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소련이 무너지고 몽골도 무혈 민주혁명이 성공하면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티베트 불교가 국교처럼 존중되면서 많은 사찰이 복원되었고 승려 양성기관을 통해 많은 승려가 배출되기 시작했다. 1990년 민주화 혁명 이후 집권한 오치르바트는 취임과 동시에 소련으로 실려 간 간단사 관음전의 관음보살상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불사를 추진했고 몽골 국민 대부분이 보시했는데 이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현재 몽골 불교는 티베트 불교(주로 겔룩파)의 영향으로 달라이 라마를 여러 차례 초청해 대규모 법회를 열고 개별 가정에서도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나 조형물을 모셔놓은 경우가 많다.

몽골 울란바토르에 위치한 대표적인 불교 사원 단지인 간단테그치늘렌 사원(Gandan Monastery)의 내부 경내,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간단 사원은 몽골이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1727년 옹정제 시대에 처음 건설되었다. 이후 몽골이 공산화되고 티베트 불교에 대한 대숙청이 벌어졌을 때 몽골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사실상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 수도원으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절 역할을 하긴 할 수 있었다. 이후 몽골이 탈공산화하고 칭기즈칸과 티베트 불교 등 과거의 유산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자 이곳도 다시금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원나라 승려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파스파였다.
티베트 불교 승려였던 그는 제국의 불교계를 지배했고 티베트 문자를 기본으로 현재까지 공식 문자로 내려오는 파스파 문자를 만들기도 했다. 14세기 말 원나라가 멸망하고 초원으로 물러간 몽골족은 불교로 인해 제국이 멸망했다는 이유로 이전 신앙인 샤머니즘으로 돌아갔다. 몽골이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당시에는 청나라 조정에서 몽골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승려들을 지원했고 불교의 정치·경제적인 영향력이 커지자 많은 몽골인이 승려가 됨으로서 19세기 말엽에는 성인 남자의 절반 이상이 승려가 될 정도였다.
한때 초원을 지배했던 몽골 남성들이 승려가 되고, 사원을 중심으로 한 정착이 이루어지면서 몽골인의 상무정신과 기상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승려들의 경우는 소련 지배 시절 강제결혼정책의 영향으로 독신인 비구승(Gelon)과 결혼한 대처승(Genen)으로 나누어져 있다. 자신의 근기에 따라 결정할 수 있고, 가문을 이어야 하는 독자들은 승려가 되더라도 대처승이 되어야 한다. 비구승도 한국의 스님들처럼 절 안에 모여 살 수 있는 공간이나 제도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
아침에 절에 가고 저녁 때면 퇴근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가족들과 지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몽골의 불자들은 절에 가는 것보다 스님들의 집으로 찾아가 축복을 받거나 상담을 받는 경우가 많다. 승려 대부분이 세속과 분리되지 않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유흥업소나 극장을 자주 가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몽골인들은 거의 없다. 최근에는 비구승인 티베트 고승들이 몽골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지고 비구승들이 우대를 받으면서 몽골의 승려 사회가 조금씩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1990년대 소련이 무너지고 몽골도 무혈 민주혁명이 성공하면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티베트 불교가 국교처럼 존중되면서 많은 사찰이 복원되었고 승려 양성기관을 통해 많은 승려가 배출되기 시작했다. 1990년 민주화 혁명 이후 집권한 오치르바트는 취임과 동시에 소련으로 실려 간 간단사 관음전의 관음보살상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불사를 추진했고 몽골 국민 대부분이 보시했는데 이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현재 몽골 불교는 티베트 불교(주로 겔룩파)의 영향으로 달라이 라마를 여러 차례 초청해 대규모 법회를 열고 개별 가정에서도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나 조형물을 모셔놓은 경우가 많다.
몽골 울란바토르에 위치한 대표적인 불교 사원 단지인 간단테그치늘렌 사원(Gandan Monastery)의 내부 경내,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간단 사원은 몽골이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1727년 옹정제 시대에 처음 건설되었다. 이후 몽골이 공산화되고 티베트 불교에 대한 대숙청이 벌어졌을 때 몽골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사실상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 수도원으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절 역할을 하긴 할 수 있었다. 이후 몽골이 탈공산화하고 칭기즈칸과 티베트 불교 등 과거의 유산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자 이곳도 다시금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원나라 승려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파스파였다.
티베트 불교 승려였던 그는 제국의 불교계를 지배했고 티베트 문자를 기본으로 현재까지 공식 문자로 내려오는 파스파 문자를 만들기도 했다. 14세기 말 원나라가 멸망하고 초원으로 물러간 몽골족은 불교로 인해 제국이 멸망했다는 이유로 이전 신앙인 샤머니즘으로 돌아갔다. 몽골이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당시에는 청나라 조정에서 몽골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승려들을 지원했고 불교의 정치·경제적인 영향력이 커지자 많은 몽골인이 승려가 됨으로서 19세기 말엽에는 성인 남자의 절반 이상이 승려가 될 정도였다.
한때 초원을 지배했던 몽골 남성들이 승려가 되고, 사원을 중심으로 한 정착이 이루어지면서 몽골인의 상무정신과 기상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승려들의 경우는 소련 지배 시절 강제결혼정책의 영향으로 독신인 비구승(Gelon)과 결혼한 대처승(Genen)으로 나누어져 있다. 자신의 근기에 따라 결정할 수 있고, 가문을 이어야 하는 독자들은 승려가 되더라도 대처승이 되어야 한다. 비구승도 한국의 스님들처럼 절 안에 모여 살 수 있는 공간이나 제도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
아침에 절에 가고 저녁 때면 퇴근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가족들과 지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몽골의 불자들은 절에 가는 것보다 스님들의 집으로 찾아가 축복을 받거나 상담을 받는 경우가 많다. 승려 대부분이 세속과 분리되지 않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유흥업소나 극장을 자주 가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몽골인들은 거의 없다. 최근에는 비구승인 티베트 고승들이 몽골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지고 비구승들이 우대를 받으면서 몽골의 승려 사회가 조금씩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