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영국의 수도 런던(London), 이 이름이 로마가 브리타니아를 정복하고 주둔했던 시기의 론디니움(Londinium)에서 나온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왜 론디니움(Londinium)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잉글랜드에는 켈트어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기 때문에 런던도 켈트어를 라틴어 형식으로 변용한 것이 아닐까는 추측이 가장 많다. 그러나 이는 확실하지는 않은데다 문헌적 근거 또한 전무하기 때문이다. 특히 켈트어 유래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거칠다는 의미, 론디누스 족의 이름을 차용한 론도(londo)나 '좁은 땅의 성'을 의미하는 린딘(lyndyn)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켈트 신화의 신들의 왕인 누아다 아르게틀람(Nuada Airgetlam)에서 누아다의 영국식 발음인 루드(Lud)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를 묘사한 무명 화가의 17세기 유화 작품, 출처 : Wikipedia, Great Fire of London
피터 애크로이드(Peter Ackroyd)의 주장에 의하면 도시, 요새(Don])와 호수, 냇가 옆(Lynn)을 의미하는 두 단어가 결합했거나 긴 언덕, 늪을 의미하는 등, 장소를 표현하는 단어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이후 로마 제국 시대 론디니움 요새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2010년 복스홀(Vauxhall) 다리 아래에서 무려 약 6,000년 전의 목조 건물의 잔해들이 발견되면서 실질적인 정착 시기는 요새 건립 이전부터일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후, 서로마 제국의 호노리우스가 브리타니아를 포기하고 로마군을 철수시키자 색슨족이 들어오게 되고 중심지 런던은 색슨족에게 철저한 파괴와 유린을 당해 인구가 1,000명도 안 되는 도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앵글로색슨의 침입 이후 서기 886년에는 잉글랜드의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의 통치 시대에 이르러 런던의 도시 재건이 이루어져 잉글랜드의 수도로 번성하게 되었고 17세기까지 수많은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러던 1666년 9월 2일 오전 2시에 런던의 역사에 있어 고대로부터 이어온 모든 영화가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출신의 시계공 로버트 휴버트가 토마스 패리너가 운영하는 제과점 푸딩 레인(Puding lane)에 불을 질렀다고 자백하면서 원래 웨스터민스터에 방화를 저지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토마스 패리너가 운영하는 푸딩 제과점 창문을 통해 화약을 던졌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토마스 패리너의 제과점에는 창문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되었지만 결국 그는 유죄판결을 받으면서 최종적으로 9월 2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9월 2일에 푸딩 레인(Puding lane)에서부터 발생한 화재는 9월 5일까지 지났음에도 진화되지 않았고 때마침 강한 동풍까지 불면서 웨스트 런던으로 불길이 확산되어 나갔다.
당시 유럽에서의 주요 화재 진압방법은 건물을 철거한 뒤, 방화벽을 설치하고 소화를 진행하는 방식이었지만, 당시 런던 시장경은 이와 같은 화재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고, 이와 같은 방심이 결국 더욱 불길이 겉잡을 수 없게 되자 일요일 밤이 되어서야 건물을 철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화재는 겉잡을 수 없이 커져있었고 불길은 시내로 향하고 있었다. 월요일인 3일이 됐을때 화재는 런던 시내 중심부까지 깊숙이 들어갔고, 화요일인 4일에는 세인트폴 대성당이 화재에 파괴당했다. 결국 군이 투입되어 화약을 폭발시켜 방화로를 만들고 강풍이 잦아든 덕택에 불길을 간신히 잡았지만 이 화재는 런던 시티의 4/5를 전소시켰다. 그리고 런던월을 대부분 태웠으며, 웨스터민스터의 귀족 지구와 찰스 2세가 있던 화이트홀 궁전까지 위협했다.
그리고 87채의 교회, 13,000여 채의 집이 전소되었고, 44채의 회사 건물과, 왕립거래소, 세관, 브라이드웰 구빈원, 교도소 우체국, 3개의 성문이 소실되었다. 게다가 런던에 사는 7만여 명이 집을 잃었다. 당시 런던 인구가 약 8만 명 가량이었는데 7만여 명이 집을 잃고 노숙자가 되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런던 시민들이 노숙자가 되었다는 말과 같다. 이는 전체 건물의 약 80%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모든 주택이 초토화한 셈이다. 불이 나자 시민들은 진화에 나서기는커녕 귀중품이나 가재도구를 챙겨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리고 소방수들은 화재 현장 주변에서 수수방관하기도 했다. 민간조합 형태로 운영된 소방수들은 불난 제과점이 상인조합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런던 주택가가 소형 목재 가옥으로 서로 연결되어 불이 붙을 정도로 조밀했던 것이 오히려 화재 피해를 더욱 키웠다.
물론 공식적인 기록에는 단 6명 만이 죽었다고 나와 있지만, 불이 너무 뜨거워서 시체가 전부 녹아내려 구분할 수 없었다는 설과 극빈층이 시민으로 등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기록된 사망자만 6명이고, 당시 빈민층과 중산층의 사람들이 집계되지 않았고, 또한 화재의 열기가 사망자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녹여버렸다는 추측만이 남아있다. 석조 건물마저 태울 만큼 고열을 낸 불길에 불법 체류 빈민이나 노숙자가 희생됐을 개연성이 크며 이들은 시 당국에 등록되지 않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면 사망자 명단에서 누락되었다. 불이 시작된 푸딩 레인에서 발견된 녹은 도자기 조각을 조사한 결과 화재로 인한 온도가 1,250℃까지 치솟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런던이 이번 화재 이전에도 1632년에 이미 대형 화재를 한번 더 겪은 바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목조건물이나 초가지붕을 금지했으나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일자리를 찾아 수도로 몰려든 빈민들이 비싼 벽돌이나 석재로 집을 지을 형편이 못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런던이 단기간에 인구 5만 명을 넘을 정도로 급팽창하자 불법 목조건물이 도시 곳곳에 어지럽게 들어선 것도 화마를 더욱 키운 셈이 되었다.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당시 국왕인 찰스 2세는 이재민들에게 식량지급을 약속하였다. 게다가 대화재로 인해 쥐들도 타 죽었기 때문에 그 이전 해인 1664년 말부터 1666년까지 발생한 흑사병이 완전히 종료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 사건이 바로 런던대화재가 낳은 불행 중에 호재이기도 했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프랑스 출신의 시계공 로버트 휴버트가 용의자로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앞서 언급한데로 푸딩 레인의 토마스 패리너가 운영하는 제과점의 창문을 통해 화약을 투척했으나 토마스 패리너의 제과점에는 창문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휴버트가 화재가 발생하고 이틀 뒤에 런던에 들어왔던 것이 판명되면서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찰스 2세가 시민들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았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대회재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울화의 대상이 된 것은 외국인과 카톨릭교도에게로 돌아갔고 분노한 대중들은 이것이 모두 프랑스인, 네덜란드인들과 같은 카톨릭교도 때문이라면서 거리에서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은 프로테스탄트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분쟁도 폭동의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푸딩 레인 인근에 런던대화재 기념탑이 세워지는데, 이 탑에는 "여기, 바로 천국에 허락을 받아 지옥이 이 개신교 도시에 부셔졌다. 카톨릭교의 믿을수 없고, 악한 음직임이 시작되었다. 카톨릭의 광란은 공포를 만들었고,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새겨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문구는 이후 1830년에서야 지워지게 된다. 이곳으로 가려면 런던 지하철을 타고 Monument 역에서 내리면 되는데 지하철 역 이름인 Monument가 바로 런던 대화재 기념비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런던 대화재를 계기로 많은 제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민간조합 소방제의 문제점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소방차를 갖춘 근대 소방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템즈 강 연안에 건축을 금지하고 벽돌이나 석조 주택만 허용했으며 매연을 배출하는 양조나 염색 공장은 도심 밖으로 내몰았다. 현대식 화재보험회사도 탄생했으며 대재앙 15년 만인 1681년 의사 출신 건축가인 니콜라스 바본이 영국 최초 화재보험회사를 설립한다. 판잣집이 난립하던 도시 공간을 현대식 주택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화재보험은 높은 인기를 끌었다. 처음 불이 난 제과집 주인 토마스 페리니의 후손이 경영하는 런던 베이커가 1986년 침묵을 깨고 런던 대화재 진상을 공개했다. 제과집 여직원이 화덕에서 일하다가 실수로 불을 내 대화재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더불어 방화범으로 몰려 처형된 로버트 휴버트가 320년 만에 누명을 벗게 되었다.
오늘날 영국의 수도 런던(London), 이 이름이 로마가 브리타니아를 정복하고 주둔했던 시기의 론디니움(Londinium)에서 나온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왜 론디니움(Londinium)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잉글랜드에는 켈트어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기 때문에 런던도 켈트어를 라틴어 형식으로 변용한 것이 아닐까는 추측이 가장 많다. 그러나 이는 확실하지는 않은데다 문헌적 근거 또한 전무하기 때문이다. 특히 켈트어 유래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거칠다는 의미, 론디누스 족의 이름을 차용한 론도(londo)나 '좁은 땅의 성'을 의미하는 린딘(lyndyn)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켈트 신화의 신들의 왕인 누아다 아르게틀람(Nuada Airgetlam)에서 누아다의 영국식 발음인 루드(Lud)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를 묘사한 무명 화가의 17세기 유화 작품, 출처 : Wikipedia, Great Fire of London
피터 애크로이드(Peter Ackroyd)의 주장에 의하면 도시, 요새(Don])와 호수, 냇가 옆(Lynn)을 의미하는 두 단어가 결합했거나 긴 언덕, 늪을 의미하는 등, 장소를 표현하는 단어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이후 로마 제국 시대 론디니움 요새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2010년 복스홀(Vauxhall) 다리 아래에서 무려 약 6,000년 전의 목조 건물의 잔해들이 발견되면서 실질적인 정착 시기는 요새 건립 이전부터일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후, 서로마 제국의 호노리우스가 브리타니아를 포기하고 로마군을 철수시키자 색슨족이 들어오게 되고 중심지 런던은 색슨족에게 철저한 파괴와 유린을 당해 인구가 1,000명도 안 되는 도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앵글로색슨의 침입 이후 서기 886년에는 잉글랜드의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의 통치 시대에 이르러 런던의 도시 재건이 이루어져 잉글랜드의 수도로 번성하게 되었고 17세기까지 수많은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러던 1666년 9월 2일 오전 2시에 런던의 역사에 있어 고대로부터 이어온 모든 영화가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출신의 시계공 로버트 휴버트가 토마스 패리너가 운영하는 제과점 푸딩 레인(Puding lane)에 불을 질렀다고 자백하면서 원래 웨스터민스터에 방화를 저지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토마스 패리너가 운영하는 푸딩 제과점 창문을 통해 화약을 던졌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토마스 패리너의 제과점에는 창문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되었지만 결국 그는 유죄판결을 받으면서 최종적으로 9월 2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9월 2일에 푸딩 레인(Puding lane)에서부터 발생한 화재는 9월 5일까지 지났음에도 진화되지 않았고 때마침 강한 동풍까지 불면서 웨스트 런던으로 불길이 확산되어 나갔다.
당시 유럽에서의 주요 화재 진압방법은 건물을 철거한 뒤, 방화벽을 설치하고 소화를 진행하는 방식이었지만, 당시 런던 시장경은 이와 같은 화재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고, 이와 같은 방심이 결국 더욱 불길이 겉잡을 수 없게 되자 일요일 밤이 되어서야 건물을 철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화재는 겉잡을 수 없이 커져있었고 불길은 시내로 향하고 있었다. 월요일인 3일이 됐을때 화재는 런던 시내 중심부까지 깊숙이 들어갔고, 화요일인 4일에는 세인트폴 대성당이 화재에 파괴당했다. 결국 군이 투입되어 화약을 폭발시켜 방화로를 만들고 강풍이 잦아든 덕택에 불길을 간신히 잡았지만 이 화재는 런던 시티의 4/5를 전소시켰다. 그리고 런던월을 대부분 태웠으며, 웨스터민스터의 귀족 지구와 찰스 2세가 있던 화이트홀 궁전까지 위협했다.
그리고 87채의 교회, 13,000여 채의 집이 전소되었고, 44채의 회사 건물과, 왕립거래소, 세관, 브라이드웰 구빈원, 교도소 우체국, 3개의 성문이 소실되었다. 게다가 런던에 사는 7만여 명이 집을 잃었다. 당시 런던 인구가 약 8만 명 가량이었는데 7만여 명이 집을 잃고 노숙자가 되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런던 시민들이 노숙자가 되었다는 말과 같다. 이는 전체 건물의 약 80%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모든 주택이 초토화한 셈이다. 불이 나자 시민들은 진화에 나서기는커녕 귀중품이나 가재도구를 챙겨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리고 소방수들은 화재 현장 주변에서 수수방관하기도 했다. 민간조합 형태로 운영된 소방수들은 불난 제과점이 상인조합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런던 주택가가 소형 목재 가옥으로 서로 연결되어 불이 붙을 정도로 조밀했던 것이 오히려 화재 피해를 더욱 키웠다.
물론 공식적인 기록에는 단 6명 만이 죽었다고 나와 있지만, 불이 너무 뜨거워서 시체가 전부 녹아내려 구분할 수 없었다는 설과 극빈층이 시민으로 등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기록된 사망자만 6명이고, 당시 빈민층과 중산층의 사람들이 집계되지 않았고, 또한 화재의 열기가 사망자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녹여버렸다는 추측만이 남아있다. 석조 건물마저 태울 만큼 고열을 낸 불길에 불법 체류 빈민이나 노숙자가 희생됐을 개연성이 크며 이들은 시 당국에 등록되지 않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면 사망자 명단에서 누락되었다. 불이 시작된 푸딩 레인에서 발견된 녹은 도자기 조각을 조사한 결과 화재로 인한 온도가 1,250℃까지 치솟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런던이 이번 화재 이전에도 1632년에 이미 대형 화재를 한번 더 겪은 바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목조건물이나 초가지붕을 금지했으나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일자리를 찾아 수도로 몰려든 빈민들이 비싼 벽돌이나 석재로 집을 지을 형편이 못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런던이 단기간에 인구 5만 명을 넘을 정도로 급팽창하자 불법 목조건물이 도시 곳곳에 어지럽게 들어선 것도 화마를 더욱 키운 셈이 되었다.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당시 국왕인 찰스 2세는 이재민들에게 식량지급을 약속하였다. 게다가 대화재로 인해 쥐들도 타 죽었기 때문에 그 이전 해인 1664년 말부터 1666년까지 발생한 흑사병이 완전히 종료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 사건이 바로 런던대화재가 낳은 불행 중에 호재이기도 했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프랑스 출신의 시계공 로버트 휴버트가 용의자로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앞서 언급한데로 푸딩 레인의 토마스 패리너가 운영하는 제과점의 창문을 통해 화약을 투척했으나 토마스 패리너의 제과점에는 창문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휴버트가 화재가 발생하고 이틀 뒤에 런던에 들어왔던 것이 판명되면서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찰스 2세가 시민들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았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대회재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울화의 대상이 된 것은 외국인과 카톨릭교도에게로 돌아갔고 분노한 대중들은 이것이 모두 프랑스인, 네덜란드인들과 같은 카톨릭교도 때문이라면서 거리에서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은 프로테스탄트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분쟁도 폭동의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푸딩 레인 인근에 런던대화재 기념탑이 세워지는데, 이 탑에는 "여기, 바로 천국에 허락을 받아 지옥이 이 개신교 도시에 부셔졌다. 카톨릭교의 믿을수 없고, 악한 음직임이 시작되었다. 카톨릭의 광란은 공포를 만들었고,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새겨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문구는 이후 1830년에서야 지워지게 된다. 이곳으로 가려면 런던 지하철을 타고 Monument 역에서 내리면 되는데 지하철 역 이름인 Monument가 바로 런던 대화재 기념비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런던 대화재를 계기로 많은 제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민간조합 소방제의 문제점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소방차를 갖춘 근대 소방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템즈 강 연안에 건축을 금지하고 벽돌이나 석조 주택만 허용했으며 매연을 배출하는 양조나 염색 공장은 도심 밖으로 내몰았다. 현대식 화재보험회사도 탄생했으며 대재앙 15년 만인 1681년 의사 출신 건축가인 니콜라스 바본이 영국 최초 화재보험회사를 설립한다. 판잣집이 난립하던 도시 공간을 현대식 주택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화재보험은 높은 인기를 끌었다. 처음 불이 난 제과집 주인 토마스 페리니의 후손이 경영하는 런던 베이커가 1986년 침묵을 깨고 런던 대화재 진상을 공개했다. 제과집 여직원이 화덕에서 일하다가 실수로 불을 내 대화재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더불어 방화범으로 몰려 처형된 로버트 휴버트가 320년 만에 누명을 벗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