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철학에서 분명히 드러난 취약점들 가운데 하나는 중국 철학이다. 헤겔의 『철학사 강의』에서 보면 중국 철학의 위상은 인도철학이나 아랍 철학보다 훨씬 낮다. 헤겔은 중국 철학을 논하면서 공자 - 『주역』과 『서경』을 포함해서 - 와 노자 – 대표적으로 『도덕경』 - 정도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헤겔은 공자와 노자를 대립적으로 설정하기는 했지만, 정확히 어떤 측면에서 서로 대립하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또 이후 어떤 방식으로 각각의 고유한 발전을 통해 중국 철학사의 전통을 형성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우선 헤겔의 공자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다. 헤겔은 공자의 철학을 사변이 없는 도덕론으로 간주하고 『주역』도 통속적인 관념의 틀에 매몰되어 직관이나 지각에 따라 피상적인 지성의 규정으로 평가한다. 헤겔의 진술에 따르면 『서경』은 만물의 생성을 5개소의 원소로 설명되고 있지만, 원리가 아니라 단지 일상적 추상물이 외면적 질서에 아무런 의미 없이 구체적인 것으로 진전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헤겔은 당시에 공자의 사상을 직접 원전으로 보지 못했고, 단지 예수회 선교사들이 라틴어로 쓴 중국학에 관한 저술인 『공자, 중국의 철학자』 (1687) 혹은 『중국에 관한 회고록』(1766)만을 참조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헤겔의 공자에 대한 평가는 실로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헤겔 자신의 논리와 개념으로만 공자의 고유한 사상을 재단해 버렸다. 더 나아가 헤겔은 『주역』의 경우에도 전체를 보지 못했을 것인데, 아마도 부베 신부가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대략 내용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보다 단지 독일의 철학자인 빈디슈만의 『세계사의 전진에서 철학』(1827)에서 『주역』에 대한 평가를 『철학사』에서 인용한 것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서경』은 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출처 없이 그야말로 일부 내용만을 떼어 놓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헤겔의 중국 철학, 특히 유교에 대한 관점은 실로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중국 철학의 역사적 맥락이 의도적으로 간과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선진 시대 이전의 고전적 수준에서만 유교에 대한 일면적 평가가 이루어지고 그곳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헤겔이 유교(혹은 유학)에서 자연의 질서만이 존재하고 철학적 인식이 없다는 판단으로 중국 철학을 철학사에서 배제하기에 이른다. 헤겔은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적 인식의 부재를 간파했지만, 거기에서 예를 들어 훈고학과 성리학의 형성 과정까지의 전개 더 나아가 철학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중국의 철학사적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즉 헤겔은 『주역』에서 말하자면 생성의 논리와 노자의 『도덕경』과 연관된 논의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헤겔은 노자를 도덕론자인 공자와 달리 신과 같은 붓다로 이해한다. 노자의 『도덕경』도 헤겔은 전체를 보지 못했으며 단지 프랑스의 동양학 학자인 레뮈자의 『노자의 생애와 사상』(1823)과 아미노 신부의 『서간집』(1787) 정도만을 참조했을 뿐이다. 헤겔은 도교에서 말하는 도를 최고의 것, 궁극적인 것, 최초의 것 또는 만물의 근원이 무이고 공허한 것이며, 무규정적인 것, 추상적 보편으로 간주함으로써 부정의 사상이 긍정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말한다. 헤겔은 천지 만물의 원리인 도의 본체를 로고스로 간주했던 레뮈자의 의견을 따른다. 그러나 이것은 노자의 도를 상당히 협소하게 만든다. 노자의 도가 본체론적으로 과연 이해될 수 있는지도 문제겠지만, 노자는 분명히 도를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연관시켜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언어적 한계를 넘어서서 존재론적인 지평에서 설명한다. 헤겔은 도를 설명하면서도 장자를 언급하지 않은 것도 문제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장자의 경우 도를 관계적-상대적으로 상정하기 때문에, 노자의 형이상학적 도와 구별된다. 더 나아가 헤겔은 열자나 양자와 같은 논의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의 논의는 헤겔이 왜 그렇게 진술하고 있는지에 있다. 사실 헤겔의 중국 철학에 대한 논의는 중국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이다. 문제는 이에 대응하는 논리가 좀처럼 헤겔의 논리에 맞서기에는 상당한 제약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딜레마도 생기기 마련이다. 즉 헤겔의 중국 철학에 관한 서술에 한정해 보면 문제가 있다고 인정되더라도 헤겔 철학 전체의 논리를 놓고 보면 오히려 헤겔이 오히려 그렇게 생각한 것도 전혀 일리가 없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 말이다. 철학사라는 상당히 방대한 분야를 한 개인이 자신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치밀한 논리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입장이란 고작 헤겔이 중국 철학에 대한 무지했다는 방식으로 돌린다. 그러나 그와 같은 관점은 오히려 헤겔이 중국 철학을 정말 제대로 알았더라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반대로 헤겔 철학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거봐 그러니까 헤겔의 논리가 정당하다고 하면서 손을 곧바로 들어버리고 마는 상황도 발생한다. 그들은 중국 철학, 별거 아니라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공통으로 중국 철학에 관한 상당한 무지도 드러난다. 헤겔이 중국 철학을 그 당시 상황에서 제약된 자료만 보고 중국 철학을 평가한 것은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 중국 철학에 대한 무지는 적어도 이해되기 어렵다.
헤겔의 중국 철학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라면 이를 대체할 만한 대응 논리가 응당 나와야 한다. 거기에는 헤겔이 간과했던 중국 철학에 내재한 고유하면서도 다양한 사상적 흐름이 제대로 조명되어야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헤겔 자신이 변증법적 논리가 작동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고 싶다. 헤겔이 유교와 도교의 대립 구도를 설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를 서로 지양하면서 변증법적 통합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중국 철학에 대한 이해에서 헤겔의 한계로 귀결된다. 헤겔이 중국 철학을 이해하는 방식은 자신의 역사 철학에 기초해서 거기에 합당한 추론만을 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헤겔은 정작 변증법적 통합보다 오히려 배제의 논리로서 철학사에서 중국 철학과 결별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더욱이 헤겔 자신이 철학 체계를 자연보다 정신을 통해 완결하려는 방식은 중국 철학을 지양해야 할 하나의 계기로만 간주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우리가 헤겔식의 배제 논리를 깰 토대를 찾고자 한다면, 결국 중국 철학, 어쩌면 동양 철학 전체에서 고유하게 내재되어 있는 논리가 발굴될 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헤겔이 간과한 제자백가와 성리학 및 양명학, 그리고 중국 불교(중관론)를 서로 비교 종합하는 것도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노자의 형이상학적 도가 『주역』 혹은 음양론과 연계되면 이것이 성리학의 태극론이나 리기론과도 연관될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존재론적인 지평에서 헤겔의 철학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의 『철학사 강의』에서 서술된 중국 철학에 대한 관점은 헤겔이 설정한 개념들에 따라서 평가된 것일 뿐이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만일 우리가 그것에 대응하는 논리가 없을 때 헤겔의 논리에 어떤 식으로든 말려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또 다른 입장은 아예 헤겔 철학을 회피해 버리기도 한다. 거기에는 하나의 공통점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무용론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주의적 관점이다. 그런데 이것보다는 예를 들어 헤겔이 말하는 개념 혹은 범주가 중국 철학의 것과 서로 다르다는 입장이라면 그래도 둘의 입장보다 나을 것이다. 이때는 적어도 관점상의 차이일 수 있어서 서로 대화나 토론도 가능하다. 사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이면이나 서로 간과한 것이 무엇인지를 서로 알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상당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다른 논의보다 생산적일 것이다.
나는 헤겔이 중국 철학에 대한 관점에서 드러난 부정적 관점을 긍정적 관점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기반이 중국 철학, 동양 철학에서 부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 방법론적 불충분함이 문제라 하겠다. 더 나아가 배제의 논리보다 상생의 논리가 오히려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 철학에서도 헤겔 철학을 어느 정도 수용하지 못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중국 철학에도 동양 철학 전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열린 마음으로 사유의 여정에 동참하는 사람이라면 이를 마다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권기환 철학박사
헤겔 철학에서 분명히 드러난 취약점들 가운데 하나는 중국 철학이다. 헤겔의 『철학사 강의』에서 보면 중국 철학의 위상은 인도철학이나 아랍 철학보다 훨씬 낮다. 헤겔은 중국 철학을 논하면서 공자 - 『주역』과 『서경』을 포함해서 - 와 노자 – 대표적으로 『도덕경』 - 정도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헤겔은 공자와 노자를 대립적으로 설정하기는 했지만, 정확히 어떤 측면에서 서로 대립하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또 이후 어떤 방식으로 각각의 고유한 발전을 통해 중국 철학사의 전통을 형성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우선 헤겔의 공자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다. 헤겔은 공자의 철학을 사변이 없는 도덕론으로 간주하고 『주역』도 통속적인 관념의 틀에 매몰되어 직관이나 지각에 따라 피상적인 지성의 규정으로 평가한다. 헤겔의 진술에 따르면 『서경』은 만물의 생성을 5개소의 원소로 설명되고 있지만, 원리가 아니라 단지 일상적 추상물이 외면적 질서에 아무런 의미 없이 구체적인 것으로 진전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헤겔은 당시에 공자의 사상을 직접 원전으로 보지 못했고, 단지 예수회 선교사들이 라틴어로 쓴 중국학에 관한 저술인 『공자, 중국의 철학자』 (1687) 혹은 『중국에 관한 회고록』(1766)만을 참조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헤겔의 공자에 대한 평가는 실로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헤겔 자신의 논리와 개념으로만 공자의 고유한 사상을 재단해 버렸다. 더 나아가 헤겔은 『주역』의 경우에도 전체를 보지 못했을 것인데, 아마도 부베 신부가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대략 내용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보다 단지 독일의 철학자인 빈디슈만의 『세계사의 전진에서 철학』(1827)에서 『주역』에 대한 평가를 『철학사』에서 인용한 것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서경』은 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출처 없이 그야말로 일부 내용만을 떼어 놓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헤겔의 중국 철학, 특히 유교에 대한 관점은 실로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중국 철학의 역사적 맥락이 의도적으로 간과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선진 시대 이전의 고전적 수준에서만 유교에 대한 일면적 평가가 이루어지고 그곳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헤겔이 유교(혹은 유학)에서 자연의 질서만이 존재하고 철학적 인식이 없다는 판단으로 중국 철학을 철학사에서 배제하기에 이른다. 헤겔은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적 인식의 부재를 간파했지만, 거기에서 예를 들어 훈고학과 성리학의 형성 과정까지의 전개 더 나아가 철학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중국의 철학사적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즉 헤겔은 『주역』에서 말하자면 생성의 논리와 노자의 『도덕경』과 연관된 논의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헤겔은 노자를 도덕론자인 공자와 달리 신과 같은 붓다로 이해한다. 노자의 『도덕경』도 헤겔은 전체를 보지 못했으며 단지 프랑스의 동양학 학자인 레뮈자의 『노자의 생애와 사상』(1823)과 아미노 신부의 『서간집』(1787) 정도만을 참조했을 뿐이다. 헤겔은 도교에서 말하는 도를 최고의 것, 궁극적인 것, 최초의 것 또는 만물의 근원이 무이고 공허한 것이며, 무규정적인 것, 추상적 보편으로 간주함으로써 부정의 사상이 긍정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말한다. 헤겔은 천지 만물의 원리인 도의 본체를 로고스로 간주했던 레뮈자의 의견을 따른다. 그러나 이것은 노자의 도를 상당히 협소하게 만든다. 노자의 도가 본체론적으로 과연 이해될 수 있는지도 문제겠지만, 노자는 분명히 도를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연관시켜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언어적 한계를 넘어서서 존재론적인 지평에서 설명한다. 헤겔은 도를 설명하면서도 장자를 언급하지 않은 것도 문제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장자의 경우 도를 관계적-상대적으로 상정하기 때문에, 노자의 형이상학적 도와 구별된다. 더 나아가 헤겔은 열자나 양자와 같은 논의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의 논의는 헤겔이 왜 그렇게 진술하고 있는지에 있다. 사실 헤겔의 중국 철학에 대한 논의는 중국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이다. 문제는 이에 대응하는 논리가 좀처럼 헤겔의 논리에 맞서기에는 상당한 제약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딜레마도 생기기 마련이다. 즉 헤겔의 중국 철학에 관한 서술에 한정해 보면 문제가 있다고 인정되더라도 헤겔 철학 전체의 논리를 놓고 보면 오히려 헤겔이 오히려 그렇게 생각한 것도 전혀 일리가 없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 말이다. 철학사라는 상당히 방대한 분야를 한 개인이 자신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치밀한 논리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입장이란 고작 헤겔이 중국 철학에 대한 무지했다는 방식으로 돌린다. 그러나 그와 같은 관점은 오히려 헤겔이 중국 철학을 정말 제대로 알았더라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반대로 헤겔 철학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거봐 그러니까 헤겔의 논리가 정당하다고 하면서 손을 곧바로 들어버리고 마는 상황도 발생한다. 그들은 중국 철학, 별거 아니라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공통으로 중국 철학에 관한 상당한 무지도 드러난다. 헤겔이 중국 철학을 그 당시 상황에서 제약된 자료만 보고 중국 철학을 평가한 것은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 중국 철학에 대한 무지는 적어도 이해되기 어렵다.
헤겔의 중국 철학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라면 이를 대체할 만한 대응 논리가 응당 나와야 한다. 거기에는 헤겔이 간과했던 중국 철학에 내재한 고유하면서도 다양한 사상적 흐름이 제대로 조명되어야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헤겔 자신이 변증법적 논리가 작동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고 싶다. 헤겔이 유교와 도교의 대립 구도를 설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를 서로 지양하면서 변증법적 통합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중국 철학에 대한 이해에서 헤겔의 한계로 귀결된다. 헤겔이 중국 철학을 이해하는 방식은 자신의 역사 철학에 기초해서 거기에 합당한 추론만을 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헤겔은 정작 변증법적 통합보다 오히려 배제의 논리로서 철학사에서 중국 철학과 결별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더욱이 헤겔 자신이 철학 체계를 자연보다 정신을 통해 완결하려는 방식은 중국 철학을 지양해야 할 하나의 계기로만 간주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우리가 헤겔식의 배제 논리를 깰 토대를 찾고자 한다면, 결국 중국 철학, 어쩌면 동양 철학 전체에서 고유하게 내재되어 있는 논리가 발굴될 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헤겔이 간과한 제자백가와 성리학 및 양명학, 그리고 중국 불교(중관론)를 서로 비교 종합하는 것도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노자의 형이상학적 도가 『주역』 혹은 음양론과 연계되면 이것이 성리학의 태극론이나 리기론과도 연관될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존재론적인 지평에서 헤겔의 철학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의 『철학사 강의』에서 서술된 중국 철학에 대한 관점은 헤겔이 설정한 개념들에 따라서 평가된 것일 뿐이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만일 우리가 그것에 대응하는 논리가 없을 때 헤겔의 논리에 어떤 식으로든 말려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또 다른 입장은 아예 헤겔 철학을 회피해 버리기도 한다. 거기에는 하나의 공통점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무용론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주의적 관점이다. 그런데 이것보다는 예를 들어 헤겔이 말하는 개념 혹은 범주가 중국 철학의 것과 서로 다르다는 입장이라면 그래도 둘의 입장보다 나을 것이다. 이때는 적어도 관점상의 차이일 수 있어서 서로 대화나 토론도 가능하다. 사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이면이나 서로 간과한 것이 무엇인지를 서로 알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상당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다른 논의보다 생산적일 것이다.
나는 헤겔이 중국 철학에 대한 관점에서 드러난 부정적 관점을 긍정적 관점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기반이 중국 철학, 동양 철학에서 부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 방법론적 불충분함이 문제라 하겠다. 더 나아가 배제의 논리보다 상생의 논리가 오히려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 철학에서도 헤겔 철학을 어느 정도 수용하지 못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중국 철학에도 동양 철학 전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열린 마음으로 사유의 여정에 동참하는 사람이라면 이를 마다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권기환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