로 하여금 토벌을 명령했다. 이에 참파의 수장 나드라 역시 참파의 전사들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러 나왔다. 그러나 이불마는 베트남 군이 거느린 대부대의 수적 우위를 과시하면서 전령을 보내 나드라에게 항복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나드라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그들 부족의 최고 전사들을 내보내서 응전했다. 이 당시 동남아시아 집단 간에는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가장 전투를 잘하는 전사를 내보내 1대 1의 격투를 벌이게 하는 관습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들 동남아시아 전사 간의 대결은 서로 창과 방패를 들고 가까이 다가가면서 창을 하나씩 던지는 것이었는데, 대개는 접근전이 벌어지기 전에 한쪽이 부상을 입거나 도주를 함으로써 승부가 결정되는 식이었다.
이러한 참파를 대표하는 최고 전사는 항복을 종용하는 이불마의 전령을 욕설하며 이불마와 베트남 군을 자극시켰다. 이에 베트남 군 측에서 한 청년이 나와 참파의 전사와 맞섰다. 참파의 전사는 관습대로 그의 창을 던지면서 달려왔다. 그런데 베트남의 전사는 창을 던지는 대신 방패로 창을 막으면서 계속 다가왔다. 참파의 전사가 마지막 창을 던졌을 때, 베트남의 전사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달려오더니 참파 전사의 방패를 자신의 방패로 쳐서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상대의 왼쪽 옆구리가 노출되자 짧은 창을 들어 그대로 찔렀다. 나드라의 전사는 상체를 관통당하는 치명상을 입고 그대로 쓰려져 죽었다. 이를 신호로 베트남 군은 5,000여 명의 전사가 참파 군에게 돌격했고 자신들의 최고 전사가 죽는 것을 목격한 참파의 전사들은 그대로 도주하여 밀림 속으로 숨었다.
이에 이불마는 참파 군이 숨어있는 밀림을 포위하고 다시 한 번 항복을 종용하였고 결국 나드라는 남쪽 포위망을 뚫고 도주했고 참파 군은 이불마에게 항복했다. 참파의 최고 전사를 죽인 이 청년은 이후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전투 방식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게다가 이 날의 전투로 국왕 이불마가 청년을 주목하게 되었고 이 청년의 이름은 베트남의 최고 영웅 중 하나로 칭송 받고 있는 리 트엉 끼엣(Ly Thuong Kiet, 李常傑) 이었다.

베트남 이 왕조의 태종은 친히 군 4만을 거느리고 홍 강 델타 지역에 이르러 남하를 방어했고 양혼의 군대와 교전을 벌였다. 결국 홍 강의 여러 수로들을 이용하여 수성한 태종의 군대가 양혼의 군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했고 양혼은 홍 강에서 배를 타고 광저우로 도주했다. 그러자 양혼의 패배 소식을 들은 강위는 랑선을 침공할 의도가 없었다. 이는 황제의 직위를 남용하는 태종에게 단순한 위협을 통해 동남아시아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이 왕조의 위세를 누르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력의 군대와 랑선의 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지리한 대치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우회했던 양혼의 군대가 대패하였고 상당한 수의 베트남 병력이 강위의 송군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었다.
중국 북송 왕조와 베트남 리(Lý, 李) 왕조 사이에서 벌어진 송-대월 전쟁(또는 리-송 전쟁, 1075~1077년)의 주요 군사 이동 경로와 전역을 나타낸 역사 지도, 출처 : Military Wiki | Fandom
적어도 랑선에서 대치하고 있는 강 위의 송군들이 베트남군의 접근에 대비하고 적어도 수성 가능한 범위를 광서지역까지 대규모로 확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강위의 송군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베트남 병력은 5만 명, 이 베트남 병력에 맞서는 송군 병력은 민간인과 부상병을 포함하여 약 3만 명 정도였다. 대치 상태를 책임지고 있던 강위는 운남성 대리국 국왕에게 도움을 줄 것을 요구했으나 곤명에서 지원 병력 형식 으로 오기로 했던 대리국의 군대가 오지 않자 강위는 이들 대리국에 좀 더 강한 압박을 위해 광서군을 라오까이와 하지앙 지역의 산간 지대로 보낸 상태였다. 강위는 랑선의 대치 진을 떠나 하지앙을 이동하면서 휘하의 부장들에게 임시로 지휘권을 맡겼는데 강위가 떠난 이후 이를 알고 있던 맞 대치하고 있는 이력의 군대가 전면전을 걸어와 결국 랑선의 송군은 대패하여 광서성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이에 하지앙에 도착하여 대리국을 압박하려던 강위는 랑선의 부장들에서의 패전의 보고를 받게 되었다. 강위는 마침내 송군 전체의 철수를 결정했고 결국 송나라의 이 왕조 공격을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송나라를 격파한 이 태종은 이 트엉 끼엣이라는 영웅의 맹활약으로 남쪽 냐짱에 이르기까지 쉽게 판도를 획득하고 개선했다. 이후 참파는 태조 생전에 다시 침공하지 못했다. 이는 참파의 세력이 꺾인 것도 있지만 부족장 나드라가 참파 내부에서 발생한 내분으로 인하여 앙코르 제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참파의 내분은 상당 기간 지속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중부 베트남은 이 왕조의 발달된 문화를 이식하여 북베트남과 마찬가지로 문명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한편 동남아시아에서 제국을 이루었던 이 왕조의 기마, 보병 군단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있다. 이는 당시 베트남 인들의 생활 자체를 곧 군사훈련으로 변모시켰기 때문에 다른 정착 국가의 군대처럼 별도의 격리와 훈련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 왕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청소년들이 일정 기간동안 군사집단인 딘 쯔엉(Dihn Trung)에서 공동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정식 훈련이 있다기보다는 딘 쯔엉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곧 훈련이었다. 이 태종은 동생 이력(李力)으로 하여금 딘 쯔엉의 지원병력을 이끌고 1032년 1월 22일 이른 오후에 송나라의 광동자사 강위(姜委)가 주둔하던 랑선에 도착하자 또 다른 황하 지역의 송나라 군 지원 부대가 도착했다. 그러나 강위의 부장인 황치(黃稚)가 선봉군 3천의 군대가 이 왕조의 군대를 공격하다가 전멸 당했고 부장 황치 또한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강위는 본 군의 방어를 위하여 남았고 그와 함께 왔던 거기장군 양혼(梁琿)이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랑선을 우회하여 오늘날의 하이퐁으로 향하게 된다.
태조는 참파의 도발을 중대한 영토 침략으로 간주하고 아들인 이불마(李佛瑪)로 하여금 토벌을 명령했다. 이에 참파의 수장 나드라 역시 참파의 전사들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러 나왔다. 그러나 이불마는 베트남 군이 거느린 대부대의 수적 우위를 과시하면서 전령을 보내 나드라에게 항복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나드라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그들 부족의 최고 전사들을 내보내서 응전했다. 이 당시 동남아시아 집단 간에는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가장 전투를 잘하는 전사를 내보내 1대 1의 격투를 벌이게 하는 관습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들 동남아시아 전사 간의 대결은 서로 창과 방패를 들고 가까이 다가가면서 창을 하나씩 던지는 것이었는데, 대개는 접근전이 벌어지기 전에 한쪽이 부상을 입거나 도주를 함으로써 승부가 결정되는 식이었다.
이러한 참파를 대표하는 최고 전사는 항복을 종용하는 이불마의 전령을 욕설하며 이불마와 베트남 군을 자극시켰다. 이에 베트남 군 측에서 한 청년이 나와 참파의 전사와 맞섰다. 참파의 전사는 관습대로 그의 창을 던지면서 달려왔다. 그런데 베트남의 전사는 창을 던지는 대신 방패로 창을 막으면서 계속 다가왔다. 참파의 전사가 마지막 창을 던졌을 때, 베트남의 전사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달려오더니 참파 전사의 방패를 자신의 방패로 쳐서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상대의 왼쪽 옆구리가 노출되자 짧은 창을 들어 그대로 찔렀다. 나드라의 전사는 상체를 관통당하는 치명상을 입고 그대로 쓰려져 죽었다. 이를 신호로 베트남 군은 5,000여 명의 전사가 참파 군에게 돌격했고 자신들의 최고 전사가 죽는 것을 목격한 참파의 전사들은 그대로 도주하여 밀림 속으로 숨었다.
이에 이불마는 참파 군이 숨어있는 밀림을 포위하고 다시 한 번 항복을 종용하였고 결국 나드라는 남쪽 포위망을 뚫고 도주했고 참파 군은 이불마에게 항복했다. 참파의 최고 전사를 죽인 이 청년은 이후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전투 방식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게다가 이 날의 전투로 국왕 이불마가 청년을 주목하게 되었고 이 청년의 이름은 베트남의 최고 영웅 중 하나로 칭송 받고 있는 리 트엉 끼엣(Ly Thuong Kiet, 李常傑)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