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주의를 해체하다]
5-2-2.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텍스트론으로 변조한 데리다
소리와 몸짓이 왜 문자인가? 현존은 왜 동일성이고 근원인가? 이것은 서구문명, 알파벳 표음문자의 자기모순에 불과하다. 소리와 몸짓이야말로 현존이고 동시에 현존은 동일성도 아니다. 현존은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고, 광대의 표현을 통해 관객들은 차이를 느끼게 된다. 관객에는 차이가 더 중요하지만, 광대에게는 존재의 표현이 더 중요하다. 광대는 존재의 가능성에 있다.
도리어 현재진행형(현재분사)의 현존이야말로 차이(차연)와 존재(현존재)이다. 무언극은 당연히 현존이고 존재이다. 왜 그것을 문자라고 하고, 문자학으로 설명하는가. 문자의 ‘에크리튀르’(쓰여 진 것)야말로 과거분사적 의미가 아닌가. 차이는 부재이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존이기 때문에 드러나고, 부재는 현존의 지나감의 결과(현재완료)이다. 그래야 부재의 차이와 현존의 존재가 만나게 된다.
데리다의 차이는 아무래도 하이데거의 존재에 못 미친다. 어딘가 프랑스식의 억지가 있다. 여기서 프랑스식의 억지라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여야 하는 특성과 관련이 있다. 프랑스의 문화문법은 ‘존재의 무(無)’를 바로 무(無)라고 하지 못한다. 그래서 데리다의 텍스트 이론이 탄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텍스트는 설사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텍스트 자체는 있기 때문이다. 있는 것을 가지고 없다고 해야(의미를 무의미라고 해야) 적어도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말라르메는 아시다시피 ‘미메시스(mimesis)’로 대표되는 플라톤의 모방이론을 해체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에 따르면 배우의 몸짓이나 표정으로서의 문자가 모방이나 모방이 겨냥하고 있는 현존과 기원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미 있는 모방보다 의미를 지칭하지 않는 능기가 넘쳐흐르고 있다. 즉 이 세계의 텍스트에서 소기보다 언제나 능기가 과잉이다.”
여기서 ‘의미가 없는(비어 있는) 능기의 과잉’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의미보다는 무의미가 넘친다는 뜻이다. 동시에 소리의 능기는 완전히 생략한 채, 문자의 능기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이론은 텍스트이론이 될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모방이론에 의하면 본질이나 존재가 모방의 모델이기에 모델이 모방하는 자에 앞섰다. 데리다는 말라르메의 몸짓을 이렇게 설명한다. “말라르메의 배우의 몸짓은 아무 것도 모방하지 않고, 그의 몸짓이 만드는 문자 이전에 아무 것도 없다. 아무도 그의 몸짓을 규정하는 대목은 없다.

여기서 ‘몸짓이 만드는 문자 이전에 아무 것도 없다’는 몸짓을 문자로 환원시키는 동시에 문자를 “태초에 문자가 있었다.”는 식의 아포리아로 만드는 셈이다. 전반적으로 데리다에게는 사물의 문자에로의 환원이 내재되어 있는 셈인데, 그 문자는 결국 의미가 없는 ‘공백의 문자’인 것에 역설이 있다. 이는 야바위와 같다.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게?” 해놓고 결국 빈 상자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문자는 빈 상자에 불과하다. 왜 데리다는 공(空)을 말하면서 상자 자체가 없는 것은 생각하지 못할까.
데리다는 무언극의 몸짓은 바로 ‘이멘(hymen: 처녀막의 이중성)의 산종(散種: 헛되이 뿌려지는 씨앗)’과 같다고 생각한다. 무언극 배우의 즉흥적인 연기는 본래 대본이 없이 진행된다. 매우 상황적(contextual)이다. 무언극의 특징이 말이 없는 것이고, 동시에 몸짓의 연기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말의 대본(모델)이 없기 마련이다. 여기서 특히 몸은 중요하다. 말이 아닌 몸이야말로 해체철학을 이루는 출발점이자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배우의 몸과 몸짓을 문자라고 전제한다. 그에게는 현상 자체가 문자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현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문자는 의미가 없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paradoxical)이다. 왜 문자라고 전제해놓고, 문자의 특징인 의미를 무의미로 만드는 난해(難解)와 교란(攪亂)의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가. 데리다의 철학은 철학적 내용만이 이중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적 형식도 이중적이다. 데리다는 몸과 몸짓을 텍스트(text)라고 생각한다. 몸의 말없는 상황적 연기를 텍스트라고 하는 셈이다.
데리다는 이중성의 의미들은 ‘이멘’ ‘날개’ ‘새’ ‘부리’ ‘스페이드’ ‘부채’ ‘무희’ ‘백조’ ‘나비’ ‘젓가락운동’으로 표현하다가 마지막에 ‘팽이돌기’로 설명하기도 한다. “팽이가 돌면서 이 면이 저 면이 되고, 저 면이 이면이 된다. 다름과 같음이 서로 맞물면서 돌고 돈다. 팽이돌기에는 연기와 간격의 이중소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이중적 의미는 공(空)이 아니다. 이중적 의미론은 공(空)에 접근하는 ‘썼다가 지우는 것’이지, 처음부터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쓰지 않고 바라보는 것, 관음(觀音)이나 법음(法音)이 아니다.
데리다는 ‘말’은 버리고 ‘문자’를 택했다. 이때의 말은 소리(음성)로서의 말이고, 문자는 표음문자가 아니라 표의문자로서의 문자이다. 그런데 그의 문자는 기록으로서의 문자가 아니라 ‘공백으로서의 문자’ ‘차연으로서의 문자’이다. 그러나 ‘문자’는 ‘자연’(自然)이 아니고 ‘차연’(差延)도 ‘자연’(自然)이 아니다.
서양문명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존재신학의 절대신이다. 우리는 데리다의 문자학을 통해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절대신이란 기독교가 표방하듯이 인격신이며, 인격신은 말로는 인격신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 말 속에는 인간이 들어있다. 서양문명은 항상 사물의 뒤(이면)에는 사물보다 먼저 존재하는 존재(who, 주체, 제조자, 창조자, 명령자, 감시자, 심판자, 아버지)가 있다.
그래서 서양문명은 항상 ‘태초의 말씀’이나 ‘말소리(음성)’를 들을 때에도 항상 그 누구(who: 주체)가 숨어있다. 그래서 그것을 로고스(Logos)라고 하고, 자기환원이라고 한다. 이는 말소리중심주의(logo-phonocentrism)는 ‘말소리(logo-phono)’의 본질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바라보는, ‘logos=phone’라는, ‘말소리중심주의’의 ‘중심주의’가 그렇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말소리중심주의야말로 말소리중심주의인 자기환원인 것이다.
여기에는 음성언어나 문자언어, 그 가운데서도 표음문자의, 소리는 날아가기 때문에 날아가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잡아야 하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다. 만약 말소리는 말소리로 보지 않고 잡아야 할 필요성이 없으면 말소리중심주의가 필요 없다. 예컨대 처음부터 표의문자였다면, 문자는 날아가 버리지 않기 때문에 중심주의가 필요 없게 된다.
그렇게 보면 데리다의 문자학은 바로 알파벳 표음문자의 본질적인 문제(정신심리적 질병)를 치료하기 위해서 제안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질병(환자)과 치료(의사)라는 대칭관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왜 ‘소리’(phone)가 그 이성주의와 환원주의의 원인이 되는 지에 대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본원적인 문제이다.
데리다는 자신도 모르게(혹시 알았을 수도 있다) 서양문명의 집단무의식으로 문자학의 처방을 한 셈이다. 이것은 문화적 필요성에 의한 것이다. 철학도 그 기저에 있어서는 삶의 테두리에서 발생하는 필요와 연관이 있다. 문자학은 서양문명의 자기환원이면서 동시에 자기치료이다. 말소리중심주의의 서양문명은 항상 역설적으로 ‘쓰는 자(who=인간)’가 숨어 있어서, 다시 말하면 ‘음성이 발하면’ (조금 늦은) 차연(差延)으로서 에크리튀르하여야 한다(에크리튀르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말소리중심으로 인해(그것의 반사로서) 문자가 필요하고, 문자는 차연이 되고, 차연은 표시가 된다(그러면서도 문자의 기록성을 간과한다).
실제 이성주의는 말소리(logos=phone) 때문이 아니라 문자기록성(logos=letter) 때문이다. 이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의 한자문화권에서도 이성주의가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더욱이 표의문자는 그것을 발음해도(parole), 말소리중심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중국은 말소리를 운율로 사용하면서 시(詩)를 발전시켰다.
서양문명의 이러한 과정은 존재신학이 아니라 자연신학을 대칭으로 두면 보다 선명해진다. 자연신학은 ‘누가 없음’(no-who: 비주체)이다. 그래서 신은 범신이고, 범신은 자연이고, 자연은 소리이고, 소리는 말(음성)이고, 말을 현존이고, 현존은 표현이다. 소리와 말을 이성주의의 원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who: 주체)=존재신학=신=인격신=인간=문화(문명)= 문자=차연(부재)=표시 |
누가 없음(no-who: 비주체)=자연신학=신=범신=자연=소리=말(음성)=현존=표현 |
데리다의 문자학이 ‘소리를 문자에로 끌어넣고’ 있는데 반해 필자의 포노로지는 ‘문자를 소리에 끌어넣고’ 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공허(空虛)의 철학’, 해체철학의 본래 취지에 이르기 쉽다. 이는 소리 자체가 공기(空氣)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문자는 백지(白紙, 바탕)의 산물이다. 소리는 공기를 바탕으로 하는 문자이다. 그러한 점에서 ‘필자의 포노로지’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가깝다.
존재(Sein)는 왜 현존재(Da-sein: Being-there)인가. 현존재는 현재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살아있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공동존재’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하이데거가 이것을 ‘고요의 종소리(Geläut der Stille)’에 비유한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종소리는 자선과 시여를 알리거나 종용하는 그런 신호이다. 그러므로 고요의 종소리는 무(無)와 공(空)이 시여와 보시를 알리거나 또는 종용하는 그런 신호이다. 공(空)의 보시, 베품, 몸짓, 보여주기로서의 계시를 종소리가 대신한다. 또 그는 말은 존재의 신호하기(Winken)라고 언명하기도 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호하기(Winken)은 오게끔 신호하기(Zu-winken)와 가게끔 신호하기(Ab-winken)의 의 두 가지 질서로 나누어진다.” 이 존재의 말로서의 신호하기를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신호는 나타나면서 은닉시키는 것(das lichtende Vehüllen)의 심부름(Botschaft)이다.”
하이데거와 데리다는 같은 <존재와 차연> <차연과 존재>를 말하면서도 하이데거는 소리에서, 데리다는 문자에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함을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소리와 문자를 통해서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데리다에겐 하이데거의 소리에 대한 비유가 ‘현존=현재’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하이데거야말로 가장 서양문명의 말소리중심주의의 콤플렉스를 벗어난 상태에서 자신의 존재론을 주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장 자연에 가까이 다가간 철학자로 보인다.
하이데거는 종소리에서 소리의 존재성을 비유할 뿐만 아니라 ‘말하다’ 자체가 바로 존재의 탈은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로고스의 개념을 서구 철학사는 <오성>(ratio), <말>(verbum) <세계법칙>(Weltgesetz) <논리적인 것>(das Logische) <사유의 필연성>(Denknotwendigkeit) <의미>(Sinn) <이성>(Vernunft) 등으로 해석해왔다는 것이다. (중략) 로고스의 동사형인 <legein)은 <말하다)(sagen) <담화하다>(reden) <언표하다>(aussagen)의 의미로 해석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 이전에는 그 동사는 <모으다>(zusammenbringen)의 의미로 읽혀지면서 마치 라틴어의 <모으다>의 뜻인 <legere>나 독일어의 <lesen>(읽다/모으다/줍다/가려내다/강의하다)의 의미와 방불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legein>이 <모으다>의 뜻으로 해석되기 이전에 그 동사는 본디의 어원에서 <놓다, 저장하다, 간직하다>(legen)의 의미로 먼저 이해되어야 된다고 하이데거가 설명한다.”
<legein>이 말하다, 담화하다, 언표하다 등의 의미로 진화한 것에 대한 하이데거의 주장과 이에 대한 김형효의 설명을 들어보자.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에 의하면 <말하다> <담화하다> <언표하다> 등의 의미는 <비은적성에 놓여 있으면서 본질을 현전시키는 모든 것을 함께 앞에 두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중략) <말하다>라는 그리스적인 의미는 뜻을 소리로 나타낸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은적되어 있는 것을 탈은적화(Entbergung) 시키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표현과 의미가 말하는 것의 전부라고 간주해왔으나, 그런 음성적인 표현보다 오히려 감추어진 것의 펼침을 <말하다>의 본질이라고 그리스인들이 여겼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앞에 두다>, <앞에 놓다>와 같은 뉘앙스가 늘 <legein>의 어원 속에 잠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말하다>의 뜻이 <소리로서 표현하다>가 아니고, 은적으로부터의 나타남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 것>이라면, <듣다>의 의미도 그냥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일 수 없다.”
하이데거는 <듣다>의 존재론적 특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듣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요구된 말을 스스로 모으는 것이고, 듣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귀담아 들으려고 모으는 것이다. 귀담아 들으려는 것(Horchsamen)에 경청(Gehör)이 자신의 본질을 현현한다. 우리가 전적으로 귀(Ohr)인 한에서 우리는 듣는다. 그러나 그 귀는 청각적인 감각기관을 뜻하지 않는다.”
김형효의 설명과 하이데거의 이어지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마음에서 귀담아 들으려는 경청의 자세가 없이는 물리적인 들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과학적인 들음의 현상 진단은 대단히 공허한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말함이 소리의 진동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래서 말함과 들음은 연구조사의 주제로서 통계자료로 입력되는 그런 수치상의 문제일 수 없다. 가장 잘 듣는 마음은 ‘단순한 것에 주의를 보내는 숙고’에서 가능하다.”
하이데거의 듣는 행위에 대한 존재론적 견해와 김형효의 설명을 다시 보자.
“우리가 귀를 갖고 있기 때문에 듣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듣기 때문에 귀를 갖고 있고, 또 육체적으로 청각을 갖고 있다. 이 말은 마음이 들으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 귀가 듣지 않는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우리에게 말이 건네진 것에 귀속하는 한에서 우리는 들어왔다.”
말하고 듣는 행위에 대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인 결론을 김형효의 부연설명을 통해 살펴보자.
“고대 그리스적인 의미의 <legein>은 우리에게 말해진 것을 귀담아 듣고 그것을 앞에 펼쳐 놓는 것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말해진 것을 귀담아 들으려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귀속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말해진 것을 듣고 그것을 현전에 열어 보이려는 것이 곧 말하기로서의 펼쳐 보임이다. 그러므로 듣지 않으면 말하기가 불가능하다. 말하기는 먼저 들은 것에 대한 교응(交應)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말하기(legein)가 곧 교응하기(homologein)와 같다고 지적하였다. 그런 점에서 듣기가 없으면 말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말하기와 듣기가 서로 동거하고 있다고 봐야 하리라.”
하이데거의 로고스의 개념은 다른 서양철학자들과는 다르다. 그리스의 로고스의 본래적 의미를 탐색하는 것을 통해 존재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말하고 듣는 것은 단지 소리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탈은적화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하이데거는 소리를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하이데거는 서양문명, 즉 알파벳 표음문자의 ‘소리에 대한 콤플렉스’를 처음으로 완전히 벗어난 철학자임에 틀림없다. 그는 소리에서 철학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야말로 ‘이성과 의식의 철학’을 완전히 ‘무의식과 존재의 철학’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이다.
데리다의 해석은 항상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에 의한 차이(差異)’를 기조로 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하이데거는 항상 ‘아래에서(저기서) 솟아오르는 청각에 의한 함성(喊聲)’을 기조로 하고 있다. 데리다는 현존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서 차이를 택한다면, 하이데거는 현재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현존재 혹은 존재를 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데리다는 하이데거를 종종 비판하였는데 이는 다분히 의도적 오해에 가깝다. 김형효는 하이데거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요약하면서도 하이데거에 우호적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비판해 온 하이데거의 철학도 데리다가 볼 때 전통적인 존재신학의 진리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이란 개념을 즐겨 쓰지 않고 인간의 실존양식으로서의 <현존재(Da-sein)>를 인간의 개념 대신에 사용하기에 휴머니즘을 파괴시킨 철학자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가 인간 실존의 양식을 <현존재>로 규정하였던 것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존재의 의미를 알고 있고, 그것과 가까이서 대화하고 사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형효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존재자의 협조 속에서 움직인다. 그런 협조로부터 존재의 의미에 관한 명사적인 물음과 존재의 개념에로의 경향이 솟아난다. 우리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모르지만, 우리는 존재의 협조(l'entente de l'être) 속에서 스스로를 지탱시키고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하이데거를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대목에서 하이데거에게 돌아선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존재론은 이미 형이상학적인 존재의 인간에 대한 내림(來臨)을 전제한 것이다. 즉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가 이미 우리 존재자의 가까이에 접근하여 존재자로서의 현존재가 존재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을 수 있는 그런 존재의 현존재(존재자)와의 근접성을 일러주고 있다. 그런 근접성에 근거해서 우리의 현존재는 존재를 모시면서 동시에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런 관계, 근접성의 관계는 주관적 의식의 형식, 즉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의 현존철학의 양식과 다르지 않다. (중략) <현존재는 인간은 아닐지라도 인간과 다른 것도 아니다.>따라서 인간성의 존재의 근접적 사귐을 배제하면 하이데거의 철학이 휴머니즘의 인간 철학에 반대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기실 그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철학은 서구철학사를 관통해 온 현존과 존재의 형이상학과 휴머니즘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위의 구절을 보면 데리다는 하이데거를 마치 종래의 현상학자로 몰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이데거는 스승의 현상학에 대해서 처음으로 반기를 든 인물이다. 현존과 존재의 차이는 현재와 현재완료의 차이와 같다. 현재완료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를 현상학자로 몰아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데리다의 문자학에는 바로 후설과 하이데거와 레비스트로스, 멀게는 루소와 니체, 그리고 메를로-퐁티, 베르그송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들은 데리다의 주름과 같다. 데리다는 이들 주름을 넘어서기 위해, 혹은 새로운 주름(하이데거와 자신의 경계)을 만들기 위해 하이데거를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프랑스와 독일의 보이지 않는 철학적 주도권의 경쟁인지, 민족적 감정인지 알 수 없다. 데리다는 자신의 정체성과 프랑스의 자존심을 하이데거에 대한 공격으로 달성했는지도 모른다.
현상학으로부터 가장 먼저 이탈한 하이데거를 단지 그를 공격하기 위해 현상학자로 돌아 세우는 것은 결국 하이데거를 이성주의자로 낙인찍는 것이다. 이는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존재자로부터 날카로운 돌아섬’ ‘역전의 돌아섬(180도의 반전)’을 모르는 소치이다. 데리다는 그 돌아섬을, 계속되는 차연으로, 느슨하게 돌아서고 있고, 타자의 타자로 우회적으로 돌고 있는 반면에 하이데거는 그것과 다르다. 하이데거는 존재(실제로 존재자)에서 현존재(실제로 존재)로 바로 떨어지고 있다.
하이데거는 어쩌면 제자리에서, 점(點)에서 비존재(실제로 존재)에로 돌아서버리는 것에 비할 수 있고, 데리다는 끝없는 원의 궤적을 그리는 것에 비할 수 있다. 물론 데리다의 차연은, 차이의 연장(延長)을 통해 의미를 무의미로 바꾸는 것이겠지만, 차이의 ‘연장’이라는 개념이 존재자가 존재로 들어가는 구멍(空)임을 모르는 것 같다. 모든 점(點)처럼 말이다. 만약 중심이나 중점이 없다면 구태여 차연을 할 필요가 없다. 어느 지점에 있든 존재의 무수한 점, 무한소(無限素)를 향하여 들어가면 그만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하이데거는 텍스트가 필요 없다.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관계는 마치 돈오점수(頓悟漸修), 교선(敎禪)의 관계와 같다. 데리다=점수(漸修)=교종(敎宗), 하이데거=돈오(頓悟)=선종(禪宗)이다. 데리다의 문자학은 차연을 통해 무의미(無意味)를 추구하지만,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존재를 통해 무(無)의 본질(實在)에 바로 들어간다. 두 철학자의 근본적인 차이는 데리다는 불교의 무(無)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반해 하이데거는 무(無)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데리다의 한계는 문자학의 특성으로 인해 항상 해석학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무(無)가 아니라 무의미(無意味)를 주장하고 있다. 무의미는 무를 향하여 갈 수 있으나 무는 아니다. 무의미는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가는 과정 중에 있다. 결국 데리다는 프랑스 합리주의 철학의 전통을 따라 의미의 이중성이나 양가성으로 자연(존재, 실재)에 귀환하고 있다.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관계를 불교의 교선(敎禪)이나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비교하면 보다 소상하게 알 수 있다. 교종의 대종을 이루는 화엄종과 선종의 대종을 이루는 남종선의 간화선은 참으로 대척점에 있다. 화엄학은 선(禪)을 이학(理學)으로 푼 것이라면, 선(禪)은 화엄을 사실(事實)로 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禪)은 돈오돈수(頓悟頓修)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 점수(漸修)는 윤리적 사고에 머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리다는 교종(敎宗)-점수돈오(漸修頓悟)/돈오점수(頓悟漸修)-문자학/기(記)-무의미(無意味)-이중적 의미의 연쇄에 있다면, 하이데거는 선종(禪宗)-돈오점수(頓悟漸修)/돈오돈수(頓悟頓修)-존재론/기(氣)-무(無)-관음(觀音)·법음(法音)의 연쇄에 있다.
데리다 (차연) | 교종(敎宗) (경전) | 점수돈오(漸修頓悟)/ 돈오점수(頓悟漸修) | 문자학/ 기(記) | 무의미 (無意味) | 이중적(二重的) 의미 |
하이데거 (존재) | 선종(禪宗) (교외별전) |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돈수(頓悟頓修) | 존재론/ 기(氣) | 무(無) 존재(存在) | 관음(觀音)/ 법음(法音) |
데리다의 문자학과 텍스트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존재보다 더 서양알파벳 표음문자 문명의 족쇄를 느끼게 한다. 데리다는 니체에 의해 출발하고, 하이데거에 의해 제대로 철학적으로 정리된 ‘탈(脫)이성주의 철학의 흐름’을 프랑스의 문화적 문법에 토착화한 공은 있지만, 그에게는 어딘가 하이데거의 카피(copy)의 냄새가 짙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를 이해하지 못하거나(낮은 차원에 있거나) 하이데거를 알면서도 자기의 이해차원보다 낮은 차원에서 하이데거를 공격함으로써 일반인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혼란을 유도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텍스트의 언간(言間, 空白)의 의미를 읽으면서(이것은 부재의 현존이다), 특히 하이데거를 나치즘과 연결시키려는 안개를 피우는 대목과 문체는 바로 그가 하이데거에게 처음부터 네거티브(negative)한 해석을 하려하고 있다는 의도와 콘텍스트를 느끼게 한다. 실로 텍스트 밖에 콘텍스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자를 통해서 문자 밖의 분위기를 읽는 좋은 예이다.
철학적 문장 혹은 문법적 문장에는 개인 혹은 집단의 의식이 작용하는데 그 의식의 이면에는 양(陽)의 콘텍스트와 음(陰)의 콘텍스트가 흐르고 있다. 전자는 문장을 해석함에 있어서 포지티브한 입장에 서고, 후자는 네거티브한 입장에 선다. 해석학적 차원이라는 것은 항상 둘로 갈라진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신화와 같은 비문법적 문장에는 개인 혹은 집단의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그 무의식은 결국 언어학의 음소의 차원인데 여기에는 항상 이원대립항이 숨어 있다. 이 이원대립항은 결국 음악의 멜로디처럼 플러스(+)/마이너스(-)의 리듬의 양상을 보인다. 결국 신화적 담론은 음악이다. 텍스트의 저변에는 항상 상징(象徵)처럼 기운(氣運)이 흐르고 있고, 콘텍스트의 저변에는 항상 음악(音樂)과 같은 기운(氣韻)이 흐르고 있다.
텍스트 (문법적 문장) | 의식 (집단) | 양(陽)의 콘텍스트 | 포지티브 해석학 | 상징(象徵) /기운(氣運) |
음(陰)의 콘텍스트 | 네거티브 해석학 |
콘텍스트 (비문법적 신화) | 무의식 (집단) | 양의 음소(音素) | 이원대립항 (대칭의 연속) | 소리(氣韻) /음악(音樂) |
음의 음소(音素) |
이제 어떤 담론에서도 기운(氣運, 氣韻)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서양철학은 말로는 어떤 말을 하든지 간에,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닌, 자연 그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어떤 철학적 진술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는 사기와 진실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철학은 마치 진실과 허위 사이를 곡예(曲藝)하는 ‘말들의 놀이’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언어=사물’을 추구하던 서양의 이성주의 철학의 전통은 하이데거의 등장으로 완전히 극복되고 다시 자연의 품으로, ‘대상으로서의 상(象)’에서 ‘존재의 물(物)’로, 물 자체로 돌아가게 되었다. ‘언어는 존재의 집’으로 변했다. 바로 이 지점에 도달함으로써 도리어 지금까지 서양철학이 머물렀던 위상(위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위상은 존재자-존재의 이중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과감히 “서양철학이 지금까지 존재라고 불렀던 것들은 모두 존재자이다”라고 천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비교는 매우 델리키트하다. 데리다는 결국 문자학의 차원에 머물음으로써 문자라는 표면의 ‘수평적 이중성’에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하이데거는 존재의 이면에서 이중성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수직적 이중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리다 | 문자학(에크리튀르) | 표면 | 수평적 이중성 | 의미/무의미 |
하이데거 | 존재론(소리) | 이면 | 수직적 이중성 | 본질현현/본질퇴거 |
* 데리다 문자학의 에크리튀르는 표면적인 것도 있을 수 있고, 이면적인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소리는 겉으로 표면적일지라도 이면의 존재를 끌고 올라간다. |
진리의 의미에 대한 하이데거의 은유를 김형효는 다음과 같이 상기시킨다.
“진리는 밀어냄(Entrückung)과 되돌아 옮김(Berückung)으로서 생기하는 ‘나타나는 감춤’(lichtende Verbergung)이다. 이 나타나는 감춤은 자신의 두 가지 계기들의 조화나 또는 어느 한쪽을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경우나 다 마찬가지로 존재자의 놀이를 위해 교차된 자유(das umstellte Offene)를 준다. 이 존재자의 놀이는 사물, 도구, 만들기, 일, 행위, 제물로서 존재하면서 존재자의 진리를 보호한다.”
“저러한 진리의 본질, 즉 마음(das Da)의 근원으로서 밀어내면서 동시에 되돌아 옮기는(entrückend-berückend) 나타남(Lichtung)과 감춤(Verbergung)은 우리가 자성화(Er-eigung)로서 경험하고 있는 그 본질의 근거에서 현현하고 있다.”
진리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밀어냄과 되돌아 옮김 등을 통한 자성화의 본질에 근거한 놀이로 바라봄을 알 수 있다. 존재의 유무도 마찬가지이다. 유무의 왕래라는 것도 결국 놀이의 일종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유무에 대한 김형효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유(有)를 본질의 생기로서 보면 그것은 본질현현(Wesung, 本質顯現)이고, 무(無)를 본질의 생기로서 역시 보면 그것은 본질퇴거(Ab-wesung, 本質退去)로 해석된다. <유(有)/무(無)>가 다 고착된 어떤 것(Etwas)이 아니라, 늘 오고가는 그런 왕래의 의미로서 나타난다.”
진리, 존재는 실은 언어의 등장이 없으면 드러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어가 진리와 존재를 한편에서 드러내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그것을 대상화하는 이중적 제스처의 도구임에랴! 언어의 등장은 이미 사물을 대상화하는 것의 출발이다. 음성언어의 단계에서는 소리의 비결정성과 비기록성으로 인하여 그(대상화) 정도가 약했지만, 문자언어의 등장으로 대상화는 완성된다. 문자 언어의 결정성과 기록성과 고정성(고정관념)은 바로 의미를 개념화함으로서 의미의 이중성을 의미의 대립성(대상화)으로 변화시킨다. 의미의 이중성이 동시성(同時性)이며 동거성(同居性)인 반면에 의미의 대립성은 동일성(同一性)에 속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에서 존재자(언어)로 나아간 반면, 데리다는 존재자(언어)에서 존재(무의미의 언어)에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불교의 마음(佛心)과 법성(法性)에 도달하였지만, 데리다는 서양의 ‘말소리중심주의’의 콤플렉스로 인해 존재자(언어; 데리다에게 알파벳 표음문자는 존재자의 원흉이다)에서 문자(존재자; 데리다는 문자를 존재로 보지만 실은 존재자이다)에로 피신하였다. 이것은 피신하는 척하는 피신이거나 거짓 피신이다.
문자에로의 피신(避身)은 존재로의 완전한 피안(彼岸)이 아니다. 비록 데리다는 문자를 공백의 문자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아직 문자에 얽매인 것이다. 철학적 대상화의 원인이 바로 문자에 있기 때문이다. 문자를 사용하면서 문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화두를 잡고 있으면서 화두를 벗어나지 못하는 초심선사와 같다. 데리다의 단계는 언어의 개념화(동일성)에서 이중적 의미(상징적 동거성)로 귀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에 얽매이면 결코 존재자를 현존재에 귀소(歸巢)시키지 못한다. 귀소 시키지 못하면 존재자에서 존재에로 완전히 귀환할 수 없다. 데리다는 존재(존재의 구멍, 틈, 흔적)를 엿볼 뿐이다. 그러나 존재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다.
자연의 소리는 존재이고, 인간의 목소리는 현존재(현재+존재=존재자+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소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목소리(인간)의 현존재를 설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데리다는 언어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문자에 머물렀다. 데리다가 문자에 머문 것은 바로 표음문자의 표음에서 표의문자의 문자로 건너간 것이다. 데리다는 그럼으로써 문자 이전의 음성언어의 음성과 존재, 소리의 일반적 존재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음성은 현존재의 존재성이라면 소리는 존재 일반, 자연의 존재성이다. 음성을 특수상대성이론이라면 소리는 일반상대성이론에 비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그 무(無)를 존재함의 진동(Erzitterung)으로 읽고 있다는 점이다. 무(無)가 진동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진동은 왕복을 의미하므로 무(無)는 유(有)에서, 유(有)는 무(無)에서 오가는 그런 진동자의 반복 운동과 같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닌가? 전자가 진동이라면 후자는 반진동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진동(振動)이라는 것을 김형효는 쉽게 진동자에 비유한다. 진동이라는 것은 반드시 진동자(振動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동자는 무(無)와 유(有)의 왕래에 해당하지만, 진동이라는 유무의 왕래가 아니라 무(無) 자체가 될 수도 있다. 이때의 진동은 파동과 같은 의미이다. 진동자는 유(有)와 무(無)의 왕래가 뿐만 아니라 유(有)와 유(有)의 왕래도 가능한 개념이다.
김형효의 주장대로 “여거(如去)는 여래(如來)의 바탕으로서의 체(體)이고, 여래는 여거의 무늬로서의 상(相)이라고 보아도 좋으리라. 즉 여거는 공(空)이며, 여래는 색(色)과 유사하게 해석되어도 무방하다는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왜나하면 공(空)은 색(色)의 바탕이요, 색(色)은 공(空)의 무늬이기 때문이다.”이라면,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차이는, 하이데거는 여거(如去)의 입장에 있고, 데리다는 여래(如來)의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여거/여래를 다 왕래하지만, 데리다는 여래에만 있는 것 같다. 데리다는 언어라는 대상에 아직 잡혀있는 상태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의 이중성을 왕래하지만, 데리다는 존재자(언어, 문자)의 이중성을 왕래할 뿐이다. 데리다는 무늬, 즉 문자의 입장에 있다. 그런데 문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연의 표상(자연을 드러내는)으로서의 문자가 있고, 언어(자연을 대상화하는)로서의 문자가 있다. 전자는 여래의 입장에 있지만, 후자는 존재자의 입장에 있는 것이다. 데리다는 여래와 존재자의 사이에 있다. 이는 문자의 개념화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미와 개념은 다르다. 의미는 쉽게 무의미가 되지만, 의미의 이중성과 의미의 변전이 가능하지만 개념은 대상화된 언어이다. 소리는 의미의 단계, 의미의 이중성과 변전의 단계에 있지만, 문자는 개념화로 나아가기 쉽다.
실지로 사물의 대상화라고 말하지만, 사물의 대상화의 실현은 언어(특히 문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사물 자체는 대상화되지 않는다. 이미 대상화된 사물이 언어이다. 그래서 언어에서 출발하면 결코 존재에 이르지 못한다. 언어의 도구성 때문이다. 도구는 존재의 가능성에서 이미 이용가능성이고 대상가능성이다. 따라서 결국 이용이 되고, 대상이 된다.
문자는 결국 이중성을 가진다고 해도(그것은 대립을 하거나 대립항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근본적인 존재(하나의 전체, 대상이 아닌 전체)가 될 수 없다. 문자는 궁극적인 기의(의미)도 되지 못하고, 기표도 되지 못한다. 문자는 기의와 기표 사이에서 때로는 존재자로, 때로는 존재로 자리매김하지만, 마지막에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문자의 존재로서의 간접성이고 추상성이다.
문자는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사물의 매개인데 때로는 양자를 통하게 하고, 때로는 양자를 불통하게 한다. 통하게 하는 영매는 종교의 신령과 통하고, 불통하게 하는 매개는 과학의 수단이 된다. 존재는 선후(先後)·상하(上下)·내외(內外)가 없다. 따라서 반대로 이것이 있으면 존재가 아니다. 문자는 내외가 있기 때문에 존재가 아니다.
“신(神)에게 고하는 말은 축고(祝告)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환되는 말은 언어(言語)이다. 그런데 실은 ‘언’(言)은 신에 대한 맹세, 즉 자기맹세다. ‘어’(語)는 말로 저주를 방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세상의 금언(金言)도 모두 신을 매개로 하여 성립한다. 고대의 언어규범은 모두 신이 정한 것이다.”
“언(言)은 신(辛)과 ㅂ(祝告器)로 이루어진 글자다. 신(辛)은 문신(文身)에 사용하는 침의 모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문신 형벌을 가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언(言)의 자형은 ‘신에게 맹세하여 기도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허위나 불순이 있다면 나는 신이 내린 형벌로서 문신을 당하는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자기 맹세를, 신(辛)과 ㅂ의 두 가지 형체소를 조합해서 표시한 것이다.”
“신(神)이란 바로 상징이다. 그래서 신과 교섭하는 수단도 모두 상징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에 문자도 상징적 수단을 형상화하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신은 스스로 고지한다. 신이 그 뜻을 나타낼 때에는 사람에게 빙의하여 사람의 입을 빌리는 것이 항례였다. 신들림을 일본어로 구치요세(口寄)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이 직접 찾아오는 것을 일본어로 ‘소리 낸다’ ‘소리 냄’(찾아 옴)이란 뜻을 지닌 ‘오토나후(おとなふ)’나 ‘오토즈레(おとづれ)’라고 한다. 이 말들은 모두 신이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신의 방문은 소리로 드러났던 것이다. (중략) 음(音)이라는 글자는 언(言)과 ㅂ에 신의 소리 냄이 일어남을 표시한 것이다. 신이 스스로 맹세할 리 없다. 그것은 사람의 기도에 대해 신의 소리 냄, 즉 신의 응답이다. 일본의 고대에서 ‘오토(소리)’란 말이나 자연의 소리를 뜻하고 ‘오토나히(소리 냄)’란 알 수 없는 것의 방문을 뜻하였다.”
“신은 으슥하고 어두운 것을 좋아한다. 제사도 대부분 철야로 이루어졌다. 암(闇)한 곳이야말로 신이 거주하는 세계이다. 암(암)이란 글자가 어째서 문(門)과 음(音)으로 이루어지는가? 문(問)이란 글자와 암(闇)이란 글자를 나란히 두고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문(問)은 남의 집 문 앞에서 용건을 묻는다는 글자가 아니다. 문(門)의 앞에 놓여있는 것은 ㅂ이며 신에게 아뢰는 말이다. 문(門)은 인가(人家)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신이 사는 곳에 세우는 사당 문이었다. (중략) 본래 은(誾)이라는 글자도 문(問)과 마찬가지로 신의 뜻을 물어 봄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그 물음에 신이 응답하는 것이 암(암), 즉 ‘소래 냄’이다. 따라서 은(誾)은 으슥하고 어둡다는 뜻이라기보다도 ‘묵묵하다’가 본의였을 것이다. 천자의 상례(喪禮)를 ‘양암(諒闇)하여 말하지 않음’이라고 하는데 ‘양암’은 본래 신의 소리 냄을 감득하는 상태이다. 곧 무성(無聲)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의미한다. 신은 말이 없다.”
신의 목소리, 혹은 소리는 문자에 있지 않다. 그런데 서양문명은 신의 목소리를 존재신학의 영향으로 절대화시킨 탓으로 이성중심의 원죄를 소리에 뒤집어씌우게 되고, 나아가서 문자가 가지는 의미의 결정성과 고정성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성중심주의를 극복한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문자에로 도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야말로 이성중심주의의 원흉인 것이다. 이는 호랑이를 피해서 도망한다고 하는 것이 호랑이굴로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학은 따라서 이성중심주의의 이중의 족쇄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했다. 이때의 신은 절대적인 신임은 말할 것도 없다. 결코 동양의 범신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데리다의 문자학은 신의 절대적인 소리를 피해서 ‘문자학’을 만들었다. 이는 ‘신의 소리를 죽인 것’이다. 그 대신 데리다는 문자를 부재(不在)라고 하고, 문자의 의미를 이중의 의미, 혹은 무의미로 만들었다. 데리다는 불행하게도 신의 본래의 소리, 은은(誾誾)한 소리,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소리 없는 소리, 무성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음(音)이라는 글자는 언(言)과 ㅂ에 신의 소리 냄이 일어남을 표시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신이 소리 없는 소리임을 안 대표적인 철학자가 하이데거였다. 하이데거는 신의 소리, 혹은 소리의 신을 존재라고 명명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하고, 소리를 현상학적인 환원으로서의 현존이 아닌 존재로 보았다.
소리의 철학은 일반성의 철학이고, 일반성의 철학은 본능의 철학이고, 생존의 철학이고, 상황의 철학이고, 모성의 철학이고, 자연의 철학이다. 모성의 철학, 자연의 철학은 동질성의 철학이다. 동질성(同質性)은 구체적(具體的)이고, 동시적(同時的)이고, 동거적(同居的)이다. 동질성은 추상적인 동일성과는 다르다.
소리학은 물학의 정점이다. 현전(현존)은 현존재이다. 소리의 철학은 결국 옛 풍류도의 전통을 오늘날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자연의 표지(문자)는 얼굴과 유전자 지도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자연의 표지(문자)가 아니다. 이름은 의식적으로 짓고 불러준 문화의 표지, 제 2차적인 표지에 불과하다. 이름은 이미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이다. 그러나 소리는 자연의 표지이다. 소리는 몸의 상태를 그대로 드러낸다. 단지 그 소리의 의미를 인간이 다 해독하지 못할 따름이다.
소리의 철학, 포노로지(phonology)는 마치 음악이 존재에 가장 가까운 예술인 것처럼 존재에 가장 가까운 철학이다. 음악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고, 이중적(다중적)이며, 결코 고정된 의미에 만족하지 않는다. 음악은 가장 존재에 가까운 존재양식이다. 존재양식이란 존재의 표현을 위한 불가피한 존재자이다. 존재양식은 존재의 표현을 위한 방편으로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 양식은 그 자체가 이미 양식의 변화와 비주체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양식은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 있다.
철학이 다른 문화장르보다 앞서거나 높은 곳에 있거나 적어도 형이상학적 위치에서 군림하는 시대는 지났다. 철학은 마치 여러 운동 종목 중의 한 종목이거나 여러 예술작품 중 한 작품이거나 ‘말장난’이 되고 말았다. 철학도 자신이 전제한 보이지 가정(假定, 假想)의 쳇바퀴 속에서 돌고 도는 다람쥐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철학은 그렇다면 이제 어떤 말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안정과 행복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 보람을 느끼게 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느냐의 현실적 효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철학도 예술이 되어야 한다. 이는 종교가 예술이 되어야 하는 것과 똑 같은 이치이다.
서양의 알파벳 문명은 시각 중심의 이성주의와 기독교라는 존재신학의 연합이라는 철학과 종교의 공모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옭고 그름의 가부(可否)의 도마에 올릴 생각은 없다. 그들이 그렇게 된 데는 나름대로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서양철학은 가부장제의 강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서양철학이 문제의 도마에 오른 것은 아마도 가부장제와 이성주의 문명의 한계에 직면한 인류가 다른 출구를 모색하는 ‘문명적-무의식적 필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문화(文化)의 문(文)은 언어(言語)에 의해 고정된 것을 의미하고, 화(化)는 고정된 것의 변화(變化)를 의미한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Being(文)- becoming(化)’과 같은 것이다. 문화는 새로워지지 않으면 문화가 아니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 이외의 모든 이름은 사칭한 것이다. 모든 이름은 사칭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성인조차도 사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을 법으로 삼는 도(道), 도법자연(道法自然)이야말로 천지인사상에 가장 근접한 것이다. 하늘이 명한 것이 도라는 천명지위도(天命之謂道)는 이를 인간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인간은 눈을 감고 말없이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자연의 소리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서양문명은 동일성을 전제한 문명이다. 동일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변증법에서 정(正)이 있기 때문에 반(反)이 있고, 정반(正反)의 교집합을 통해 통합을 이루면 그것이 다시 동일성이 되면서 동일성의 반복을 이어가는 것이 서양철학의 흐름이다. 서양의 근대합리주의철학과 후기근대해체철학이 겉으로는 반(反)인 것 같은데 실은 같은 내용을 말만 바꾸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해체주의도 동일성이 있기 때문에 해체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를 인도유럽어문명권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는 절대유일신이라는 동일성을 주장하는 반면 불교는 무자성(無自性)을 통해 동일성을 부정하고 있지만 이를 보다 넓게 바라보면 동일성의 문명권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는 불교적 사유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도의 바라문교와 유대의 기독교는 최고신을 설정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데리다는 해체주의의 키워드로 유령(spector, ghost)을 말하지만 그 유령이라는 것은 ‘가정’(as if=마치)을 ‘그 자체로’(as such=is=being=차이를 가진 동일성)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정’(가상)은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지만 결국 가정이야말로 바로 동일성의 이면구조인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허구)이 있기 때문에 동일성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유령인 것이다(가정=동일성=유령). 동일성의 구조가 바로 유령구조인 것이다. ‘as if’와 ‘as such’야말로 이중성 속의 이중성인 것이다.
‘as if’가 언어(구성, 거짓말)의 세계라면 ‘as such’는 진리(동일성, 참말)의 세계이다. 이 둘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상상 혹은 가상을 하지 않으면 동일성이라는 것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분법 자체가 상상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상상의 동물인 인간은 결국 상상함으로써 이분법과 함께 동일성이라는 것을 상상했고, 그 결과 진리라는 동일성을 찾아낸 셈이다. 결국 인간의 진리탐구는 세계를 이분법으로 나누어놓고 다시 그것을 통합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분과 통합하는 것 사이에는 시간의 개입과 함께 논리구성이 필요하긴 하지만 결국 하나의 세계를 향하는 셈이 된다. 인간은 영원히 그 통합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타고났으며, 그것은 항상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진리탐구는 상상(상상계)과 동일성(상징계)을 왕래하는 이중성의 공간이다. 결국 ‘as if=as such’가 된다. 이 둘의 밖에 있는 세계 혹은 이 둘의 안에 있는 세계는 이분법으로 사이(間)가 나지 않는 세계, 본래존재이다. 본래존재의 세계에는 시공간이 없는 실재(실재계)이다. 존재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시간이 아니다.
‘구성-해체’와 ‘해체-구성’은 직선적 선후(先後)의 사고, 즉 진리를 추구하는 세계에서 보면 다른 세계 같지만 순환(循環)의 사고로 보면 같은 것이다. 하나의 세트 속에 있는 두 구성요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일성-차이성’이든 ‘차이성-동일성’이든 같은 것이다. 결국 철학적 말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해체주의는 현상학의 이면인 것이다. 현상학에서는 환원이든 회귀든 지향이든 같은 것이다.
현상학은 판단정지(epoché)로 인해 의미가 꽉 차 있는 것, 엄밀성을 추구한다. 현상학적 환원은 불가피하게 기원(epoche)을 떠올리게 한다. 기원은 도리어 비어있음이다. 현상학의 시작(천지창조)과 끝(종말구원)은 비어있다. ‘시작-끝’과 ‘끝-시작’은 순환론의 세계에서는 같은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절대유일신(絶對唯一神)과 불교의 유아독존(唯我獨尊)의 부처는 말만 다르지 같은 의미가 됨을 알 수 있다. 신(神과 공(空), 무(無)와 무위(無爲), 나아가서 기독교의 유시유종(有始有終)과 천부경의 무시무종(無始無終)도 서로 상통함을 알 수 있다.
해체주의는 일면적으로 불교와 상통하는 철학적 구조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불교는 세계를 마야(幻影: illusion)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원리가 서양의 해체주의와 같은 것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말하자면 불교는 고정불변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관점의 거대한 철학(교리)체계라면 해체주의는 서양의 합리적인 전통 내에서 그것에 반기를 든 서양철학 내의 철학사조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칸트에 반기를 드는 칸트(Kant against Kant), 후설에 반기를 드는 후설(Husserl against Husserl), 헤겔에 반기를 드는 헤겔(Hegel against Hegel) 등 기존철학 체계 내에 도사린 일종의 틈(흔적, 새김)을 끄집어냄으로써 합리주의를 공격하는 것이다. 불교는 전반적으로 본질주의 밖에서 본질주의에 반기를 든 종교철학이라면 해체주의는 본질주의 내에서 본질주의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불교사상이나 노장사상을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철학적 글쓰기가 유행을 하지만 이것은 작은 현미경으로 본 신체를 신체 자체라고 보는 것과 같은 일종의 철학적 환원주의이다.
불교와 해체주의는 본질의 부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무자성은 모든 존재는 본질적 자아가 없고,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는 존재의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해체주의의 결정불가능성은 텍스트와 의미는 고정된 중심이 없으며, 항상 다층적이고 변하는 해석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는 의미의 고정된 본질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불교와 해체주의는 목적과 실천에서는 다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에 도달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이는 실천적 명상과 윤리적 생활을 통해 이루어진다. 해체주의의 목표는 고정된 의미와 진리를 해체하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는 텍스트와 언어의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불교는 또한 철학적이지만 종교적인 접근을 통해 개인의 내면적 성찰과 수행을 중시한다. 이에 비해 해체주의는 철학적 비판을 통해 사회적·문화적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비판한다. 이상을 통해 불교와 해체주의는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불교는 또한 자연주의도 같지 않다.
자연(자연적 존재)은 가정도 아니고, 동일성도 아니기 때문이다. 해체주의는 서양철학의 이분법과 결정론을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만 해체 속에 이미 도사린 구성의 잔재를 벗어날 수 없다. 해체(deconstruction)는 구성(construction)과 해체(destruction) 사이에서 틈(흔적 trace, 새김 inscription)을 주장하지만 서양철학의 현상학적인 전통에서 새로운 철학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철학적 소비로 끝날 공산이 크다.
이것은 남자로부터 씨(seed)를 받은 여자의 입장과 같다. 여자는 다른 남자의 씨(=의미=semantics)를 받을 수 있어도 자신이 스스로 의미(기표, signification)가 될 수 없다. 여성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자연(자연의 상속자, 자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손을 생산하는 데에 남성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가부장제 아래에서 그 이름은 족보에서 지워진다는 점에서 ‘페니스의 존재’가 아니라 ‘버자이너의 존재’로서 ‘틈의 존재’이다.
서양철학의 해체주의를 가지고는 구성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해체주의의 이중성은 이분법을 부정하지만 이분법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말만(무늬만) 해체이고, 그 이면에는 구성주의의 흔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해체주의의 이중성은 결국 존재론으로 나아갈 때 본래존재, 본래 하나였던 세계상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현상학의 초월성(주체적 초월)과 영원성(영원한 대상)은 실은 신(神)과 같은 차원의 존재(신=영혼)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신의 내재성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의 유일신을 무소부재(無所不在), 혹은 전지전능(全知全能)이라고 말한다. 무소부재는 현상학적으로는 실현될 수 없은 것이고, 진지전능도 마찬가지이다. 신이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은 제한적이고, 제약적인 현상학의 세계에서는 없다는 말이 되고, 전지전능도 마찬가지가 된다. 현상학적으로 존재유무는 존재론적으로는 유무라는 이분법을 완전히 벗어나는 차원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중성의 차원이 아니라 무량(無量)의 차원이다. 기독교의 신의 무소부재, 전지전능은 불교의 무량과 같은 말이다. 현상학적으로 무한대로 있다, 혹은 무한소로 있다는 말은 없다는 무(無)의 뜻이 된다. 그래서 그 없음을 있음으로 바꾸기 위해 존재론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생성하고 변화하는 존재로서의 자연은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이 전반적으로 소유론을 벗어나려면 해체주의가 아니라 불교적 존재론을 받아들이면서도 나아가서 도교적 자연주의, 즉 무위자연주의를 현대적으로 변형시켜서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아시아(동북아시아)에서는 불교이전에도 천부경(天符經)을 비롯하여 삼일신고, 참전계경 등 천부삼경을 경전으로 하는 단군교계통이 있었다. 단군교는 천지인정기신(天地人精氣神)사상을 기본원리로 하는 종교이다. 천부경의 원리는 중국에 전파되어 도교의 도법자연(道法自然)로 변형되었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은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삶을 추구하였다.
동북아시아에서 홍산문명을 일으킨 동이족(東夷族)이야말로 존재론적인 삶을 산 고대문명권이다. 동아시아 한자문화화권 속에서도 하화족(夏華族)의 중국문명은 농업혁명과 함께 농업생산과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점차 소유론적 삶을 강화한 문명이라 할 수 있다. 동이족의 홍산문명의 천지인사상은 중국문명에서 음양오행(陰陽五行)문화로 확대되고 재생산되어 합리성을 강화함으로써 동아시아를 재패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문명에 비해 근대서양문명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더욱더 소유론적인 삶을 강화한 문명권이라 할 수 있다.
서양후기근대의 해체주의는 불교의 직접·간접적 영향으로 일어난 철학사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조차도 신(神)과 동일성(=自性)을 부정하기는 했지만 생멸을 부정하는 진여(眞如)사상과 함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추구함으로써 자연적인 생성보다는 기독교의 천국과 같은 극락, 지옥을 설정한 종교이다. 불교도 인도의 브라만과 서양의 하나님이라는 동일성에 반기를 들었지만 자연의 생성을 존중하는 자연주의(=道法自然)를 실천한 종교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의 문제도 그렇다. 신을 말하면 이미 그 속에는 인간이 들어있고, 인간을 말하면 이미 그 속에 신이 들어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신과 인간은 둘 다 주체(주어)가 될 수 있는 존재로서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사물을 대상으로 보는 것과 신이 인간을 대상으로 보는 것은 이미 겹쳐있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동일성(이분법)보다는 동시성(이중성)의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칸트는 ‘물 자체’(Ding an sich=Thing in itself)를 알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그 때의 ‘물 자체’는 ‘사물 자체(존재사건)’(thing itself=event itself)와 다른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칸트의 ‘물 자체’는 사물의 본질이 있음을 전제하는 반면 ‘사물 자체’는 존재론적인 개념으로서 본래부터 ‘알 수 없는 존재로서의 사물(사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서양철학은 철저하게 현상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후기구조주의의 해체주의도 실은 죄다 현상학적인 차원의 철학이다. 존재를 현상학적인 차원에서 요리조리 본 것에 불과하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존재를 존재자로 본 것에 불과하다.
‘차이의 철학’은 ‘차이의 변증법’에 불과하다. 단지 종래의 본질주의적 철학이 원인적 동일성을 추구하는 철학이었다면 해체주의는 결과적 동일성을 추구하는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인에 동일성을 두었든, 결과에 동일성을 두었든 결국 동일성의 철학에 불과하다. 왼손에 있는 것을 오른손으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철학적 야바위인 것이다.
차이의 철학이 변증법과 달리 종래 진리의 밖에서 반(反)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원천적 틈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밖에서 변증(辨證)하는 것이나 안에서 차연(差延)하는 것은 결국 같은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변증하는 정반(正反)에는 이미 이중성이 있고, 그 이중성에서 새로운 정(正)으로서의 합(合)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운동하는 것은 모두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
밖에서의 공간은 안에서의 틈과 같은 것이다. 무한대는 무한소는 같은 것이다. 이 세계에서 완전히 이분(二分)되는 것은 없다. 모든 이분법은 인간이 사물을 장악하기 위한 시도이며, 결국 자연의 본래적인 생성을 왜곡하는 것이다. 구성과 해체도 일종의 이분법이다.
구성이든 해체이든 모두 가상을 기초로 하는 것이고, 이것은 동시에 현실이다. 우리는 사물 그 자체가 되지 않는 한 진정한 실재를 만날 수 없다. 현상학에서 선험, 초월, 지향은 같은 것이다. 현상학의 초월과 영원은 같은 것이다. 이것은 환원과 회귀가 방향은 정반대이지만 같은 순환 궤도에 있는 것과 같다.
서양철학의 현상학적 특징은 오늘날 ‘초월적 주체와 영원한 대상’으로 압축할 수 있다. 주체(나)는 이미 초월적 입장에 출발하는 것이고, 주체의 반대편에 있는 대상(타자)은 영원히 계속 연장되는 속성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나(ego)도 궁극적으로 알 수도 없지만 타자인 신(God)은 계속 잡히지 않고 달아나야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결국 ‘나와 신’의 숨바꼭질의 세계, 끝없는 순환 혹은 환원 혹은 회귀의 세계가 현상계인 것이다.
내가 있으니까 대상(타자)이 있고, 또한 타자로서의 신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분리되어있는 것이 이분법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중성의 관계에 있다. 이를 표현한 것이 바로 고대 샤머니즘의 천지인(天地人)사상이고, 중세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사상이고, 불교의 삼신일불(三身一佛)사상이다. 이분법에 빠져있는 현대인은 도리어 동일성(개념화)에 빠져 이러한 순환사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서양문명권은 ‘동일성(동일성-차이성)의 문명권’이라 할 수 있다면 동아시아 문명권은 ‘닮음(다르고-같음)의 문명권’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다름(차이)의 문명권’은 동아시아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 후기근대에 유행하는 ‘차이의 철학’은 동일성의 서양문명에 대한 자체 반란으로서 ‘무늬만 차이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차이는 인간이 만든 문명이 아닌 자연 그 자체이다. 자연만이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자연적 존재이고, 본래존재이다. 다음의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차이의 철학의 차연(差延)은 자연이 아니다.”
박정진 문화인류학 박사
[해체주의를 해체하다]
5-2-2.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텍스트론으로 변조한 데리다
소리와 몸짓이 왜 문자인가? 현존은 왜 동일성이고 근원인가? 이것은 서구문명, 알파벳 표음문자의 자기모순에 불과하다. 소리와 몸짓이야말로 현존이고 동시에 현존은 동일성도 아니다. 현존은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고, 광대의 표현을 통해 관객들은 차이를 느끼게 된다. 관객에는 차이가 더 중요하지만, 광대에게는 존재의 표현이 더 중요하다. 광대는 존재의 가능성에 있다.
도리어 현재진행형(현재분사)의 현존이야말로 차이(차연)와 존재(현존재)이다. 무언극은 당연히 현존이고 존재이다. 왜 그것을 문자라고 하고, 문자학으로 설명하는가. 문자의 ‘에크리튀르’(쓰여 진 것)야말로 과거분사적 의미가 아닌가. 차이는 부재이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존이기 때문에 드러나고, 부재는 현존의 지나감의 결과(현재완료)이다. 그래야 부재의 차이와 현존의 존재가 만나게 된다.
데리다의 차이는 아무래도 하이데거의 존재에 못 미친다. 어딘가 프랑스식의 억지가 있다. 여기서 프랑스식의 억지라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여야 하는 특성과 관련이 있다. 프랑스의 문화문법은 ‘존재의 무(無)’를 바로 무(無)라고 하지 못한다. 그래서 데리다의 텍스트 이론이 탄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텍스트는 설사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텍스트 자체는 있기 때문이다. 있는 것을 가지고 없다고 해야(의미를 무의미라고 해야) 적어도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말라르메는 아시다시피 ‘미메시스(mimesis)’로 대표되는 플라톤의 모방이론을 해체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에 따르면 배우의 몸짓이나 표정으로서의 문자가 모방이나 모방이 겨냥하고 있는 현존과 기원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미 있는 모방보다 의미를 지칭하지 않는 능기가 넘쳐흐르고 있다. 즉 이 세계의 텍스트에서 소기보다 언제나 능기가 과잉이다.”
여기서 ‘의미가 없는(비어 있는) 능기의 과잉’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의미보다는 무의미가 넘친다는 뜻이다. 동시에 소리의 능기는 완전히 생략한 채, 문자의 능기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이론은 텍스트이론이 될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모방이론에 의하면 본질이나 존재가 모방의 모델이기에 모델이 모방하는 자에 앞섰다. 데리다는 말라르메의 몸짓을 이렇게 설명한다. “말라르메의 배우의 몸짓은 아무 것도 모방하지 않고, 그의 몸짓이 만드는 문자 이전에 아무 것도 없다. 아무도 그의 몸짓을 규정하는 대목은 없다.
여기서 ‘몸짓이 만드는 문자 이전에 아무 것도 없다’는 몸짓을 문자로 환원시키는 동시에 문자를 “태초에 문자가 있었다.”는 식의 아포리아로 만드는 셈이다. 전반적으로 데리다에게는 사물의 문자에로의 환원이 내재되어 있는 셈인데, 그 문자는 결국 의미가 없는 ‘공백의 문자’인 것에 역설이 있다. 이는 야바위와 같다.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게?” 해놓고 결국 빈 상자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문자는 빈 상자에 불과하다. 왜 데리다는 공(空)을 말하면서 상자 자체가 없는 것은 생각하지 못할까.
데리다는 무언극의 몸짓은 바로 ‘이멘(hymen: 처녀막의 이중성)의 산종(散種: 헛되이 뿌려지는 씨앗)’과 같다고 생각한다. 무언극 배우의 즉흥적인 연기는 본래 대본이 없이 진행된다. 매우 상황적(contextual)이다. 무언극의 특징이 말이 없는 것이고, 동시에 몸짓의 연기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말의 대본(모델)이 없기 마련이다. 여기서 특히 몸은 중요하다. 말이 아닌 몸이야말로 해체철학을 이루는 출발점이자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배우의 몸과 몸짓을 문자라고 전제한다. 그에게는 현상 자체가 문자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현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문자는 의미가 없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paradoxical)이다. 왜 문자라고 전제해놓고, 문자의 특징인 의미를 무의미로 만드는 난해(難解)와 교란(攪亂)의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가. 데리다의 철학은 철학적 내용만이 이중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적 형식도 이중적이다. 데리다는 몸과 몸짓을 텍스트(text)라고 생각한다. 몸의 말없는 상황적 연기를 텍스트라고 하는 셈이다.
데리다는 이중성의 의미들은 ‘이멘’ ‘날개’ ‘새’ ‘부리’ ‘스페이드’ ‘부채’ ‘무희’ ‘백조’ ‘나비’ ‘젓가락운동’으로 표현하다가 마지막에 ‘팽이돌기’로 설명하기도 한다. “팽이가 돌면서 이 면이 저 면이 되고, 저 면이 이면이 된다. 다름과 같음이 서로 맞물면서 돌고 돈다. 팽이돌기에는 연기와 간격의 이중소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이중적 의미는 공(空)이 아니다. 이중적 의미론은 공(空)에 접근하는 ‘썼다가 지우는 것’이지, 처음부터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쓰지 않고 바라보는 것, 관음(觀音)이나 법음(法音)이 아니다.
데리다는 ‘말’은 버리고 ‘문자’를 택했다. 이때의 말은 소리(음성)로서의 말이고, 문자는 표음문자가 아니라 표의문자로서의 문자이다. 그런데 그의 문자는 기록으로서의 문자가 아니라 ‘공백으로서의 문자’ ‘차연으로서의 문자’이다. 그러나 ‘문자’는 ‘자연’(自然)이 아니고 ‘차연’(差延)도 ‘자연’(自然)이 아니다.
서양문명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존재신학의 절대신이다. 우리는 데리다의 문자학을 통해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절대신이란 기독교가 표방하듯이 인격신이며, 인격신은 말로는 인격신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 말 속에는 인간이 들어있다. 서양문명은 항상 사물의 뒤(이면)에는 사물보다 먼저 존재하는 존재(who, 주체, 제조자, 창조자, 명령자, 감시자, 심판자, 아버지)가 있다.
그래서 서양문명은 항상 ‘태초의 말씀’이나 ‘말소리(음성)’를 들을 때에도 항상 그 누구(who: 주체)가 숨어있다. 그래서 그것을 로고스(Logos)라고 하고, 자기환원이라고 한다. 이는 말소리중심주의(logo-phonocentrism)는 ‘말소리(logo-phono)’의 본질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바라보는, ‘logos=phone’라는, ‘말소리중심주의’의 ‘중심주의’가 그렇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말소리중심주의야말로 말소리중심주의인 자기환원인 것이다.
여기에는 음성언어나 문자언어, 그 가운데서도 표음문자의, 소리는 날아가기 때문에 날아가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잡아야 하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다. 만약 말소리는 말소리로 보지 않고 잡아야 할 필요성이 없으면 말소리중심주의가 필요 없다. 예컨대 처음부터 표의문자였다면, 문자는 날아가 버리지 않기 때문에 중심주의가 필요 없게 된다.
그렇게 보면 데리다의 문자학은 바로 알파벳 표음문자의 본질적인 문제(정신심리적 질병)를 치료하기 위해서 제안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질병(환자)과 치료(의사)라는 대칭관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왜 ‘소리’(phone)가 그 이성주의와 환원주의의 원인이 되는 지에 대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본원적인 문제이다.
데리다는 자신도 모르게(혹시 알았을 수도 있다) 서양문명의 집단무의식으로 문자학의 처방을 한 셈이다. 이것은 문화적 필요성에 의한 것이다. 철학도 그 기저에 있어서는 삶의 테두리에서 발생하는 필요와 연관이 있다. 문자학은 서양문명의 자기환원이면서 동시에 자기치료이다. 말소리중심주의의 서양문명은 항상 역설적으로 ‘쓰는 자(who=인간)’가 숨어 있어서, 다시 말하면 ‘음성이 발하면’ (조금 늦은) 차연(差延)으로서 에크리튀르하여야 한다(에크리튀르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말소리중심으로 인해(그것의 반사로서) 문자가 필요하고, 문자는 차연이 되고, 차연은 표시가 된다(그러면서도 문자의 기록성을 간과한다).
실제 이성주의는 말소리(logos=phone) 때문이 아니라 문자기록성(logos=letter) 때문이다. 이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의 한자문화권에서도 이성주의가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더욱이 표의문자는 그것을 발음해도(parole), 말소리중심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중국은 말소리를 운율로 사용하면서 시(詩)를 발전시켰다.
서양문명의 이러한 과정은 존재신학이 아니라 자연신학을 대칭으로 두면 보다 선명해진다. 자연신학은 ‘누가 없음’(no-who: 비주체)이다. 그래서 신은 범신이고, 범신은 자연이고, 자연은 소리이고, 소리는 말(음성)이고, 말을 현존이고, 현존은 표현이다. 소리와 말을 이성주의의 원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who: 주체)=존재신학=신=인격신=인간=문화(문명)=
문자=차연(부재)=표시
누가 없음(no-who: 비주체)=자연신학=신=범신=자연=소리=말(음성)=현존=표현
데리다의 문자학이 ‘소리를 문자에로 끌어넣고’ 있는데 반해 필자의 포노로지는 ‘문자를 소리에 끌어넣고’ 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공허(空虛)의 철학’, 해체철학의 본래 취지에 이르기 쉽다. 이는 소리 자체가 공기(空氣)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문자는 백지(白紙, 바탕)의 산물이다. 소리는 공기를 바탕으로 하는 문자이다. 그러한 점에서 ‘필자의 포노로지’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가깝다.
존재(Sein)는 왜 현존재(Da-sein: Being-there)인가. 현존재는 현재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살아있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공동존재’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하이데거가 이것을 ‘고요의 종소리(Geläut der Stille)’에 비유한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종소리는 자선과 시여를 알리거나 종용하는 그런 신호이다. 그러므로 고요의 종소리는 무(無)와 공(空)이 시여와 보시를 알리거나 또는 종용하는 그런 신호이다. 공(空)의 보시, 베품, 몸짓, 보여주기로서의 계시를 종소리가 대신한다. 또 그는 말은 존재의 신호하기(Winken)라고 언명하기도 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호하기(Winken)은 오게끔 신호하기(Zu-winken)와 가게끔 신호하기(Ab-winken)의 의 두 가지 질서로 나누어진다.” 이 존재의 말로서의 신호하기를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신호는 나타나면서 은닉시키는 것(das lichtende Vehüllen)의 심부름(Botschaft)이다.”
하이데거와 데리다는 같은 <존재와 차연> <차연과 존재>를 말하면서도 하이데거는 소리에서, 데리다는 문자에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함을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소리와 문자를 통해서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데리다에겐 하이데거의 소리에 대한 비유가 ‘현존=현재’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하이데거야말로 가장 서양문명의 말소리중심주의의 콤플렉스를 벗어난 상태에서 자신의 존재론을 주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장 자연에 가까이 다가간 철학자로 보인다.
하이데거는 종소리에서 소리의 존재성을 비유할 뿐만 아니라 ‘말하다’ 자체가 바로 존재의 탈은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로고스의 개념을 서구 철학사는 <오성>(ratio), <말>(verbum) <세계법칙>(Weltgesetz) <논리적인 것>(das Logische) <사유의 필연성>(Denknotwendigkeit) <의미>(Sinn) <이성>(Vernunft) 등으로 해석해왔다는 것이다. (중략) 로고스의 동사형인 <legein)은 <말하다)(sagen) <담화하다>(reden) <언표하다>(aussagen)의 의미로 해석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 이전에는 그 동사는 <모으다>(zusammenbringen)의 의미로 읽혀지면서 마치 라틴어의 <모으다>의 뜻인 <legere>나 독일어의 <lesen>(읽다/모으다/줍다/가려내다/강의하다)의 의미와 방불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legein>이 <모으다>의 뜻으로 해석되기 이전에 그 동사는 본디의 어원에서 <놓다, 저장하다, 간직하다>(legen)의 의미로 먼저 이해되어야 된다고 하이데거가 설명한다.”
<legein>이 말하다, 담화하다, 언표하다 등의 의미로 진화한 것에 대한 하이데거의 주장과 이에 대한 김형효의 설명을 들어보자.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에 의하면 <말하다> <담화하다> <언표하다> 등의 의미는 <비은적성에 놓여 있으면서 본질을 현전시키는 모든 것을 함께 앞에 두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중략) <말하다>라는 그리스적인 의미는 뜻을 소리로 나타낸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은적되어 있는 것을 탈은적화(Entbergung) 시키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표현과 의미가 말하는 것의 전부라고 간주해왔으나, 그런 음성적인 표현보다 오히려 감추어진 것의 펼침을 <말하다>의 본질이라고 그리스인들이 여겼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앞에 두다>, <앞에 놓다>와 같은 뉘앙스가 늘 <legein>의 어원 속에 잠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말하다>의 뜻이 <소리로서 표현하다>가 아니고, 은적으로부터의 나타남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 것>이라면, <듣다>의 의미도 그냥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일 수 없다.”
하이데거는 <듣다>의 존재론적 특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듣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요구된 말을 스스로 모으는 것이고, 듣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귀담아 들으려고 모으는 것이다. 귀담아 들으려는 것(Horchsamen)에 경청(Gehör)이 자신의 본질을 현현한다. 우리가 전적으로 귀(Ohr)인 한에서 우리는 듣는다. 그러나 그 귀는 청각적인 감각기관을 뜻하지 않는다.”
김형효의 설명과 하이데거의 이어지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마음에서 귀담아 들으려는 경청의 자세가 없이는 물리적인 들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과학적인 들음의 현상 진단은 대단히 공허한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말함이 소리의 진동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래서 말함과 들음은 연구조사의 주제로서 통계자료로 입력되는 그런 수치상의 문제일 수 없다. 가장 잘 듣는 마음은 ‘단순한 것에 주의를 보내는 숙고’에서 가능하다.”
하이데거의 듣는 행위에 대한 존재론적 견해와 김형효의 설명을 다시 보자.
“우리가 귀를 갖고 있기 때문에 듣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듣기 때문에 귀를 갖고 있고, 또 육체적으로 청각을 갖고 있다. 이 말은 마음이 들으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 귀가 듣지 않는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우리에게 말이 건네진 것에 귀속하는 한에서 우리는 들어왔다.”
말하고 듣는 행위에 대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인 결론을 김형효의 부연설명을 통해 살펴보자.
“고대 그리스적인 의미의 <legein>은 우리에게 말해진 것을 귀담아 듣고 그것을 앞에 펼쳐 놓는 것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말해진 것을 귀담아 들으려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귀속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말해진 것을 듣고 그것을 현전에 열어 보이려는 것이 곧 말하기로서의 펼쳐 보임이다. 그러므로 듣지 않으면 말하기가 불가능하다. 말하기는 먼저 들은 것에 대한 교응(交應)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말하기(legein)가 곧 교응하기(homologein)와 같다고 지적하였다. 그런 점에서 듣기가 없으면 말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말하기와 듣기가 서로 동거하고 있다고 봐야 하리라.”
하이데거의 로고스의 개념은 다른 서양철학자들과는 다르다. 그리스의 로고스의 본래적 의미를 탐색하는 것을 통해 존재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말하고 듣는 것은 단지 소리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탈은적화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하이데거는 소리를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하이데거는 서양문명, 즉 알파벳 표음문자의 ‘소리에 대한 콤플렉스’를 처음으로 완전히 벗어난 철학자임에 틀림없다. 그는 소리에서 철학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야말로 ‘이성과 의식의 철학’을 완전히 ‘무의식과 존재의 철학’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이다.
데리다의 해석은 항상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에 의한 차이(差異)’를 기조로 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하이데거는 항상 ‘아래에서(저기서) 솟아오르는 청각에 의한 함성(喊聲)’을 기조로 하고 있다. 데리다는 현존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서 차이를 택한다면, 하이데거는 현재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현존재 혹은 존재를 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데리다는 하이데거를 종종 비판하였는데 이는 다분히 의도적 오해에 가깝다. 김형효는 하이데거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요약하면서도 하이데거에 우호적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비판해 온 하이데거의 철학도 데리다가 볼 때 전통적인 존재신학의 진리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이란 개념을 즐겨 쓰지 않고 인간의 실존양식으로서의 <현존재(Da-sein)>를 인간의 개념 대신에 사용하기에 휴머니즘을 파괴시킨 철학자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가 인간 실존의 양식을 <현존재>로 규정하였던 것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존재의 의미를 알고 있고, 그것과 가까이서 대화하고 사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형효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존재자의 협조 속에서 움직인다. 그런 협조로부터 존재의 의미에 관한 명사적인 물음과 존재의 개념에로의 경향이 솟아난다. 우리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모르지만, 우리는 존재의 협조(l'entente de l'être) 속에서 스스로를 지탱시키고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하이데거를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대목에서 하이데거에게 돌아선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존재론은 이미 형이상학적인 존재의 인간에 대한 내림(來臨)을 전제한 것이다. 즉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가 이미 우리 존재자의 가까이에 접근하여 존재자로서의 현존재가 존재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을 수 있는 그런 존재의 현존재(존재자)와의 근접성을 일러주고 있다. 그런 근접성에 근거해서 우리의 현존재는 존재를 모시면서 동시에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런 관계, 근접성의 관계는 주관적 의식의 형식, 즉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의 현존철학의 양식과 다르지 않다. (중략) <현존재는 인간은 아닐지라도 인간과 다른 것도 아니다.>따라서 인간성의 존재의 근접적 사귐을 배제하면 하이데거의 철학이 휴머니즘의 인간 철학에 반대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기실 그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철학은 서구철학사를 관통해 온 현존과 존재의 형이상학과 휴머니즘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위의 구절을 보면 데리다는 하이데거를 마치 종래의 현상학자로 몰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이데거는 스승의 현상학에 대해서 처음으로 반기를 든 인물이다. 현존과 존재의 차이는 현재와 현재완료의 차이와 같다. 현재완료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를 현상학자로 몰아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데리다의 문자학에는 바로 후설과 하이데거와 레비스트로스, 멀게는 루소와 니체, 그리고 메를로-퐁티, 베르그송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들은 데리다의 주름과 같다. 데리다는 이들 주름을 넘어서기 위해, 혹은 새로운 주름(하이데거와 자신의 경계)을 만들기 위해 하이데거를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프랑스와 독일의 보이지 않는 철학적 주도권의 경쟁인지, 민족적 감정인지 알 수 없다. 데리다는 자신의 정체성과 프랑스의 자존심을 하이데거에 대한 공격으로 달성했는지도 모른다.
현상학으로부터 가장 먼저 이탈한 하이데거를 단지 그를 공격하기 위해 현상학자로 돌아 세우는 것은 결국 하이데거를 이성주의자로 낙인찍는 것이다. 이는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존재자로부터 날카로운 돌아섬’ ‘역전의 돌아섬(180도의 반전)’을 모르는 소치이다. 데리다는 그 돌아섬을, 계속되는 차연으로, 느슨하게 돌아서고 있고, 타자의 타자로 우회적으로 돌고 있는 반면에 하이데거는 그것과 다르다. 하이데거는 존재(실제로 존재자)에서 현존재(실제로 존재)로 바로 떨어지고 있다.
하이데거는 어쩌면 제자리에서, 점(點)에서 비존재(실제로 존재)에로 돌아서버리는 것에 비할 수 있고, 데리다는 끝없는 원의 궤적을 그리는 것에 비할 수 있다. 물론 데리다의 차연은, 차이의 연장(延長)을 통해 의미를 무의미로 바꾸는 것이겠지만, 차이의 ‘연장’이라는 개념이 존재자가 존재로 들어가는 구멍(空)임을 모르는 것 같다. 모든 점(點)처럼 말이다. 만약 중심이나 중점이 없다면 구태여 차연을 할 필요가 없다. 어느 지점에 있든 존재의 무수한 점, 무한소(無限素)를 향하여 들어가면 그만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하이데거는 텍스트가 필요 없다.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관계는 마치 돈오점수(頓悟漸修), 교선(敎禪)의 관계와 같다. 데리다=점수(漸修)=교종(敎宗), 하이데거=돈오(頓悟)=선종(禪宗)이다. 데리다의 문자학은 차연을 통해 무의미(無意味)를 추구하지만,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존재를 통해 무(無)의 본질(實在)에 바로 들어간다. 두 철학자의 근본적인 차이는 데리다는 불교의 무(無)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반해 하이데거는 무(無)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데리다의 한계는 문자학의 특성으로 인해 항상 해석학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무(無)가 아니라 무의미(無意味)를 주장하고 있다. 무의미는 무를 향하여 갈 수 있으나 무는 아니다. 무의미는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가는 과정 중에 있다. 결국 데리다는 프랑스 합리주의 철학의 전통을 따라 의미의 이중성이나 양가성으로 자연(존재, 실재)에 귀환하고 있다.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관계를 불교의 교선(敎禪)이나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비교하면 보다 소상하게 알 수 있다. 교종의 대종을 이루는 화엄종과 선종의 대종을 이루는 남종선의 간화선은 참으로 대척점에 있다. 화엄학은 선(禪)을 이학(理學)으로 푼 것이라면, 선(禪)은 화엄을 사실(事實)로 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禪)은 돈오돈수(頓悟頓修)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 점수(漸修)는 윤리적 사고에 머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리다는 교종(敎宗)-점수돈오(漸修頓悟)/돈오점수(頓悟漸修)-문자학/기(記)-무의미(無意味)-이중적 의미의 연쇄에 있다면, 하이데거는 선종(禪宗)-돈오점수(頓悟漸修)/돈오돈수(頓悟頓修)-존재론/기(氣)-무(無)-관음(觀音)·법음(法音)의 연쇄에 있다.
데리다
(차연)
교종(敎宗)
(경전)
점수돈오(漸修頓悟)/
돈오점수(頓悟漸修)
문자학/
기(記)
무의미
(無意味)
이중적(二重的) 의미
하이데거
(존재)
선종(禪宗)
(교외별전)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돈수(頓悟頓修)
존재론/
기(氣)
무(無)
존재(存在)
관음(觀音)/
법음(法音)
데리다의 문자학과 텍스트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존재보다 더 서양알파벳 표음문자 문명의 족쇄를 느끼게 한다. 데리다는 니체에 의해 출발하고, 하이데거에 의해 제대로 철학적으로 정리된 ‘탈(脫)이성주의 철학의 흐름’을 프랑스의 문화적 문법에 토착화한 공은 있지만, 그에게는 어딘가 하이데거의 카피(copy)의 냄새가 짙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를 이해하지 못하거나(낮은 차원에 있거나) 하이데거를 알면서도 자기의 이해차원보다 낮은 차원에서 하이데거를 공격함으로써 일반인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혼란을 유도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텍스트의 언간(言間, 空白)의 의미를 읽으면서(이것은 부재의 현존이다), 특히 하이데거를 나치즘과 연결시키려는 안개를 피우는 대목과 문체는 바로 그가 하이데거에게 처음부터 네거티브(negative)한 해석을 하려하고 있다는 의도와 콘텍스트를 느끼게 한다. 실로 텍스트 밖에 콘텍스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자를 통해서 문자 밖의 분위기를 읽는 좋은 예이다.
철학적 문장 혹은 문법적 문장에는 개인 혹은 집단의 의식이 작용하는데 그 의식의 이면에는 양(陽)의 콘텍스트와 음(陰)의 콘텍스트가 흐르고 있다. 전자는 문장을 해석함에 있어서 포지티브한 입장에 서고, 후자는 네거티브한 입장에 선다. 해석학적 차원이라는 것은 항상 둘로 갈라진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신화와 같은 비문법적 문장에는 개인 혹은 집단의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그 무의식은 결국 언어학의 음소의 차원인데 여기에는 항상 이원대립항이 숨어 있다. 이 이원대립항은 결국 음악의 멜로디처럼 플러스(+)/마이너스(-)의 리듬의 양상을 보인다. 결국 신화적 담론은 음악이다. 텍스트의 저변에는 항상 상징(象徵)처럼 기운(氣運)이 흐르고 있고, 콘텍스트의 저변에는 항상 음악(音樂)과 같은 기운(氣韻)이 흐르고 있다.
텍스트
(문법적 문장)
의식
(집단)
양(陽)의 콘텍스트
포지티브 해석학
상징(象徵)
/기운(氣運)
음(陰)의 콘텍스트
네거티브 해석학
콘텍스트
(비문법적 신화)
무의식
(집단)
양의 음소(音素)
이원대립항
(대칭의 연속)
소리(氣韻)
/음악(音樂)
음의 음소(音素)
이제 어떤 담론에서도 기운(氣運, 氣韻)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서양철학은 말로는 어떤 말을 하든지 간에,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닌, 자연 그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어떤 철학적 진술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는 사기와 진실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철학은 마치 진실과 허위 사이를 곡예(曲藝)하는 ‘말들의 놀이’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언어=사물’을 추구하던 서양의 이성주의 철학의 전통은 하이데거의 등장으로 완전히 극복되고 다시 자연의 품으로, ‘대상으로서의 상(象)’에서 ‘존재의 물(物)’로, 물 자체로 돌아가게 되었다. ‘언어는 존재의 집’으로 변했다. 바로 이 지점에 도달함으로써 도리어 지금까지 서양철학이 머물렀던 위상(위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위상은 존재자-존재의 이중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과감히 “서양철학이 지금까지 존재라고 불렀던 것들은 모두 존재자이다”라고 천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비교는 매우 델리키트하다. 데리다는 결국 문자학의 차원에 머물음으로써 문자라는 표면의 ‘수평적 이중성’에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하이데거는 존재의 이면에서 이중성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수직적 이중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리다
문자학(에크리튀르)
표면
수평적 이중성
의미/무의미
하이데거
존재론(소리)
이면
수직적 이중성
본질현현/본질퇴거
* 데리다 문자학의 에크리튀르는 표면적인 것도 있을 수 있고, 이면적인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소리는 겉으로 표면적일지라도 이면의 존재를 끌고 올라간다.
진리의 의미에 대한 하이데거의 은유를 김형효는 다음과 같이 상기시킨다.
“진리는 밀어냄(Entrückung)과 되돌아 옮김(Berückung)으로서 생기하는 ‘나타나는 감춤’(lichtende Verbergung)이다. 이 나타나는 감춤은 자신의 두 가지 계기들의 조화나 또는 어느 한쪽을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경우나 다 마찬가지로 존재자의 놀이를 위해 교차된 자유(das umstellte Offene)를 준다. 이 존재자의 놀이는 사물, 도구, 만들기, 일, 행위, 제물로서 존재하면서 존재자의 진리를 보호한다.”
“저러한 진리의 본질, 즉 마음(das Da)의 근원으로서 밀어내면서 동시에 되돌아 옮기는(entrückend-berückend) 나타남(Lichtung)과 감춤(Verbergung)은 우리가 자성화(Er-eigung)로서 경험하고 있는 그 본질의 근거에서 현현하고 있다.”
진리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밀어냄과 되돌아 옮김 등을 통한 자성화의 본질에 근거한 놀이로 바라봄을 알 수 있다. 존재의 유무도 마찬가지이다. 유무의 왕래라는 것도 결국 놀이의 일종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유무에 대한 김형효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유(有)를 본질의 생기로서 보면 그것은 본질현현(Wesung, 本質顯現)이고, 무(無)를 본질의 생기로서 역시 보면 그것은 본질퇴거(Ab-wesung, 本質退去)로 해석된다. <유(有)/무(無)>가 다 고착된 어떤 것(Etwas)이 아니라, 늘 오고가는 그런 왕래의 의미로서 나타난다.”
진리, 존재는 실은 언어의 등장이 없으면 드러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어가 진리와 존재를 한편에서 드러내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그것을 대상화하는 이중적 제스처의 도구임에랴! 언어의 등장은 이미 사물을 대상화하는 것의 출발이다. 음성언어의 단계에서는 소리의 비결정성과 비기록성으로 인하여 그(대상화) 정도가 약했지만, 문자언어의 등장으로 대상화는 완성된다. 문자 언어의 결정성과 기록성과 고정성(고정관념)은 바로 의미를 개념화함으로서 의미의 이중성을 의미의 대립성(대상화)으로 변화시킨다. 의미의 이중성이 동시성(同時性)이며 동거성(同居性)인 반면에 의미의 대립성은 동일성(同一性)에 속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에서 존재자(언어)로 나아간 반면, 데리다는 존재자(언어)에서 존재(무의미의 언어)에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불교의 마음(佛心)과 법성(法性)에 도달하였지만, 데리다는 서양의 ‘말소리중심주의’의 콤플렉스로 인해 존재자(언어; 데리다에게 알파벳 표음문자는 존재자의 원흉이다)에서 문자(존재자; 데리다는 문자를 존재로 보지만 실은 존재자이다)에로 피신하였다. 이것은 피신하는 척하는 피신이거나 거짓 피신이다.
문자에로의 피신(避身)은 존재로의 완전한 피안(彼岸)이 아니다. 비록 데리다는 문자를 공백의 문자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아직 문자에 얽매인 것이다. 철학적 대상화의 원인이 바로 문자에 있기 때문이다. 문자를 사용하면서 문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화두를 잡고 있으면서 화두를 벗어나지 못하는 초심선사와 같다. 데리다의 단계는 언어의 개념화(동일성)에서 이중적 의미(상징적 동거성)로 귀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에 얽매이면 결코 존재자를 현존재에 귀소(歸巢)시키지 못한다. 귀소 시키지 못하면 존재자에서 존재에로 완전히 귀환할 수 없다. 데리다는 존재(존재의 구멍, 틈, 흔적)를 엿볼 뿐이다. 그러나 존재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다.
자연의 소리는 존재이고, 인간의 목소리는 현존재(현재+존재=존재자+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소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목소리(인간)의 현존재를 설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데리다는 언어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문자에 머물렀다. 데리다가 문자에 머문 것은 바로 표음문자의 표음에서 표의문자의 문자로 건너간 것이다. 데리다는 그럼으로써 문자 이전의 음성언어의 음성과 존재, 소리의 일반적 존재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음성은 현존재의 존재성이라면 소리는 존재 일반, 자연의 존재성이다. 음성을 특수상대성이론이라면 소리는 일반상대성이론에 비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그 무(無)를 존재함의 진동(Erzitterung)으로 읽고 있다는 점이다. 무(無)가 진동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진동은 왕복을 의미하므로 무(無)는 유(有)에서, 유(有)는 무(無)에서 오가는 그런 진동자의 반복 운동과 같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닌가? 전자가 진동이라면 후자는 반진동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진동(振動)이라는 것을 김형효는 쉽게 진동자에 비유한다. 진동이라는 것은 반드시 진동자(振動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동자는 무(無)와 유(有)의 왕래에 해당하지만, 진동이라는 유무의 왕래가 아니라 무(無) 자체가 될 수도 있다. 이때의 진동은 파동과 같은 의미이다. 진동자는 유(有)와 무(無)의 왕래가 뿐만 아니라 유(有)와 유(有)의 왕래도 가능한 개념이다.
김형효의 주장대로 “여거(如去)는 여래(如來)의 바탕으로서의 체(體)이고, 여래는 여거의 무늬로서의 상(相)이라고 보아도 좋으리라. 즉 여거는 공(空)이며, 여래는 색(色)과 유사하게 해석되어도 무방하다는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왜나하면 공(空)은 색(色)의 바탕이요, 색(色)은 공(空)의 무늬이기 때문이다.”이라면,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차이는, 하이데거는 여거(如去)의 입장에 있고, 데리다는 여래(如來)의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여거/여래를 다 왕래하지만, 데리다는 여래에만 있는 것 같다. 데리다는 언어라는 대상에 아직 잡혀있는 상태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의 이중성을 왕래하지만, 데리다는 존재자(언어, 문자)의 이중성을 왕래할 뿐이다. 데리다는 무늬, 즉 문자의 입장에 있다. 그런데 문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연의 표상(자연을 드러내는)으로서의 문자가 있고, 언어(자연을 대상화하는)로서의 문자가 있다. 전자는 여래의 입장에 있지만, 후자는 존재자의 입장에 있는 것이다. 데리다는 여래와 존재자의 사이에 있다. 이는 문자의 개념화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미와 개념은 다르다. 의미는 쉽게 무의미가 되지만, 의미의 이중성과 의미의 변전이 가능하지만 개념은 대상화된 언어이다. 소리는 의미의 단계, 의미의 이중성과 변전의 단계에 있지만, 문자는 개념화로 나아가기 쉽다.
실지로 사물의 대상화라고 말하지만, 사물의 대상화의 실현은 언어(특히 문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사물 자체는 대상화되지 않는다. 이미 대상화된 사물이 언어이다. 그래서 언어에서 출발하면 결코 존재에 이르지 못한다. 언어의 도구성 때문이다. 도구는 존재의 가능성에서 이미 이용가능성이고 대상가능성이다. 따라서 결국 이용이 되고, 대상이 된다.
문자는 결국 이중성을 가진다고 해도(그것은 대립을 하거나 대립항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근본적인 존재(하나의 전체, 대상이 아닌 전체)가 될 수 없다. 문자는 궁극적인 기의(의미)도 되지 못하고, 기표도 되지 못한다. 문자는 기의와 기표 사이에서 때로는 존재자로, 때로는 존재로 자리매김하지만, 마지막에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문자의 존재로서의 간접성이고 추상성이다.
문자는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사물의 매개인데 때로는 양자를 통하게 하고, 때로는 양자를 불통하게 한다. 통하게 하는 영매는 종교의 신령과 통하고, 불통하게 하는 매개는 과학의 수단이 된다. 존재는 선후(先後)·상하(上下)·내외(內外)가 없다. 따라서 반대로 이것이 있으면 존재가 아니다. 문자는 내외가 있기 때문에 존재가 아니다.
“신(神)에게 고하는 말은 축고(祝告)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환되는 말은 언어(言語)이다. 그런데 실은 ‘언’(言)은 신에 대한 맹세, 즉 자기맹세다. ‘어’(語)는 말로 저주를 방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세상의 금언(金言)도 모두 신을 매개로 하여 성립한다. 고대의 언어규범은 모두 신이 정한 것이다.”
“언(言)은 신(辛)과 ㅂ(祝告器)로 이루어진 글자다. 신(辛)은 문신(文身)에 사용하는 침의 모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문신 형벌을 가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언(言)의 자형은 ‘신에게 맹세하여 기도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허위나 불순이 있다면 나는 신이 내린 형벌로서 문신을 당하는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자기 맹세를, 신(辛)과 ㅂ의 두 가지 형체소를 조합해서 표시한 것이다.”
“신(神)이란 바로 상징이다. 그래서 신과 교섭하는 수단도 모두 상징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에 문자도 상징적 수단을 형상화하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신은 스스로 고지한다. 신이 그 뜻을 나타낼 때에는 사람에게 빙의하여 사람의 입을 빌리는 것이 항례였다. 신들림을 일본어로 구치요세(口寄)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이 직접 찾아오는 것을 일본어로 ‘소리 낸다’ ‘소리 냄’(찾아 옴)이란 뜻을 지닌 ‘오토나후(おとなふ)’나 ‘오토즈레(おとづれ)’라고 한다. 이 말들은 모두 신이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신의 방문은 소리로 드러났던 것이다. (중략) 음(音)이라는 글자는 언(言)과 ㅂ에 신의 소리 냄이 일어남을 표시한 것이다. 신이 스스로 맹세할 리 없다. 그것은 사람의 기도에 대해 신의 소리 냄, 즉 신의 응답이다. 일본의 고대에서 ‘오토(소리)’란 말이나 자연의 소리를 뜻하고 ‘오토나히(소리 냄)’란 알 수 없는 것의 방문을 뜻하였다.”
“신은 으슥하고 어두운 것을 좋아한다. 제사도 대부분 철야로 이루어졌다. 암(闇)한 곳이야말로 신이 거주하는 세계이다. 암(암)이란 글자가 어째서 문(門)과 음(音)으로 이루어지는가? 문(問)이란 글자와 암(闇)이란 글자를 나란히 두고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문(問)은 남의 집 문 앞에서 용건을 묻는다는 글자가 아니다. 문(門)의 앞에 놓여있는 것은 ㅂ이며 신에게 아뢰는 말이다. 문(門)은 인가(人家)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신이 사는 곳에 세우는 사당 문이었다. (중략) 본래 은(誾)이라는 글자도 문(問)과 마찬가지로 신의 뜻을 물어 봄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그 물음에 신이 응답하는 것이 암(암), 즉 ‘소래 냄’이다. 따라서 은(誾)은 으슥하고 어둡다는 뜻이라기보다도 ‘묵묵하다’가 본의였을 것이다. 천자의 상례(喪禮)를 ‘양암(諒闇)하여 말하지 않음’이라고 하는데 ‘양암’은 본래 신의 소리 냄을 감득하는 상태이다. 곧 무성(無聲)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의미한다. 신은 말이 없다.”
신의 목소리, 혹은 소리는 문자에 있지 않다. 그런데 서양문명은 신의 목소리를 존재신학의 영향으로 절대화시킨 탓으로 이성중심의 원죄를 소리에 뒤집어씌우게 되고, 나아가서 문자가 가지는 의미의 결정성과 고정성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성중심주의를 극복한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문자에로 도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야말로 이성중심주의의 원흉인 것이다. 이는 호랑이를 피해서 도망한다고 하는 것이 호랑이굴로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학은 따라서 이성중심주의의 이중의 족쇄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했다. 이때의 신은 절대적인 신임은 말할 것도 없다. 결코 동양의 범신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데리다의 문자학은 신의 절대적인 소리를 피해서 ‘문자학’을 만들었다. 이는 ‘신의 소리를 죽인 것’이다. 그 대신 데리다는 문자를 부재(不在)라고 하고, 문자의 의미를 이중의 의미, 혹은 무의미로 만들었다. 데리다는 불행하게도 신의 본래의 소리, 은은(誾誾)한 소리,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소리 없는 소리, 무성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음(音)이라는 글자는 언(言)과 ㅂ에 신의 소리 냄이 일어남을 표시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신이 소리 없는 소리임을 안 대표적인 철학자가 하이데거였다. 하이데거는 신의 소리, 혹은 소리의 신을 존재라고 명명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하고, 소리를 현상학적인 환원으로서의 현존이 아닌 존재로 보았다.
소리의 철학은 일반성의 철학이고, 일반성의 철학은 본능의 철학이고, 생존의 철학이고, 상황의 철학이고, 모성의 철학이고, 자연의 철학이다. 모성의 철학, 자연의 철학은 동질성의 철학이다. 동질성(同質性)은 구체적(具體的)이고, 동시적(同時的)이고, 동거적(同居的)이다. 동질성은 추상적인 동일성과는 다르다.
소리학은 물학의 정점이다. 현전(현존)은 현존재이다. 소리의 철학은 결국 옛 풍류도의 전통을 오늘날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자연의 표지(문자)는 얼굴과 유전자 지도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자연의 표지(문자)가 아니다. 이름은 의식적으로 짓고 불러준 문화의 표지, 제 2차적인 표지에 불과하다. 이름은 이미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이다. 그러나 소리는 자연의 표지이다. 소리는 몸의 상태를 그대로 드러낸다. 단지 그 소리의 의미를 인간이 다 해독하지 못할 따름이다.
소리의 철학, 포노로지(phonology)는 마치 음악이 존재에 가장 가까운 예술인 것처럼 존재에 가장 가까운 철학이다. 음악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고, 이중적(다중적)이며, 결코 고정된 의미에 만족하지 않는다. 음악은 가장 존재에 가까운 존재양식이다. 존재양식이란 존재의 표현을 위한 불가피한 존재자이다. 존재양식은 존재의 표현을 위한 방편으로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 양식은 그 자체가 이미 양식의 변화와 비주체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양식은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 있다.
철학이 다른 문화장르보다 앞서거나 높은 곳에 있거나 적어도 형이상학적 위치에서 군림하는 시대는 지났다. 철학은 마치 여러 운동 종목 중의 한 종목이거나 여러 예술작품 중 한 작품이거나 ‘말장난’이 되고 말았다. 철학도 자신이 전제한 보이지 가정(假定, 假想)의 쳇바퀴 속에서 돌고 도는 다람쥐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철학은 그렇다면 이제 어떤 말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안정과 행복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 보람을 느끼게 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느냐의 현실적 효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철학도 예술이 되어야 한다. 이는 종교가 예술이 되어야 하는 것과 똑 같은 이치이다.
서양의 알파벳 문명은 시각 중심의 이성주의와 기독교라는 존재신학의 연합이라는 철학과 종교의 공모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옭고 그름의 가부(可否)의 도마에 올릴 생각은 없다. 그들이 그렇게 된 데는 나름대로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서양철학은 가부장제의 강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서양철학이 문제의 도마에 오른 것은 아마도 가부장제와 이성주의 문명의 한계에 직면한 인류가 다른 출구를 모색하는 ‘문명적-무의식적 필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문화(文化)의 문(文)은 언어(言語)에 의해 고정된 것을 의미하고, 화(化)는 고정된 것의 변화(變化)를 의미한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Being(文)- becoming(化)’과 같은 것이다. 문화는 새로워지지 않으면 문화가 아니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 이외의 모든 이름은 사칭한 것이다. 모든 이름은 사칭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성인조차도 사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을 법으로 삼는 도(道), 도법자연(道法自然)이야말로 천지인사상에 가장 근접한 것이다. 하늘이 명한 것이 도라는 천명지위도(天命之謂道)는 이를 인간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인간은 눈을 감고 말없이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자연의 소리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서양문명은 동일성을 전제한 문명이다. 동일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변증법에서 정(正)이 있기 때문에 반(反)이 있고, 정반(正反)의 교집합을 통해 통합을 이루면 그것이 다시 동일성이 되면서 동일성의 반복을 이어가는 것이 서양철학의 흐름이다. 서양의 근대합리주의철학과 후기근대해체철학이 겉으로는 반(反)인 것 같은데 실은 같은 내용을 말만 바꾸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해체주의도 동일성이 있기 때문에 해체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를 인도유럽어문명권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는 절대유일신이라는 동일성을 주장하는 반면 불교는 무자성(無自性)을 통해 동일성을 부정하고 있지만 이를 보다 넓게 바라보면 동일성의 문명권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는 불교적 사유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도의 바라문교와 유대의 기독교는 최고신을 설정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데리다는 해체주의의 키워드로 유령(spector, ghost)을 말하지만 그 유령이라는 것은 ‘가정’(as if=마치)을 ‘그 자체로’(as such=is=being=차이를 가진 동일성)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정’(가상)은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지만 결국 가정이야말로 바로 동일성의 이면구조인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허구)이 있기 때문에 동일성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유령인 것이다(가정=동일성=유령). 동일성의 구조가 바로 유령구조인 것이다. ‘as if’와 ‘as such’야말로 이중성 속의 이중성인 것이다.
‘as if’가 언어(구성, 거짓말)의 세계라면 ‘as such’는 진리(동일성, 참말)의 세계이다. 이 둘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상상 혹은 가상을 하지 않으면 동일성이라는 것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분법 자체가 상상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상상의 동물인 인간은 결국 상상함으로써 이분법과 함께 동일성이라는 것을 상상했고, 그 결과 진리라는 동일성을 찾아낸 셈이다. 결국 인간의 진리탐구는 세계를 이분법으로 나누어놓고 다시 그것을 통합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분과 통합하는 것 사이에는 시간의 개입과 함께 논리구성이 필요하긴 하지만 결국 하나의 세계를 향하는 셈이 된다. 인간은 영원히 그 통합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타고났으며, 그것은 항상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진리탐구는 상상(상상계)과 동일성(상징계)을 왕래하는 이중성의 공간이다. 결국 ‘as if=as such’가 된다. 이 둘의 밖에 있는 세계 혹은 이 둘의 안에 있는 세계는 이분법으로 사이(間)가 나지 않는 세계, 본래존재이다. 본래존재의 세계에는 시공간이 없는 실재(실재계)이다. 존재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시간이 아니다.
‘구성-해체’와 ‘해체-구성’은 직선적 선후(先後)의 사고, 즉 진리를 추구하는 세계에서 보면 다른 세계 같지만 순환(循環)의 사고로 보면 같은 것이다. 하나의 세트 속에 있는 두 구성요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일성-차이성’이든 ‘차이성-동일성’이든 같은 것이다. 결국 철학적 말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해체주의는 현상학의 이면인 것이다. 현상학에서는 환원이든 회귀든 지향이든 같은 것이다.
현상학은 판단정지(epoché)로 인해 의미가 꽉 차 있는 것, 엄밀성을 추구한다. 현상학적 환원은 불가피하게 기원(epoche)을 떠올리게 한다. 기원은 도리어 비어있음이다. 현상학의 시작(천지창조)과 끝(종말구원)은 비어있다. ‘시작-끝’과 ‘끝-시작’은 순환론의 세계에서는 같은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절대유일신(絶對唯一神)과 불교의 유아독존(唯我獨尊)의 부처는 말만 다르지 같은 의미가 됨을 알 수 있다. 신(神과 공(空), 무(無)와 무위(無爲), 나아가서 기독교의 유시유종(有始有終)과 천부경의 무시무종(無始無終)도 서로 상통함을 알 수 있다.
해체주의는 일면적으로 불교와 상통하는 철학적 구조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불교는 세계를 마야(幻影: illusion)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원리가 서양의 해체주의와 같은 것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말하자면 불교는 고정불변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관점의 거대한 철학(교리)체계라면 해체주의는 서양의 합리적인 전통 내에서 그것에 반기를 든 서양철학 내의 철학사조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칸트에 반기를 드는 칸트(Kant against Kant), 후설에 반기를 드는 후설(Husserl against Husserl), 헤겔에 반기를 드는 헤겔(Hegel against Hegel) 등 기존철학 체계 내에 도사린 일종의 틈(흔적, 새김)을 끄집어냄으로써 합리주의를 공격하는 것이다. 불교는 전반적으로 본질주의 밖에서 본질주의에 반기를 든 종교철학이라면 해체주의는 본질주의 내에서 본질주의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불교사상이나 노장사상을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철학적 글쓰기가 유행을 하지만 이것은 작은 현미경으로 본 신체를 신체 자체라고 보는 것과 같은 일종의 철학적 환원주의이다.
불교와 해체주의는 본질의 부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무자성은 모든 존재는 본질적 자아가 없고,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는 존재의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해체주의의 결정불가능성은 텍스트와 의미는 고정된 중심이 없으며, 항상 다층적이고 변하는 해석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는 의미의 고정된 본질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불교와 해체주의는 목적과 실천에서는 다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에 도달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이는 실천적 명상과 윤리적 생활을 통해 이루어진다. 해체주의의 목표는 고정된 의미와 진리를 해체하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는 텍스트와 언어의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불교는 또한 철학적이지만 종교적인 접근을 통해 개인의 내면적 성찰과 수행을 중시한다. 이에 비해 해체주의는 철학적 비판을 통해 사회적·문화적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비판한다. 이상을 통해 불교와 해체주의는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불교는 또한 자연주의도 같지 않다.
자연(자연적 존재)은 가정도 아니고, 동일성도 아니기 때문이다. 해체주의는 서양철학의 이분법과 결정론을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만 해체 속에 이미 도사린 구성의 잔재를 벗어날 수 없다. 해체(deconstruction)는 구성(construction)과 해체(destruction) 사이에서 틈(흔적 trace, 새김 inscription)을 주장하지만 서양철학의 현상학적인 전통에서 새로운 철학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철학적 소비로 끝날 공산이 크다.
이것은 남자로부터 씨(seed)를 받은 여자의 입장과 같다. 여자는 다른 남자의 씨(=의미=semantics)를 받을 수 있어도 자신이 스스로 의미(기표, signification)가 될 수 없다. 여성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자연(자연의 상속자, 자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손을 생산하는 데에 남성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가부장제 아래에서 그 이름은 족보에서 지워진다는 점에서 ‘페니스의 존재’가 아니라 ‘버자이너의 존재’로서 ‘틈의 존재’이다.
서양철학의 해체주의를 가지고는 구성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해체주의의 이중성은 이분법을 부정하지만 이분법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말만(무늬만) 해체이고, 그 이면에는 구성주의의 흔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해체주의의 이중성은 결국 존재론으로 나아갈 때 본래존재, 본래 하나였던 세계상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현상학의 초월성(주체적 초월)과 영원성(영원한 대상)은 실은 신(神)과 같은 차원의 존재(신=영혼)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신의 내재성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의 유일신을 무소부재(無所不在), 혹은 전지전능(全知全能)이라고 말한다. 무소부재는 현상학적으로는 실현될 수 없은 것이고, 진지전능도 마찬가지이다. 신이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은 제한적이고, 제약적인 현상학의 세계에서는 없다는 말이 되고, 전지전능도 마찬가지가 된다. 현상학적으로 존재유무는 존재론적으로는 유무라는 이분법을 완전히 벗어나는 차원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중성의 차원이 아니라 무량(無量)의 차원이다. 기독교의 신의 무소부재, 전지전능은 불교의 무량과 같은 말이다. 현상학적으로 무한대로 있다, 혹은 무한소로 있다는 말은 없다는 무(無)의 뜻이 된다. 그래서 그 없음을 있음으로 바꾸기 위해 존재론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생성하고 변화하는 존재로서의 자연은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이 전반적으로 소유론을 벗어나려면 해체주의가 아니라 불교적 존재론을 받아들이면서도 나아가서 도교적 자연주의, 즉 무위자연주의를 현대적으로 변형시켜서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아시아(동북아시아)에서는 불교이전에도 천부경(天符經)을 비롯하여 삼일신고, 참전계경 등 천부삼경을 경전으로 하는 단군교계통이 있었다. 단군교는 천지인정기신(天地人精氣神)사상을 기본원리로 하는 종교이다. 천부경의 원리는 중국에 전파되어 도교의 도법자연(道法自然)로 변형되었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은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삶을 추구하였다.
동북아시아에서 홍산문명을 일으킨 동이족(東夷族)이야말로 존재론적인 삶을 산 고대문명권이다. 동아시아 한자문화화권 속에서도 하화족(夏華族)의 중국문명은 농업혁명과 함께 농업생산과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점차 소유론적 삶을 강화한 문명이라 할 수 있다. 동이족의 홍산문명의 천지인사상은 중국문명에서 음양오행(陰陽五行)문화로 확대되고 재생산되어 합리성을 강화함으로써 동아시아를 재패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문명에 비해 근대서양문명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더욱더 소유론적인 삶을 강화한 문명권이라 할 수 있다.
서양후기근대의 해체주의는 불교의 직접·간접적 영향으로 일어난 철학사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조차도 신(神)과 동일성(=自性)을 부정하기는 했지만 생멸을 부정하는 진여(眞如)사상과 함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추구함으로써 자연적인 생성보다는 기독교의 천국과 같은 극락, 지옥을 설정한 종교이다. 불교도 인도의 브라만과 서양의 하나님이라는 동일성에 반기를 들었지만 자연의 생성을 존중하는 자연주의(=道法自然)를 실천한 종교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의 문제도 그렇다. 신을 말하면 이미 그 속에는 인간이 들어있고, 인간을 말하면 이미 그 속에 신이 들어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신과 인간은 둘 다 주체(주어)가 될 수 있는 존재로서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사물을 대상으로 보는 것과 신이 인간을 대상으로 보는 것은 이미 겹쳐있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동일성(이분법)보다는 동시성(이중성)의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칸트는 ‘물 자체’(Ding an sich=Thing in itself)를 알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그 때의 ‘물 자체’는 ‘사물 자체(존재사건)’(thing itself=event itself)와 다른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칸트의 ‘물 자체’는 사물의 본질이 있음을 전제하는 반면 ‘사물 자체’는 존재론적인 개념으로서 본래부터 ‘알 수 없는 존재로서의 사물(사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서양철학은 철저하게 현상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후기구조주의의 해체주의도 실은 죄다 현상학적인 차원의 철학이다. 존재를 현상학적인 차원에서 요리조리 본 것에 불과하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존재를 존재자로 본 것에 불과하다.
‘차이의 철학’은 ‘차이의 변증법’에 불과하다. 단지 종래의 본질주의적 철학이 원인적 동일성을 추구하는 철학이었다면 해체주의는 결과적 동일성을 추구하는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인에 동일성을 두었든, 결과에 동일성을 두었든 결국 동일성의 철학에 불과하다. 왼손에 있는 것을 오른손으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철학적 야바위인 것이다.
차이의 철학이 변증법과 달리 종래 진리의 밖에서 반(反)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원천적 틈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밖에서 변증(辨證)하는 것이나 안에서 차연(差延)하는 것은 결국 같은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변증하는 정반(正反)에는 이미 이중성이 있고, 그 이중성에서 새로운 정(正)으로서의 합(合)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운동하는 것은 모두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
밖에서의 공간은 안에서의 틈과 같은 것이다. 무한대는 무한소는 같은 것이다. 이 세계에서 완전히 이분(二分)되는 것은 없다. 모든 이분법은 인간이 사물을 장악하기 위한 시도이며, 결국 자연의 본래적인 생성을 왜곡하는 것이다. 구성과 해체도 일종의 이분법이다.
구성이든 해체이든 모두 가상을 기초로 하는 것이고, 이것은 동시에 현실이다. 우리는 사물 그 자체가 되지 않는 한 진정한 실재를 만날 수 없다. 현상학에서 선험, 초월, 지향은 같은 것이다. 현상학의 초월과 영원은 같은 것이다. 이것은 환원과 회귀가 방향은 정반대이지만 같은 순환 궤도에 있는 것과 같다.
서양철학의 현상학적 특징은 오늘날 ‘초월적 주체와 영원한 대상’으로 압축할 수 있다. 주체(나)는 이미 초월적 입장에 출발하는 것이고, 주체의 반대편에 있는 대상(타자)은 영원히 계속 연장되는 속성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나(ego)도 궁극적으로 알 수도 없지만 타자인 신(God)은 계속 잡히지 않고 달아나야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결국 ‘나와 신’의 숨바꼭질의 세계, 끝없는 순환 혹은 환원 혹은 회귀의 세계가 현상계인 것이다.
내가 있으니까 대상(타자)이 있고, 또한 타자로서의 신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분리되어있는 것이 이분법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중성의 관계에 있다. 이를 표현한 것이 바로 고대 샤머니즘의 천지인(天地人)사상이고, 중세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사상이고, 불교의 삼신일불(三身一佛)사상이다. 이분법에 빠져있는 현대인은 도리어 동일성(개념화)에 빠져 이러한 순환사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서양문명권은 ‘동일성(동일성-차이성)의 문명권’이라 할 수 있다면 동아시아 문명권은 ‘닮음(다르고-같음)의 문명권’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다름(차이)의 문명권’은 동아시아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 후기근대에 유행하는 ‘차이의 철학’은 동일성의 서양문명에 대한 자체 반란으로서 ‘무늬만 차이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차이는 인간이 만든 문명이 아닌 자연 그 자체이다. 자연만이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자연적 존재이고, 본래존재이다. 다음의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차이의 철학의 차연(差延)은 자연이 아니다.”
박정진 문화인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