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주의를 해체하다]
4. 데리다의 문자학(grammatology)
1. 데리다의 문자학과 박정진의 소리철학(phonology)
철학이 나와 너의 문제, 주체와 대상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일은 독일에서는 니체, 하이데거를 비롯한 존재론 철학에 의해, 프랑스에서는 레비스토로스, 데리다를 비롯한 구조주의·해체주의 철학에 의해, 영국에서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의해 이끌어졌다.
아시다시피 데리다는 프랑스의 후기근대 철학을 이끌어온 세계적인 철학자이다. 해체주의 철학은 구조주의 철학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는 쌍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구조가 없으면 해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조언어학의 절대적인 이해와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해체라는 말은 그 이전에 축조(건축)가 있기 때문에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축조가 없었던 것과는 다르다. 해체는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기존의 것을 두고 가타부타하는 것이지, 새로운 철학의 수립과는 다르다. 좀 더 이 말을 진전하면 해체는 다음에 오는 무엇을 위해서 사전 정지작업을 하는 것이기도 하고 예축적(豫祝的) 작업이기도 하다. 해체는 평지(平地)가 아니다.

해체는 평지(대지)의 텅 빈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 자연의 소리를 들으려는 사전 몸짓인지도 모른다. 해체는 그래서 하늘의 영감(靈感)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대지를 통해서 전해오는 교감, 대지의 네트워킹(networking)을 기다리고 있다. 지하는 더 이상 지옥이 아니라 생명이 움트는 장소이고, 혹은 생명을 위한 지진과 화산이 일어나는 지질과 같고, 그것으로 인해 생성된 동굴을 거느린 화산 동굴계와 같다. 해체는 또한 수평선으로 상징되는 바다의 심연과 같다. 바다는 항상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 파도치고, 해일이 일어나는 곳이다.
해체철학은 결국 주로 기존의 텍스트를 읽는 방식을 택한다. 말하자면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된다. 텍스트 분석에는 구조언어학의 절대적인 ‘도구적 기여’가 한몫하고 있다. 구조언어학은 철학사적으로 간단하게 말하면 시각에 의해서 ‘주체-대상’의 관점에서 바라보던 사물에 대한 인식을 주체의 부분에 언어를 대입하고, 언어의 ‘시니피앙(signifiant: 能記: 記表: Sa), 시니피에(signifié: 所記: 記意: Se)’를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러한 전환의 가장 큰 핵심은 바로 사물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서 객관성 혹은 실재라는 것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를 제기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사물을 대상으로 보는 데에 있어서 언어(기호)의 두 가지 관점에 의해서 사물을 보는 것이 된다. 두 가지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은 우선 이중적이고 애매호모하다. 구조주의는 처음부터 이중성과 애매모호함을 가지고 출발했던 셈이다.
여기에 언어의 밖으로 사물을 지시하려는 외연성(denotation)과 안으로 의미를 함축하려는 내포성(connotation), 그리고 의미를 원천적으로 있게 하는 메타포(metaphor)와 그 의미를 고정시키려는 메타니미(metonymy)가 더해지면 언어학과 철학은 참으로 난해한 것이 된다. 언어를 어떤 동물보다 많이 사용하는 인간은 언어의 인습(因習, 因襲)에 빠져 마치 사물이 있고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있고 사물이 있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주객이 전도되게 사는 것이 인간이 문명이라는 것이다.
유인원을 비롯하여 동물이 사용하는 간단한 언어를 인류학에서는 원문화(原文化, proto-culture)라고 말한다. 인간이 직립하면서 몸의 에너지가 머리 쪽으로 많이 올라가게 되고, 뇌의 용량이 증가하고, 적을 공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던 입의 이빨(송곳니)은 무디어지고, 구강구조는 보다 많은 음운을 발할 수 있게 되었다. 앞발의 기능을 하던 손은 완전히 다른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보다 많은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고, 인간은 점차 의미의 동물이 되어갔다. 인간은 이제 무엇보다도 ‘의미를 먹고 사는 동물’이 되었다.
인간은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먹이를 만들어내는 이외에도 그와 더불어 항상 의미가 따라다니게 되는 이상한(?) 동물이 되었던 셈이다. 집단적 동물인 인간은 사회적 존재임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사회는 인간에게 사회적 언어를 강요하게 되고, 이로 인해 언어가 사물을 규정하는(언어>사물) 이외에, 다시 사회가 언어를 규정하는(사회>언어) 사회적 동물이 되어갔다. 이것이 인간이 오늘에 이르게 된 진화적 과정(process)이다.
의미는 흔히 사회적 통용으로 인해서 처음부터 사회적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언어가 사회적 소통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회적 약속의 산물이며, 도구이기는 하지만 의미는 처음부터 사람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 사물이 아니다. 의미가 통용되는 것은 사람이 사회적 약속에 동의한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미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인간의 몸 안의 뇌구조에서 발생하고, 그 발생에 몸 전체가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시 말하면 몸은 의미의 발생의 발전소이다.
의미, 즉 기의는 인간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셈이다. 의미는 매우 가변적이고 이중적이고 애매모호하다. 이러한 의미의 발생의 구체적인 운반자(전류)는 바로 메타포(metaphor: 隱喩)이다. 메타포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메타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미를 먹고사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셈이다.
메타포는 의미의 여러 층을 수직적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메타포가 하나의 층에 머물러 고정되는 것을 메타니미(metonymy: 換喩)라고 한다. 메타니미 때문에 학문과 과학, 그리고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한 셈이다. 메타니미의 레벨에서도 외연성(denotation)과 내포성(connotation)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상징(symbol)의 성격 때문이다. 서양문명은 ‘언어=사물’(등식의 문명)을 실현하기 위한 문명체계이다. 이는 메타니미=시니피앙=외연성의 연결이다.
그 메타니미가 주체와 대상의 차원에 머문 것이 바로 소위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객관적이라는 것도 실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객관성을 만들어내는 대상도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상대인 주체도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발견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서양은 근대에 들어 구주언어학의 등장과 더불어 기표/기의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과 메타포/메타니미와 관계되고, 그리고 인류학의 도움으로 그것이 원시주술 시대에는 동종주술/감염주술과 대응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각 중심 문명은 기표>기의, 청각 중심 문명은 메타포>메타니미, 그리고 원시주술시대에는 동종주술>감염주술의 경향을 보였다.
서양 시각중심 문명(이미지-미술) | 기표 | 기의 | 주체-객관(의식) | 기표 우선 과학철학시대 |
동양 청각 중심 문명(소리-음악) | 메타니미 | 메타포 | 주객일체 | 메타포 우선 예술시대 |
원시 주술(magic)시대(축제-종합예술) | 감염주술 | 동종주술 | 무의식/무분별 | 동종주술 우선 신화주술시대 |
<시각중심, 청각중심, 그리고 주술>
객관적이라는 사실이 시각중심적 사고, 시각중심 문명의 산물이라는 이라는 것이 최근에 공인되었다. 말하자면 객관성은 실재가 아니다. 객관성은 사회적(집단적)으로) 약속한 정체성이고, 그 정체성 때문에 보편성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따라서 보편성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문화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절대적인 보편성이라는 것은 없다. 단지 인간이 특정의 역사적 맥락에서 가장 폭넓게 필요를 인정하는 것이 보편성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유용성에 따라 ‘필요한 정도의 선에서만’ 진리에 대한 욕망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이다.
실재나 동일성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현대 철학의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 남근이성주의에 빠져 있을 시기만 해도 실재나 동일성이 전제되었고, 그 동일성은 보편성의 다른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역사는 동일성과 보편성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권력의 거대한 연합 속에 진행된 셈이다. 지금도 역사에서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일성의 철학이 필요하다. 동일성의 철학은 존재자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바로 권력이라는 것은 바로 동일성을 기초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쌓아올리기 어려운 실체이다.
객관성, 동일성, 보편성이라는 것은 매우 가변적이고 양면적이고 중층적인 능기와 소기의 변신 속에서(의미는 능기와 소기의 역동적 중층구조의 연속이다) 최상층에서 메타니미와 만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것은 매우 표면적인 것이다. 언어의 권력자(폭력자)로서의 군림은 이 층에서 이루어진다. 이 층이 남근이성주의가 위치한 곳이다.
해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수직적 구조(건축물)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해체에는 반드시 메타포(은유)와 메타니미(환유)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특히 의미의 생산과 관련이 있는 메타포가 의미의 사회적 유통과 관련이 있는 메타니미보다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해체라는 작업이 여러 층위에서 메타포를 찾는 작업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지로 지대무외(至大無外)나 지소무내(至小無內)에 이르면 은유(隱喩)를 쓰지 않을 수 없다. 숨어 있으면서 존재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잡을 수 없기 때문에 환유(換喩)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여성성이나 절대적 남성성, 예컨대 여신이나 하느님과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메타포는 항상 메타니미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에, 혹은 기표는 기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수많은 논쟁과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실지로 이것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없어서 불필요한 논쟁을, 오해와 시간낭비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니체와 데리다의 여성성과 은유와 관련된 여러 논설들이 그것이다.
니체는 묘비명에 이렇게 썼다.
“이제 나는 명령한다. 자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 자신을 발견할 것을”
니체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또 다른 은유가 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은유적 구원은 진정한 구원이 아니기 때문일까.
서양 시각중심주의 | 니체/데리다 | 은유적 구원 (환유-은유) | 영원한(불임의) 여인상 | 남자 생산체계 |
동양 청각중심주의 | 박정진 | 환유적 구원 (은유-환유) | 살아있는(임신하는) 여자 | 여자 재생산체계 |
<시각-청각 중심과 은유-환유적 구원>
구조주의와 해체주의가 등장하면서 의미는 결국 가변적이고 불확실해져 버렸다. 모든 개념은 관점에 따라 해체될 수 있는 것이고, 해석은 다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텍스트가 콘텍스트가 되고’ ‘콘텍스트가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고정된 의미와 텍스트가 없고, 모든 텍스트는 ‘상황적 기호’로 해체할 수 있다. 동시에 콘텍스트 속에서 언제나 텍스트를 뽑아낼 수 있다. 텍스트는 이분법이다.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중층적 연속과 메타포와 메타니미의 의미작용은 마치 여러 개의 코드로 구성된 악기처럼 느껴진다. 악기의 울림만큼 다의미(polysemy)와 의미의 역동성을 발산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소리는 어떠한 쓰기나 흔적에 비해 더욱 융합적(融合的)이고 무아적(無我的)이다. 악기가 소리를 낼 때 악기는 여자이고, 악기를 소리 나게 하는 연주자는 남자이다. 이때 소리를 내는 것은 전적으로 연주자의 몫인가, 아니면 악기의 몫인가. 악기의 역할에 더 비중을 두는 쪽이 은유에 편에 서는 것이고, 연주자의 편에 서는 쪽이 환유의 편에 서는 사람이다. 버저이너의 여자는 악기와 같고, 페니스는 연주자이다. 페니스(연주자)는 악기의 밖에 있다.
보편성과 복제는 밖에서 보는 시각과 모방행위가 있어야 가능하다. 일반성은 안에서 보는 시각과 물질성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말한다. 남성과 여성은 밖으로는 서로 대칭이지만, 남성은 다시 안으로 남성과 부성, 여성은 안으로 여성과 모성으로 분파된다. 남성과 여성은 동양 문화권에서는 음양사상에 포함된다. 다시 말하면 동양의 한자문화권은 일찍이 음양사상을 완성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서양에서 한창 활발하게 논의하는 구조-해체주의, 차이와 불확실성, 비결정성, 상징의 상호교환의 문제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보편성은 지대무외(至大無外)와 관련이 있고, 일반성은 지소무내(至小無內)와 관련이 있다.
이상을 정리하면 남자는 <메타니미=시니피앙=외연성=보편성=연주자=이(理, 利)>의 연결이고, 반면에 여자는 <메타포=시니피에=내포성=일반성=악기=기(氣, 器)>의 연결이다.
남자(陽) | 메타니미 | 시니피앙 | 외연성 | 보편성 | 연주자 | 이(理, 利) |
여자 (陰) | 메타포 | 시니피에 | 내포성 | 일반성 | 악기 | 기(氣, 器) |
<남자-이(理), 여자-기(氣), 보편성-일반성>
이와 더불어 인문학은 결국 메타포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고, 자연과학은 메타니미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은 메타포가 없으면 원천적으로 학문 자체가 불가능하다. 니체와 데리다 등 철학의 최고봉의 내용들이 결국 메타포, 은유의 문제로 결말지어 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인문학은 마지막에 여성을 은유하는 것이 되고, 자연과학은 마지막에 사물을 환유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신화와 철학이 결국 남성성과 여성성의 은유, 그리고 그들의 교차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가 있음으로서 여자가 되었다. 만약 여자는 남자(수컷)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그냥 자연이었을 것이다.
인문학 | 메타포>메타니미>메타포 | 여성(자연)을 은유 |
자연과학 | 메타니미>메타포>메타니미 | 사물(자연)을 환유 |
<비유법으로 본 인문학과 자연과학>
결국 남자가 여자를 규정하는 셈이다. 왜 이러한 역전이 일어나는가. 언어는 처음부터 사물을 규정하는 것으로 태어났다. 이는 무엇으로부터 뒤에 태어난 것이(태어남을 당한 것이) 앞의 것(태어남을 있게 한 것)을 규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앞에 있었던 것이 뒤에 태어난 것을 규정할 필요성이 줄어든다. 보다 본질적이고 원천적인 것은 스스로를 규정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사물(자연)을 규정하지 사물(자연)이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인간을 멸종하게 할 수 있을지언정 규정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자연에 해당하는 것이 여자(여성성, 陰)에게 있고, 문명(언어)에 해당하는 것이 남자(남성성, 陽)에게 있다. 결국 문명이란 자연을 카피한 것이다. 철학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으로 매우 난해한 것 같지만 실은 인간의 삶을 기준으로 검토해보면 의외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생물종으로서의 인간은 섹스를 통해 종을 영속시킨다. 섹스에는 암수가 있고, 인간에서는 남녀이다. 역시 암수와 남녀는 도치된 것을 알 수 있다. 섹스를 할 경우 대체로 여자가 아래에 있고, 남자가 위에 있다. 남성 상위체형이다. 이러한 생식과정을 보면 마치 복사기에서 카피(copy)하는 모습과 같다.
남자는 자신을 카피하기 위해 섹스를 하고, 그 결과인 자식에게 자신의 성씨와 이름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한, 즉 바탕으로 참가한 여성의 흔적은 성씨와 이름에 없다. 이 과정에 있는 남녀의 전도(顚倒)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카피는 필연적으로 전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자는 몸으로만 자식이 자신에게서 증식된 것을 안다. 여자는 신체적으로 자식을 후손으로 알고, 남자는 신체적으로 보다는 출계로(명분으로) 그것을 믿는다.
이 과정은 남자(凸)가 여자(凹)를 카피하여 뒤집어 세운 것이 된다. 남자는 여자를 모방한 것이 된다. 물론 유전학적으로는 남자도 여자와 반반으로 유전자를 공유한 셈이지만 말이다. 여자는 재생산과정에서 유전자만 제공한 남자와는 달리 태아를 키우는 거의 전부를 담당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여자는 흔히 ‘배(腹)의 존재’라고 하고 남자는 ‘머리(頭)의 존재’라고 한다. 배의 존재는 무의식의 존재를 말하고, 머리의 존재는 의식의 존재임을 말한다. 여자는 신체적 존재이고, 남자는 정신적 존재인 것처럼 느끼는 까닭은 무엇인가. 머리도 신체의 일부인데 왜 머리는 항상 신체와 별개인 것처럼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것일까. 이는 은유적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에 남자의 관념은 여성을 규정하게 된다.
‘음’ 자체는 매우 내포적(connotative)이고, 메타포적(metaphorical)이다. 이에 비해 양은 매우 외연적(denotation)이고 메타니미적(metonymic)이다. 음이라는 것도 기호적 상형으로 보면 비어있지만 이미 양을 내포하기 위해서, 혹은 임신하기 위해서 비어 있는 양상이다. 또 기호학에서 기호는 의미를 나타내는 기표(記票)이지만 기표가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표는 단지 의미를 표상하는 것에 불과하다. 발생학적으로 보면 의미가 먼저이다. 말하자면 밖으로 표현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려면 기표가 필요하지만 이에 앞서 의미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 권력적으로 보면 기표가 우선이지만 권능적(능력적, 혹은 역능적)으로 보면 기의(記意)가 먼저이다.
말하자면 음양론으로 보면 음(陰)은 발생할 것을 미리 내포하고 있는, 임신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바탕적인 존재이고, 양은 무엇으로부터 태어난 존재이지만, 주인노릇을 하려는 존재자이다. 발생학적(생성론적)으로 보면 음은 능동적인 존재이고, 양이야말로 피동적인 존재이지만 존재론적(존재자적)으로 보면 음은 피동적이고, 소기적(所記的) 존재이고, 양은 능동적이고 능기적(能記的) 존재이다. 음과 양이 발생학과 존재론에서 서로 자리를 역전시키는 셈이다. 왜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 역전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것이 음양의 상징적 상호교환이다.
여기서 ‘기’(記)라는 것이 문제의 관건이다. 기는 기호이고, 동시에 의미이다. 그런데 ‘기’(記)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이 글자그대로 능기(能記)이다. 이는 자연과 반대인 역전된 상황이다. 서양철학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남자와 여자가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아서 아이에게 결국 남자의 성씨를 달아주는 것과 같은 전도행위의 소산이다. 모방(복사)한 것은 다시 바로 세워야 된다. 이는 성(姓)과 씨(氏)가 자연스럽게 두면 여자의 증여(贈與)혹은 소여(所與)인데 남자의 소유(所有)가 된 것과 같다. 이때의 증여와 소유는 바로 능기(能記)와 소기(所記)로 연결된다. 증여한 자는 반대로 소기가 되고 증여를 받은 자는 능기가 된다.
씨(氏)도 흔히 씨앗(seed)이라는 의미에서 남자를 말하고 부계를 상징하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씨는 모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따르면 씨(氏)의 훈인 ‘각시’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나온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나 ‘월인석보’(月印釋譜)에는 ‘갓’ ‘가시’로 나타나며 이는 ‘여자’를 뜻하는 말이다. 씨(氏: gsjig에서 후에 어미 -g 가 탈락함)를 여자의 의미로 푸는 것은 모계로 이어졌던 모계사회에서의 ‘씨’ 개념이 그 음과 함께 한반도에 전래되고 지(枝: ksjig)도 마찬가지로 훈이 ‘가지’이다. 여기서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원래 출계는 모계이며 가족을 가지 치는 것, 분가(分家)도 여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각시’ 와 ‘가지’는 옛 가족의 형태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중요한 우리말이다. 혈통과 분가는 원래 여자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가부장사회로 이동하면서 전부 남자의 것이 되어버렸다. 여성은 남성 속에 예속되어 버리거나 묻혀버린 셈이다. ‘씨’라는 말도 실은 여성, 혹은 모계를 의미하는 말인데 이것이 남성, 혹은 부계를 의미하는 용어로 의미가 백팔십도로 전환되어 버렸다. ‘아들’ ‘새끼’ ‘열매’ ‘씨’ ‘나’ ‘남자’ 등 여러 의미로 쓰이는 자(子)자를 사용하여 남자의 성기를 말하는 ‘자지’(子持: 씨를 가진 자)는 모계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남자들이 찬탈한 것이 된다.
성(姓) | 여(女)+생(生): 여자로부터 태어남 | 남자의 성(姓) |
씨(氏) | 여자인 각시(갓, 가시 gsjig)에서 어미-g의 탈락 | 남자의 씨(氏) |
<성씨(姓氏)의 원형>
이는 가부장사회의 전도이다. 가부장사회는 가부장사회를 뒷받침하는 철학적·신학적 이론(이데올로기)를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것이 서양의 시각중심(이성중심)철학이고 종합적으로 서양문명이다. 남성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자궁치환’(transposition)을 한다.
내용 | 그릇 | 자궁치환 |
의미(기의) | 기표 | 의미는 몸에서 생성된 후 기표에게 줌 |
정충 | 자궁(질) | 정충은 자궁의 아들에게 자기이름을 붙임 |
<기표-기의, 정충-자궁>
이런 자궁치환은 은유적으로 사용되는데 니체와 데리다가 자주 이용하는 수법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보자.
“(니체는) 아버지의 위치에 있는 이전의 철학자들을 제거하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에 그의 욕망이 여성의 출산에 집중된다는 것이다.”
니체의 욕망은 자기를 무능력한 존재로 단정내린 자신의 철학적 아버지들은 죽이고 위버멘쉬를 탄생시키기 위해 ‘존재의 자궁’을 충만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니체는 여성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들이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강한 남성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니체는 초인이 되기 위해서 아버지를 이기기 위해서 자궁치환을 한 반면 데리다는 다르다. 데리다의 산종(散種, dissemin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산종이론은 씨를 헛되이 뿌려지고 아버지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데리다는 의미론(semantics)과 정자(semen)라는 근거는 없지만 어원적으로 유사한 두 단어를 자신의 텍스트로 변형시킨다. 식물을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반복되는 씨뿌리기. 파종/정액주입이되, 씨뿌리기/수정이 아닌 흩뿌리기/산종. 씨는 헛되이 뿌려지고 아버지의 기원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사정이다.
여기에 데리다의 여성인 체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산종이라는 것을 데리다는 ‘아버지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시점’으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실은 남자의 정자는 본래 산종적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듯하다. 남자의 정충은 바로 산종을 통해서 그 중에 운 좋은 놈이 수정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구조이다.
산종은 처음부터 남성-부계(父系)의 표상이다. 그의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야말로 산종의 좋은 예이다. 그라마톨로지는 실은 소리(phonology)를 모방한, 기표화한 것이다.앞에서 전술하였지만 들뢰즈의 ‘여성-되기’(woman-becoming)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여성인 체하는 것이다. 여성인 체하는 것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차라리 남성인 체하지 여성인 체하지 않는다.
니체는 ‘초인’이 되기 위해서 자궁의 여성성을 탄력으로 사용하고 있고, 데리다는 ‘의미’와 ‘정자’를 같은 의미로 봄으로써 비록 아버지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지만, 둘 다 스스로 서양의 가부장-이성중심문명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들은 서양문명의 한계를 느끼고 출구를 찾고 있는(탈출을 시도하고 있는) 예언자들이고, 선각자들이다.
데리다는 다의성(polysemy)이라는 해석학적인 개념을 ‘산종’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한다. 데리다가 생각하는 산종은 해석이 진리의 표상이 될 수 없음을 뜻한다.
“만약 텍스트의 단계를 벗어나 재전유하려고 하는 주제적 조화나 전체적인 의미라는 것이 없고, 의도나 실제 체험 등 상상적 상태에 위치한 전체적인 뜻이 없다면, 텍스트는 더 이상...... 문헌의 다의성에서 분산되고 모여질 어떤 진리의 표현이나 표상이 아니다. 따라서 해석학적인 개념인 다의성은 산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박정진 문화인류학 박사
[해체주의를 해체하다]
4. 데리다의 문자학(grammatology)
1. 데리다의 문자학과 박정진의 소리철학(phonology)
철학이 나와 너의 문제, 주체와 대상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일은 독일에서는 니체, 하이데거를 비롯한 존재론 철학에 의해, 프랑스에서는 레비스토로스, 데리다를 비롯한 구조주의·해체주의 철학에 의해, 영국에서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의해 이끌어졌다.
아시다시피 데리다는 프랑스의 후기근대 철학을 이끌어온 세계적인 철학자이다. 해체주의 철학은 구조주의 철학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는 쌍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구조가 없으면 해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조언어학의 절대적인 이해와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해체라는 말은 그 이전에 축조(건축)가 있기 때문에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축조가 없었던 것과는 다르다. 해체는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기존의 것을 두고 가타부타하는 것이지, 새로운 철학의 수립과는 다르다. 좀 더 이 말을 진전하면 해체는 다음에 오는 무엇을 위해서 사전 정지작업을 하는 것이기도 하고 예축적(豫祝的) 작업이기도 하다. 해체는 평지(平地)가 아니다.
해체는 평지(대지)의 텅 빈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 자연의 소리를 들으려는 사전 몸짓인지도 모른다. 해체는 그래서 하늘의 영감(靈感)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대지를 통해서 전해오는 교감, 대지의 네트워킹(networking)을 기다리고 있다. 지하는 더 이상 지옥이 아니라 생명이 움트는 장소이고, 혹은 생명을 위한 지진과 화산이 일어나는 지질과 같고, 그것으로 인해 생성된 동굴을 거느린 화산 동굴계와 같다. 해체는 또한 수평선으로 상징되는 바다의 심연과 같다. 바다는 항상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 파도치고, 해일이 일어나는 곳이다.
해체철학은 결국 주로 기존의 텍스트를 읽는 방식을 택한다. 말하자면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된다. 텍스트 분석에는 구조언어학의 절대적인 ‘도구적 기여’가 한몫하고 있다. 구조언어학은 철학사적으로 간단하게 말하면 시각에 의해서 ‘주체-대상’의 관점에서 바라보던 사물에 대한 인식을 주체의 부분에 언어를 대입하고, 언어의 ‘시니피앙(signifiant: 能記: 記表: Sa), 시니피에(signifié: 所記: 記意: Se)’를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러한 전환의 가장 큰 핵심은 바로 사물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서 객관성 혹은 실재라는 것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를 제기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사물을 대상으로 보는 데에 있어서 언어(기호)의 두 가지 관점에 의해서 사물을 보는 것이 된다. 두 가지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은 우선 이중적이고 애매호모하다. 구조주의는 처음부터 이중성과 애매모호함을 가지고 출발했던 셈이다.
여기에 언어의 밖으로 사물을 지시하려는 외연성(denotation)과 안으로 의미를 함축하려는 내포성(connotation), 그리고 의미를 원천적으로 있게 하는 메타포(metaphor)와 그 의미를 고정시키려는 메타니미(metonymy)가 더해지면 언어학과 철학은 참으로 난해한 것이 된다. 언어를 어떤 동물보다 많이 사용하는 인간은 언어의 인습(因習, 因襲)에 빠져 마치 사물이 있고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있고 사물이 있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주객이 전도되게 사는 것이 인간이 문명이라는 것이다.
유인원을 비롯하여 동물이 사용하는 간단한 언어를 인류학에서는 원문화(原文化, proto-culture)라고 말한다. 인간이 직립하면서 몸의 에너지가 머리 쪽으로 많이 올라가게 되고, 뇌의 용량이 증가하고, 적을 공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던 입의 이빨(송곳니)은 무디어지고, 구강구조는 보다 많은 음운을 발할 수 있게 되었다. 앞발의 기능을 하던 손은 완전히 다른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보다 많은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고, 인간은 점차 의미의 동물이 되어갔다. 인간은 이제 무엇보다도 ‘의미를 먹고 사는 동물’이 되었다.
인간은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먹이를 만들어내는 이외에도 그와 더불어 항상 의미가 따라다니게 되는 이상한(?) 동물이 되었던 셈이다. 집단적 동물인 인간은 사회적 존재임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사회는 인간에게 사회적 언어를 강요하게 되고, 이로 인해 언어가 사물을 규정하는(언어>사물) 이외에, 다시 사회가 언어를 규정하는(사회>언어) 사회적 동물이 되어갔다. 이것이 인간이 오늘에 이르게 된 진화적 과정(process)이다.
의미는 흔히 사회적 통용으로 인해서 처음부터 사회적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언어가 사회적 소통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회적 약속의 산물이며, 도구이기는 하지만 의미는 처음부터 사람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 사물이 아니다. 의미가 통용되는 것은 사람이 사회적 약속에 동의한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미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인간의 몸 안의 뇌구조에서 발생하고, 그 발생에 몸 전체가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시 말하면 몸은 의미의 발생의 발전소이다.
의미, 즉 기의는 인간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셈이다. 의미는 매우 가변적이고 이중적이고 애매모호하다. 이러한 의미의 발생의 구체적인 운반자(전류)는 바로 메타포(metaphor: 隱喩)이다. 메타포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메타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미를 먹고사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셈이다.
메타포는 의미의 여러 층을 수직적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메타포가 하나의 층에 머물러 고정되는 것을 메타니미(metonymy: 換喩)라고 한다. 메타니미 때문에 학문과 과학, 그리고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한 셈이다. 메타니미의 레벨에서도 외연성(denotation)과 내포성(connotation)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상징(symbol)의 성격 때문이다. 서양문명은 ‘언어=사물’(등식의 문명)을 실현하기 위한 문명체계이다. 이는 메타니미=시니피앙=외연성의 연결이다.
그 메타니미가 주체와 대상의 차원에 머문 것이 바로 소위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객관적이라는 것도 실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객관성을 만들어내는 대상도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상대인 주체도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발견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서양은 근대에 들어 구주언어학의 등장과 더불어 기표/기의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과 메타포/메타니미와 관계되고, 그리고 인류학의 도움으로 그것이 원시주술 시대에는 동종주술/감염주술과 대응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각 중심 문명은 기표>기의, 청각 중심 문명은 메타포>메타니미, 그리고 원시주술시대에는 동종주술>감염주술의 경향을 보였다.
서양 시각중심 문명(이미지-미술)
기표
기의
주체-객관(의식)
기표 우선
과학철학시대
동양 청각 중심 문명(소리-음악)
메타니미
메타포
주객일체
메타포 우선
예술시대
원시 주술(magic)시대(축제-종합예술)
감염주술
동종주술
무의식/무분별
동종주술 우선
신화주술시대
<시각중심, 청각중심, 그리고 주술>
객관적이라는 사실이 시각중심적 사고, 시각중심 문명의 산물이라는 이라는 것이 최근에 공인되었다. 말하자면 객관성은 실재가 아니다. 객관성은 사회적(집단적)으로) 약속한 정체성이고, 그 정체성 때문에 보편성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따라서 보편성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문화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절대적인 보편성이라는 것은 없다. 단지 인간이 특정의 역사적 맥락에서 가장 폭넓게 필요를 인정하는 것이 보편성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유용성에 따라 ‘필요한 정도의 선에서만’ 진리에 대한 욕망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이다.
실재나 동일성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현대 철학의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 남근이성주의에 빠져 있을 시기만 해도 실재나 동일성이 전제되었고, 그 동일성은 보편성의 다른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역사는 동일성과 보편성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권력의 거대한 연합 속에 진행된 셈이다. 지금도 역사에서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일성의 철학이 필요하다. 동일성의 철학은 존재자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바로 권력이라는 것은 바로 동일성을 기초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쌓아올리기 어려운 실체이다.
객관성, 동일성, 보편성이라는 것은 매우 가변적이고 양면적이고 중층적인 능기와 소기의 변신 속에서(의미는 능기와 소기의 역동적 중층구조의 연속이다) 최상층에서 메타니미와 만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것은 매우 표면적인 것이다. 언어의 권력자(폭력자)로서의 군림은 이 층에서 이루어진다. 이 층이 남근이성주의가 위치한 곳이다.
해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수직적 구조(건축물)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해체에는 반드시 메타포(은유)와 메타니미(환유)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특히 의미의 생산과 관련이 있는 메타포가 의미의 사회적 유통과 관련이 있는 메타니미보다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해체라는 작업이 여러 층위에서 메타포를 찾는 작업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지로 지대무외(至大無外)나 지소무내(至小無內)에 이르면 은유(隱喩)를 쓰지 않을 수 없다. 숨어 있으면서 존재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잡을 수 없기 때문에 환유(換喩)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여성성이나 절대적 남성성, 예컨대 여신이나 하느님과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메타포는 항상 메타니미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에, 혹은 기표는 기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수많은 논쟁과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실지로 이것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없어서 불필요한 논쟁을, 오해와 시간낭비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니체와 데리다의 여성성과 은유와 관련된 여러 논설들이 그것이다.
니체는 묘비명에 이렇게 썼다.
“이제 나는 명령한다. 자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 자신을 발견할 것을”
니체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또 다른 은유가 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은유적 구원은 진정한 구원이 아니기 때문일까.
서양
시각중심주의
니체/데리다
은유적 구원
(환유-은유)
영원한(불임의) 여인상
남자
생산체계
동양
청각중심주의
박정진
환유적 구원
(은유-환유)
살아있는(임신하는) 여자
여자
재생산체계
<시각-청각 중심과 은유-환유적 구원>
구조주의와 해체주의가 등장하면서 의미는 결국 가변적이고 불확실해져 버렸다. 모든 개념은 관점에 따라 해체될 수 있는 것이고, 해석은 다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텍스트가 콘텍스트가 되고’ ‘콘텍스트가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고정된 의미와 텍스트가 없고, 모든 텍스트는 ‘상황적 기호’로 해체할 수 있다. 동시에 콘텍스트 속에서 언제나 텍스트를 뽑아낼 수 있다. 텍스트는 이분법이다.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중층적 연속과 메타포와 메타니미의 의미작용은 마치 여러 개의 코드로 구성된 악기처럼 느껴진다. 악기의 울림만큼 다의미(polysemy)와 의미의 역동성을 발산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소리는 어떠한 쓰기나 흔적에 비해 더욱 융합적(融合的)이고 무아적(無我的)이다. 악기가 소리를 낼 때 악기는 여자이고, 악기를 소리 나게 하는 연주자는 남자이다. 이때 소리를 내는 것은 전적으로 연주자의 몫인가, 아니면 악기의 몫인가. 악기의 역할에 더 비중을 두는 쪽이 은유에 편에 서는 것이고, 연주자의 편에 서는 쪽이 환유의 편에 서는 사람이다. 버저이너의 여자는 악기와 같고, 페니스는 연주자이다. 페니스(연주자)는 악기의 밖에 있다.
보편성과 복제는 밖에서 보는 시각과 모방행위가 있어야 가능하다. 일반성은 안에서 보는 시각과 물질성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말한다. 남성과 여성은 밖으로는 서로 대칭이지만, 남성은 다시 안으로 남성과 부성, 여성은 안으로 여성과 모성으로 분파된다. 남성과 여성은 동양 문화권에서는 음양사상에 포함된다. 다시 말하면 동양의 한자문화권은 일찍이 음양사상을 완성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서양에서 한창 활발하게 논의하는 구조-해체주의, 차이와 불확실성, 비결정성, 상징의 상호교환의 문제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보편성은 지대무외(至大無外)와 관련이 있고, 일반성은 지소무내(至小無內)와 관련이 있다.
이상을 정리하면 남자는 <메타니미=시니피앙=외연성=보편성=연주자=이(理, 利)>의 연결이고, 반면에 여자는 <메타포=시니피에=내포성=일반성=악기=기(氣, 器)>의 연결이다.
남자(陽)
메타니미
시니피앙
외연성
보편성
연주자
이(理, 利)
여자
(陰)
메타포
시니피에
내포성
일반성
악기
기(氣, 器)
<남자-이(理), 여자-기(氣), 보편성-일반성>
이와 더불어 인문학은 결국 메타포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고, 자연과학은 메타니미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은 메타포가 없으면 원천적으로 학문 자체가 불가능하다. 니체와 데리다 등 철학의 최고봉의 내용들이 결국 메타포, 은유의 문제로 결말지어 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인문학은 마지막에 여성을 은유하는 것이 되고, 자연과학은 마지막에 사물을 환유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신화와 철학이 결국 남성성과 여성성의 은유, 그리고 그들의 교차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가 있음으로서 여자가 되었다. 만약 여자는 남자(수컷)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그냥 자연이었을 것이다.
인문학
메타포>메타니미>메타포
여성(자연)을 은유
자연과학
메타니미>메타포>메타니미
사물(자연)을 환유
<비유법으로 본 인문학과 자연과학>
결국 남자가 여자를 규정하는 셈이다. 왜 이러한 역전이 일어나는가. 언어는 처음부터 사물을 규정하는 것으로 태어났다. 이는 무엇으로부터 뒤에 태어난 것이(태어남을 당한 것이) 앞의 것(태어남을 있게 한 것)을 규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앞에 있었던 것이 뒤에 태어난 것을 규정할 필요성이 줄어든다. 보다 본질적이고 원천적인 것은 스스로를 규정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사물(자연)을 규정하지 사물(자연)이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인간을 멸종하게 할 수 있을지언정 규정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자연에 해당하는 것이 여자(여성성, 陰)에게 있고, 문명(언어)에 해당하는 것이 남자(남성성, 陽)에게 있다. 결국 문명이란 자연을 카피한 것이다. 철학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으로 매우 난해한 것 같지만 실은 인간의 삶을 기준으로 검토해보면 의외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생물종으로서의 인간은 섹스를 통해 종을 영속시킨다. 섹스에는 암수가 있고, 인간에서는 남녀이다. 역시 암수와 남녀는 도치된 것을 알 수 있다. 섹스를 할 경우 대체로 여자가 아래에 있고, 남자가 위에 있다. 남성 상위체형이다. 이러한 생식과정을 보면 마치 복사기에서 카피(copy)하는 모습과 같다.
남자는 자신을 카피하기 위해 섹스를 하고, 그 결과인 자식에게 자신의 성씨와 이름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한, 즉 바탕으로 참가한 여성의 흔적은 성씨와 이름에 없다. 이 과정에 있는 남녀의 전도(顚倒)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카피는 필연적으로 전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자는 몸으로만 자식이 자신에게서 증식된 것을 안다. 여자는 신체적으로 자식을 후손으로 알고, 남자는 신체적으로 보다는 출계로(명분으로) 그것을 믿는다.
이 과정은 남자(凸)가 여자(凹)를 카피하여 뒤집어 세운 것이 된다. 남자는 여자를 모방한 것이 된다. 물론 유전학적으로는 남자도 여자와 반반으로 유전자를 공유한 셈이지만 말이다. 여자는 재생산과정에서 유전자만 제공한 남자와는 달리 태아를 키우는 거의 전부를 담당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여자는 흔히 ‘배(腹)의 존재’라고 하고 남자는 ‘머리(頭)의 존재’라고 한다. 배의 존재는 무의식의 존재를 말하고, 머리의 존재는 의식의 존재임을 말한다. 여자는 신체적 존재이고, 남자는 정신적 존재인 것처럼 느끼는 까닭은 무엇인가. 머리도 신체의 일부인데 왜 머리는 항상 신체와 별개인 것처럼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것일까. 이는 은유적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에 남자의 관념은 여성을 규정하게 된다.
‘음’ 자체는 매우 내포적(connotative)이고, 메타포적(metaphorical)이다. 이에 비해 양은 매우 외연적(denotation)이고 메타니미적(metonymic)이다. 음이라는 것도 기호적 상형으로 보면 비어있지만 이미 양을 내포하기 위해서, 혹은 임신하기 위해서 비어 있는 양상이다. 또 기호학에서 기호는 의미를 나타내는 기표(記票)이지만 기표가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표는 단지 의미를 표상하는 것에 불과하다. 발생학적으로 보면 의미가 먼저이다. 말하자면 밖으로 표현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려면 기표가 필요하지만 이에 앞서 의미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 권력적으로 보면 기표가 우선이지만 권능적(능력적, 혹은 역능적)으로 보면 기의(記意)가 먼저이다.
말하자면 음양론으로 보면 음(陰)은 발생할 것을 미리 내포하고 있는, 임신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바탕적인 존재이고, 양은 무엇으로부터 태어난 존재이지만, 주인노릇을 하려는 존재자이다. 발생학적(생성론적)으로 보면 음은 능동적인 존재이고, 양이야말로 피동적인 존재이지만 존재론적(존재자적)으로 보면 음은 피동적이고, 소기적(所記的) 존재이고, 양은 능동적이고 능기적(能記的) 존재이다. 음과 양이 발생학과 존재론에서 서로 자리를 역전시키는 셈이다. 왜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 역전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것이 음양의 상징적 상호교환이다.
여기서 ‘기’(記)라는 것이 문제의 관건이다. 기는 기호이고, 동시에 의미이다. 그런데 ‘기’(記)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이 글자그대로 능기(能記)이다. 이는 자연과 반대인 역전된 상황이다. 서양철학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남자와 여자가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아서 아이에게 결국 남자의 성씨를 달아주는 것과 같은 전도행위의 소산이다. 모방(복사)한 것은 다시 바로 세워야 된다. 이는 성(姓)과 씨(氏)가 자연스럽게 두면 여자의 증여(贈與)혹은 소여(所與)인데 남자의 소유(所有)가 된 것과 같다. 이때의 증여와 소유는 바로 능기(能記)와 소기(所記)로 연결된다. 증여한 자는 반대로 소기가 되고 증여를 받은 자는 능기가 된다.
씨(氏)도 흔히 씨앗(seed)이라는 의미에서 남자를 말하고 부계를 상징하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씨는 모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따르면 씨(氏)의 훈인 ‘각시’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나온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나 ‘월인석보’(月印釋譜)에는 ‘갓’ ‘가시’로 나타나며 이는 ‘여자’를 뜻하는 말이다. 씨(氏: gsjig에서 후에 어미 -g 가 탈락함)를 여자의 의미로 푸는 것은 모계로 이어졌던 모계사회에서의 ‘씨’ 개념이 그 음과 함께 한반도에 전래되고 지(枝: ksjig)도 마찬가지로 훈이 ‘가지’이다. 여기서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원래 출계는 모계이며 가족을 가지 치는 것, 분가(分家)도 여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각시’ 와 ‘가지’는 옛 가족의 형태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중요한 우리말이다. 혈통과 분가는 원래 여자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가부장사회로 이동하면서 전부 남자의 것이 되어버렸다. 여성은 남성 속에 예속되어 버리거나 묻혀버린 셈이다. ‘씨’라는 말도 실은 여성, 혹은 모계를 의미하는 말인데 이것이 남성, 혹은 부계를 의미하는 용어로 의미가 백팔십도로 전환되어 버렸다. ‘아들’ ‘새끼’ ‘열매’ ‘씨’ ‘나’ ‘남자’ 등 여러 의미로 쓰이는 자(子)자를 사용하여 남자의 성기를 말하는 ‘자지’(子持: 씨를 가진 자)는 모계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남자들이 찬탈한 것이 된다.
성(姓)
여(女)+생(生): 여자로부터 태어남
남자의 성(姓)
씨(氏)
여자인 각시(갓, 가시 gsjig)에서 어미-g의 탈락
남자의 씨(氏)
<성씨(姓氏)의 원형>
이는 가부장사회의 전도이다. 가부장사회는 가부장사회를 뒷받침하는 철학적·신학적 이론(이데올로기)를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것이 서양의 시각중심(이성중심)철학이고 종합적으로 서양문명이다. 남성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자궁치환’(transposition)을 한다.
내용
그릇
자궁치환
의미(기의)
기표
의미는 몸에서 생성된 후 기표에게 줌
정충
자궁(질)
정충은 자궁의 아들에게 자기이름을 붙임
<기표-기의, 정충-자궁>
이런 자궁치환은 은유적으로 사용되는데 니체와 데리다가 자주 이용하는 수법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보자.
“(니체는) 아버지의 위치에 있는 이전의 철학자들을 제거하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에 그의 욕망이 여성의 출산에 집중된다는 것이다.”
니체의 욕망은 자기를 무능력한 존재로 단정내린 자신의 철학적 아버지들은 죽이고 위버멘쉬를 탄생시키기 위해 ‘존재의 자궁’을 충만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니체는 여성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들이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강한 남성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니체는 초인이 되기 위해서 아버지를 이기기 위해서 자궁치환을 한 반면 데리다는 다르다. 데리다의 산종(散種, dissemin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산종이론은 씨를 헛되이 뿌려지고 아버지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데리다는 의미론(semantics)과 정자(semen)라는 근거는 없지만 어원적으로 유사한 두 단어를 자신의 텍스트로 변형시킨다. 식물을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반복되는 씨뿌리기. 파종/정액주입이되, 씨뿌리기/수정이 아닌 흩뿌리기/산종. 씨는 헛되이 뿌려지고 아버지의 기원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사정이다.
여기에 데리다의 여성인 체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산종이라는 것을 데리다는 ‘아버지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시점’으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실은 남자의 정자는 본래 산종적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듯하다. 남자의 정충은 바로 산종을 통해서 그 중에 운 좋은 놈이 수정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구조이다.
산종은 처음부터 남성-부계(父系)의 표상이다. 그의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야말로 산종의 좋은 예이다. 그라마톨로지는 실은 소리(phonology)를 모방한, 기표화한 것이다.앞에서 전술하였지만 들뢰즈의 ‘여성-되기’(woman-becoming)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여성인 체하는 것이다. 여성인 체하는 것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차라리 남성인 체하지 여성인 체하지 않는다.
니체는 ‘초인’이 되기 위해서 자궁의 여성성을 탄력으로 사용하고 있고, 데리다는 ‘의미’와 ‘정자’를 같은 의미로 봄으로써 비록 아버지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지만, 둘 다 스스로 서양의 가부장-이성중심문명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들은 서양문명의 한계를 느끼고 출구를 찾고 있는(탈출을 시도하고 있는) 예언자들이고, 선각자들이다.
데리다는 다의성(polysemy)이라는 해석학적인 개념을 ‘산종’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한다. 데리다가 생각하는 산종은 해석이 진리의 표상이 될 수 없음을 뜻한다.
“만약 텍스트의 단계를 벗어나 재전유하려고 하는 주제적 조화나 전체적인 의미라는 것이 없고, 의도나 실제 체험 등 상상적 상태에 위치한 전체적인 뜻이 없다면, 텍스트는 더 이상...... 문헌의 다의성에서 분산되고 모여질 어떤 진리의 표현이나 표상이 아니다. 따라서 해석학적인 개념인 다의성은 산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박정진 문화인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