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바 칸국에 대한 공격 결정은 1872년 12월에 이루어졌다. 1873년 3월 카우프만은 카스피해에 건설한 크라스노보츠크 항구와 북부의 오렌부르크 군사 기지, 새로 점령한 타슈켄트 등 세 곳에서 1만 3천의 병력을 출발시켜 사막을 가로질러 진군했다. 히바는 의외로 쉽게 붕괴되었다. 러시아군이 수도에 다가오자 칸은 억류된 러시아 노예와 포로를 석방할 것이니 진군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구는 소용 없었고 러시아군의 공격이 임박하자 칸은 무조건 항복했다. 부대는 전투 없이 1873년 5월 히바에 입성했다. 일부 히바 군이 항복에 반대하고 저항했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히바는 전쟁 배상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

러시아의 저명한 전쟁화가 프란츠 루보(Franz Roubaud)가 1898년에 그린 역작, 《1881년 1월 12일 게옥 테페 요새 돌격(Assault of the Fortress of Geok Tepe on January 12, 1881)》, 출처 :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미술관(State Russian Museum)에 소장
러시아의 남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새로 보호국으로 만든 지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이란 지역이 있었다. 이곳은 카라쿰 사막(Karakum Desert)이 넓게 펄쳐져 있고, 산맥들이 뻗어 있어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사람이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다.19세기 중반 중앙아시아로 남하하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지역까지 남하하였는데 이 일대에 존재하는 히바 칸국을 공략하기에 앞서 카스피 해 연안의 자카스피 지역의 통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1869년 크라스노보츠크(Красноводск)라는 이름의 요새를 세웠다. 붉은(Красно;красный) 물(вод ; вода)의 도시라는 뜻으로, 이 지역을 가리키던 키질수(Kyzyl-Su)를 러시아어로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히바 일대는 별도의 국가가 조직되어 있지 않고 주민들은 히바 칸국에 용병으로 나가거나 약탈과 노예 납치를 하며 생존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영국이 차지하기 전에 이 척박한 땅을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1879년 미하일 스코벨레프(Михаил Скобелев) 장군은 투르크메니스탄을 공격했다. 투르크멘 인들은 게옥-테페(Geok Tepe) 요새에 집결했다. 러시아군은 보병과 기병을 합해 7천, 투르크멘 측은 병력 1만에 민간인 4만 명이었다. 투르크멘인들은 격렬히 저항했다. 성벽은 매우 견고했으며 러시아 군은 성벽 밑까지 토굴을 파고 들어가 폭약을 설치했다. 폭약이 터지면서 성벽에 큰 구멍이 뚫리고 중화기로 무장한 러시아군은 성내로 들어갔다. 그 다음은 전투가 아닌 학살이었다. 러시아군은 아이 노인, 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도주하는 사람들도 추격하여 죽였다. 성 내는 주검들로 덮였으며 많은 여자들은 죽기 전에 강간을 당했다. 얼마나 죽었는지 통계가 없다. 성내에는 6천 5백 구의 주검이 나왔고, 도주하다 죽은 자만 6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 스코벨레프 장군은 이와 같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적을 많이 학살할수록 평화도 오래 지속된다. 세계 공격할수록 조용히 있는 시간도 길어진다고 하였다. 그와 같은 공포는 증오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증오감으로 추방당했지만, 러시아는 공포심으로 지배했다. 그 동안 페르시아 인이나 러시아 인을 잡아 노예로 팔고 대상들을 약탈하던 투르크멘 사람들은 러시아 인에 대한 공포에 더 이상 그와 같은 행위들을 벌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학살 사건이 유럽에도 알려졌다. 영국은 러시아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러시아는 마지못해 스코벨레프를 직위 해제하고 참전 군인들을 벽지로 보냈다.
그러나 그렇다고 투르크메니스탄을 본래대로 돌려놓지는 않았다. 오히려 1884년에 오아시스 도시 메르브(Merv)마저 점령해 투르크메니스탄을 러시아 영토로 만들었다. 러시아는 20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지금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의 지역을 모두 점령했다. 이로써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접하며 영국령 인도를 긴장시켰다. 카우프만은 공병 출신으로 1848년부터 카프카스에서 근무하여, 크림전쟁에서도 카프카스 공병 대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전쟁 후에는 공병감부와 육군성 근무를 거쳐, 1867년 투르케스탄 군관구 사령관 겸 총독이 되어, 1868년 부하라 칸국, 1873년 히바 칸국을 정벌하였다. 1874∼1876년 코칸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를 러시아에 합병하여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경략할 기초를 만들었다.
총독으로서 투르키스탄의 지리학적인 조사를 추진하여 제국지리학회의 명예회원에 추천되기도 하였다. 카우프만은 부하라를 노렸다. 그러자 부하라가 먼저 움직였다. 부하라는 1868년 4월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사마르칸트에 집결했다. 카우프만은 3천 5백의 병력을 이끌고 사마르칸트로 출병했다. 하지만 부하라 군 내부에서 내란이 일어나 주민들은 항복했다. 같은 해, 5월 2일, 사마르칸트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흡수되었다. 사마르칸트(Samarkand)는 영웅 티무르의 묘가 있는 도시로, 중앙아시아의 상징적인 곳이다. 러시아가 이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중앙아시아 투르크족에게 심리적인 압도감을 주게 되었다. 카우프만은 이제 부하라의 수도로 진격했다. 부하라 군은 러시아 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연이어 패전하면서 부하라의 칸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부하라 칸은 러시아 차르의 봉신으로 칸 위만 유지하게 되었다. 1868년 부하라가 항복한 이후 이제 히바 칸국(Khanate of Khiva)이 남았다. 러시아는 1717년, 1839년 두 차례의 히바 원정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았다. 러시아는 우선 카스피 해 동쪽 연안에 크라스노보츠크(Красноводск)에 항구를 건설했다. 이 항구는 러시아 중부에서 볼가 강을 따라 물자를 싣고 내려와 카스피해를 활용해 히바를 연결하는 교통망의 중간 요충지였다.

히바 칸국에 대한 공격 결정은 1872년 12월에 이루어졌다. 1873년 3월 카우프만은 카스피해에 건설한 크라스노보츠크 항구와 북부의 오렌부르크 군사 기지, 새로 점령한 타슈켄트 등 세 곳에서 1만 3천의 병력을 출발시켜 사막을 가로질러 진군했다. 히바는 의외로 쉽게 붕괴되었다. 러시아군이 수도에 다가오자 칸은 억류된 러시아 노예와 포로를 석방할 것이니 진군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구는 소용 없었고 러시아군의 공격이 임박하자 칸은 무조건 항복했다. 부대는 전투 없이 1873년 5월 히바에 입성했다. 일부 히바 군이 항복에 반대하고 저항했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히바는 전쟁 배상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
러시아의 저명한 전쟁화가 프란츠 루보(Franz Roubaud)가 1898년에 그린 역작, 《1881년 1월 12일 게옥 테페 요새 돌격(Assault of the Fortress of Geok Tepe on January 12, 1881)》, 출처 :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미술관(State Russian Museum)에 소장
러시아의 남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새로 보호국으로 만든 지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이란 지역이 있었다. 이곳은 카라쿰 사막(Karakum Desert)이 넓게 펄쳐져 있고, 산맥들이 뻗어 있어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사람이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다.19세기 중반 중앙아시아로 남하하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지역까지 남하하였는데 이 일대에 존재하는 히바 칸국을 공략하기에 앞서 카스피 해 연안의 자카스피 지역의 통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1869년 크라스노보츠크(Красноводск)라는 이름의 요새를 세웠다. 붉은(Красно;красный) 물(вод ; вода)의 도시라는 뜻으로, 이 지역을 가리키던 키질수(Kyzyl-Su)를 러시아어로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히바 일대는 별도의 국가가 조직되어 있지 않고 주민들은 히바 칸국에 용병으로 나가거나 약탈과 노예 납치를 하며 생존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영국이 차지하기 전에 이 척박한 땅을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1879년 미하일 스코벨레프(Михаил Скобелев) 장군은 투르크메니스탄을 공격했다. 투르크멘 인들은 게옥-테페(Geok Tepe) 요새에 집결했다. 러시아군은 보병과 기병을 합해 7천, 투르크멘 측은 병력 1만에 민간인 4만 명이었다. 투르크멘인들은 격렬히 저항했다. 성벽은 매우 견고했으며 러시아 군은 성벽 밑까지 토굴을 파고 들어가 폭약을 설치했다. 폭약이 터지면서 성벽에 큰 구멍이 뚫리고 중화기로 무장한 러시아군은 성내로 들어갔다. 그 다음은 전투가 아닌 학살이었다. 러시아군은 아이 노인, 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도주하는 사람들도 추격하여 죽였다. 성 내는 주검들로 덮였으며 많은 여자들은 죽기 전에 강간을 당했다. 얼마나 죽었는지 통계가 없다. 성내에는 6천 5백 구의 주검이 나왔고, 도주하다 죽은 자만 6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 스코벨레프 장군은 이와 같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적을 많이 학살할수록 평화도 오래 지속된다. 세계 공격할수록 조용히 있는 시간도 길어진다고 하였다. 그와 같은 공포는 증오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증오감으로 추방당했지만, 러시아는 공포심으로 지배했다. 그 동안 페르시아 인이나 러시아 인을 잡아 노예로 팔고 대상들을 약탈하던 투르크멘 사람들은 러시아 인에 대한 공포에 더 이상 그와 같은 행위들을 벌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학살 사건이 유럽에도 알려졌다. 영국은 러시아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러시아는 마지못해 스코벨레프를 직위 해제하고 참전 군인들을 벽지로 보냈다.
그러나 그렇다고 투르크메니스탄을 본래대로 돌려놓지는 않았다. 오히려 1884년에 오아시스 도시 메르브(Merv)마저 점령해 투르크메니스탄을 러시아 영토로 만들었다. 러시아는 20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지금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의 지역을 모두 점령했다. 이로써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접하며 영국령 인도를 긴장시켰다. 카우프만은 공병 출신으로 1848년부터 카프카스에서 근무하여, 크림전쟁에서도 카프카스 공병 대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전쟁 후에는 공병감부와 육군성 근무를 거쳐, 1867년 투르케스탄 군관구 사령관 겸 총독이 되어, 1868년 부하라 칸국, 1873년 히바 칸국을 정벌하였다. 1874∼1876년 코칸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를 러시아에 합병하여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경략할 기초를 만들었다.
총독으로서 투르키스탄의 지리학적인 조사를 추진하여 제국지리학회의 명예회원에 추천되기도 하였다. 카우프만은 부하라를 노렸다. 그러자 부하라가 먼저 움직였다. 부하라는 1868년 4월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사마르칸트에 집결했다. 카우프만은 3천 5백의 병력을 이끌고 사마르칸트로 출병했다. 하지만 부하라 군 내부에서 내란이 일어나 주민들은 항복했다. 같은 해, 5월 2일, 사마르칸트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흡수되었다. 사마르칸트(Samarkand)는 영웅 티무르의 묘가 있는 도시로, 중앙아시아의 상징적인 곳이다. 러시아가 이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중앙아시아 투르크족에게 심리적인 압도감을 주게 되었다. 카우프만은 이제 부하라의 수도로 진격했다. 부하라 군은 러시아 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연이어 패전하면서 부하라의 칸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보호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부하라 칸은 러시아 차르의 봉신으로 칸 위만 유지하게 되었다. 1868년 부하라가 항복한 이후 이제 히바 칸국(Khanate of Khiva)이 남았다. 러시아는 1717년, 1839년 두 차례의 히바 원정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았다. 러시아는 우선 카스피 해 동쪽 연안에 크라스노보츠크(Красноводск)에 항구를 건설했다. 이 항구는 러시아 중부에서 볼가 강을 따라 물자를 싣고 내려와 카스피해를 활용해 히바를 연결하는 교통망의 중간 요충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