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주의를 해체하다]1-6. 종(種)의 관점에서 본 가부장제-국가사회

박정진
2026-08-05

[해체주의를 해체하다]


6. 종(種)의 관점에서 본 가부장제-국가사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종의 관점에서 보면 생존경쟁에서 권력경쟁으로 삶의 방식을 전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력경쟁이라는 것은 종과 종간의 생존경쟁에서 호모사피엔스가 만물의 영장이 된 뒤, 종 내부의 경쟁으로 삶의 특징을 전환했다는 뜻이다.

종 내부의 경쟁이란 바로 집단 및 권력경쟁을 뜻한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면서 동시에 고도의 정치적 동물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은 계층구조(hierarchy)를 통해 국가를 등장시켰다는 뜻이다. 인간은 국가형성을 통해 그 구성원이 되면서 자신의 삶과 안전과 행복을 보장받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일까. 여기서 국가론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류학적으로 볼 때 국가는 가부장제의 산물이다. 가부장제는 실은 원시공동체-모계사회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발달해온 제도이다. 인류는 성공적인 적응과 함께 인구(population)를 증가시키면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국가라는 제도를 발달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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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국가사회는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서 폭력과 전쟁을 행사하는 등 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국가보다 훌륭한 ‘법적 집단(corporate)’은 없는 것 같다. 모든 권력은 법과 함께 강제력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다. 때로는 국가는 정당한 폭력을 행사할 때도 있다. 군대가 국가의 구성요건 중 첫째인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날 국가권력의 남용이나 폭력성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삼권분립을 비롯하여 권력을 분산하고 방어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오늘날 인권사상이나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있지만 여전히 권력의 부산물로서의 권력횡포나 부정부패, 관료주의, 그리고 정당과 국회의원, 법조인, 기업인 등의 권력카르텔들을 막기 어려운 실정에 있다. 이런 현상들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귀족들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익부 빈익빈을 비롯 자유-자본주의의 문제점 때문에 생겨난 공산사회주의 운동은 평등을 정치적 슬로건으로 출발하였지만 결국 공산당귀족을 만들면서 국민들은 가난에 쪼들리게 하는 전체주의로 본색을 드러냈다. 마르크시즘은 거짓 인권, 거짓 민주, 거짓 평등, 거짓 지상천국으로 판명이 났다. 마르크시즘은 종교와 과학이 잘못 교차된 이데올로기이다. 종교의 자리에 과학을 대입함으로써 ‘무신론(無神論)’이 되었고, 반대로 과학의 자리에 ‘유물론(唯物論)’이라는 관념(이데올로기)을 대입함으로써 ‘무신론적(無神論的) 종교’가 되었다.

마르크시즘은 처음부터 인민(민중)들에게 평등을 내세우는 무신론적 종교이고, 과학을 가장한 거짓종교였다. 자본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산성부족에 직면한 사회주의는 빈곤의 하향평준화에 몰릴 수밖에 없다. 인간의 욕망을 부정한 사회주의는 계급투쟁과 함께 평등을 정의로 내세웠지만 자기모순에 빠져 더욱 심한 계급구조를 드러냈다. 마르크시즘은 종교(표현형은 경제이지만 이면형은 종교)이고, 자본주의는 경제(표현형은 자유이지만 이면형은 경제)이다.

자본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산성부족에 직면한 사회주의는 빈곤의 하향평준화에 몰리고 있다. 인간의 욕망을 부정한 사회주의는 계급투쟁과 함께 평등을 정의로 내세웠지만 자기모순에 빠져 더욱 심한 계급구조를 드러냈다.

인류는 근대에 1, 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자유-자본주의와 공산-사회주의로 갈라져서 냉전구조를 이루면서 살아왔다. 한동안 지구촌을 들먹이면서 세계주의를 주장하던 인류는 다시 미소(美蘇) 대신에 미중(美中) 패권경쟁으로 신(新)냉전구조로 들어갔다. 이는 인간의 역사가 쉽게 패권경쟁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세계사는 제국주의의 역사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자유-자본주의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사회주의보다는 상대적으로 좋은 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유-자본의의 장점은 마르크시즘의 비판을 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공산-사회주의는 비판세력을 용인할 수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 자유-자본주의 진영의 철학자들은 대개 마르크시스트이지만 그들의 활동은 크게 제약을 받지 않고 있으면서 자본주의의 자정(自淨)작용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자체비판을 불허할 뿐만 아니라 검열을 함으로써 하나같이 전체주의화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하나같이 공산당 일당독재정치를 하고 있으면서 공산당귀족화를 통해 역사적 후퇴를 하고 있다. 말로만 민주와 평등과 지상천국을 외치면서 자기기만에 빠져있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기만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비극적인 것이다. 사회주의로 인해 지금까지 수많은 인명이 전쟁과 정치적 탄압으로 살상되었다. 구소련이 공산종주국으로서 연방 내 반체제인사들과 동유럽위성국에 벌인 반인륜적 만행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물론 한국전쟁도 소련이 저지른 만행에 속한다.

자유는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하는 반면 평등은 계산적 평등에 골몰한 나머지 분노와 질투에 빠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주의는 ‘축복의 굿판’을 펼치고 있지만 사회주의는 ‘저주의 굿판’을 벌이고 있다. 어느 쪽이 미래에 희망을 주는지는 물어볼 것도 없다. 자유는 열린 국가, 열린 종교,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반면에 평등은 닫힌 국가, 닫힌 종교, 닫힌 사회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열린사회는 자기반성, 자기개혁을 통해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반면 닫힌 사회는 자신만이 정의이고, 공정하다는 아집과 이념무장 때문에 사회를 분열과 저주로 몰아넣은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사회를 ‘저주하는 집단’으로 몰아가기 쉽다. 흔히 진보-좌파들은 자신의 텍스트 속에서 현실을 진단하고, 혁명하려고 함으로써 사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는다.

공산사회주의운동의 역사를 일별해 보면, 기존의 권력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반(反)운동, 예컨대 개혁과 혁명운동은 비판의 목소리는 높지만 정작 자신이 권력을 잡으면 또다시 기존권력의 부조리와 모순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그래서 극단적 이상주의, 예컨대 공산사회주의운동과 문화해체주의운동 등은 도리어 인류의 정치-문화구조를 파괴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계급투쟁과 문화해체주의는 스스로의 모순과 역(逆)차별에 빠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가부장-국가사회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다른 제도를 주장하면 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는 게 인류문명이 당면한 현실이다. 문제는 권력이 폭력의 양상으로 바뀌는 것을 경계하고, 그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제도적 장치마련을 비롯하여 사회균형의 달성을 위한 사회적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자유-자본주의를 기조로 하면서 사회적 이상을 점진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해서 실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요컨대 부익부빈익빈의 해소, 경제적 평등의 강화, 인권의 신장, 복지증진, 환경보호 등이 그것이다. 평등을 위해 자유를 희생한다거나 빈부격차의 해소를 위해 기업의 생산성을 무시한다거나 인권을 빌미로 반인권을, 민주를 빌미로 반민주를 행하는 것 등은 문제이다. 평등과 정의를 위해 역차별이 자행되는 것 등은 경계하여야 한다.

인간의 삶에는 항상 규칙(원리, 법칙, 기준)과 규범(윤리)이 있어야 한다. 종래의 규칙이나 규범이 삶에 맞지 않을 때는 바꿀지라도 규칙, 규범 자체를 부정하거나 한꺼번에 무너뜨리면 삶은 더욱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국가나 정부의 정책이 잘못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정부주의가 되면 인간이 발붙이고 살 땅을 잃어버리는 지경에 처하게 된다.

공산사회주의나 해체주의는 자칫 잘못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규칙이나 규범 자체를 부정하는 감정이나 논리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다. 계급투쟁이나 문화의 규범해체는 가부장제 혹은 문명의 결정론에 대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도리어 더 급진적인 결정론으로 사회를 몰아갈 위험이 있다. 해체주의 결정론이나 결정론적 해체주의가 그것이다. 해체는 구성의 이면이다. 구성을 부정하는 해체주의는 비판을 위한 비판, 철학의 문학화, 철학의 수사학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철학자들은 비판을 주업으로 하지만 비판을 하다보면 비판하는 자신이 정의인양 독선에 빠지기 쉽고, 자신도 모르게 관성에 의해서 비판이 아니라 기존질서의 파괴를 목적으로 경우에 빠지게 된다. 아울러 철학과 사회를 새롭게 구성하고 구축하는 데는 등한하게 되고, 심하게는 기존질서를 저주하게 된다. 철학자들은 항상 자신의 도그마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철학자들의 상당수가 좌파적 사유와 도그마에 물드는 까닭은 일종의 직업병에 가까운 것이다.

인간은 남을 축복하는 ‘축복의 인간’이 될 수도 있고, 남을 저주하는 ‘저주의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신을 축복할 수도 있고, 저주할 수도 있다. 왜 그러느냐고 묻지 말고, 인간은 그런 존재이다. 인간은 경계선상의 존재이고, 왕래하는 존재이고, 반항(反抗)하는 존재이고, 반전(反轉)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세계-내-존재이고, 세계-밖-존재이다.

삶은 항상 무엇의 밖(Ex-istence)에 있다. 앎은 항상 무엇의 안(essence)에 있다. 동시에 삶은 항상 나의 밖에 있다. 앎은 항상 앎의 밖을 요구하고 있다. 앎과 삶은 변증과 순환의 관계에 있다. 이것은 삶이 의미와 무의미의 연속임을 말한다. 부조리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삶이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선택만이 가능하고 말한다. “삶이 부조리하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여야한다.”

그러나 인간은 의미를 먹고사는 존재이고, 비록 불완전하다하더라도 하나의 의미가 없어지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나서는 존재이다.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선택 대신에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서는 것도 강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서양철학은 근대까지 자연의 생성을 존재로 해석해왔다. 즉 자연의 생성을 존재의 유무(有無)로 해석했다. 서양철학의 후기근대는 존재의 유무(有無)를 무유(無有)로 해석하는 반전(反轉)을 했다. 여기서 유무이든, 무유이든 현상학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다. 무유의 경우 아직 현상학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무(無)가 공(空)으로 해석되어야 완전한 존재론이 될 수 있다. 공은 유무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때의 공은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반야(般若)의 공(空)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무유(無有)의 무(無)로서 아직도 현상학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의 존재현상학을 거쳐 박정진의 존재론적 존재론, 일반성의 철학이 되어야 존재론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생성생멸을 존재유무로 해석하는 자체가 이미 자연으로서의(자연으로 태어난) 인간이 스스로(자연)를 대상으로 보는 출발점이고, 이것은 바로 인간이 의식적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의식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연을 대상으로 보게 되는 동시에 스스로는 주체가 된다.

주체가 설정되는 순간 자연은 대상으로 전락하면 나아가서 물질이 된다. 왜냐하면 자연을 대상으로 규정하는 주체를 인간은 이미 정신이라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의 철학은 여러 경로를 거치겠지만 결론은 유물론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원초적인 역설을 만나게 된다. 본래 있는 존재인 자연을 물질(유물)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바로 정신(유심)이다. 물질(존재자)이 물질(존재자)을 규정할 수는 없다.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물질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우리는 또다시 현상학의 치명적인 역설 혹은 이중성 혹은 왕래성을 보게 된다.

인간은 의식적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현상학적 존재이다. 의식은 대상의식에서 출발하여 자기의식으로 돌아온다. 자기의식은 다시 대상의식으로 나아간다. 의식은 왕래와 반복을 거듭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현상학의 요체이다. 더욱이 무의식을 무의식이라고 규정한 것도 의식이다. 그러한 점에서 무의식도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식이 있는 동물은 결국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가 있는 곳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천동설이 지동설에 앞서 있었던 것은 의식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는 당연과 결과이다. 물론 천동설은 객관성을 기초로 하는 과학에 의해 지동설로 바뀌었지만 의식은 언제나 지구가 중심이 되는(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 되는) 천동설적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의식은 언제나 대상의식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자의식이 형성됨을 특징으로 한다.

자의식은 대상의식의 당연한 산물이다. 인간이 자의식(반성적 의식) 혹은 인식(인식주체)의 동물이 되는 것은 의식의 동물로서는 당연한 귀결이다. 천동설이 지동설이 된 것도 실은 ‘의식의 왕래성’에 기인한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 탄생한 것도 의식의 발전의 당연한 귀결이다.

의식과 대상은 엄밀하게 나눌 수 없다. 의식자체가 이미 대상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상학에서 초월적 주체와 영원한 대상은 항상 평행선은 그을 수밖에 없고, 어느 지점에서 교차하는 순간, 하나(기원=순간=영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반전(反轉)이 일어나는 것이 현상학이다. 이것을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하든, ‘현상학적인 회귀’라고 하든, 그 내용은 같은 것이다.

주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미 주체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초월적 주관이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초월은 이미 대상(존재)과는 다른 입장에 서게 되며, 이는 초월적 영혼, 혹은 초월적 신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은 내 속에 있는 신이며, 신은 내 밖에 있는 영혼과 같은 것이다. 영혼과 신은 이미 서로 왕래하는 관계에 있는 단어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행위 자체에 이미 신적인 위치가 내재해 있다. 그래서 이데아(Idea)가 신(God)과 같은 동의어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니체의 말대로 신은 대중적 플라토니즘인 것이다.

초월적 주체는 영원한 대상을 짝으로 할 수밖에 없다. 주체가 계속해서 초월성을 유지하려면 대상은 영원이 대상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둘은 잠시 분열되었을 뿐, 본래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하나로 통합될 수밖에 없다. 헤겔의 주관-객관적 절대와 같은 것이다. 인간과 신, 신과 인간은 왕래할 수밖에 없고, 둘은 현상학적 인과론을 벗어나기 위해 원(순환)을 그릴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서는 심물(心物)은 본래 하나인 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자연(존재)은 항상 생각(존재자)의 밖에 있다. 자연은 스스로 새롭게 변하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 새롭게 변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 신은 불완전한 신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불완전한 인간과 같은 것이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인간이 자기 꾀(지혜)에 넘어가는 것과 같다. 진정한 신이 있다면 인간이 있다고 해서 있고, 없다고 해서 없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항상 신을 부르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다. 부른다는 것은 이미 부정을 포함하고 있고, 부정은 이미 부를 것을 예약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주체라는 말은 자연에 대한 주체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여성에 대해 남성적 입장을 우선하는 말이기도 하다. 왜 인간은 하나님아버지(God the father)라고 말하는가. 왜 하나님어머니는 안 되는가. 이러한 이상한 문명적 편견이거나 습속에 대해 별로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 인류는 옛날 옛적 모계사회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점(觀點)이라는 것은 이미 맹점(盲點)을 안고 있다. 가부장-국가사회 이전 모계사회에서는 신도 여성이었고, 태양도 여성이었다. 왜냐하면 생성·변화하는 자연에 가까운 것이, 자연의 속성을 더 가진 것이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류문화가 급속하게 가부장-국가사회가 된 것은 인구의 증가와 함께 그 인구를 보호하고 먹여살리는 일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생존경쟁에서 권력경쟁으로 들어간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영속과 안녕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집단과 집단 간의 권력경쟁은 전쟁을 불러왔고, 그 전쟁으로 인해 전사로서의 남자가 더 중요하게 되었으며, 전시체제는 가부장-국가사회를 필연적으로 도모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유대기독교의 절대유일신은 가부장사회에 대한 요구와 압력의 강도가 높은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다.

권력경쟁은 도덕을 강요하고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권력자들은 계층(계급)의 위계와 위세를 보여주어야 때문이다. 왕과 귀족(상류층)들은 항상 사치와 풍요를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자신의 지위를 피지배자(중·하류층)에게 수시로 확인시키고 과시하는 것을 일삼는다. 이리한 지배의 행태는 원시부족, 고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대에 이르러 인간은 과학기술의 힘 덕택에 더욱 막강하게 되었다. 전지전능한 존재는 이제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간신(人間神)이다.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힘(권력)이 더욱 강력해진 인간은 신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이것이 현대의 무신론적 분위기이다. 과학기술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는 동서 문명을 막론하고 물신숭배에 빠져있다. 자본주의는 무신-유물론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물신숭배에 빠져있다고 보면 틀리지 않다.

인류학자들이 원시미개사회를 현지조사하면서 원주민들이 자연물을 숭배하는 것을 보고 물신숭배(物神崇拜)를 한다고 조롱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물신숭배가 아니라 신물숭배(神物崇拜)를 했다고 해야 한다. 원주민들은 자연물을 신처럼 영혼·정령을 가진 존재로 숭배했던 것이다. 도리어 과하기술시대에 사는 현대인이야말로 진정으로 물질을 신(神)으로 섬기는 물신숭배자들이다.

인간신(人間神)과 신인간(神人間)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신은 과학기술시대에 엄청난 지식과 능력을 가짐으로써 못할 것이 없는 전지전능의 신의 자리에 올라간 인간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신인간은 처음부터 신령스러움을 가진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신은 신을 배반하거나 무신론자가 될 수 있다면 신인간은 처음부터 신적인 요소를 내재한 인간을 말한다.

옛날에는 신과 인간이 동거하는 관계에 있었다면 현대는 신의 자리에 인간이 대체된 것을 의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라는 단순한 문장은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데카르트는 ‘신존재증명’을 한 철학자이지만 그의 코키토는 이미 신의 해체의 시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에 따라 태초의 원인으로서의 신, 즉 원인적 동일성은 사라졌다. 신이 없이도 인간은 천지창조를 과학적으로 즉, ‘빅뱅-블랙홀’로 해석한다.

근대는 신의 해체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변증법도 해체의 연장선에 있다. 정(正)에 반(反)이 있다는 것은 이미 해체를 의미한다. 그 뒤에 오는 무신론(無神論)-유물론(唯物論)은 물론이고, 신의 죽음선언 등은 해체의 연장선에 있다. 근대의 정신을 살펴보면 여러 곳에서 해체의 징후가 발견된다. 과학의 등장은 무엇보다도 중세의 해체일 뿐 아니라 신의 해체의 신호탄이다. 해체가 니체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해체는 후기근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근대의 출발에서 이미 엿볼 수 있다. 근대 속에 이미 후기근대가 있고, 후기근대 속에 근대가 있는 것이다. 근대-후기근대는 따라서 물고물리는 관계에 있다.

해체론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구성의 해체이기 때문이다. 신을 앞세웠다가 나를 앞세우면 그것이 신의 해체가 된다. 해체철학은 실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노골적으로 폭로된 것이 바로 니체였을 따름이다. 이것이 근대의 ‘나’가 중세의 ‘신’을 대체한 이유이다. 신과 내가 실은 하나라면 둘러치나 매치나 마찬가지이다. 세계를 유시유종(有始有終)으로 말하든,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말하든 하나의 궤도에 있다. 구성은 해체를, 해체는 구성을 서로 내재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 주체와 대상, 의식과 무의식 등 모든 대립적인 것은 이중성(이중연쇄, 이중긍정, 이중부정)의 관계에 있다. 이때의 이중성은 불분명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중성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설정한 이분법의 반대급부로 형성되며, 따라서 이분법의 반사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분법의 출발점은 어디일까. 아마도 가부장-국가사회, 다른 말로 문명의 남성성, 팰러스가 만들어낸 그림자일 것이다. 그러나 문화의 바탕에는 자연(본능, 섹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남성의 전유물이다. 생성(생멸)을 존재(유무)로 설명하는 자체가 이미 남성적 시각이 투사된 결과이다. 인간의 역사는 가부장-국가사회 이후 이미 오래된 남성중심의 역사를 전개해왔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남성중심의 사유를 문명전반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은 더욱 더 그것을 증진시켜왔다. 존재라는 말 자체가 이미 고정불변의 어떤 존재(사물) 혹은 신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인식주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자연과 여성을 대상으로 보는 존재자적 사유가 침투되어있다.

그렇다면 여성적 철학은 무엇인가. 크게 보면 남성적 철학이 ‘존재(Being)의 철학’이라면 여성적 철학은 ‘생성(becoming)의 철학’이다. 남성철학이 구성주의철학의 편이라면 여성철학은 존재론철학(해체주의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 여성적 철학이 생성의 철학인 것은 무엇보다도 여성이 ‘출산’을 담당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며, 기초적인 소통도구인 언어를 습득하게 하여 사회로 내보내까지 가정에서의 성장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의 신체적-전통적 역할과 관련이 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자연에 밀착되어 있는 존재이다. 남성적 철학은 문명을 주도하면서 자연과 멀어진 게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접하는 있는 모든 철학은 남성철학이다. 남성은 여성을 정복하면서 주인이 된다. 여자들은 자신의 남편을 ‘주인’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여성은 아이를 낳으면 스스로 아이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 아이는 또 다른 주인이다. 가족이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구성되었는지도 모른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가정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다. 이것을 사회에 확대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된다.

인간은 두뇌의 동물인 만큼 세뇌적(洗腦的)이고, 자기도취적이다. 그래서 한번 세뇌되면 그것에 매달리게 된다. 이것이 폭넓은 의미에서 빙의(憑依)이다. 빙의는 글자그대로 뇌가 다른 가상(假想)의 옷을 입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 적응하는 한편 초자연을 상상하고 가상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적 존재로서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러한 인간을 두고 의식적 존재라고 말한다.

죽음 이후에 천국과 극락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현상학적인 인간의 발상,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일이다. 현상학은 존재, 즉 있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의 없음도 있음을 전제로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있음을 죽음 너머에도 적용하고픈 것이 인간현존재이다. 비록 신과 부처는 현상학적인 발상이고, 그것이 인간의 특성이자 한계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 초자연적인 세계인 영성과 양심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된다. 현대인의 비극은 도리어 신(神)과 영성(靈性)에 대해 질문하는 자체를 잃어버리거나 포기한 데서 비롯된다. 가부장사회는 특히 자연을 지배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표상하고 있다.

남성적 철학은 문명을 주도하면서 자연과 멀어진 게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접하는 있는 모든 철학은 남성철학이다. 남성철학은 자연을 지배하고 권력(힘)을 지향하는 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남성철학은 ‘대뇌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대뇌의 철학은 자신의 뇌가 신체의 일부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도착적이고, 그 잊어버리는 지점에서 철학을 출발하기도 한다. 이데아라는 것은 바로 대뇌의 생각(Idea)이다. 자연을 이데아의 모방이라고 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철학이다.

남성철학은 자연을 이데아에 종속시키는 특징을 보인다. 권력의 엄격한 보수성에 비하면 문명에 있어서 새로운 창조라는 것은 도리어 매우 생성적이고 여성적이기까지 하다. 남성중심의 가부장문명은 여성의 생성(생성의 자연적 특성)을 신(남성)의 창조(존재)로 바꾸었다.

인간의 창조는 역사에서 여성적 히스테리를 닮았다. 기존의 팰러스(Phallus)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남성은 줄곧 종이(평면)에 책을 써왔고, 여성은 거울을 보고 얼굴에 화장을 해왔다. 신은 태초에 천지를 만든 창조자였지만 인간은 최후에 인생을 예술로 만드는 예술가이다. 시인과 음악가, 예술가야말로 살아있는 신이 되는 것이 존재론인 셈이다. 존재론은 시간과 현상학을 무(無)로 만드는 철학이다. 해체론은 변증법(현상학)의 부정적 차연(差延)이고, 존재론(하이데거)의 현상학적인 차원의 카피(copy)이다.

해체주의철학을 인류문명론의 입장에서 말하면 가부장-국가사회의 철학에 속했던 일군의 서양철학자들이 마치 자신들은 여성성(자연성, 민중성)을 토대로 철학을 하는 것처럼 흉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잠언 중에서 “철학이 여성이었다면”이라는 말은 이런 경향을 상징적으로 표출하는 구절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욕망은 끝이 없다. 진리에 대한 남성의 욕망도 끝이 없다. 니체의 분신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여인이여, 내게 그 작은 진리를 다오!” 그러자 그 늙은 여인은 말했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아라!”(『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



박정진 철학박사, 문화인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