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제작사 제공 포스터. 왕과 사는 남자는 지금 여기 우리이기도 하다.
조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000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다. 조선시대에 대한 관심이 높다. 영화를 논하기에 앞서 조선을 돌아보고자 한다. 조선을 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조선은 중첩된 사회적 모순을 안고 있었고, 민중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훈민정음(해례본)』,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조선왕조 의궤』,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동의보감』, 『일성록』,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난중일기』, 『4.19혁명기록물』 등 세계기록유산 20건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보유 수고, 아시아에서는 제일 많다. 『조선왕조실록』 은 사실적인 기록으로 정평이 나있다. 『조선왕조실록』 에서 오늘 반추할 만한 사실들을 먼저 들여다보고자 한다.
조선은 유학, 그중에서도 12세기 남송(南宋)의 주희(朱熹,1130~1200)가 주창한 것으로 알려진 성리학(性理學)을 이념으로 추구한 나라였다. 성리학은 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 또는 신유학, 정주학, 이학이라고도 한다. 주희는 사물에 깃든 이치를 깨달아 이를 통해 앎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먼저 앎이 있고 실천이 있다고 봤다. 유학은 편의상 공자와 맹자 시대의 원시 유학, 한당(漢唐)의 고대 유학, 송나라의 중세 유학으로 나눈다. 북송(北宋)의 정이·정호 형제를 이어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유학이 성리학이다. 우주와 인간의 법칙을 이기론(理氣論)이라는 하나의 원리로 이해하는 유학의 한 흐름인데, 정치적으로는 한(漢)족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요체로 한다. 즉, 리(理)는 본질적 원리인 한족의 위상을 말하고 기(氣)는 본질에서 파생하는 여타 민족의 처지와 상황을 말한다.
성리학은 한족의 입장과 중소지주인 사대부의 입장에서 세계를 해석한 이념이기도 하다. 고려 말 유학자들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것은 중소 규모 지주였던 고려 말 사대부들의 처지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고려 말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이색(李穡, 1328~1396)은 사회개혁의 학문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내세워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개국한 정도전이다. 이색과 그의 제자 정몽주는 고려를 개혁하려고 했지만 조선 개창까지 나아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역사를 통해 성리학은 공고해졌고 현재까지 한국의 사상과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선시대를 유교국가로 보는 것은 지배층 이념에만 중점을 둔 시각이기도 하다. 피지배층의 신앙과 종교는 고유 신앙(무속, 자연숭배, 조상숭배, 도교 등), 불교, 유교가 복합적으로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유교는 지배집단의 수덕(修德)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고자 했고, 무속은 구복(求福)을 위한 인간의 갈망을 의례로 적극 표현했다. 조선은 무(巫), 불(佛), 도(道)가 공존하는 사회였다.
앞서 봤듯 공자가 유교의 창시자는 아니다. 그는 유학사상과 사유체계를 나름대로 정리해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한 윤리규범을 체계화 했다. 그는 주(周) 나라 (서기전 1046~256) 문화를 복원해 춘추시대의 혼돈을 바로잡으려 한 유학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술이부작(述而不作) 이란 언명도 이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공자는 인(仁)을 추구했는데 인을 여러 차원으로 표현했다. 그는 인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답하지 않았지만, ‘사람다움’의 근원으로 봤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도 하지 않는 것’, ‘ 사사로운 욕심을 이겨내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 등을 인이라 했다. 인은 인(人)과 이(二)로 이루어진 글자다. 인은 ‘너’ 와 ‘나’ 두 사람의 관계에 천착하는 면이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와 모든 사물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 유학은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그 핵심을 사랑으로 봤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다”라고 말한 공자는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도리로 봤다. 인간과 자연, 우주의 근본을 동일시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이다. 초기 유학의 이런 정신은 예부터 하늘·땅·사람을 하나로 보고 모두 존귀하게 여겼던 우리 민족의 정서와 일치한다. 하늘 존재인 환웅은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땅과 결합해 단군왕검을 낳았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했다.
유학은 규칙적으로 순환하는 자연과 함께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주체적인 자각과 성실한 노력을 중요하게 여겼다. 공자는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공자는 “자신을 닦고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한다(修己而安人)”고 답했다. 맹자는 “배우지 않아도 알고 일삼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타고난 도덕적 자각 능력을 강조했다.
“가까운 사람을 가깝게 사랑하고서 남을 사랑하라.” 맹자의 말이다. 가까운 관계에서 느낀 구체성과 절실함을 더욱 넓은 관계로 확대하라는 뜻이겠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예수의 언명과 일맥상통 한다.
한편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가장 원초적인 관계는 부모와 자식 관계다. 유학은 효를 덕의 근본으로 보고, 효에서 가르침이 시작한다고 봤다. 명대의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은 초기 유학에 주목해 주희의 선지후행(先知後行)이 아니라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내세웠다. 이치를 깨달아야 효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효는 내 마음속에 있다는 시각이다. 그는 마음이 곧 이치이니 천하, 또 마음 밖에 일이 있을 수 없고 마음 밖에 이치가 있을 수 없다고 봤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
1419년 즉위 1년을 맞은 세종이 내린 명이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 요즘 수한풍박(水旱風雹)의 재앙으로 인하여, 해마다 흉년이 들어 환과고독(鰥寡孤獨)과 궁핍한 자가 먼저 그 고통을 받으며, 산업이 있는 백성도 역시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하였다. 호조에 명령하여 창고를 열어 구제하게 하고, 연달아 지인(知印)을 보내어 나누어 다니면서 고찰하게 한바 수령으로서 백성의 쓰라림을 돌아보지 않는 자도 간혹 있으므로, 이미 유사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슬프다. 한 많은 백성들의 굶어 죽게 된 형상은 부덕한 나로서 두루 다 알 수 없으니, 감사나 수령으로 무릇 백성과 가까운 관원은 내 지극한 뜻을 체득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일관해서 그 경내의 백성으로 하여금 굶주려 처소를 잃지 않게 유의할 것이며, 궁벽한 촌락에 까지도 친히 다니며 두루 살피어 힘껏 구제하도록 하라. 나는 장차 다시 조정의 관원을 파견하여, 그에 대한 행정 상황을 조사할 것이며, 만약 한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 모두 교서를 위반한 죄를 논할 것이다.”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 2월 12일.

[사진] 단종 유배길 안내 글이다. 2026년 1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서 촬영했다.
지금도 우리는 세종의 사상을 잇지 못하고 있다. 조선은 앞서 말했듯 다양한 차원에서 접근해 살펴야 할 여러 모순과 갈등을 안고 있는 사회였다. 오늘은 조선 초기 상황 일부를 하나의 시각에서 들여다볼 뿐이다. 세종은 한 사람이라도 굶어 죽으면 감사나 수령 모두에게 형벌을 내리겠다고 명했다. 환과고독은 홀아비, 홀어미, 고아, 늙고 자식이 없는 이를 말한다. 조선은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과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이념 차원에서 소홀히 여기지 않으려 한 나라였다. 수백년 전 일이기에 결코 의미가 작지 않다. 장애인이란 말도 없었지만 몸이 불편한 이들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도 없었다. 병에 걸린 사람과 그를 부양하는 이에게는 각종 부역과 잡역을 면제했다. 소위 장애인에 대한 처우에서 조선은 선진적인 문화와 제도를 구현했다. 장애인의 자립을 위해 점복사, 독경사, 악공 등의 전문직을 창출했다. 장애인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금 쓰는 장애인이란 단어를 그대로 써 보겠다. 우의정 허조는 척추 장애인, 우의정 권균은 간질 장애인, 좌의정 심희수는 지체 장애인, 대제학과 형조판서를 지낸 이덕수는 청각 장애인, 명재상 채제공은 시각장애인, 생육신인 권절은 기형아였다. 그들은 단지 몸이 불편했을 뿐 능력을 발휘하는 데는 그 어떤 문제도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장애인 관료의 신체적 결함을 논한 바도 전혀 없다. 유학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내세운 조선은 초기부터 민본사상에 근거해 복지정책을 모색했다. 민생구휼은 군주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었다. 적어도 이념상 그랬고, 이를 위해 노력했다. 시대의 한계는 분명했지만 2026년 3월 , 오늘날 세계를 돌아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무릇 민간의 부채는, 빌어간 자와 빌려준 자가 모두 사망하였을 때, 자손이 문계(文契)에만 의거하여 추징하는 것을 일절 모두 엄금하라.” - 『정종실록』 정종 2년(1400) 7월 2일.
“빈궁한 소민(小民)이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그 자녀를 겁박해서 인질로 삼아 여러 해를 사역(使役)시켜, 혹 영구히 천인(賤人)을 만들기를 꾀하는 자가 있는데, 소재지 관사에서 자세히 살펴 엄중히 다스리라.” - 『정종실록』 정종 2년(1400) 7월 2일.
조선의 군주는 궁핍해 자력으로 생존하기 힘든 이들을 우대해서 진휼하고 구제했다. 부채를 빌어간 자와 빌려준 자가 모두 사망했을 때 자손이 문서에 쓴대로 추징하는 것을 엄금했다. 빈궁한 백성이 빚을 갚지 못한다고 그 자녀를 사역 시키거나 천인으로 만들고자 하면 처벌했다. 가난한 이들의 혼사와 장례를 위해 소재지 관사에서 비용을 지원했다. 국가가 사회복지의 가장 중요한 주체라고 했을 때 조선은 오늘 현실을 뛰어넘는 측면이 적지 안았다.
조선의 유학이념에서 큰 도를 행함은 천하를 공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현명한 자와 능력자를 뽑아 신뢰와 조화를 이루게 하고, 모든 이들을 자신의 부모와 자식으로 여기며, 노인은 삶의 마무리를 잘 하게 돕고, 장년에게는 적절한 일거리를, 어린이는 잘 크게,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과 병이 있는 이들은 부양을 하고, 남자에게는 직분을, 여자에게는 적절한 때에 시집가도록 지원했다. 오직 자기만을 위한 행위는 취해야 할 도리가 아니었다. 세종은 흉년이 든 해에 고을 수령이 진휼할 때를 놓쳐 백성이 굶어 죽으면 견책과 형벌을 가했다. 감사와 수령이 시집을 못간 사람과 장사를 지내지 못한 사람을 제때에 지원하도록 했다. 세금을 과중하게 징수하지 못하도록 세심하게 단속했다. 흉년을 면한 해에도 백성들이 너무 많은 것을 내지 않을까 걱정해서 곡식 빚을 감해주라고 했다.
“내가 듣건대, 환자를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인해 백성들이 괴로워한 지가 오래다. 대신들은 이르기를, ‘군량은 허술히 할 수 없으니 마땅히 평상시에 미리 저축하여 뜻밖의 환란을 구해야 한다.’고 하는데, 나도 이 말을 진실로 옳게 여기는 바이다. 그러나 근년에는 여러 해 동안 풍년이 들지 않아서 백성들의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하다가, 다행히 금년이 조금 풍년이 들었을 뿐인데, 만일 1년의 풍년을 가지고서 전일의 묵은 빚을 모두 받아들이고 보면, 환과고독들은 반드시 곤궁한 지경에 이를 것이니,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이 뜻을 수령들에게 유시하고 경들은 10월을 기다려 다시 아뢰도록 하라.” - 『세종실록』 세종 10년(1428) 8월 5일.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과학기술과 의학, 예술의 발전 등은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나왔다. 도성 안에 사람은 많고 땅은 비좁으니, 집짓기에 적당한 곳을 마련해 집 없는 사람에게 무료로 주자는 한성부의 청을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무료로 집터를 받고 집을 짓지 않는 사례에 대해서는 3개월 이내에 집을 짓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도록 했다. 유학이 추구한 대동(大同) 사회는 세상이 모두의 것이라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사상에서 나왔다. 왕도정치(王道政治)는 민심을 얻는 데서 시작하고 그것이 천심이라는 사유과정이었다. 왕의 인과 덕은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과 이른바 장애인에 대한 정책으로 가늠했다. "과연 지금은 어떠한가"를 생각한다(계속).
이주한 에세이철학회 칼럼리스트,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사진]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제작사 제공 포스터. 왕과 사는 남자는 지금 여기 우리이기도 하다.
조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000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다. 조선시대에 대한 관심이 높다. 영화를 논하기에 앞서 조선을 돌아보고자 한다. 조선을 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조선은 중첩된 사회적 모순을 안고 있었고, 민중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훈민정음(해례본)』,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조선왕조 의궤』,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동의보감』, 『일성록』,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난중일기』, 『4.19혁명기록물』 등 세계기록유산 20건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보유 수고, 아시아에서는 제일 많다. 『조선왕조실록』 은 사실적인 기록으로 정평이 나있다. 『조선왕조실록』 에서 오늘 반추할 만한 사실들을 먼저 들여다보고자 한다.
조선은 유학, 그중에서도 12세기 남송(南宋)의 주희(朱熹,1130~1200)가 주창한 것으로 알려진 성리학(性理學)을 이념으로 추구한 나라였다. 성리학은 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 또는 신유학, 정주학, 이학이라고도 한다. 주희는 사물에 깃든 이치를 깨달아 이를 통해 앎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먼저 앎이 있고 실천이 있다고 봤다. 유학은 편의상 공자와 맹자 시대의 원시 유학, 한당(漢唐)의 고대 유학, 송나라의 중세 유학으로 나눈다. 북송(北宋)의 정이·정호 형제를 이어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유학이 성리학이다. 우주와 인간의 법칙을 이기론(理氣論)이라는 하나의 원리로 이해하는 유학의 한 흐름인데, 정치적으로는 한(漢)족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요체로 한다. 즉, 리(理)는 본질적 원리인 한족의 위상을 말하고 기(氣)는 본질에서 파생하는 여타 민족의 처지와 상황을 말한다.
성리학은 한족의 입장과 중소지주인 사대부의 입장에서 세계를 해석한 이념이기도 하다. 고려 말 유학자들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것은 중소 규모 지주였던 고려 말 사대부들의 처지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고려 말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이색(李穡, 1328~1396)은 사회개혁의 학문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내세워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개국한 정도전이다. 이색과 그의 제자 정몽주는 고려를 개혁하려고 했지만 조선 개창까지 나아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역사를 통해 성리학은 공고해졌고 현재까지 한국의 사상과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선시대를 유교국가로 보는 것은 지배층 이념에만 중점을 둔 시각이기도 하다. 피지배층의 신앙과 종교는 고유 신앙(무속, 자연숭배, 조상숭배, 도교 등), 불교, 유교가 복합적으로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유교는 지배집단의 수덕(修德)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고자 했고, 무속은 구복(求福)을 위한 인간의 갈망을 의례로 적극 표현했다. 조선은 무(巫), 불(佛), 도(道)가 공존하는 사회였다.
앞서 봤듯 공자가 유교의 창시자는 아니다. 그는 유학사상과 사유체계를 나름대로 정리해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한 윤리규범을 체계화 했다. 그는 주(周) 나라 (서기전 1046~256) 문화를 복원해 춘추시대의 혼돈을 바로잡으려 한 유학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술이부작(述而不作) 이란 언명도 이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공자는 인(仁)을 추구했는데 인을 여러 차원으로 표현했다. 그는 인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답하지 않았지만, ‘사람다움’의 근원으로 봤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도 하지 않는 것’, ‘ 사사로운 욕심을 이겨내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 등을 인이라 했다. 인은 인(人)과 이(二)로 이루어진 글자다. 인은 ‘너’ 와 ‘나’ 두 사람의 관계에 천착하는 면이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와 모든 사물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 유학은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그 핵심을 사랑으로 봤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다”라고 말한 공자는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도리로 봤다. 인간과 자연, 우주의 근본을 동일시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이다. 초기 유학의 이런 정신은 예부터 하늘·땅·사람을 하나로 보고 모두 존귀하게 여겼던 우리 민족의 정서와 일치한다. 하늘 존재인 환웅은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땅과 결합해 단군왕검을 낳았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했다.
유학은 규칙적으로 순환하는 자연과 함께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주체적인 자각과 성실한 노력을 중요하게 여겼다. 공자는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공자는 “자신을 닦고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한다(修己而安人)”고 답했다. 맹자는 “배우지 않아도 알고 일삼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타고난 도덕적 자각 능력을 강조했다.
“가까운 사람을 가깝게 사랑하고서 남을 사랑하라.” 맹자의 말이다. 가까운 관계에서 느낀 구체성과 절실함을 더욱 넓은 관계로 확대하라는 뜻이겠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예수의 언명과 일맥상통 한다.
한편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가장 원초적인 관계는 부모와 자식 관계다. 유학은 효를 덕의 근본으로 보고, 효에서 가르침이 시작한다고 봤다. 명대의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은 초기 유학에 주목해 주희의 선지후행(先知後行)이 아니라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내세웠다. 이치를 깨달아야 효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효는 내 마음속에 있다는 시각이다. 그는 마음이 곧 이치이니 천하, 또 마음 밖에 일이 있을 수 없고 마음 밖에 이치가 있을 수 없다고 봤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
1419년 즉위 1년을 맞은 세종이 내린 명이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 요즘 수한풍박(水旱風雹)의 재앙으로 인하여, 해마다 흉년이 들어 환과고독(鰥寡孤獨)과 궁핍한 자가 먼저 그 고통을 받으며, 산업이 있는 백성도 역시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하였다. 호조에 명령하여 창고를 열어 구제하게 하고, 연달아 지인(知印)을 보내어 나누어 다니면서 고찰하게 한바 수령으로서 백성의 쓰라림을 돌아보지 않는 자도 간혹 있으므로, 이미 유사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슬프다. 한 많은 백성들의 굶어 죽게 된 형상은 부덕한 나로서 두루 다 알 수 없으니, 감사나 수령으로 무릇 백성과 가까운 관원은 내 지극한 뜻을 체득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일관해서 그 경내의 백성으로 하여금 굶주려 처소를 잃지 않게 유의할 것이며, 궁벽한 촌락에 까지도 친히 다니며 두루 살피어 힘껏 구제하도록 하라. 나는 장차 다시 조정의 관원을 파견하여, 그에 대한 행정 상황을 조사할 것이며, 만약 한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 모두 교서를 위반한 죄를 논할 것이다.”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 2월 12일.
[사진] 단종 유배길 안내 글이다. 2026년 1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서 촬영했다.
지금도 우리는 세종의 사상을 잇지 못하고 있다. 조선은 앞서 말했듯 다양한 차원에서 접근해 살펴야 할 여러 모순과 갈등을 안고 있는 사회였다. 오늘은 조선 초기 상황 일부를 하나의 시각에서 들여다볼 뿐이다. 세종은 한 사람이라도 굶어 죽으면 감사나 수령 모두에게 형벌을 내리겠다고 명했다. 환과고독은 홀아비, 홀어미, 고아, 늙고 자식이 없는 이를 말한다. 조선은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과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이념 차원에서 소홀히 여기지 않으려 한 나라였다. 수백년 전 일이기에 결코 의미가 작지 않다. 장애인이란 말도 없었지만 몸이 불편한 이들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도 없었다. 병에 걸린 사람과 그를 부양하는 이에게는 각종 부역과 잡역을 면제했다. 소위 장애인에 대한 처우에서 조선은 선진적인 문화와 제도를 구현했다. 장애인의 자립을 위해 점복사, 독경사, 악공 등의 전문직을 창출했다. 장애인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금 쓰는 장애인이란 단어를 그대로 써 보겠다. 우의정 허조는 척추 장애인, 우의정 권균은 간질 장애인, 좌의정 심희수는 지체 장애인, 대제학과 형조판서를 지낸 이덕수는 청각 장애인, 명재상 채제공은 시각장애인, 생육신인 권절은 기형아였다. 그들은 단지 몸이 불편했을 뿐 능력을 발휘하는 데는 그 어떤 문제도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장애인 관료의 신체적 결함을 논한 바도 전혀 없다. 유학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내세운 조선은 초기부터 민본사상에 근거해 복지정책을 모색했다. 민생구휼은 군주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었다. 적어도 이념상 그랬고, 이를 위해 노력했다. 시대의 한계는 분명했지만 2026년 3월 , 오늘날 세계를 돌아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무릇 민간의 부채는, 빌어간 자와 빌려준 자가 모두 사망하였을 때, 자손이 문계(文契)에만 의거하여 추징하는 것을 일절 모두 엄금하라.” - 『정종실록』 정종 2년(1400) 7월 2일.
“빈궁한 소민(小民)이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그 자녀를 겁박해서 인질로 삼아 여러 해를 사역(使役)시켜, 혹 영구히 천인(賤人)을 만들기를 꾀하는 자가 있는데, 소재지 관사에서 자세히 살펴 엄중히 다스리라.” - 『정종실록』 정종 2년(1400) 7월 2일.
조선의 군주는 궁핍해 자력으로 생존하기 힘든 이들을 우대해서 진휼하고 구제했다. 부채를 빌어간 자와 빌려준 자가 모두 사망했을 때 자손이 문서에 쓴대로 추징하는 것을 엄금했다. 빈궁한 백성이 빚을 갚지 못한다고 그 자녀를 사역 시키거나 천인으로 만들고자 하면 처벌했다. 가난한 이들의 혼사와 장례를 위해 소재지 관사에서 비용을 지원했다. 국가가 사회복지의 가장 중요한 주체라고 했을 때 조선은 오늘 현실을 뛰어넘는 측면이 적지 안았다.
조선의 유학이념에서 큰 도를 행함은 천하를 공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현명한 자와 능력자를 뽑아 신뢰와 조화를 이루게 하고, 모든 이들을 자신의 부모와 자식으로 여기며, 노인은 삶의 마무리를 잘 하게 돕고, 장년에게는 적절한 일거리를, 어린이는 잘 크게,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과 병이 있는 이들은 부양을 하고, 남자에게는 직분을, 여자에게는 적절한 때에 시집가도록 지원했다. 오직 자기만을 위한 행위는 취해야 할 도리가 아니었다. 세종은 흉년이 든 해에 고을 수령이 진휼할 때를 놓쳐 백성이 굶어 죽으면 견책과 형벌을 가했다. 감사와 수령이 시집을 못간 사람과 장사를 지내지 못한 사람을 제때에 지원하도록 했다. 세금을 과중하게 징수하지 못하도록 세심하게 단속했다. 흉년을 면한 해에도 백성들이 너무 많은 것을 내지 않을까 걱정해서 곡식 빚을 감해주라고 했다.
“내가 듣건대, 환자를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인해 백성들이 괴로워한 지가 오래다. 대신들은 이르기를, ‘군량은 허술히 할 수 없으니 마땅히 평상시에 미리 저축하여 뜻밖의 환란을 구해야 한다.’고 하는데, 나도 이 말을 진실로 옳게 여기는 바이다. 그러나 근년에는 여러 해 동안 풍년이 들지 않아서 백성들의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하다가, 다행히 금년이 조금 풍년이 들었을 뿐인데, 만일 1년의 풍년을 가지고서 전일의 묵은 빚을 모두 받아들이고 보면, 환과고독들은 반드시 곤궁한 지경에 이를 것이니,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이 뜻을 수령들에게 유시하고 경들은 10월을 기다려 다시 아뢰도록 하라.” - 『세종실록』 세종 10년(1428) 8월 5일.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과학기술과 의학, 예술의 발전 등은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나왔다. 도성 안에 사람은 많고 땅은 비좁으니, 집짓기에 적당한 곳을 마련해 집 없는 사람에게 무료로 주자는 한성부의 청을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무료로 집터를 받고 집을 짓지 않는 사례에 대해서는 3개월 이내에 집을 짓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도록 했다. 유학이 추구한 대동(大同) 사회는 세상이 모두의 것이라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사상에서 나왔다. 왕도정치(王道政治)는 민심을 얻는 데서 시작하고 그것이 천심이라는 사유과정이었다. 왕의 인과 덕은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과 이른바 장애인에 대한 정책으로 가늠했다. "과연 지금은 어떠한가"를 생각한다(계속).
이주한 에세이철학회 칼럼리스트,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