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주의를 해체하다]3-3. 새로운 정신으로서의 신체적 존재론

박정진
2026-08-26

[해체주의를 해체하다]


3-3. 새로운 정신으로서의 신체적 존재론

 

    신체적 존재론은 신체적 존재를 회복하지 않으면 인간이 기계가 되고야말 것이라는 불안, 스스로 기계의 숭배자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은 죽음에 대한 실존적 불안에 못지않은 불안이다. 그렇긴 하지만 신체적 존재론이 본래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엄과 의미를 주장하는 것에 그치고, 신체의 생성적 의미와 함께 역사의 단계마다에서 새로운 역사적 생산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해체론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신체적 존재론은 시대정신에 부응하면서 존재로부터 신체의 새로운 개념과 정신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신체적 존재론의 역설적인 의미이다. 존재로부터 떠오른(솟아오른) 개념은 시작(beginning)과 끝(ending)의 성격이 아니라 새로운 기원(origin)을 의미한다. 새로운 기원은 기존의 것을 판단정지(epoché)하는 것을 통해 신기원(epoch)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기원은 존재의 밑바닥에 도달한 자가 떠올리는 내재적 초월, 혹은 끊임없이 초월을 향해 지향을 감행한 초월적 내재에 맞닿아있는 것이다. 이때의 초월과 내재는 ‘천지(天地)의 순환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역사의 영원한 타자(object)’일 수도 있다. 이것은 집단존재의 역사적인(시간적인) 것인 동시에 개인존재의 역사운명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때의 개인은 집단을 위한 희생이 될 수도 있다. 인류의 성인(聖人)들은 그 좋은 예이다. 인간의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영장성은 바로 성인을 탄생시키고, 그 성인을 희생물로 하늘의 제단에 바침으로써 보다 많은 집단과 국가의 생존을 보장받는 의식(儀式)을 행한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탄생을 무시하거나 그것에 대해 무지하면 개인이든, 집단이든 망할 수밖에 없다. 성인들은 신체를 타고 나면서도 그것을 육체로 한정짓지 않는(육체에 갇히지 않는) 신체적 존재론의 산 증인이다.

    신기원은 매우 성스러운 것이다. 기독교의 천지창조야말로 신기원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인류는 그런 신기원을 발견했기 때문에 집단의 역사에서, 혹은 개인의 존재사에서 작은 시작과 끝을 연출하는 드라마를 계속해서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 각자는 작은 신이 되어 일생이라는 각자의 시작과 끝을 쓰고 있다. 그것이 바로 보통사람들의 삶의 드라마이다.

    오늘날 신체와 관련한 성스러운 개념과 정신은 신체가 어떻게 인류의 평화에 기여할 것인가를 둘러싼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전쟁무예에서 출발한 스포츠와 무예가 어떻게 인류의 평화에 기여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평화에의 관심이 높아진다는 것은 역으로 공포의 전쟁(핵전쟁)의 분위기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의 반증이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그것은 아직도 살아남은, 존재의 저 깊은 곳에 감추어진 생존의 본능일까.



1a67ab59705ba.jpg



    신체적 존재론의 인류평화에의 기여는 보편성의 철학 대(對) 일반성의 철학, 개념철학 대 구체철학, 남성철학 대 여성철학, 과학철학 대 생태철학 등 철학의 다양한 이원대립항들이 전쟁(경쟁) 대신에 평화(공존)를 중심으로 새롭게 정리되어야 함을 뜻한다. 이는 과학기술무기의 발달로 인해 인류가 이제 더 이상 패권경쟁을 하면 공멸할 수도 있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 즉 인류멸종을 지연시킨다는 의미맥락상에 위치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오늘날 철학의 시대정신이다.

    오늘날 스포츠나 무예의 기본정신은 상대(적)를 완전히 절멸시켜서 죽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나 무예는 일종의 ‘게임과 놀이’로서, 혹은 ‘신체의 예술’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의미와 함께 인간의 신체를 존재론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한편 생존경쟁과 권력경쟁으로 증대된 인간의 투쟁본능을 무마시키고 세련되게 하는 것을 통해 공존과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함이다. 오늘날 스포츠와 무예는 일종의 ‘평화의 의례’로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올림픽과 월드컵은 이미 대표적인 성공사례이다(무예올림픽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철학이 인간과 만물의 ‘신체의 존재성’에 도달하지 못한 까닭은 인간이 신체적 존재로서 스스로 내관(內觀)할 수 없었고, 객관이라는 미명하에 자기기만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인간현존재는 존재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인간중심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인간의 존재에 대한 실체적 이해는 객관적인 세계로서의 물질과 기계, 즉 유물론과 과학기술의 세계로 확장되었을 뿐,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도리어 문외한이 되었고, 그것으로부터 소외되었을 뿐이다. 서양철학은 생성에 관한 한 구제불능이다.

    신체적 존재론이 몸을 주장하면서 마음, 즉 새로운 정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역사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종래에 정신과 육체를 나누는 태도와 방식으로 신체적 존재론을 생각한다면 육체만이 존재라는 어처구니없는 일에 빠지게 된다. 신체적 존재론은 새로운 정신을 창달함으로써 역사적 의무를 다하게 된다.

    여기서 새로운 정신은 ‘마음의 혁명’을 의미한다. 몸과 마음은 본래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도 오늘날 현대인은 서양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과 세계에 대한 이분법적인 인식태도로 인해 심신을 분리해왔다. 심신이원론을 벗어나서 말하면 몸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고, 마음의 변화는 몸의 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새로운 정신은 몸 전체를 참여시키는 가운데 형성된 덕성을 의미한다. 몸 전체와 분리된 지식과 지성은 체화(소화)되지 않는 가상존재일 뿐이다.

    신체적 존재론은 무엇보다도 심신일원론(心身一元論)의 태도에서 출발하지만, 새로운 시대정신과 마음의 중심을 개개인이 온전하게 형성하게 함으로써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것을 지향한다. 그런 점에서 신체적 존재론은 종래의 역사적인 실천이나 현상학적인 삶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땅과 그 땅에서 전개된 역사와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이성과 지식과 개인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신과 신화와 공존을 환기시키는 것이야말로 구원이 되고, 치유가 될 수 있다. 인간은 기술이 발달할수록 반대로 신화와 함께 상징적 삶을 회복할 것을 필요로 한다. 신화와 상징과 신바람과 정령(spirit)이 없는 삶을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삶의 도처에서 이용과 이익만을 찾고 의리와 겸손을 찾지 않는다면 삶을 머지않아 지옥이 될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너무 오래 동안 지(知)-덕(德)-체(體)와 진(眞)-선(善)-미(美)를 모토로 삶을 영위해왔다. 그리스를 비롯해서 인류의 모든 문화가 보편적인 이상으로서 이 덕목을 채택해왔다. 만약 지덕체나 진선미가 우선순위로 받아들인다면 지(知)와 진(眞)은 나머지 것을 지배하게 된다. 인류의 문명은 그동안 너무 지배의 논리에 의해 움직인 것 같다. 지식사회인 현대는 신체에 가깝거나 신체에 속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생략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신체 속에 머리가 있듯이 이 문제도 체-덕-지, 미-선-진으로 역전시켜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존재론적인 방식이고, 신체적 존재론의 방식이다. 구체적인 데서 추상적인 것으로, 신체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존재론적 기반 위에서 역사적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신체와 언어에 의해 문화를 계승시키는 존재이다.

    신체는 존재이고 언어는 문화이다. 우리는 신체 없는 자신을 생각할 수 없다. 신체의 기반 위해서 언어도 성립되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본래존재가 아니다. 신체에서 문화를 바라보는 것은 매우 발생학적인-존재론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적 존재론에 충실한 삶의 모습을 예로 들어보자.

    신체적 존재론의 삶은 첫째, 항상 자신의 몸 전체로 살아간다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내 몸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내 몸(신체)의 연장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내 몸의 바탕이 되는 바탕존재(본래존재)다. 그런 점에서 자연은 내 몸과 떨어지래야 떨어질 수 없는 일심동체이다.

    둘째, 자신이 처한 ‘지금 여기’가 내 존재의 자리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운명애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존재는 본래 자신(개인)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천지부모(天地父母)로부터 선물(은혜)를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가 태초이고 종말이라는 실존적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셋째, 신바람 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신바람이 나려면 세상을 긍정하고, 세상을 믿고, 세상에 적극적으로 도전해야 한다. 신바람이 나는 삶은 기쁨의 삶이고, 재미있는 삶이다. 재미있는 삶을 위해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삶은 설사 고통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힘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 신의 바람(風), 이것이 풍류도이다. 신바람이 성령(기독교)이고, 깨달음(불교)이고, 접신(샤머니즘)이고, 하늘로 돌아감(신선교)이다.

    넷째, 신바람을 생활적으로 설명하면 바로 항상 기운이 넘치는 ‘기운생동의 삶’을 의미한다. 내 삶이 지금 기운생동하면 신이 함께 하는 ‘신이 살아있는 삶’이다. 신바람 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신이 죽어버린 삶’이다.

    다섯째, 기운생동하는 삶은 바로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삶이다. 오늘날 휘트니스(fitness) 운동은 특정운동에 최적화된 몸을 만들기 위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신일체, 문무겸전, 문무균형의 인간을 형성하기 위한 수신(修身)체계가 되어야 한다. 뷰티(beauty)와 휘트니스(fitness)의 합성어인 뷰티니스(beautiness)는 미래의 모습이다.

    여섯째, 하루하루의 삶을 예술작품을 하는 태도로 만나야 한다. 삶을 예술한다는 기분과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말하자면 내 삶은 최종적으로 나의 예술작품인 셈이다. 예술하는 마음은 존재의 비밀스런 장소로 들어가는 의식(儀式)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은 모든 사람의 취미(趣味)가 되어야 한다.

    일곱째, 세계(세상)가 내 앞에 펼쳐져 있지만, 결국 나는 세계를 내 안의 삶으로 전환시키고, 보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세계-내-존재를 자기-내-존재로 만드는 삶이라고 한다. 여기에 이르면 내가 세계이고, 세계가 내가 된다.

    여덟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야 한다. 죽음에 임해서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은 본래 생멸의 연속에 불과하며, 생멸의 과정의 한 점이 바로 죽음이다. 종교적 믿음이나 깨달음이라는 것도 생멸에 대한 인간의 태도이다.

    아홉째, 노래하고 춤추고 기도하는 삶이야말로 신체적 존재론의 총화이며, 총체적 인간상이다. 어린아이의 마음이야말로 자유자재의 해탈한 마음이다.

    이상을 간추려 보면 신체적 존재론의 삶은 다음과 같다. 먼저 종교적으로는 성령이 충만한 삶이다. 신체적으로는 기운이 생동하는 삶이다. 기분으로는 신바람이 나는 삶이다. 생활로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으로 가득 찬 삶이다. 시간적으로는 현재(지금, 여기)에 매진하는 삶이다. 철학적으로는 부정의 철학보다는 긍정의 철학을 선호하는 삶이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삶이다. 종합적으로는 생활이 예술인 삶이다.

    인류의 삶을 관통해서 크게 보면, 종교에서 예술과 학문을 하던 시기가 있었고, 학문에서 종교와 예술을 찾던 시기가 있었다면, 미래는 예술에서 종교와 학문을 찾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정신으로서의 마음의 혁명은 ‘낮은 데로 임하는 사랑의 정신’(“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과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자비의 마음’이다. 결국 예수부처, 부처예수의 마음이다. 예수부처, 부처예수의 마음은 공자의 수신평천하(修身平天下)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필자는 이러한 새로운 시대정신을 자신(自身), 자신(自信), 자신(自新), 자신(自神)으로 요약한 적이 있다.

    신체적 존재론을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존엄성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시대의 책무(mission)이다. 필자가 신체적 존재론을 주장한 것은 『심정평화 효정평화』(2018년)를 쓸 무렵이다. 무엇보다도 신체를 육체(물질)로 비하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였고, 일반적인 존재의 세계를 보편화·추상화해서 과학기술의 세계로 환원시켜서 보는 타성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인간의 심정세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심정은 이성과 지성에 반대되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심정은 어쩌면 세계에 대한 감정적·정서적 혹은 직관적 접근의 개념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시간과 공간이 감성적 직관의 산물인 것과 같다. 인간이면 누구나 심정을 갖기 마련이다.



박정진 문화인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