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8년에 중앙아시아의 몽골군은 강력한 티무르의 지휘 아래 인도를 침입했다. 티무르는 투글루크의 잔당들을 격파하고 델리를 공략한 이후 중앙아시아로 돌아오면서, 펀자브 지방을 그가 임명한 인물로 하여금 지배하게 했다. 그 직후, 투글루크 왕조는 멸망했지만, 술탄 에이트는 지속적으로 존속하였다. 티무르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은 자는 델리를 정복하고 새로운 술탄임을 선언했다. 그것이 15세기 전반을 지배한 사이이드 왕조의 출현으로 나타난다. 사이이드 왕조는 보다 나은 로디 왕조에게 멸망되기까지 그 체제를 유지했다. 북부 지방의 지배자 바흐루 로디(Buhlul Lodi)는 사이이드를 추방하고, 1451년에 델리의 술탄을 차지함으로써 로디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로디는 순수한 아프가니스탄 출신이었기 때문에, 로디 왕조의 출현은 투르크계 귀족들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 귀족들은 투르크계와 비교하여 술탄에 덜 순종적이고 종족적(種族的) 세력 확장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귀족들은 로디 왕조의 주요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로디 왕은 귀족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델리 술탄국의 사이이드 왕조(Sayyid Dynasty) 제2대 군주였던 무바라크 샤(Mubarak Shah, 재위 1421~1434)의 무덤, 출처 : Flickr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두 로디 왕국의 국왕은 술탄 에이트의 자치권에 수정을 가하여 아프가니스탄 귀족들의 충성심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로디 왕조의 마지막 왕인 이브라힘(Ibrahim)은 술탄의 절대적 권력을 주장하고, 종족적 감정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아프가니스탄 귀족들의 노골적인 불만을 초래시켰다. 종족들 간의 반목은 사라지고 이브라힘에 대한 적대감이 쌓여져 갔다. 이어 펀자브와 신드의 지배자들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바부르(Baber)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바부르는 펀자브를 합병하려 했기 때문에 흔쾌히 그의 군대를 북인도에 파병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귀족들만이 바부르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아니었다. 라지푸트의 왕들 중 하나가 또 델리 정복의 야심을 갖고 바부르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 1526년, 바부르는 파니파트 초원에서 이브라힘 군대와 마주했다. 이 전투의 승리는 바부르에게 돌아갔으며 이브라힘은 전사했고, 그의 죽음과 더불어 로디 왕조는 멸망했다. 바부르는 인도에 자신의 왕정을 세우게 되었으며, 델리 술탄의 숙원이었던 대제국 건설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13세기 동안 남인도를 정복하려는 술탄 에이트의 야심은, 몇 번의 남인도 원정을 시도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술탄 에이트의 세력이 약화 되면서 데칸의 투르크계 귀족들은 술탄 에이트에 반란을 일으켜 바흐마니(Bahmani) 왕국을 건국했다. 바흐마니 왕국은 2세기 동안 북부 데칸을 지배했다. 이보다도 10년 전에 한 때 호이살라(Hoisala)가 지배했던 데칸 남부 지방인 인도 남단에서는 비자야나가라(Vijayanagara) 왕국이 독립했다. 비자야나가라는 힌두계 왕국으로 1565년 1월에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멸망할 때까지 남인도를 지배했다. 바흐마니와 비자야나가라의 경계는 크리슈나 강이었다. 거의 전통이 되다시피한 데칸과 남인도의 투쟁은 14세기에 다시 재개되었다. 그 지역에 대한 쟁탈전은 비옥하고 광목 자원이 풍부한 라이추르 도아브(Raichur Doab, 크리슈나 강과 퉁가브하드라 지류 사이에 있는 지역)의 획득과 관련하여 발생했다. 여기에는 골콘다(Golconda)에 있던 다이아몬드 광산은 서로가 욕심을 내는 매력적인 지역이었다. 14세기부터 16세기 초 동안 남인도의 정치사는 이러한 투쟁과 반도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 왕국들의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전개되었다.
바흐마니 왕조의 개국은 다울라타바드에서 술탄 에이트의 명을 받아 데칸을 지배한 자파르 칸(Zafar Khan)이 반란을 일으켜 북부 데칸의 왕으로 선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자파르 칸은 바흐만 샤(Bahman Shah)라는 명칭을 스스로 부여하고 남쪽의 마두라이까지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나, 새로운 두 왕국의 출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두 왕국은 안드라에 있던 와랑갈(Warangal)이며, 퉁가바드라 남쪽의 비자야나가라였다. 와랑갈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술탄 에이트의 군대는 두 지역의 왕자인 하리하라(Harihara)와 부카(Bukka)를 포로로 잡아 델리로 데려갔다. 이들은 델리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후일 술탄 에이트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그들의 고향으로 보내졌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 두 왕자는 스스로의 왕국을 세웠다. 1336년에 하리하라는 하스티나바티(Hastinavati, 오늘날의 Hampi)에서 왕위에 올라 비자야나가라 왕국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다시 그들은 본래의 종교인 힌두교로 돌아왔다. 비자야나가라의 흥기는 남인도에서의 힌두의 부활로 종종 주장되었지만, 여기에 대한 증거가 미약하다. 왕실의 후원은 오래된 사원을 증축하고 새로운 사원을 짓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당시의 상황에서 힌두교의 부활로 여겨질 수 있는 반 무슬림적 감정을 파악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비자야나가라 왕은 그에게 방해가 될 경우, 힌두 지역의 왕들을 공격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일례로 비자야나가라가 남인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려고 1346년에 호이살라에 대해 전쟁을 벌인 사건이 그것이다. 하리하라는 함피의 근교에 이 나라의 이름과 같은 비자야나가라(영광의 도시)를 건립하였다. 1343년, 비자야나가라는 한 국가의 수도가 되었다. 왕조의 이름과 같은 이름의 수도 비자야나가라는 앞서 나타난 북인도 지방의 중심 도시인 카나우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7겹으로 구성된 성벽에 둘러싸인 견고한 요새 도시였다. 비자야나가라와 바흐마니 사이의 투쟁은 불가피했으며, 1358년에 라이추르 도아브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양국의 경계는 양국의 세력 판도에 따라 계속 바뀌게 된다. 비자야나가라는 1370년에 마두라이를 정복함으로써 남부 변경 지대를 평정했으나, 동쪽의 해안 국가들인 오리사, 와랑갈에 대해서는 상황이 더 어렵게 되었다. 비자야나가라가 고아를 정복한 것은 무역을 통한 이익의 증가를 떠나서 전략적으로 주요한 일이었다. 당시 동부 해안 지역이 비자야나가라에 의해 장악된 것이라면, 해안과 해안을 연결하는 비자야나가라의 지배가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에 북부 변경 지대만을 방어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남인도의 정세에 바흐마니의 적극적인 간섭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15세기 후반에 바흐마니는 국내외적으로 더 적극적인 정책을 전개시켰다. 이 일은 주로 재상인 마흐무드 가반(Mahaud Gavan)의 노력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말와(Malwa)로부터의 공격적인 위험은 구자라트의 도움을 받아 바흐마니 왕국의 북부 변경 지대에서 그 세력을 구축함으로써 제거되었다. 이 일이 있었던 직후 가반은 비자야나가라로부터 고아를 재탈취하여 무역 활동을 통한 수익을 바흐마니에로 돌렸다. 그러나 재상 가반이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하는 등 왕국의 세력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지방의 귀족들은 바흐마니의 종주권이 거의 명목에 불과했을 정도로 그들의 세력을 증강시켰다. 나아가, 바흐마니의 국력은 비자야나가라의 잦은 침입으로 더욱 약화되었다. 한편 북인도의 사이이드 왕조(Sayyid dynasty)는 인도 이슬람 지배 초기에 존재했던 델리 술탄국 중, 4번째 왕조(1414∼1451)로 나타난다. 14세기 말 투글루크 왕조가 쇠락하는 사이를 이용하여 귀족인 히즈르칸(Hzrkhan)이 1414년 델리를 점령하고 술탄의 지위에 올라 사이이드 왕조를 개창했다.
사이이드 왕조는 4대 37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델리의 여러 왕조들 중에서 가장 단명(短命)한 왕조이기도 하였고, 또는 세력도 크게 떨치지 못하여 로디 왕조에게 지배권이 넘어간 국가이다. 사이이드(Sayyid)라는 단어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 가문을 지칭하는 칭호로서, 사이이드 왕조의 명칭도 시조(始祖)가 무함마드의 후예(後裔)라고 지칭한 것에서 나타난 것이다. 한 때 델리 술탄국 역사상 최대 강역을 차지했던 투글루크 왕조는 1398년 티무르 제국의 공격을 받아 약탈을 당해 재정적으로 크게 타격을 입고 완전한 분열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한편 투글루크 왕조의 술탄이었던 피루즈 샤 투글루크(Firuz Sha Thgluk)는 키즈르 칸 사이드(Qyzr Khan Sayyid)를 펀자브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물탄(Multan)을 다스리도록 명령했으나, 키즈르 칸은 얼마 가지 못해 추방당하고 말았다. 갈 곳이 사라진 키즈르 칸은 봉신들을 이끌고 인근의 티무르 제국에게 의탁했고, 티무르는 델리 술탄국을 정복한 이후 키즈르 칸을 델리의 총독이자 자신의 대리인으로 남겨 놓게 된다. 그리고 티무르가 떠나자 당연하게도 키즈르 칸에 대한 반란이 곳곳에서 발생했으나 키즈르 칸은 이들 대부분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으며, 1414년 6월 6일 델리에 입성하여 공식적으로 새로운 왕조를 열게 된다.
당시 키즈르 칸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들을 부르는 칭호인 '사이이드'를 자칭했기 때문에 키즈르 칸이 세운 왕조를 '사이이드 왕조'라고 부르게 되었다. 키즈르 칸이 델리의 지배자가 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독자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티무르의 세력을 빌려 얻은 자리였기 때문에 함부로 델리의 술탄을 자칭하지는 못했다. 키즈르 칸은 티무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을 티무르의 충성스러운 봉신이라 부르며 신하의 예를 취하였고, 죽을 때까지 델리 술탄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키즈르 칸은 티무르의 침공으로 델리 술탄국이 상실한 영토들을 회복하기 위해 반란군들을 진압하고 고토를 회복하는 것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고, 실제로 괄리오르(Goalior), 바야나(Bayana) 지방들을 수복하기도 했다. 키즈르 칸은 즉위 7년 만인 1421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키즈르 칸의 아들 무바라크 사이드(Mubarq Sayyid)가 새로운 군주로 즉위했다. 1421년에 즉위한 무바라크 샤 역시 부친의 뒤를 승계하여 옛 델리 술탄국의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여러 차례 회복 전쟁을 시도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재능이 없었던 무바라크 샤가 수많은 작은 왕국들과 반란군들을 동시에 상대하며 승리를 거두기에는 무리였으며, 결국 무바라크 샤는 막대한 인명 피해만 낸 채, 이렇다 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1434년 무바라크 샤가 사망하자 무함마드 사이드(Muhammad Sayyid))가 대귀족 살와르 울 물크(Salwar Ul Mulq)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무함마드 샤는 필사적으로 살와르 울 물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한 채, 살와르 알 물크의 조종을 당하는 술탄으로 살았다. 그 와중에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사이이드 왕조 시기의 델리 술탄국은 옛 투글루크 왕조 시절의 강성함은 찾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한 상태를 유지했다. 무함마드 샤는 1443년에 사망했고, 이후 최후의 사이이드 왕조 계열 술탄인 알람 사이드(Alam Sayyid)가 술탄이 되었다. 이 때 아프간 계통의 신흥 강자인 로디(Lodi) 족의 바흐룰 로디(Bahrul Lodi)가 침공해 오자 알람 샤는 몰락해 버린 사이이드 왕조로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결국 1451년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던 로디 족의 바흐룰 로디에게 양위하면서 델리 술탄국 최후의 왕조 로디 왕조가 창건되었다. 이로써 사이이드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한편 남인도 지역의 바흐마니 왕국은 1538년에 비자푸르(Bijapur), 골콘다(Golconda), 아메드나가르(Ahmednagar), 비다르(Bidar), 베라르(Berar)의 5개국으로 분열되었다. 가반의 죽음으로 인해 바흐마니 왕국이 쇠락해갈 당시에 비자야나가라는 남인도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으며, 특히 크리슈나 데바 라자(Krishna Deva Raza, 1509~1530)가 지배할 동안, 그 위력은 대단했다.
바흐마니는 1509년에 최종적으로 라이추르 도아브를 정복하려 했지만, 크리슈나 데바 라자는 그들을 격파하여 바흐마니 왕국 수도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이것 자체로만 볼 때, 바흐마니의 지배에 결정적인 상황일 수 있었으나, 크리슈나 데바는 술탄을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었다. 바흐마니 왕을 그대로 둔 이유는 지방의 지배자들이 그들의 자치권을 선포하는 것을 막고, 하나의 약한 바흐마니 왕은 작긴 하지만 강한 4개의 왕국보다 더 낫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흐마니의 지배자는 그의 주요 기반이 비자야나가라 왕임을 알고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는 크리슈나 데바가 지배했을 당시에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후일 5개 왕국이 동맹을 맺어 비자야나가라를 침범하기에 이른다. 크리슈나 데바는 동부 해안을 정복하여 오리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전과를 올렸다. 서부 해안에서 그는 포르투갈인들과 상호 지원을 근거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포르투갈과 남인도와의 무역은 비자야나가라의 번영에 달려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크리슈나 데바로 하여금 구자라트와 바흐마니에 대항해서 서로 간의 정치적 동맹 관계를 맺을 것을 자주 요구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서 포르투갈인들은 말(馬)의 공급자 이상은 아니었으며, 함께 정치적으로 맺어지길 원하지 않았다. 북부 데칸의 5개 왕국은 비자야나가라를 정복할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들 중 4개의 왕국이 이슬람 연합군을 결성하여 남인도로 진군하였다. 1565년, 탈리코타(Talikota) 전투에서 비자야나가라는 이슬람 연합군에게 대패하게 된다. 수도는 적에게 넘어가 엄청난 파괴와 약탈을 당했다. 그 이후 남인도의 힌두 왕국은 많은 세월 동안 명멸하다가 끝내는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무슬림 국왕들은 차츰 남인도를 침식해 들어가 17세기와 18세기에 무굴 제국 지배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만일 탈리코타 전투의 양상이 달랐더라면 18세기의 영국이나 프랑스는 북쪽의 무굴 제국과 균형을 이루는 남쪽의 힌두 왕국을 발견하였을 것으로 보여 진다.

1398년에 중앙아시아의 몽골군은 강력한 티무르의 지휘 아래 인도를 침입했다. 티무르는 투글루크의 잔당들을 격파하고 델리를 공략한 이후 중앙아시아로 돌아오면서, 펀자브 지방을 그가 임명한 인물로 하여금 지배하게 했다. 그 직후, 투글루크 왕조는 멸망했지만, 술탄 에이트는 지속적으로 존속하였다. 티무르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은 자는 델리를 정복하고 새로운 술탄임을 선언했다. 그것이 15세기 전반을 지배한 사이이드 왕조의 출현으로 나타난다. 사이이드 왕조는 보다 나은 로디 왕조에게 멸망되기까지 그 체제를 유지했다. 북부 지방의 지배자 바흐루 로디(Buhlul Lodi)는 사이이드를 추방하고, 1451년에 델리의 술탄을 차지함으로써 로디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로디는 순수한 아프가니스탄 출신이었기 때문에, 로디 왕조의 출현은 투르크계 귀족들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 귀족들은 투르크계와 비교하여 술탄에 덜 순종적이고 종족적(種族的) 세력 확장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귀족들은 로디 왕조의 주요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로디 왕은 귀족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델리 술탄국의 사이이드 왕조(Sayyid Dynasty) 제2대 군주였던 무바라크 샤(Mubarak Shah, 재위 1421~1434)의 무덤, 출처 : Flickr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두 로디 왕국의 국왕은 술탄 에이트의 자치권에 수정을 가하여 아프가니스탄 귀족들의 충성심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로디 왕조의 마지막 왕인 이브라힘(Ibrahim)은 술탄의 절대적 권력을 주장하고, 종족적 감정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아프가니스탄 귀족들의 노골적인 불만을 초래시켰다. 종족들 간의 반목은 사라지고 이브라힘에 대한 적대감이 쌓여져 갔다. 이어 펀자브와 신드의 지배자들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바부르(Baber)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바부르는 펀자브를 합병하려 했기 때문에 흔쾌히 그의 군대를 북인도에 파병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귀족들만이 바부르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아니었다. 라지푸트의 왕들 중 하나가 또 델리 정복의 야심을 갖고 바부르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 1526년, 바부르는 파니파트 초원에서 이브라힘 군대와 마주했다. 이 전투의 승리는 바부르에게 돌아갔으며 이브라힘은 전사했고, 그의 죽음과 더불어 로디 왕조는 멸망했다. 바부르는 인도에 자신의 왕정을 세우게 되었으며, 델리 술탄의 숙원이었던 대제국 건설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13세기 동안 남인도를 정복하려는 술탄 에이트의 야심은, 몇 번의 남인도 원정을 시도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술탄 에이트의 세력이 약화 되면서 데칸의 투르크계 귀족들은 술탄 에이트에 반란을 일으켜 바흐마니(Bahmani) 왕국을 건국했다. 바흐마니 왕국은 2세기 동안 북부 데칸을 지배했다. 이보다도 10년 전에 한 때 호이살라(Hoisala)가 지배했던 데칸 남부 지방인 인도 남단에서는 비자야나가라(Vijayanagara) 왕국이 독립했다. 비자야나가라는 힌두계 왕국으로 1565년 1월에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멸망할 때까지 남인도를 지배했다. 바흐마니와 비자야나가라의 경계는 크리슈나 강이었다. 거의 전통이 되다시피한 데칸과 남인도의 투쟁은 14세기에 다시 재개되었다. 그 지역에 대한 쟁탈전은 비옥하고 광목 자원이 풍부한 라이추르 도아브(Raichur Doab, 크리슈나 강과 퉁가브하드라 지류 사이에 있는 지역)의 획득과 관련하여 발생했다. 여기에는 골콘다(Golconda)에 있던 다이아몬드 광산은 서로가 욕심을 내는 매력적인 지역이었다. 14세기부터 16세기 초 동안 남인도의 정치사는 이러한 투쟁과 반도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 왕국들의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전개되었다.
바흐마니 왕조의 개국은 다울라타바드에서 술탄 에이트의 명을 받아 데칸을 지배한 자파르 칸(Zafar Khan)이 반란을 일으켜 북부 데칸의 왕으로 선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자파르 칸은 바흐만 샤(Bahman Shah)라는 명칭을 스스로 부여하고 남쪽의 마두라이까지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나, 새로운 두 왕국의 출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두 왕국은 안드라에 있던 와랑갈(Warangal)이며, 퉁가바드라 남쪽의 비자야나가라였다. 와랑갈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술탄 에이트의 군대는 두 지역의 왕자인 하리하라(Harihara)와 부카(Bukka)를 포로로 잡아 델리로 데려갔다. 이들은 델리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후일 술탄 에이트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그들의 고향으로 보내졌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 두 왕자는 스스로의 왕국을 세웠다. 1336년에 하리하라는 하스티나바티(Hastinavati, 오늘날의 Hampi)에서 왕위에 올라 비자야나가라 왕국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다시 그들은 본래의 종교인 힌두교로 돌아왔다. 비자야나가라의 흥기는 남인도에서의 힌두의 부활로 종종 주장되었지만, 여기에 대한 증거가 미약하다. 왕실의 후원은 오래된 사원을 증축하고 새로운 사원을 짓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당시의 상황에서 힌두교의 부활로 여겨질 수 있는 반 무슬림적 감정을 파악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비자야나가라 왕은 그에게 방해가 될 경우, 힌두 지역의 왕들을 공격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일례로 비자야나가라가 남인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려고 1346년에 호이살라에 대해 전쟁을 벌인 사건이 그것이다. 하리하라는 함피의 근교에 이 나라의 이름과 같은 비자야나가라(영광의 도시)를 건립하였다. 1343년, 비자야나가라는 한 국가의 수도가 되었다. 왕조의 이름과 같은 이름의 수도 비자야나가라는 앞서 나타난 북인도 지방의 중심 도시인 카나우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7겹으로 구성된 성벽에 둘러싸인 견고한 요새 도시였다. 비자야나가라와 바흐마니 사이의 투쟁은 불가피했으며, 1358년에 라이추르 도아브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양국의 경계는 양국의 세력 판도에 따라 계속 바뀌게 된다. 비자야나가라는 1370년에 마두라이를 정복함으로써 남부 변경 지대를 평정했으나, 동쪽의 해안 국가들인 오리사, 와랑갈에 대해서는 상황이 더 어렵게 되었다. 비자야나가라가 고아를 정복한 것은 무역을 통한 이익의 증가를 떠나서 전략적으로 주요한 일이었다. 당시 동부 해안 지역이 비자야나가라에 의해 장악된 것이라면, 해안과 해안을 연결하는 비자야나가라의 지배가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에 북부 변경 지대만을 방어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남인도의 정세에 바흐마니의 적극적인 간섭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15세기 후반에 바흐마니는 국내외적으로 더 적극적인 정책을 전개시켰다. 이 일은 주로 재상인 마흐무드 가반(Mahaud Gavan)의 노력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말와(Malwa)로부터의 공격적인 위험은 구자라트의 도움을 받아 바흐마니 왕국의 북부 변경 지대에서 그 세력을 구축함으로써 제거되었다. 이 일이 있었던 직후 가반은 비자야나가라로부터 고아를 재탈취하여 무역 활동을 통한 수익을 바흐마니에로 돌렸다. 그러나 재상 가반이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하는 등 왕국의 세력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지방의 귀족들은 바흐마니의 종주권이 거의 명목에 불과했을 정도로 그들의 세력을 증강시켰다. 나아가, 바흐마니의 국력은 비자야나가라의 잦은 침입으로 더욱 약화되었다. 한편 북인도의 사이이드 왕조(Sayyid dynasty)는 인도 이슬람 지배 초기에 존재했던 델리 술탄국 중, 4번째 왕조(1414∼1451)로 나타난다. 14세기 말 투글루크 왕조가 쇠락하는 사이를 이용하여 귀족인 히즈르칸(Hzrkhan)이 1414년 델리를 점령하고 술탄의 지위에 올라 사이이드 왕조를 개창했다.
사이이드 왕조는 4대 37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델리의 여러 왕조들 중에서 가장 단명(短命)한 왕조이기도 하였고, 또는 세력도 크게 떨치지 못하여 로디 왕조에게 지배권이 넘어간 국가이다. 사이이드(Sayyid)라는 단어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 가문을 지칭하는 칭호로서, 사이이드 왕조의 명칭도 시조(始祖)가 무함마드의 후예(後裔)라고 지칭한 것에서 나타난 것이다. 한 때 델리 술탄국 역사상 최대 강역을 차지했던 투글루크 왕조는 1398년 티무르 제국의 공격을 받아 약탈을 당해 재정적으로 크게 타격을 입고 완전한 분열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한편 투글루크 왕조의 술탄이었던 피루즈 샤 투글루크(Firuz Sha Thgluk)는 키즈르 칸 사이드(Qyzr Khan Sayyid)를 펀자브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물탄(Multan)을 다스리도록 명령했으나, 키즈르 칸은 얼마 가지 못해 추방당하고 말았다. 갈 곳이 사라진 키즈르 칸은 봉신들을 이끌고 인근의 티무르 제국에게 의탁했고, 티무르는 델리 술탄국을 정복한 이후 키즈르 칸을 델리의 총독이자 자신의 대리인으로 남겨 놓게 된다. 그리고 티무르가 떠나자 당연하게도 키즈르 칸에 대한 반란이 곳곳에서 발생했으나 키즈르 칸은 이들 대부분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으며, 1414년 6월 6일 델리에 입성하여 공식적으로 새로운 왕조를 열게 된다.
당시 키즈르 칸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들을 부르는 칭호인 '사이이드'를 자칭했기 때문에 키즈르 칸이 세운 왕조를 '사이이드 왕조'라고 부르게 되었다. 키즈르 칸이 델리의 지배자가 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독자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티무르의 세력을 빌려 얻은 자리였기 때문에 함부로 델리의 술탄을 자칭하지는 못했다. 키즈르 칸은 티무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을 티무르의 충성스러운 봉신이라 부르며 신하의 예를 취하였고, 죽을 때까지 델리 술탄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키즈르 칸은 티무르의 침공으로 델리 술탄국이 상실한 영토들을 회복하기 위해 반란군들을 진압하고 고토를 회복하는 것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고, 실제로 괄리오르(Goalior), 바야나(Bayana) 지방들을 수복하기도 했다. 키즈르 칸은 즉위 7년 만인 1421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키즈르 칸의 아들 무바라크 사이드(Mubarq Sayyid)가 새로운 군주로 즉위했다. 1421년에 즉위한 무바라크 샤 역시 부친의 뒤를 승계하여 옛 델리 술탄국의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여러 차례 회복 전쟁을 시도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재능이 없었던 무바라크 샤가 수많은 작은 왕국들과 반란군들을 동시에 상대하며 승리를 거두기에는 무리였으며, 결국 무바라크 샤는 막대한 인명 피해만 낸 채, 이렇다 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1434년 무바라크 샤가 사망하자 무함마드 사이드(Muhammad Sayyid))가 대귀족 살와르 울 물크(Salwar Ul Mulq)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무함마드 샤는 필사적으로 살와르 울 물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한 채, 살와르 알 물크의 조종을 당하는 술탄으로 살았다. 그 와중에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사이이드 왕조 시기의 델리 술탄국은 옛 투글루크 왕조 시절의 강성함은 찾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한 상태를 유지했다. 무함마드 샤는 1443년에 사망했고, 이후 최후의 사이이드 왕조 계열 술탄인 알람 사이드(Alam Sayyid)가 술탄이 되었다. 이 때 아프간 계통의 신흥 강자인 로디(Lodi) 족의 바흐룰 로디(Bahrul Lodi)가 침공해 오자 알람 샤는 몰락해 버린 사이이드 왕조로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결국 1451년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던 로디 족의 바흐룰 로디에게 양위하면서 델리 술탄국 최후의 왕조 로디 왕조가 창건되었다. 이로써 사이이드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한편 남인도 지역의 바흐마니 왕국은 1538년에 비자푸르(Bijapur), 골콘다(Golconda), 아메드나가르(Ahmednagar), 비다르(Bidar), 베라르(Berar)의 5개국으로 분열되었다. 가반의 죽음으로 인해 바흐마니 왕국이 쇠락해갈 당시에 비자야나가라는 남인도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으며, 특히 크리슈나 데바 라자(Krishna Deva Raza, 1509~1530)가 지배할 동안, 그 위력은 대단했다.
바흐마니는 1509년에 최종적으로 라이추르 도아브를 정복하려 했지만, 크리슈나 데바 라자는 그들을 격파하여 바흐마니 왕국 수도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이것 자체로만 볼 때, 바흐마니의 지배에 결정적인 상황일 수 있었으나, 크리슈나 데바는 술탄을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었다. 바흐마니 왕을 그대로 둔 이유는 지방의 지배자들이 그들의 자치권을 선포하는 것을 막고, 하나의 약한 바흐마니 왕은 작긴 하지만 강한 4개의 왕국보다 더 낫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흐마니의 지배자는 그의 주요 기반이 비자야나가라 왕임을 알고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는 크리슈나 데바가 지배했을 당시에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후일 5개 왕국이 동맹을 맺어 비자야나가라를 침범하기에 이른다. 크리슈나 데바는 동부 해안을 정복하여 오리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전과를 올렸다. 서부 해안에서 그는 포르투갈인들과 상호 지원을 근거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포르투갈과 남인도와의 무역은 비자야나가라의 번영에 달려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크리슈나 데바로 하여금 구자라트와 바흐마니에 대항해서 서로 간의 정치적 동맹 관계를 맺을 것을 자주 요구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서 포르투갈인들은 말(馬)의 공급자 이상은 아니었으며, 함께 정치적으로 맺어지길 원하지 않았다. 북부 데칸의 5개 왕국은 비자야나가라를 정복할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들 중 4개의 왕국이 이슬람 연합군을 결성하여 남인도로 진군하였다. 1565년, 탈리코타(Talikota) 전투에서 비자야나가라는 이슬람 연합군에게 대패하게 된다. 수도는 적에게 넘어가 엄청난 파괴와 약탈을 당했다. 그 이후 남인도의 힌두 왕국은 많은 세월 동안 명멸하다가 끝내는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무슬림 국왕들은 차츰 남인도를 침식해 들어가 17세기와 18세기에 무굴 제국 지배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만일 탈리코타 전투의 양상이 달랐더라면 18세기의 영국이나 프랑스는 북쪽의 무굴 제국과 균형을 이루는 남쪽의 힌두 왕국을 발견하였을 것으로 보여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