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주의를 해체하다]5-3-1. 시각-언어중심에서 청각-상징중심으로의 반전

박정진
2026-09-14

[해체주의를 해체하다]


5-3-1. 시각-언어중심에서 청각-상징중심으로의 반전

 

현대 철학의 성립은 흔히 다윈의 진화론, 프로이트의 리비도론, 마르크스의 유물론이라는 문지방을 넘어야 하는 것으로 집약되는데 이는 의식의 차원에서 무의식의 차원으로의 철학적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후기 근대의 철학자들은 저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독특한 색깔을 띠고 있다. 독일은 칸트 플러스 마르크스, 프랑스는 구조주의(구조언어학) 플러스 마르크스, 영국과 미국은 자유주의 플러스 실용주의 등등으로 저마다의 철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철학을 하건, 자연을 나름대로 해석한 자연 그 자체를 염두에 둔 철학은 아니다. 이것은 자연을 기준으로 보면 제 2차적인 산물이다.

서양문명의 문제점은 바로 <자연=이성=신=목소리(소리)>의 등식에 있다. 이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이유 없는 반항과 마찬가지로 이유 없는 전제이다. 물론 필자는 그 이유는 알고 있다. 서양의 <시각중심 문명>에 있다. 이것을 서양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사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자연=이성>의 등식을 부정하고(<자연≠이성>), 자연의 소리, 존재의 소리를 경청하려하고 있다. 데리다는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있음이다. 하이데거는 나아가 <이성=신>이라는 등식마저 깨고(<이성≠신>), 존재의 허무의 과정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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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은 지금까지 <자연=이성=신=목소리(소리)>의 등식을 주류로 삼아왔고, 이 등식이야말로 서양철학의 <자기가 가정한 것을 자기가 되풀이 하는> 자기순환의, 자기애정의 궤적이었다. 이성이야말로 본질적으로 환원적이다. 목소리는 본질적으로 환원적이지도 않고, 단지 자신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표현을 환원적이라고 보는 것은 표현을 단지 의식의 차원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표현은 무의식의, 몸의 차원의 문제이다. 바로 이것이 현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자연=목소리(소리)>의 등식에 눈을 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무(無)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텍스트마저도 불필요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선사(禪師)의 입장이다. 데리다의 문자학은 문자의 의미를 지우는 작업이지만, 하이데거는 아예 의미를 설정하지 않고 있다. 데리다는 존재의 틈바구니에서 솟아난 의미(이원대립항의 의미)를 지우고 있고, 하이데거는 존재의 구멍 자체를 들여다보고 있다.

목소리가 나오는 목구멍도 구멍이다. 목소리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리는 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소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양문명을 바라보면 마치 범인은 문자인데 항상 소리를 범인으로 오해한 잘못된 형사의 추적과 같은 것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스스로 잘못된 추정(존재자를 존재로 믿어온)을 안 최초의 철학자이다.

인간은 존재의 에너지의 분출을 위해 틈(구멍)을 요구한다. 그 틈으로 솟아오른 것은 존재자이다. 존재의 동사가 분출한 뒤에는 존재자의 명사가 되어버렸다. 존재자의 명사가 되어버린 인간은 다시 그 틈으로 존재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것은 아이러니이다. 인간과 세계가 연출하는 세계는 바로 아이러니의 세계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그야말로 그 아이러니를 철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한 철학이다.

인도와 실크로드의 신화에 공명조(共命鳥)의 전설이 있다. 머리는 둘이고, 몸은 하나인 이 새는 머리가 둘이므로 잠을 자는 시간도 음식을 먹는 입도 다르다. 하루는 한쪽 머리가 자고 있는 사이에 다른 머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한 머리는 혼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다른 머리에 미운 마음을 갖고 그를 죽일 생각으로 독초를 먹여버렸다. 결국 이 새는 죽어버렸다. 존재는 마치 공명조의 몸과 같고, 몸에서 솟아난 의미인 이원대립항은 서로 대립을 하는 두 개의 머리와 같다.

현존과 부재도 대립항 중의 하나이다. 현존이 죽으면 한 몽뚱아리에 붙어있는 부재도 동시에 죽는다. 현존과 부재는 하나이다. 어떤 의미도 의미의 이면에는 반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존재론의 입장에서 볼 때 의미는 무의미이다. 자연과 문화를 나누는 대칭도 실은 수많은 대칭과 경계의 하나일 뿐이고, 차이이며 흔적에 불과하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적으로 자기애정이라고 비판받는 <현존(présence)>이 세워진 자리에서 ‘존재자’를 확인하고 ‘존재’를 깨달음으로써, 나아가 ‘목소리의 현존’(現存)을 ‘존재의 자연(自然)’으로 연장함으로서 <현존(現存)=자연(自然)>의 성립과 함께 <존재(Sein)의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그렇다면 ‘현존’과 ‘현존재’의 차이는 무엇인가. 현존은 소리에 대해 잘못 규정된 ‘인간 의식의 자기환원’, 혹은 ‘존재신학의 자기환원’이라면, 현존재는 자연의 큰 리듬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존재(Da-sein)는 인간을 깨달음의 존재로 전환하기 위한 발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존재(Da-sein)와 음성(현존)과 에크리튀르의 관계를 도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현존재는 존재자의 존재이고, 사물을 대상화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이에 비하면 음성은 존재의 존재자이다. 그러나 존재의 전체성을 은유하고 있다. 음성이 표현적임은 물론이다. 음성은 몸 전체의 감정을 표현하지만, 결국 음성은 다시 자연에 흡수되며 존재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이에 비해 에크리튀르는 음성과 같이 존재의 존재자이다. 에크리튀르는 표지적이지만, 존재의 표면을 환유할 따름이다. 그 환유는 문자와 이성의 차가움을 특성으로 한다. 에크리튀르는 자연스럽게 자연에 흡수되는 음성과 달리, 그것의 기록성으로 인해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데리다는 ‘공백(空白)의 문자학’을 주장하여야 이성주의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현존재(Da-sein)

음성(현존)

에크리튀르(차이, 부재)

존재자의 존재

존재의 존재자

존재의 존재자

존재와 존재자의 경계

존재의 전체성을 은유

존재의 표면을 환유

 

표현적(表現的)

표지적(標識的)

 

몸 전체의 감정을 표현

문자와 이성의 차가움

 

음성은 자연에 흡수

공백의 문자학


 

데리다의 문자학에는 문자의 역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의 역설에는 이상하게도 문자에 얽매이는 아이러니를 읽을 수 있다. 이는 마치 불교적으로 말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색즉시공이 아닌, 말로만 색즉시공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혐의이다. 말하자면 그는 문즉시공(文卽是空)이라고 말하면서도 문즉시공이 되지 못하는 혐의가 있다. 데리다는 따라서 공즉시문(空卽是文)도 되지 못하고 있다.

데리다는 아직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 일이이(一而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데리다가 결정적으로 불교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유대인으로서 유대그리스도의 존재신학적 전통이 무의식에서 강하게 그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에 비해 하이데거는 게르만족인데 게르만족은 아리안족과 혈통이 섞여있다. 불교를 창도한 석가는 아리안족(아시아계)이 아닌가. 철학에서도 유전적 DNA가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데리다에 비하면 하이데거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입장에 있다. 하이데거는 공즉시색의 공(空)을 음(音)으로 느끼면서, 음즉시색(音卽是色)에서 다시 문자보다는 소리에 집중하는 음즉시공(音卽是空)의 차원에 도달한 느낌이다. 데리다는 정신계열 내의 보충대리에 있다면, 하이데거는 물학(物學) 및 기(氣)의 교차(交差)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데리다는 문자적 환원 및 강박관념에 있는가 하면, 하이데거는 무(無)라는 비근거의 근거에 있다고 보면 틀린 말일까.

 


데리다

색즉시공

(色卽是空)

문즉시공

(文卽是空)

정신계열(文字) 내의

보충대리(補充代理)

문자적(文字的) 환원 및 강박관념

하이데거)

공즉시색

(空卽是色)

음즉시공

(音卽是空)

물학(物學) 및

기(氣)의 교차(交差)

무(無)의 비근거의 근거로 돌아감


 

데리다는 표지적(標識的)이고 유기적(有記的)이고 무기적(無氣的)이다. 또 데리다는 대칭과 이중성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존재자와 존재자의 사이에서 찾는다. 이에 반해 하이데거는 존재적(存在的)이고 무기적(無記的)이고 유기적(有氣的)이다. 또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 존재자와 존재 사이에서 대칭과 이중성을 찾는다. 데리다가 표지학을 주장하는 이유는 유기적(有記的)-무기적(無氣的)인 것의 연쇄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문자의 특성이다. 이에 비해 하이데거가 존재론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기적(無記的)-유기적(有氣的)인 것의 연쇄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소리의 특성이다. 유기적(有氣的, 有機的)인 것은 진동적(振動的)인 것이고, 상호침투적이다.

“문자는 존재의 밖에 있다.” “소리는 존재의 안에서 밖으로 나온다.” 문자는 밖에 있으면서 표시적이지만 존재 안의 아무 것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무기적(無氣的)이다. 소리는 안에서 밖으로 나오지만 존재의 전체를 안으로 품고 있어 유기적(有氣的)이다. 소리는 존재적이다. 문자는 해체된 해골이다. 소리는 살아있는 살점이다. ‘살점’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는 신체적 존재(파동적 존재)이다.


데리다

표지적

(標識的)

유기적(有記的)

무기적(無氣的)

문자는 존재의 밖에 있다.(해체된 해골)

존재자/존재자의

대칭과 이중성

하이데거)

존재적

(存在的)

무기적(無記的)

유기적(有氣的)

소리는 존재의 안에서 밖으로 나온다. (살아있는 살점)

존재와 존재자/존재자와 존재의 대칭과 이중성


 

데리다의 보충대리는 서양철학의 양대 축인 정신계열과 물질계열 가운데 정신계열의 보충대리에 그치는 감이 있다. 이는 데리다와 정반대인 물질계열의 입장에 있는 들뢰즈를 비교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들뢰즈는 물질계열에서 보충대리를 하고 있다.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과 문자학(grammatology)’과 들뢰즈의 ‘기계주의(machinism)와 리좀(Rhizome)’은 서양철학과 문명의 두 레일(rail)이고, 두 수레바퀴이다.

보다 바람직한 것은 두 레일이 교차하는 것, 다시 말하면 정신계열의 차이(差異)와 물질계열의 차이(差異)가 만나는 교차(交差), 즉 차이들 간의 교차를 바라보는 ‘정신과 물질의 일반적(一般的) 차원에서의 교차’가 필요하다. 이것은 기(氣)의 교차(交差)이다. ‘기의 교차’야말로 포노로지(phonology)의 교차(交差)이다. ‘포노로지의 교차’의 관점에서 보면 정신/물질의 이분법도 ‘정신↔ 물질’의 교차의 좋은 예이다.

철학적 진화라는 것도 종래의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는 철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포노로지는 그라마톨로지를 포용한다. 나아가서 이성중심주의도 포용한다. 이성중심주의는 틀린 것이 아니라 한계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성중심주의도 일종의 정신과 물질 사이의 한정교환이다. 포노로지는 철학적 소통에 있어서 일반교환을 추구하는 철학이다. 그래서 종래의 것을 다 버리지는 않는다.

위의 교차의 관점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정신계열에 속하는 데리다보다는 물질계열에 속하는 들뢰즈에게 가깝다. 그러나 필자의 ‘물학(物學)’은 ‘유물론(唯物論)’이 아니다. 유물-기계적 존재론자인 들뢰즈는 역설적으로 기계를 가지고 생성을 설명하는 도착에 빠졌다. 유기체적인 자연을 기계로 환원시키는 것을 물론이고, 세계를 기계적 생성 혹은 차이의 반복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연결(connection)과 연접(conjunction)과 이접(disconjunction)이론은 기계로 환원된 생성적 세계관을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기계적 생성에는 심각한 ‘동일성의 불치병’이 숨어 있다. 이것은 자연의 생성이 아니라 자연과학적 기계론에 완전히 빠져있는 구제불능의 도착현상이다. 고정불변의 세계에 가장 가까이 간 것이 바로 기계이다.

나의 포노로지는 물학(物學)을 추구한다. 흔히 물학이라고 하면 유물론이라고 착각하기 일쑤인데 실은 물학의 물(物)이야말로 존재론의 존재이다. 정신-물질의 이분법이 아니라 심물일원론(心物一元論)의 입장에서 보면 심즉물(心卽物)이고, 물즉심(物卽心)이다. 그런 점에서 심학과 물학은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경지가 있다. 심학과 물학은 방편으로 나누어 접근할 수 있지만 종국에는 하나라는 것에 도달하지 못하면 심학도 물학도 관철하지 못한 것이 된다. 심학과 물학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기(氣), 기운생동, 울림, 공명(共鳴), 물활(物活)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기(氣)는 심(心)도 될 수 있고, 물(物)도 될 수 있다.

물론 들뢰즈의 프로이디언(Freudian) 유물론(materialism)은 물학과는 다르지만 이성중심주의의 원류인 정신계열보다는 그것에 반기를 든 물질계열이 물학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심학(心學)은 특히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영향으로 불교를 가장 대중적으로 상징하는 구절이 되었지만 여기서 심조(心造), 즉 마음이 만든다는 구절은 제조(製造)의 의미가 아니고 조화(造化)의 의미이다. 이를 잘못 읽으면 주술로 전락하게 된다. 사람들이 너무 욕망과 물질에 경도하니까,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마음을 주장한 것이다.

현대철학을 하려면 진화론이나 리비도론이나 유물론은 기본이다. 유물론이 물학이 되면 존재론에 도달하는 것이 되다. 존재론은 근본적으로 심물(心物)의 구분이 없는 것이고, 그것을 구분하면 이미 현상학이 되어버린다. 유물론은 물학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물학은 헤겔의 절대정신보다는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더 교감되는 바가 크다. 유물론은 물상(物象)에서 상(象, 現象)을 버림으로써 물질(物質)을 주장하였지만 물질은 물(物)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양학에서는 물(物)을 존재, 즉 자연의 개념으로 사용한 구절이 적지 않다. 물질은 문자(기호)보다는 자연에서 더 가깝다. 유물론은 자연을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만 극복하면 물학(物學)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접경에 와 있다. 이에 비해 문자는 자연의 표면의 기호이다.

‘기(氣)의 교차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데리다는 어딘가 문자(文字)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상식적으로 문자의 역설인 문자학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문자학은 ‘문자(文字)의 문자학’이 아니라 ‘공백(空白)의 문자학’인 것이다. 데리다는 정작 ‘문자-이성주의’의 맥락에 벗어나고 있다고 하면서도 문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문자를 가지고 문자를 벗어났다고 하는 셈이다. 이것은 서양문명의 문명적 패러독스이며 아이러니이다. 데리다는 소리도 문자라고 말하지만 그것에는 억지로 소리를 문자라는 틀 속에 집어넣는 인상이 짙다.

소리를 문자 속에 집어넣는 것보다는 문자를 소리 속에 집어넣는 것이 훨씬 용이할 것이다. 소리는 최초의 의미(기의)이면서 표상(기표)이기 때문이다. 소리는 본질적으로 자연 그 자체, 혹은 자연과 네트워킹(networking)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문자 속에 자연이 들어가는가. 자연 속에 문자가 들어가야 되지 않겠는가. 문자는 자연의 보충대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보충대리(補充代理)의 철학보다는 보충대신(補充代身)의 철학이 필요하다. 보충대신의 철학이야말로 자연의 재생산(reproduction) 시스템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문자학에는 어딘가 남성적 카피(copy)의 냄새가 있는 반면, 여성의 재생산(reproduction)에는 어딘가 자연과 연결되는 네트워크를 느낄 수 있다. 여성의 두 입술(two lips) 저편 어둠의 동굴을 거치면 자궁이 있는 것과 같다. 문자는 사물의 표면에 붙인 이름이지만, 소리는 무의식에서부터 솟아오르면서 우주적 울림에 참여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목소리는 환원적인 것이 아니라 몸에서 터져 나오는 직접적인 것이다. 마치 여자가 자궁을 통해 아이를 생산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글쓰기는 몸에서 떨어진 간접적인 것이다.

물론 글쓰기도 보기에 따라서는 작가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쓰기는 다른 수단인 문자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문자를 가지고(데리다는 물론 문자의 공백을 주장하지만) 존재의 직접성을 말할 수는 없다. 쓰기를 가지고 존재를 역설적으로 증명하기보다는 목소리를 가지고 존재를 느끼는 것이 존재에 이르는 참다운 길이다. 존재는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느끼는 것이다. 현존의 이름이 지금까지 이성주의의 원흉인 것처럼 매도되었지만, 실은 현존이야말로 가장 존재에 가까운 것이다.

태초의 말씀이나 목소리를 이성주의로 바로 연결하고 대입한 것은 마치 플라톤이 이데아를 실재로 본 것만큼이나 인간의 원천적인 착각이었으며, 결국 사물을 인간중심주의에 의해서 전도시킨 행위의 결과이다. 인간은 사물을 보는 순간, 생각하는 순간,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 스스로를 사물에 투사하는 버릇이 있다. 흘러가는 사물을 시간이라는 잣대로 통해 소급하고, 사물을 정지시키는 버릇이 있다. 생각이라는 것의 정체는 바로 환원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바로 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자인’(Da-sein)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소유라는 것이 어디에 붙어 있는(belong to, access to)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 사물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아야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존재는 시각적으로(능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수용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발명은 생산과 연결되고 발견은 재생산과 연결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데리다의 ‘차이’의 차이는 <노래와 문장>을 비교하면 쉽게 터득할 수 있다. 노래는 인간의 신체적 기표인 음성을 재료로 한다. 노래는 인간의 신체를 악기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노래는 호흡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서 호흡을 타지 않고는 절대로 노래를 부를 수 없다. 호흡에는 리듬이 있다. 노래는 공간을 향하여 나아간다. 노래는 결국 소리가 되어 자연 속으로 잦아진다.

이에 비해 문장은 인간의 신체와 직접 관계가 없는 기호적 기표인 언어(기호, 문자)를 사용한다. 글씨 쓰기는 호흡의 리듬을 타기도 하지만, 호흡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에 다소 어긋날 수도 있다. 글씨는 마지막에 바탕(종이 등)에 남는다. 이것은 자연이 아니라 기록이다.

 


노래

(현존재)

음성(신체적 기표)

호흡(리듬)

공간

자연

문장

(문자학)

문자(기호적 기표)

글씨(호흡과 차이)

바탕(종이)

기록

시(詩)

문자로 음성을 표시

시는 운율을 탄다

시는 낭송(朗誦)해야 한다.

시는 애송(愛誦)된다.


 

서양 알파벳 문명, 유대그리스도 문명,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통합은 <자연=이성=신>의 등식이 빚은 문명적 특성에 불과하다. 그로 인해 <소리=현존=이성>을 전제한 가운데 ‘존재신학의 억압’을 특징으로 하는 문명이다. 이것은 감각의 문명이 아니라 감각을 다스리는(이성으로 규정하는) 문명이며, 그 결과가 자연과학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자연과학은 한계에 이르렀다. 관념, 개념, 이성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구성적인 문명은 결국 자연에 껍데기(가면)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성의 껍데기는 자연의 진정한 표지가 아니다. 이것이 보편성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표지와 내용이 따로 없다. 자연은 기표와 기의가 따로 없다. 자연은 표지와 내용, 기표와 기의가 하나이다. 자연은 심층과 표층이 없다.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모두 존재자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존재는 자아도 없고, 정체성도 없고, 주체도 없고, 주제도 없고, 중력도 없고, 단지 리듬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존재는 소리를 닮았다.

틈이나 선, 주름, 차이, 경계에도 인위적인 것이 있고, 무위적인 것이 있다. 인위적인 것으로 존재와 차이를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위적인, 자연에서 터져 나오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몸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몸을 떠난 어떤 것도 가상이기 때문이다. 삶은 살지만 볼 수 없다. 그래서 삶을 보려면 조금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조금 떨어져서 보면 또 삶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삶은 연극이다. 이중성이나 차이라는 개념도 실은 삶의 연극성에 대해서 말하는 새로운 개념이다. 철학도 연극이고 놀이이다. 우리가 이성주의를 비난하지만, 플라톤은 플라톤식으로, 칸트는 칸트식으로, 헤겔을 헤겔식으로, 그리고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식으로, 데리다는 데리다식으로, 하이데거는 하이데거식으로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에서도 결정적으로 가부나 승패를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진선미(眞善美)가 아니라 미선진(美善眞)이 되는 것이다.

후기 근대 철학에서 원리보다는 원형에 대한 탐색을 우선하며, 예술이 과학이나 종교보다 더 각광을 받는 것이다. 예술은 처음부터 차이와 존재를 존중하는 분야이다. 과학이나 종교는 차이를 관찰하기는 하지만, 차이를 통해 동일성(동일률)의 법칙을 발견하려는 것인데 반해, 예술은 차이 자체를 존중하며, 차이 자체를 존재로 여기는 영역이다. 그러한 점에서 소리야말로 차이를 나타내는 가장 원초적인 상징이다. 음악이 가장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상징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노로지 식으로 말하면 소리야말로 진정으로 감각되는 표지(기표)이다. 감각되는 것, 감지되는 것, 지각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표지이다. 그것의 강도가 희미(稀微)하고 미미(微微)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관념은 진정한 표지가 될 수 없다. 개념은 더더구나 표지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추상적인 관념이나 개념을 도리어 표지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존재에서 무엇을 인식하기(대상화하기) 위해서 존재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은 존재자를 통해서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언어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을 선종의 공안은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은 언어가 아니고, 몸이다. 몸 안에 의식이 있는 줄은 알고, 그 의식의 내면의 음성은 들을 줄 알면서도, 몸 밖에 태초의 하느님이 있는 줄 알고, 그 하느님의 태초의 음성은 알지만 몸은 망각하고 있다. 서양문명은 몸을 망각하고 있다. 이성주의에 전면적인 선전포고를 한 데리다마저도 문자학의 표지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데리다의 문자학을 해부해보자. 앞에서 플라톤과 서양철학의 시종(始終)에 대해서 틈나는 대로 언급을 하였다. 이제 해부의 출발점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삼아보자. 인간의 생각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관점(觀點)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이다.

시간의 ‘지금’은 공간의 ‘일점(一點)’과 공통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일점(一點)은 시간과 공간의 종합적 한 지점이다.

“시간과 공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간은 불가시적인 것이어서 인간이 시간을 의식함은 공간지각의 변화와 운동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예부터 시간의 핵심으로 <지금>을 상정하였듯이, 공간의 핵심으로 사람들은 공간의 <일점>을 상상하였다. 이 점에서 <지금>과 <일점>은 유사성이 있다. 그래서 헤겔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 공통적인 성질을 지니는 <일점(un point)>이라고 여겼다. <시간은 점의 관점에서, 점으로부터 생각될 수 있다. 점과 시간은 서로서로 관계를 맺는 순환 속에서 생각되어질 수 있다.> 지금이 시간을 가능케 하지만 그 자체 시간이 아니고, 점이 공간의 원형이지만 그 자체 공간이 아니기에, <지금>과 <점>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상호 공통적이다. 그래서 <점>과 <지금>은 상호 교환될 수 있는 개념으로 오래전부터 표상되어 왔다.”

“시간의 원형인 지금은 그 자체 존재가 아니고 무화(無化)요, 자기부정이다. 그러면 이 자기 부정의 무화인 시간의 무와 <영혼의 형식> <내적 감각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시간의 존재를 어떻게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가. 즉, 시간의 무와 시간의 존재를 어떻게 동시적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이런 역설에 서양철학사는 봉착하게 되었다. (중략)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역리(逆理)를 최초로 태클한 철학자이다. 이런 역리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행태(energeia)와 가능태(dynamis)의 논리를 전개한다. 즉 <현행태로서의 존재는 가능태(운동, 가능)와 달라서 현존이다. ‘이미-없음’과 ‘아직도-있지 않음’을 내포하고 있는 시간은 하나의 복합체이다. 현행태와 가능태가 시간에서 함께 어울리고 있다.> (중략) 시간의 현행태가 무엇인가. 그것이 현재(지금)이다.”

“시간은 이미 없는 것과 아직도 있지 않는 것 사이에 있다. 그 사이라는 것도 현재라는 관점을 의식해서 나온 개념이다. 만약에 현재라는 관점이 없다면, 이미 없어진 과거와 아직도 있지 않는 미래를 생각할 수 없고, 따라서 시간개념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현재를 기점으로 존재를 생각하면 이미 없는 과거나 아직도 있지 않는 미래는 비존재이다. 그래서 시간은 언제나 현재의 현재분사에서 출발해야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이 현재의 현재분사에서 출발해야 존재한다면 과거분사는 저절로 현재(현존)의 부재가 된다. 따라서 에크리튀르가 ‘쓰여 진’(written)으로 ‘과거분사적 의미’로 해석되는 것은 바로 에크리튀르의 부재적 성격을 두드러지게 할 의도로 여겨진다. 능동과 수동은 결국 시간과 공간, 현존과 부재와 관련이 있는 셈이다.

결국 이상의 구절을 보면 현재는 비시간이기 때문에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점은 비공간이기 때문에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설이 성립된다. 항상 언어의 의미는 정반대의 의미가 이중적으로 붙어 있기 때문에 의미작용을 하는 것이 된다. 생각이라는 것이 관점(觀點)의 산물임을 감안하면 존재와 존재자가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점은 존재의 틈(구멍)으로 존재자를 생겨나게 한다. 인간의 몸은 자연의 연속체로서 존재인데 몸에서 의미라는 존재자가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몸은 존재로서 시간과 공간, 현존과 부재, 능동과 수동이 솟아나는 틈(구멍)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은 바로 자연(physis)과 연결되어 있다. 몸이 재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니체와 베르그송으로부터 비롯되며, 하이데거의 존재에서 발전적으로 계승되어 메를로-퐁티에서 절정을 이룬다.

메를로-퐁티는 최초로 신체를 현상학적으로 다룬 철학자였지만 지각현상학을 지성(개념)에서 감각의 편으로 다시 극단적으로 끌어내온 철학자였다. 그런 점에서 경험론자인 데이비드 흄의 신체적 존재론, 즉 신체적 감각과 그것의 인상과 관념(인상을 기초로 형성된)을 지각의 출발점으로 삼는, 보편성을 전제하지 않는, 그럼으로써 존재일반의 일반성을 기초로 철학을 하는 성격마저 있다. 메를로-퐁티는 어디까지나 현상학자였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현상학과 존재론의 중간에서 상호왕래하고 있었다. 메를로-퐁티는 말기에 ‘살(chair)’이라는 개념으로 그의 철학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세계는 내 몸의 연장이다.” “내가 지각하는 모든 대상은 살(chair)이라는, 내 몸과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만나는 대상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요동치며 자신을 구성하고 있다.” 등은 그 좋은 예이다.

메를로-퐁티는 지식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외부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의식과 감각은 항상 '몸'의 '체험'(신체화된 의식)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대륙의 관념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중간지대에 있었지만 관념적 전통에서 보면 경험론 쪽으로 나아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몸에 대한 인식을 통해 대상의 파동성을 느꼈지만 결국 구성철학의 잔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가 결국 ‘시각-이미지(언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음악은 극단적으로 느낌만 있고, 형태가 없다고 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음악의 ‘청각-상징성(언어)은 ’시각-이미지‘보다는 사물 자체, 존재 자체에 붙어 있다.

몸은 물질(物質)이라기보다는 유기적인(생성적인) 신체이며, 신체적 존재라는 점에서 물(物=心)이다. 이때의 물(物)은 심물일체(心物一體)의 물(物)이기 때문에 심(心)이라고 말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심물(心物)의 구분은 여기서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심물(心物)은 이분법의 정신과 물질, 주체와 대상의 심물이 아니다.

데리다의 텍스트는 그것이 아무리 ‘해체론적 텍스트’라고 할지라도 원천적으로 자연이 될 수 없다. 텍스트는 자연의 입장에서 볼 때는 도리어 문자 시니피앙(기표)이며, 소리 시니피앙이 가지는 자연으로의 연결을 이룰 수 없다.

데리다는 소리 시니피앙을 이성중심주의의 원죄인 것처럼 말했지만 실은 도리어 소리(반드시 음성이 아니라)야말로 자연의 소리로 연장될 수 있는 물(物)이다. 소리는 보편성으로서의 하나는 아니지만, 일반성으로서의 하나이다. 소리는 공기(空氣)를 매질로 해서 파동 치는 것이며, 결국 기(氣)의 세계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성질이다. 따라서 음성을 ‘말소리중심주의’의 원인으로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실은 알파벳 표음문자의 콤플렉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한국과 같은 한자문화권의 한글표음문자, 샤머니즘 문화권에서는 알파벳 표음문자의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시각중심문화권에 속하는 ‘알파벳 표음문자문화권’은 시각적으로 볼 있는 문자의 기록성(문자시니피앙)으로 인해 음성(phone)을 의미(기의)로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청각중심문화권에 속하는 ‘한자 표의문자문화권’은 상형문자에 이미 의미가 동시적으로 있음으로서 음성을 의미로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의미의 차이를 위해서 음운(音韻)을 이용할 따름이다. 이러한 현상은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교차에 해당한다. 표음문자는 음성만으로 이루어진 언어, 즉 음성언어가 아니라 문자체계가 성립된 문자언어이다.

표음문자의 경우, 음성과 문자의 의미를 두고 겨루는 기표경쟁이 있기 마련이고, 표의문자는 그러한 기표경쟁이 없다. 알파벳 표음문자는 음성을 기표로 하기도 하고, 기의로 하기도 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음성은 음소로서 무의식의 의미에서부터 의식, 최상층의 기표인 초의식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서양문명은 주로 의식의 내면의 소리, 혹은 존재신학적 차원에서 음성을 다루는 관계로 그 동안 무의식의 차원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것이 깨어진 것은 프로이트의 등장에 의해서다.

서양문명의 이성중심주의가 ‘말소리중심주의’의 ‘소리중심주의’ 탓이라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 그것은 ‘시각-문자중심주의’ 탓이다. 이성주의는 문자주의의 흔적 혹은 기록이 아니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자연은 문자학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문자학은 자연의 표피일 뿐이다. 자연의 문자학은 자연을 왜곡시킬 정도의 복잡한 독자적인 체계를 가지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체계와 같은 것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자연은 텍스트가 아니고 텍스트의 짜깁기가 아니다.

세계는 정신계열에서 이성적으로는 계속적으로 보충대리(補充代理)이며, 물질계열에서는 신체적으로 대신(代身)이며, 이 둘은 서로 교차하고 있다. 이 둘이 교차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이 아닌, 제 3의 절충 혹은 통합으로 기(氣)라는 개념과 실제로 기운생동(氣運生動)이 필요하다. 보충대리는 이성은 항상 창조적 이성이 되어야하는 운명을 갖는 것이며, 대신한다는 것은 피상적으로 무엇이 무엇을 대신한다는 뜻이 아니라 몸을 교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몸을 교대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이고, 자연이 서로를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희생이다. 자연은 말없이 몸을 갈아입는다.

자연에 대한 오해도 많은 게 사실이다. 욕망은 흔히 자연의 본능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인데 실지로 자연의 욕망은 사람이 욕망마냥 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욕망은 항상 균형과 절제와 만족으로 해소가 된다. 동물들은 배가 고프지 않으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냥을 하지 않고, 먼 미래를 위해 식량을 저축하지 않는다. 자연은 기껏해야 일 년을 준비한다. 이것이 인간에 이르러 자연을 대상화하고 소유하기 시작하고부터 욕망은 끝없는 것이 되었다.

이제 데리다 해체의 각론에 들어가 보자. 데리다의 에크리튀르와 그라마톨로지는 실은 서양 말소리중심주의의 경계에 있는, 그럼으로써 말소리중심주의에 반발하고 있는(반작용하고 있는) 흔적을 지니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텍스트이론이나 그라마톨로지는 스스로를 비추는, 스스로의 냄새를 풍기는, 스스로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서양문명에 소속된 서양철학의 뒤집기 기술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스스로를 뒤집어도 그 몸통은 같다. 물론 서양문명의 앞면과 뒷면을 다르겠지만 말이다.

데리다의『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한마디로 ‘루소읽기’ ‘레비스트로스 읽기’를 통해서 결정적 기반을 마련한다. 데리다는 물론 이에 앞서 ‘후설 읽기’를 통해 표지, 더 정확하게는 에크리튀르(écriture)의 출발점을 마련하고, 그라마톨로지라는 거대한 체계를 구성하게 된다. 데리다의 루소, 레비스트로스 읽기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기 전에 데리다가 후설과 철학적으로 결별하게 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양철학사는 확실히 저들의 이성적 방식대로(비록 데리다는 반이성주의적 입장에 서 있지만) 변증법적 진화의 산물이다. 데리다는 후설을 딛고 일어섰다. 이는 하이데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이데거는 직접 후설에게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받은 제자로서, 그의 논문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은 실은 후설에게 증정된 것이다. 후설은 하이데거의 논문을 받아보고 “이건 현상학이 아니야.”라고 했다고 한다.

데리다는 후설의 학설을 ‘책으로 읽은 후학’이었지만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함께 후설의 현상학으로부터 문자학으로의 진화를 한 셈이다. 말하자면 후설 없는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후설은 좋은 스승이었고, 선배였고, 그리고 철학적 진화를 위한 희생(犧牲)이었다. 이성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철학도 결국 은유적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바치고 희생하는 과정이다. 좋은 스승과 선배 아래에서 좋은 제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인간이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존재자의 흔적을 버릴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데리다와 하이데거는 후설이라는 존재자를 디딤돌로 해체철학과 존재철학을 완성하였지만, 존재자의 철학을 업신여길 수 없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역시 ‘존재철학과 존재자의 철학’의 관계, ‘구조주의철학과 해체주의 철학’의 관계마저 이중적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중성을 무슨 다른 말로 표현해야 할지,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 현대철학이 당면과제이다.

철학은 자연에 비해 인위(人爲)이다. 인위는 위(僞=人+爲)이다. 위는 거짓이다. 물론 철학적 위가 일반의 사기꾼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자연의 거대한 존재에 비하면 일종의 언어적인 거짓, 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은 그래서 “예술은 사기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어떤 철학자가 “철학은 사기다.”라고 말할 때 진정한 존재와 해체의 철학이 시작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위의 말을 해석하는 데도, 진의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기’라는 말의 이중성을 넘어서야 함은 물론이다.

철학이 아무리 자연 친화와 자연주의를 표방해도, 자연환경과 에콜로지에 기울어져 있어도 인위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도덕경과 같은 ‘무위자연’의 철학마저도 철학이 철학인 한에 있어서는 자연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무위자연의 철학도 실은 자연과 멀어지는 문명으로 인한 반동으로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위자연의 노자(老子)철학은 혹시 모계사회와 맥락을 같이 하는 철학체계가 아닌 가 의심된다.

철학사에서 앞에 있는 철학들은 항상 뒤에 오는 철학에 의해 부정되기 일쑤이다. 구조주의와 해체철학들도 합리주의의 반동으로 생겨난 것이다. 합리주의의 마지막에 후설의 현상학이 있다. 하이데거나 데리다는 후설의 현상학을 언덕으로 삼았으나 다시 현상학을 무덤으로 만들면서 탄생한 철학이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직접 제자로서 현상학이 ‘의식의 학’이라는 것을 알고 결별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사의 존재가 모두 존재자였다는 것을 알고, 다시 존재의 철학을 구성하게 된다.

“데리다는 후설 연구로써 철학여행의 시발점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그의 대선배인 폴 리쾨르(P. Ricoeur: 1913∼2005)와 함께 현상학과 해석학(l'herméneutique)의 합류점에서 철학적 문제의 발굴에 골몰하다가, 리쾨르의 곁을 떠났다. 그가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근본적 부정의 논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의미의 동일성은 대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의식의 지향성의 행위인 노에시스(noesis)에서 성립하기에, 관념적 대상으로서의 노에마(noema)는 언제나 여기와 지금 의식에 현존해있다. 그런데 재래의 수학자나 논리학자도 심리학자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구성하는 의식의 활동에 대한 명증한 자의식 없이 그냥 대상적 정합성만 추구하였다.”에서 출발하였다. “현상학적으로 이해하자면, 이성적 인식에로 향하는 내면적 요구나 경향은 충분히 명증한 대상에 대한 의식의 충분한 파악에로 향한다.”

후설의 현상학은 역설적이게도 칸트철학의 이성주의가 어떤 의식의 과정의 산물인지를 재인식시키면서 칸트철학을 의식의 차원에서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의식의 지향성인 노에시스와 관념적 대상인 노에마는 실은 칸트의 이성철학의 의식차원의 생성과정과 메커니즘을 드러냈다.

데리다의 해체철학의 중요한 용어들은 실은 현상학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데리다는 후설의 주장을 뒤집거나 버려둔 개념들을 요긴하게 써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읽기 철학’ ‘해체철학’의 흠이면서 특징이고, 장점이기도 하다.

“현상학의 근원성이 무엇이던가? 그것은 시간적으로는 지금의 현재이고, 정신적으로는 의식의 현존성이고, 형상적으로는 자아의 자기동일성이고, 인식론적으로는 ‘노에시스’의 직관과 지향과 ‘노에마’의 경험적 여건과의 덮음이나 포개짐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오히려 후설의 현상학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후설과는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였다. 흔적이 현존보다 앞서고, 나이가 더 먹었고, 과거를 당시는 재귀가 있기에 현재의 시각이 가능하고, 차이가 자아의 동일성보다 더 근원적이고, 어긋남이 일치보다 선행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지론이다.”

후설은 칸트의 이성철학을 의식의 차원에서 재구성해 보임으로써, 의식의 철학의 경계에 섬으로써 의식의 구성적인 철학에서 무의식의 구조의 철학으로 넘어가게 하는 결정적인 다리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합리주의를 벗어나게 하는 디딤판 역할을 한 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서양철학자들은 왜 ‘목소리’를 ‘현존(présence)’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의미(기의)’라고 생각하는 데에 집착하고,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는 데에 골몰하는가. 현존을 말할 때는 이미 그 대칭인 부재(absence)에 대한 의식에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의미를 탐구하려고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선 까닭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데리다는 의미지향을 철저히 거부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후설의 의식의 지향성(의미작용)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지향은 이미 관념적인 대상을 설정한 것을 말하고, 의식의 지향성과 관념적 대상의 만남의 순간에 의미가 발생하게 된다.

후설은 “의식의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후설의 유명한 명제이다. 이에 반문하면서 흉내 낸 것이 데리다의 “텍스트 바깥은 없다.”(il n'y a pas de hors-texte)라는 명제이다.

데리다는 텍스트(le texte: text)와 책(le livre: book)을 크게 구분하는 데서 텍스트 이론의 출발점을 삼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것도 의미의 이중성의 관계로 본다. 책은 텍스트를 어느 부분에서 자른 것이고, 그 자른 경계선이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텍스트라는 것도 실은 무한정의 것이 아니고 사방에 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책에 못지않은 경계이다. 텍스트의 다른 텍스트와의 짜깁기도 역시 끝은 있다.

그래서 데리다는 텍스트는 끝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책과 텍스트의 폐쇄성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 해체철학은 텍스트 자체를 해체하면서 동시에 텍스트 자체를 주장하는, 그래서 텍스트의 내용이 아니라 텍스트의 바탕의 차이와 부재(흰 종이와 검은 글자)를 논하는 서양철학의 막다른 골목의 철학인지 모른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흐르는 전체문맥은 바로 이런 경계선상을 왕래하는 것이다. 그는 의식의 지향, 중심의 지향 등 중심주의 전반을 거부하는 몸짓을 하고 있지만 그 역시 해체주의라는 중심을 지향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바로 이러한 것이 데리다의 양면성이며, 모순이라는 것이다. 글쓰기라는 것이 어떤 지향, 예컨대 잠정적 지향이라도 없으면 불가능하다. 실지로 조금이라도 지향이 없이 이루어지는 텍스트가 있을까 의문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글쓰기의 현존을 무시하기 위해서 에크리튀르(쓰인 것)라는 과거분사를 설명한다.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은 이성중심주의를 비롯하여 모든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는 해체행위를 통해 또 다른 해체라는 중심을 제안하고 있다. 중심을 해체하고, 주변을 주장하는 것은 중심의 흔적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리다는 중심과 주변의 보충대리이 보충대리를 주장하지만 말이다. 그 제안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특별한 수고도 없이 남의 텍스트를 뒤집기를 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면, 그리고 여러 학자들의 학설들을 짜깁기(텍스트 짜집기)하는 수준이라면 해체주의의 진정성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서양철학사에서 해체주의의 등장은 서양철학이 그 궁극점에 도달하여 이제 기존의 구성된 것을, 구조화된 것을 해체하는 길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인류학적 철학을 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데리다의 작업이라는 것이 서커스나 야바위의 뒤집기 재주꾼이라는 인상이 짙다. 그의 주장은 화려하다. 또 현란한 문체로 인해 해독의 어려움을 준다. 일련의 그의 철학적 행위들은 어떤 사물을 놓고, “이것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라고 묻는 것과 같다.

해체주의는 기존의 존재하는 것을 두고, 그것을 반대방향으로 역반응하게 하여 결국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무의미의 방식이다. 이것은 후설의 현상학적 지향과는 반대이지만, 그것을 역방향으로 일단 몰아놓고는 결국 양자의 상호침투하는 것을 들어 양자의 의미를 무화시키고는 그 경계의 선을 차이로 해석한다. 해체주의란 현상학과 구조주의를 해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해체주의가 제안하는 것이란 새로운 현상도 아니고 구조도 아닌, 해체라는 단어밖에 없다. 철학을 위해 사용하는 개념마저 기존의 것에서 따온다. 무엇보다도 데리다는 새로운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해체주의식 텍스트 읽기의 병폐이지만, 남의 텍스트를 해체하는, 그럼으로써 그것을 부정하고, 그 부정을 통해서 부재(absence)를 즐기는 것 같다. “봐라, 너희들이 있다고 한 것이 모두 없지 않느냐?” 이런 것이다. ‘현존’(présence)이 ‘부재’(absence)가 아니냐? 이런 투다. 그리고 ‘시공간에서 일어난 모든 복합체’를 텍스트로 간주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텍스트가 자연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연과 텍스트는 어떤 관계인가. 혼란스럽다.

현존가 부재의 문제는 실은 정반대의 대립과 같이 느껴지지만, 실은 대칭에 불과하다. 여기서 대칭에 불과하다는 것은 양자가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인 관계를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로 보충대리 혹은 교차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현존’은 흔히 ‘태초의 말씀’이나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듣는’ 목소리의 환원성에서 비롯되는데 ‘부재’는 그것의 반대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차이 없는 현존이란 없다. 차이가 으레 부재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

데리다는 목소리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목소리를 자기 환원과 이성주의의 원인으로 볼 때는 다른 서양철학자와 같은 입장을 견지해놓고 다시 자신의 차이(差異)를 증거하는 것으로 사용할 때는 목소리를 단절의 기호로 보았다.

데리다는 폴 발레리(Ambroise-Paul-Toussaint-Jules Valéry: 1871∼1945)의 지적을 예로 든다.

“(발레리는) <자아가 둘>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말하는 자아와 듣는 자아가 둘이라면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la s'entendre-parler)>의 자기 현존성, 자기 근접성인 말하는 목소리가 순수 자아의 기원적 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애초의 가정을 그것이 붕괴시키는 셈이다. <(내면적 말 속에서) 누가 말하고 누가 듣는가. 그것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니다. 자기에서부터 자기까지 가는 말의 실존은 단절의 기호이다>.”

데리다는 ‘차이’를 주장하면서 ‘목소리의 자기환원성’ 추궁에서 한 발 물러서고, ‘문자학’을 주장하면서 ‘태초의 말씀’의 이성주의를 보다 적극적으로 공격한다. 목소리의 자기동일성은 부정하면서 여전히 태초의 말씀의 자기동일성은 견지한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볼 때 현존이라는 것도 실은 차이나 존재가 동시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차이나 존재는 의식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구조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나름대로 차이와 존재를 느끼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차이와 존재는 인간의 고유의 것이 아니라 중생(衆生), 나아가서 만물(萬物)에 있는 것이며, 만물 자체가 바로 차이의 존재이다.

서양철학사가 하이데거의 말대로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의 철학이 되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존재와 차이를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도리어 존재와 차이의 무의식에 어떤 침입(분절, 단절, 절편)을 가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시도한 것인지 모른다. 세상은 중심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에 중심과 질서를 부여하고, 주체(정체, 자아)를 형성하고, 나름대로 우주론을 구성하였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존재자의 철학이 성립된 이면에는 존재의 세상이 미리 존재하였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존재는 존재를 볼 수 없다. 나는(스스로는) 나를(스스로를) 볼 수 없다. 볼 수 없는 것은 사는 것이고, 볼 수 있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다. 볼 수 없는 것은 존재이다. 존재와 소유 사이에 차이가 있다. 차이는 존재의 표면이다. 존재는 표면 밖에 없다. 존재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소리의 이면에 의미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 의미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와 존재자도 실은 존재의 존재자, 존재자의 존재, 보충대리의 보충대리, 차이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똑같은 것은 현존과 부재에도 적용하면 현존은 부재의 현존이고, 부재는 현존의 부재이다. 현존과 부재도 대립적이 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단지 대칭을 대립으로 느끼거나 가정한 것일 따름이다. 해체라는 것도 구축된 것이 미리 있으니까, 말하자면 구성의 철학이 있으니까, 그 구성된 철학을 해체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식의 철학은 현상학에서 보듯이 구성의 철학이고, 환원의 철학이지만, 무의식(간혹 초의식)의 철학은 구조의 철학이고, 차이의 철학이다.

물론 이러한 해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무의미를 주장하는 것’이 반드시 무의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텍스트와 책도 확실하게 구분이 되는 것 같지 않다. 책을 흔히 ‘텍스트북’(textbook)이라고 하는 데서도 느낄 수 있지만, 텍스트는 텍스타일(textile)이라는 옷감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옷감이란 옷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옷과 옷감의 관계를 보면, 옷은 일정한 모양으로 완결된 ‘폐쇄된’ 존재이지만, 옷감은 옷을 전제로 한, 옷이 되기 위한 가능성으로 ‘열려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양자는 상관관계에 있기 때문에 상호 가역할 수 있는 관계에 있다. 이것을 굳이 텍스트로 중심이동을 하는 것은 해체주의의 반(反)해체주의인 것이다.

데리다 해체주의의 뒤집기 재주는 그의 철학의 대명사인 ‘그라마토롤지’(grammatology)에도 해당한다. 그의 문자학이라는 이름은 실은 후설이 기호의 개념을 ‘표현’(Ausdruck)과 ‘표지’(Anzeichen)라고 나누고 표현은 의미가 있는 세계지만, 표지는 그런 기능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소홀이 한 부분이다. 데리다는 결국 후설이 소홀이한 부분을 살려서 자신의 철학을 완성한 셈이다. 그라마톨로지는 실은 ‘문자학’이라기보다 ‘표지학’이다.

후설은 의미가 보편성을 지니기 위하여 ‘언어의 몸’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언어의 진술에는 표현도 있고 표지도 있다. 그런데 표지(l'indice)는 문자기호와 같은 것이어서 의식의 생생한 현장의 생동감이 죽는다. 그래서 후설은 표지보다 목소리에서 나오는 표현(l'expression)을 더 중시하게 된다.

“표현과 직결되는 후설적인 의미(Bedeutung)을 데리다는 ‘vouloir-dire’로 번역한다. 이 낱말에는 두 가지의 뜻이 동시에 담겨 있다. 첫째로, 말하는 주체가 어떤 것에 대해서 스스로 표현하여 ‘말하고자 함’이요, 둘째로, 하나의 표현이 뜻하는 바의 ‘의미’를 지칭함이다. 그런데 표현은 곧 의미의 논리화이지만, 사실의 측면에서 표현과 표지가 그렇게 두부 자르듯이 갈라지지 않고 뒤섞여 있음을 후설이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 법적인 측면에서 표현과 표지를 별도로 구분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그는 느꼈다. 왜냐하면 현상학은 의식학이고, 결국 의식의 경험현상에 대한 객관적 의미 부여를 의식이 구성하는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기에, 표지의 기호 기능처럼 가급적 의식 바깥의 것과 연관되는 측면을 괄호 속에 묶어두고 의식 내부의 표현과 순수성만을 밝히는 것이 더 적당한 것으로 후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표현은 의식 내부의 진술이고, 표지는 의식바깥의 세계와 관계된다. 후설은 나중에 보편적 타당성과 관념적 동일성을 보장하는 선험성과 그런 관념을 구성해가는 의식의 주체적 자각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자는 논리적 구조이고, 후자는 심리적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는 후설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표지’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이것은 진정한 문자학으로 나아감이다.



박정진 문화인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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