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왕국인가? 실존한 왕국인가? 에티오피아의 고대 왕국 악숨

알렉세이 정
2026-09-14

동아프리카에 자리 잡은 에티오피아는 면적이 110만㎢로 한반도보다 5배 이상 넓고, 인구는 1억 명에 이르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인구의 62.8%가 기독교를 믿고, 이슬람 신도가 33.8%로 나타나고 있는 기독교 국가이다. 이 중에서 고유의 에티오피아 교회 신도가 43.5%, 프로테스탄트 18.6%, 카톨릭 0.7%로 4세기부터 기독교 국가를 이어 왔다. 주변에 이슬람 국가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도 에티오피아가 기독교를 유지한 것은 4세기 초 악숨 왕조(Kingdom of Aksum) 시기부터이다. 악숨 왕조는 A.D 350년경에 수단과 이집트 남부에 걸쳐 있던 쿠시 왕조(Kingdom of Kush)를 멸망시킨 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왕조의 시작은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예멘 지역이라는 설과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라는 설이 있다. 신화는 예멘 지역에서 시작하지만, 역사고고학자들은 에티오피아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다. 에티오피아(Ethiopia)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태양에 검게 탄 얼굴의 땅’(Land of the Burnt Faces)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도 아프리카 남쪽 사하라 지역에 에티오피아라는 나라가 있다고 했고,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도 에티오피아가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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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에티오피아(악숨 왕국)의 종교적·역사적 유산과 관련된 세 가지 상징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 Pinterest


인류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에티오피아의 원조 국가인 악숨 왕조는 셈어(Semitic languages)를 사용하는 사바(Saba) 인들이 아라비아 남쪽 예멘에서 홍해를 건너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에 정착해 건국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비해 에티오피아 현지의 역사는 신화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신화 집으로 알려진 <케브라 네가스트(Kebra Nagast)>에는 B.C 10세기에 ‘현자의 아들’(Son of the Wise)로 알려진 메네리크(Menelik) 왕이 고대 제국을 건설했으니, 그 나라가 악숨 왕국이라는 것이다. 신화는 메네리크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Queen of Sheba)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메네리크는 유태인으로 직역된다. 신화에 의하면, 시바 여왕이 에티오피아에서 메네리크를 키웠고, 성년이 되어 메네리크는 아버지 솔로몬 왕을 찾아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스라엘에 남아 통치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메네리크는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한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 그를 보호하게 하고, 돌아가서도 성경 말씀에 따라 통치를 하라고 충고했다.


솔로몬은 아들과 작별 선물로 인해 언약궤를 아들에게 주었는데, 그 언약궤가 현재 에티오피아 테와히도(Tewahido) 교회에 보존 되고 있다 주장한다. 이는 에티오피아의 신화 상으로 악숨 왕조의 시조로 볼 때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아들 메넬리크로 되어 있다. 하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에티오피아의 신화를 믿지 않는다. 이 신화 집이 만들어진 것은 1321년으로, 에티오피아 왕국이 1270년에 수립된 이후였다. 새 왕조가 정통성을 멀리 솔로몬 왕까지 끌어 올린 것이다. 이는 한국사로 본다면 고려 시대에 단군신화가 만들어진 것과 비슷한 논리로 보인다. 하지만 솔로몬 왕 후계 설은 그 후 에티오피아 왕조의 정통성을 차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악숨 왕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것인 것은 서기 325년경으로 알려졌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것보다 약간 늦다. 프루멘티우스(Frumentius)라는 레바논 출신 성직자가 상인을 인도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홍해에서 에티오피아인들의 포로가 되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살해되고 프루멘티우스와 또 다른 청년 두 명이 노예가 되어 악숨으로 끌려갔다. 두 청년은 해당 국가들을 다스리는데 도움을 주었고, 에자나(Ezana) 왕이 프루멘티우스를 고문으로 삼았다.


프루멘티우스는 에자나 왕을 자주 만나면서 기독교를 믿으라고 설득했다. 325년경에 에지나 왕은 기독교를 공인했다. 프루멘티우스는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렉산드리아 주교에게 보고했고, 340년경에 악숨 왕국의 주교로 승인받았다. 그가 에티오피아의 태와히도 교회(Ethiopian Orthodox Tewahedo Church) 창시자가 된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악숨 왕국은 330년경부터 십자가를 새겨 넣은 주화를 찍어낸다. 한편, 악숨 왕국에 거주하던 정통 유태인들은 기독교 공인에 불만을 품고 고원 지대로 들어가 별도의 왕국인 세미엔 왕국(Kingdom of Semien)을 건국했다. 그들의 후예가 나중에 악숨 왕국을 멸망시키게 된다. 에티오피아 교회는 서구의 교회와 다르다. 프루멘티우스는 셈어로 신약성서를 번역해 현지화 했다. 또한 토착 문화를 교회 활동과 융화했다. 에티오피아의 교회는 신도들에게 부적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허용했다. 악령을 몰아내는 미신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예배가 끝나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의식도 행하게 된다. 이처럼 아프리카 전통과 기독교 의식을 융합하면서 에티오피아 교회는 1700년을 이어오고 있다.


에자나 왕 재위 시기인 320년에서 360년에 의하면 악숨 왕국은 쿠시 왕조를 멸망시켰다. 악숨 왕국은 홍해를 지배하면서 멀리 인도에서 페르시아, 로마 제국과 교역을 했다. 현재 에리트레아의 아둘리스(Adulis) 항구는 악숨의 주요 항구였다. 악숨 왕조는 인도와 로마 제국에서 상아, 거북등껍질, 금, 보석, 실크, 향신료 등을 사고팔았다. 활발한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했으며, 3세기부터 아라비아 반도 남부에 정치적 개입을 했다. 악숨 왕국은 3세기 말엽에 이르러 금, 은, 청동으로 마니(Mani)를 단위로 하는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했다. 당시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한 나라는 로마 제국,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 그리고 중국이었는데, 악숨은 이들 나라와 막강한 국력을 견주었던 것이다. 악숨 왕조는 이전부터 사용되던 언어와 셈어를 혼용해 독자적인 문자체계 게에즈(Ge'ez)를 완성했다. 악숨 왕조의 또 다른 문화적 특징은 왕의 무덤을 상징하는 거대한 오벨리스크(Obelisks)였다. 이 오벨리스크는 오늘날에도 에티오피아에 다수가 남아 있다. 에티오피아 역사상 최고의 국력과 영향력을 가졌던 국가. 수도이자 중심지는 현 티그라이 지역의 악숨이었다.


서아시아에 거주하던 셈족 계열 민족이 B.C 550년경에 에티오피아 고원 일대에 도착해서 국가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여 B.C 2세기에 건국되었고 A.D 1세기가 되어서는 제국으로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국가 자체는 10세기경까지 존속했는데 로마 제국과 이집트, 인도 등의 주변국들을 상대로 노예와 흑요석 등과 함께 교역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취했고 이 무역으로 발생한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강성한 해군을 증대하여 중무장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군사력을 중무장한 이후인 3세기경부터는 정복 사업으로 영토를 확장하기까지 했으며 4세기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 때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Mani)가 이란과 로마 제국, 중국 역대 왕조들과 더불어 4대 강국이라고 했을 정도로 강력한 시절이 있었다. 다만 악숨 왕국의 실제 국력은 영토와 인구, 군사력, 기술 등을 볼 때 저들에 비해 한참 모자랐다. 오히려 저 4대 강국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은 인도의 쿠샨 왕조가 영토와 국력이 훨씬 더 강력했다. 


악숨 왕국은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군사적인 지원도 받았으며 당시 페르시아에서 인도,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홍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와 인도, 중국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했던 페르시아에 거주하는 마니가 악숨 왕국을 과대평가했을 수도 있다. 악숨 왕국은 당대 홍해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로마 제국과 이해관계가 맞아 동맹을 형성하면서 국력이 신장되었다. 5세기경에는 당시 예멘을 지배하고 있던 힘야르 왕국을 공격해 마리브(Mariv) 댐의 붕괴로 국력이 크게 약화된 힘야르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들은 아라비아 전부를 지배하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로마의 홍해 지역 함대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힘야르 왕국은 페르시아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해당 전쟁은 서로 대립하던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두 제국이 홍해의 패권을 두고 치른 일종의 대리전에 가까웠다. 그러나 악숨 왕국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고 결국 아라비아 중부의 부족들에 의해 추방되었다.

 

참고로 아라비아 부족이 악숨 군을 격파한 해가 “코끼리의 해”, 무함마드가 탄생한 해와 같다. 에티오피아의 고대 악심 왕국은 무역 국가였다. 악숨은 강력한 해군으로 홍해와 나일 강 상류를 장악했다.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과 나일 강 하류의 누비아(Nubia), 상류의 흑인 왕국, 인도의 여러 나라와 교역했다. 또한 지중해로 진출해 로마 제국과도 물건을 사고팔았다. 주요 수출 품목은 상아, 거북등, 금, 에메랄드였고, 비단과 향료를 수입했다. 악숨 왕국은 농산물과 가축도 생산했다. 당시 에티오피아의 토양은 지금보다 훨씬 기름졌으며 농작물 재배에 알맞은 땅이었다. 이 땅에서 밀과 보리와 같은 곡류와 소와 양, 낙타 등 가축을 길렀으며 코끼리의 상아와 코뿔소의 뼈를 얻기 위해 사냥도 했다. 그들은 이렇게 얻은 농산물과 축산물을 로마와 페르시아, 이집트의 상인들에게 팔았다. 악숨에는 금과 은, 소금 광산도 있었고 특히 소금의 경우, 주요 수출품이었다. 악숨 왕국의 교역은 주로 해로를 이용했으며, 육로를 이용해 지중해와도 연결했다. 


에티오피아 지역의 악심 왕국이 수단 지역의 쿠시 왕국과 대립하게 된 것도 무역 로 때문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악숨은 이집트와 거래하기 위해 나일 강을 활용해야 하는데, 그 중간에 쿠시 왕국이 길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쿠시 왕조로서도 홍해를 이용하려면 악숨 왕국의 존재가 귀찮게 되었다. 두 나라의 무역 충돌이 전쟁으로 확대되어 350년경에 악숨이 쿠시를 공격해 멸망시킨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악숨 왕국은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에 또 다른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과 친교 했다. 이교도 국가인 쿠시 왕국을 정복한 이후 악숨은 홍해 건너편에 있는 예멘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이 사건은 칼레브(Kaleb) 왕(510~540) 시기의 일이다. 칼레브 왕이 예멘을 침공한 것은 52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예멘 일대에는 힘야르(Himyar) 왕국이 존재했는데, 유태인으로 알려진 유수프 아사르 야타르(Yusuf Asar Yathar) 왕이 기독교를 탄압했다. 악숨의 칼레브 왕이 군대를 보내 힘야르 군을 격파하고 유수프 왕을 살해했다. 


그리고 현지 출신의 기독교도들을  힘야르 총독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525년 악숨에서 파견한 장군 아브라하(Abraha)와 그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추방하고 예멘 일대를 지배했다. 악숨 왕조는 군대를 파병했지만 아브라하 일당을 패배시키지 못했다. 이후 아브라하는 악숨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준 독립적으로 예멘을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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