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한국 방문에서 어느 분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시다가 그만두신 것으로 아는데, 무슨 사연인지 알려줄 수 있느냐?" 미국 이민자 생활은 교회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쉬운데, 어느 순간 회의감이 들어서 교회를 그만 나가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겹치긴 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통계학자라는 정체성과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데이터와 증거에 기반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서만 반증 불가능한 믿음에 기대는 것은 일종의 언행 불일치였다. 그 균열을 계속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기독교를 떠나는 결정을 내렸을 때, 나는 그것이 단순히 종교를 바꾼 것이 아님을 느꼈다. 그것은 통계학은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학문이고 나는 "뼈속까지 통계학자"라는 자기 이해가, 기존 서사를 내려놓는 선택을 통해 적극적으로 창조된 순간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나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른 선택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이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면이 있다. 그런 면에서 자기 이해는 수동적인 개념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자기 이해를 마치 고정된 대상을 관찰하듯, 이미 존재하는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한때 사주명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타고난 사주팔자가 고정되어 있고, 그것을 정확히 알아내면 자기 이해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똑같은 사주도 그 사람의 살아온 삶의 맥락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자아 역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우리 자신은 과거와 외부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함수가 아니라, 그 과거를 어떻게 엮느냐에 따라 매번 다르게 구성되는 이야기 같은 존재이다. 리쾨르(Ricoeur)가 말했듯 우리는 서사적 존재다. 과거는 바뀌지 않지만, 그 과거에 대한 해석은 끊임없이 업데이트된다. 그리고 그 해석의 변화가 곧 나의 변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창조가 임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자기 창조에는 방향성이 있다. 기질, 가치의 중력, 그리고 지금까지 엮어온 서사의 관성이 창조의 공간을 구조화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미리 알 수 없다. 자기 이해의 순간이 방향성 자체를 미묘하게 바꾸고, 그 바뀐 방향이 다음 이해를 다시 바꾸는—그 과정은 본질적으로 창발적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 깊은 곳에서 항상 물어야 한다. 그 물음이 바로 자기 창조의 나침반이 된다.
사실 통계학자로서 나는 이 구조가 낯설지 않다. 통계 분석에서 모델은 데이터에 의해 언제든 업데이트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떤 증거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 모델은 과학이 아니라 도그마다. 자기 서사도 마찬가지다. 반증 가능한 자기 이해, 즉 불편한 진실 앞에서 자기 서사를 열어두는 태도는 새로운 발견과 성장의 조건이다. 그런 반전은 불편할수도 있지만 놀라운 가능성을 찾아내기도 한다.
"인생은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다. 자기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흔히 버나드 쇼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출처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말이 특정 저자의 권위 없이도 널리 공명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안에 담긴 통찰의 보편성을 증명한다. 자기 창조라는 생각은 한 사람의 격언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공통된 구조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이해란 행동하는 자아와 관찰하는 자아가 끊임없이 만나 갈등하고 화해하는 과정이다. 행동하는 자아는 앞으로 나아가고, 관찰하는 자아는 그것을 뒤에서 해석한다. 그 해석이 다시 행동을 바꾸고, 바뀐 행동이 새로운 관찰을 낳는다. 사주팔자조차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달라지듯, 나라는 텍스트도 읽힐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쓰인다. 이 화해는 완결되지 않고 그래서 자기 창조도 끝나지 않는다. 인간의 한계는 결국 자기 이해의 한계이다. 그래서 자기 이해는 끝날 수 없다.

지난 한국 방문에서 어느 분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시다가 그만두신 것으로 아는데, 무슨 사연인지 알려줄 수 있느냐?" 미국 이민자 생활은 교회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쉬운데, 어느 순간 회의감이 들어서 교회를 그만 나가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겹치긴 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통계학자라는 정체성과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데이터와 증거에 기반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서만 반증 불가능한 믿음에 기대는 것은 일종의 언행 불일치였다. 그 균열을 계속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기독교를 떠나는 결정을 내렸을 때, 나는 그것이 단순히 종교를 바꾼 것이 아님을 느꼈다. 그것은 통계학은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학문이고 나는 "뼈속까지 통계학자"라는 자기 이해가, 기존 서사를 내려놓는 선택을 통해 적극적으로 창조된 순간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나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른 선택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이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면이 있다. 그런 면에서 자기 이해는 수동적인 개념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자기 이해를 마치 고정된 대상을 관찰하듯, 이미 존재하는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한때 사주명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타고난 사주팔자가 고정되어 있고, 그것을 정확히 알아내면 자기 이해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똑같은 사주도 그 사람의 살아온 삶의 맥락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자아 역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우리 자신은 과거와 외부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함수가 아니라, 그 과거를 어떻게 엮느냐에 따라 매번 다르게 구성되는 이야기 같은 존재이다. 리쾨르(Ricoeur)가 말했듯 우리는 서사적 존재다. 과거는 바뀌지 않지만, 그 과거에 대한 해석은 끊임없이 업데이트된다. 그리고 그 해석의 변화가 곧 나의 변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창조가 임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자기 창조에는 방향성이 있다. 기질, 가치의 중력, 그리고 지금까지 엮어온 서사의 관성이 창조의 공간을 구조화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미리 알 수 없다. 자기 이해의 순간이 방향성 자체를 미묘하게 바꾸고, 그 바뀐 방향이 다음 이해를 다시 바꾸는—그 과정은 본질적으로 창발적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 깊은 곳에서 항상 물어야 한다. 그 물음이 바로 자기 창조의 나침반이 된다.
사실 통계학자로서 나는 이 구조가 낯설지 않다. 통계 분석에서 모델은 데이터에 의해 언제든 업데이트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떤 증거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 모델은 과학이 아니라 도그마다. 자기 서사도 마찬가지다. 반증 가능한 자기 이해, 즉 불편한 진실 앞에서 자기 서사를 열어두는 태도는 새로운 발견과 성장의 조건이다. 그런 반전은 불편할수도 있지만 놀라운 가능성을 찾아내기도 한다.
"인생은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다. 자기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흔히 버나드 쇼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출처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말이 특정 저자의 권위 없이도 널리 공명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안에 담긴 통찰의 보편성을 증명한다. 자기 창조라는 생각은 한 사람의 격언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공통된 구조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이해란 행동하는 자아와 관찰하는 자아가 끊임없이 만나 갈등하고 화해하는 과정이다. 행동하는 자아는 앞으로 나아가고, 관찰하는 자아는 그것을 뒤에서 해석한다. 그 해석이 다시 행동을 바꾸고, 바뀐 행동이 새로운 관찰을 낳는다. 사주팔자조차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달라지듯, 나라는 텍스트도 읽힐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쓰인다. 이 화해는 완결되지 않고 그래서 자기 창조도 끝나지 않는다. 인간의 한계는 결국 자기 이해의 한계이다. 그래서 자기 이해는 끝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