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가니스탄 최고의 석학, 엘리트 지식인 출신 대통령
현 파트에서는 하미드 카르자이의 뒤를 이어 아프가니스탄 민주정의 제3대 대통령인 아슈라프 가니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본래 아슈라프 가니는 1949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접경인 로가르 지역에서 파슈툰인 집안에서 탄생했다. 그는 어린 시절 몇 안되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파키스탄 파슈툰 지역의 학교를 다니며 여러 견문을 쌓았다. 당시 파키스탄에는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스칸데르 미르자 대통령이 파키스탄 내부에 여러 불온한 움직임들이 포착되자 전 국가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국회를 강제 해산했으며 국회의원 대부분을 적국인 인도와 내통한 혐의를 씌워 교수형에 처하는 등 독재의 기반을 마련하자 그러한 일들을 수행했던 군부의 실세인 아유브 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스칸데르 미르자 대통령을 축출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2021년 8월 탈레반 재집권 이전, 과거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Afghanistan) 정부 고위 관료들의 합동 기자회견, 왼쪽에서 두 번째는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오른쪽에서 두 번째(손을 들고 말하는 인물)는 비스밀라 칸 모하마디(Bismillah Khan Mohammadi) 전 국방부 장관(겸 내무부 장관)이다. 출처 : Pajhwok Afghan News
국민의 민주주의적 투표가 아닌 군부 쿠데타에 이은 군사독재의 시대에 접어든 파키스탄은 1965년에 인도와 2차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이 전쟁 이후에 급격한 경제 불황을 겪었으며 이에 실망한 국민들로 인하여 1967년에는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아슈라프 가니는 이러한 파키스탄의 내부 혼란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인물로써 소년시절의 그는 자신의 조국인 아프가니스탄이 파키스탄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이 생기게 되면서 서구의 민주주의를 배우기 위해 아버지에게 미국 유학을 요청하여 허가를 받고 교환학생 형식으로 미국에 건너가게 된다. 이러한 경험들이 가니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가니는 미국에서 돌아와 레바논으로 가서 아메리카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데 당시 아메리카 대학은 아랍 지역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아랍 지역 최고의 명문대학이었다.
가니가 이 학교를 들어가게 되니 아프가니스탄에서 가니를 아프가니스탄이 배출한 최고의 천재이자 인재로 여겨지면서 정부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게 된다. 그는 아메리카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졸업한 뒤, 1977년에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장학금으로 미국 컬럼비아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당시 가니가 미국 명문대학인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이 아프가니스탄에 들려오자 그에 대해 대서특필을 하는 등,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 전체가 축제의 분위기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학생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가니는 UC버클리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최고의 석학으로 거듭났으며 1991년에는 세계은행으로 이직하여 러시아 석탄 산업을 비롯해 중국, 인도 등 아시아의 여러 개발사업 프로젝트들을 추진하면서 서방 세계에 그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게 된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했고, 그로 인한 전쟁으로 탈레반 정권이 붕괴하자 가니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하여 새로운 정권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도와 전쟁으로 파괴된 아프가니스탄을 재건하고자 했다. 그로 인해 카르자이에게 인정받은 가니는 재무장관으로 취임하여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가니는 조세 체계를 세우고 새 화폐 도입을 추진하는 등, 아프가니스탄의 금융경제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그는 이후 재무장관 직에서 물러났으며 카불 대학교의 총장을 맡았지만 세계은행 총재 선거에서 참패했다. 이후 가니는 UN 사무총장에도 도전하여 우리 대한민국의 반기문과 인도의 샤시 타루와 경쟁하였으나 반기문에게 패하여 UN 사무총장도 되지 못했다. 더불어 2009년에는 대선후보로 나갔으나 2.9%라는 절망적인 표를 받고 낙선했고 반면 하미드 카르자이가 49.67%로 재선되었지만 부정선거라는 폭로가 있어 국내의 혼란과 연이은 부정부패의 목도로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고 한다.
이 때부터 가니는 서방 친화적인 모습이 아프가니스탄 대중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생각하고 국민들에게 친근감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친서방적인 모습을 버리고 아프가니스탄 인 고유의 모습을 해야한다고 판단하여 많은 이미지 변신을 하기 시작했다. 가니는 자신의 이름 뒤에 자신이 출생한 파슈툰 내 부족 이름인 아흐마드자이(Ahmadzai)라는 명칭을 붙이고, 아프가니스탄 전통의상을 입으며 수염을 기르는 등 많은 것들을 바꾸어 나가게 되는데 이러한 이미지 변신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2014년 아프가니스탄 대선 때는 전임 정부인 하미드 카르자이의 부정부패에 지친 국민들에게 부패척결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활동하였고, 이전에 세웠던 아프가니스탄의 비현실적인 정치적 견해도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에 맞게 탈바꿈했다. 그리고 가니는 우즈베키스탄 계통의 군벌 압둘 라시드 도스툼을 자신의 부통령 후보에 지명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결정은 국민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게 된다.
일전에 2009년 선거 당시 가니는 도스툼을 무자헤딘 출신으로 탈레반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국민들을 대학살한 살인자라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4개 민족인 파슈툰계, 타지크계, 우즈벡계, 하자르계 중에 우즈베크 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니는 과거의 견해를 버리고 도스툼을 포용하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단은 서방 인권주의자들로 인해 많은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도스툼이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에 실제로 탈레반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몇몇 마을의 주민들을 학살했고 그의 민병대가 생포한 탈레반 포로 2000여 명을 컨테이너 상자에 집어넣어 질식사시킨 혐의가 있었으며 전범재판에서 증인의 증언을 봉인하기 위해 고문한 전적까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아슈라프 가니는 결국 대선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다.

- 아프가니스탄 최고의 석학, 엘리트 지식인 출신 대통령
현 파트에서는 하미드 카르자이의 뒤를 이어 아프가니스탄 민주정의 제3대 대통령인 아슈라프 가니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본래 아슈라프 가니는 1949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접경인 로가르 지역에서 파슈툰인 집안에서 탄생했다. 그는 어린 시절 몇 안되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파키스탄 파슈툰 지역의 학교를 다니며 여러 견문을 쌓았다. 당시 파키스탄에는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스칸데르 미르자 대통령이 파키스탄 내부에 여러 불온한 움직임들이 포착되자 전 국가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국회를 강제 해산했으며 국회의원 대부분을 적국인 인도와 내통한 혐의를 씌워 교수형에 처하는 등 독재의 기반을 마련하자 그러한 일들을 수행했던 군부의 실세인 아유브 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스칸데르 미르자 대통령을 축출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2021년 8월 탈레반 재집권 이전, 과거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Afghanistan) 정부 고위 관료들의 합동 기자회견, 왼쪽에서 두 번째는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오른쪽에서 두 번째(손을 들고 말하는 인물)는 비스밀라 칸 모하마디(Bismillah Khan Mohammadi) 전 국방부 장관(겸 내무부 장관)이다. 출처 : Pajhwok Afghan News
국민의 민주주의적 투표가 아닌 군부 쿠데타에 이은 군사독재의 시대에 접어든 파키스탄은 1965년에 인도와 2차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이 전쟁 이후에 급격한 경제 불황을 겪었으며 이에 실망한 국민들로 인하여 1967년에는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아슈라프 가니는 이러한 파키스탄의 내부 혼란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인물로써 소년시절의 그는 자신의 조국인 아프가니스탄이 파키스탄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이 생기게 되면서 서구의 민주주의를 배우기 위해 아버지에게 미국 유학을 요청하여 허가를 받고 교환학생 형식으로 미국에 건너가게 된다. 이러한 경험들이 가니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가니는 미국에서 돌아와 레바논으로 가서 아메리카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데 당시 아메리카 대학은 아랍 지역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아랍 지역 최고의 명문대학이었다.
가니가 이 학교를 들어가게 되니 아프가니스탄에서 가니를 아프가니스탄이 배출한 최고의 천재이자 인재로 여겨지면서 정부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게 된다. 그는 아메리카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졸업한 뒤, 1977년에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장학금으로 미국 컬럼비아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당시 가니가 미국 명문대학인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이 아프가니스탄에 들려오자 그에 대해 대서특필을 하는 등,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 전체가 축제의 분위기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학생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가니는 UC버클리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최고의 석학으로 거듭났으며 1991년에는 세계은행으로 이직하여 러시아 석탄 산업을 비롯해 중국, 인도 등 아시아의 여러 개발사업 프로젝트들을 추진하면서 서방 세계에 그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게 된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했고, 그로 인한 전쟁으로 탈레반 정권이 붕괴하자 가니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하여 새로운 정권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도와 전쟁으로 파괴된 아프가니스탄을 재건하고자 했다. 그로 인해 카르자이에게 인정받은 가니는 재무장관으로 취임하여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가니는 조세 체계를 세우고 새 화폐 도입을 추진하는 등, 아프가니스탄의 금융경제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그는 이후 재무장관 직에서 물러났으며 카불 대학교의 총장을 맡았지만 세계은행 총재 선거에서 참패했다. 이후 가니는 UN 사무총장에도 도전하여 우리 대한민국의 반기문과 인도의 샤시 타루와 경쟁하였으나 반기문에게 패하여 UN 사무총장도 되지 못했다. 더불어 2009년에는 대선후보로 나갔으나 2.9%라는 절망적인 표를 받고 낙선했고 반면 하미드 카르자이가 49.67%로 재선되었지만 부정선거라는 폭로가 있어 국내의 혼란과 연이은 부정부패의 목도로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고 한다.
이 때부터 가니는 서방 친화적인 모습이 아프가니스탄 대중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생각하고 국민들에게 친근감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친서방적인 모습을 버리고 아프가니스탄 인 고유의 모습을 해야한다고 판단하여 많은 이미지 변신을 하기 시작했다. 가니는 자신의 이름 뒤에 자신이 출생한 파슈툰 내 부족 이름인 아흐마드자이(Ahmadzai)라는 명칭을 붙이고, 아프가니스탄 전통의상을 입으며 수염을 기르는 등 많은 것들을 바꾸어 나가게 되는데 이러한 이미지 변신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2014년 아프가니스탄 대선 때는 전임 정부인 하미드 카르자이의 부정부패에 지친 국민들에게 부패척결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활동하였고, 이전에 세웠던 아프가니스탄의 비현실적인 정치적 견해도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에 맞게 탈바꿈했다. 그리고 가니는 우즈베키스탄 계통의 군벌 압둘 라시드 도스툼을 자신의 부통령 후보에 지명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결정은 국민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게 된다.
일전에 2009년 선거 당시 가니는 도스툼을 무자헤딘 출신으로 탈레반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국민들을 대학살한 살인자라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4개 민족인 파슈툰계, 타지크계, 우즈벡계, 하자르계 중에 우즈베크 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니는 과거의 견해를 버리고 도스툼을 포용하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단은 서방 인권주의자들로 인해 많은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도스툼이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에 실제로 탈레반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몇몇 마을의 주민들을 학살했고 그의 민병대가 생포한 탈레반 포로 2000여 명을 컨테이너 상자에 집어넣어 질식사시킨 혐의가 있었으며 전범재판에서 증인의 증언을 봉인하기 위해 고문한 전적까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아슈라프 가니는 결국 대선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