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제1장(도가도비상도)

이명권
2026-09-04

(본 글은 이명권박사의 『노자왈 예수 가라사대』의 책 내용 중 『도덕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한 글이다. 물론 저자는 책 속에 노자와 예수를 여러 곳에서 비교하였으나, 본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그 부분을 생략했다. 편집한 내용은 저자의 문장을 그대로 살렸으며, 편집자의 의견은 최소한으로 하였고, 편집자의 의견은 괄호로 표시했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이태곤)

 

“도를 도라고 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 지어 부르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 말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과도 같다. 이는 도 그 자체의 직접적 의미가 언어적 의미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뜻이다. 언어는 단지 상징일 뿐이고 본래적 개념을 전적으로 충실히 반영해 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도는 언어를 초월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를 다만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해석학자 리꾀르는 진리의 해석에 있어서 논리적 언어보다는 상징, 은유, 이야기 형식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는 천지의 시작이며, 유는 만물의 어미를 말한다.”

이 말은 무에서 유로의 창조 과정을 말해주는 도교의 우주론적 전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대목에서 노자는 무가 유보다 존재론적으로 앞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름도 형태도 붙일 수 없는 무명, 무형의 도가 천지의 시작이 되고, 만물의 어미가 된다고 말한다. 도덕경에서 주목할 점은 유가 만물의 어머니라고 하는 사상이다. 어머니는 여성적 개념이다. 음양사상으로 말하자면 음에 속한다. 어머니에게서 젖이 나오고 그 젖으로 자식이 생육되듯 만물은 어머니와 같은 대지의 품에서 자라난다.(이 대목은 생태학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무욕으로, 그 묘함을 꿰뚫어 본다.”

이 대목은 욕망으로 마음이 가려져 있는 한, 신묘하고 오묘한 진리의 세계를 깨닫지 못함을 밝히고 있다. 무욕의 실천으로 늘 텅 빈 마음이 될 때 비로소 도와 하나님의 길이 보일 것이다. 하늘의 뜻을 알려거든 마땅히 먼저 욕망을 버리고 텅빈 마음의 귀로 세미한 음성을 듣고, 텅 빈 마음의 눈으로 그 오묘한 뜻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항상 욕망함으로 그 돌아감을 본다”

욕망의 세계는 물질적 순환의 세계를 이룬다. 순환의 세계라 함은 시작과 마침을 거듭하는 것을 뜻한다. 영혼의 세계를 일러 영원의 세계라 한다면, 육체의 세계는 마침이 있는 세계다. 그러나 이 땅의 생존 세계에서는 육체없는 영혼이 없듯이 육체와 영혼이 하나 되어 한 인격체를 이룬다. 이 때 한 인격체가 고양되고 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의 수양이 필요한 법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왕필의 노자주를 첨언한다. “무릇 유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반드시 무를 용으로 삼기 때문이다. 욕망의 뿌리가 되는 바는 도에 이르러서야 해소된다. 그러므로 항상 욕망이 있을 때에는 그로ㅆ 만물이 끝나서 돌아가 마침을 관조하는 것이다.”)

 

“이 둘(無欲, 有欲)은 같이 나왔지만 이름이 다르다. 한가지로 일컬어 현(玄)이라고 하니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뭇 현묘함의 문이 된다.”

불교의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진여 곧 진리의 세계는 한마음의 세계에 두 가지 문이 있음을 말한다. 진여심과 생멸심이 그것이다. 이 둘은 하나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도덕경』에서도 같은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무욕과 유욕의 세계가 하나의 문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왕필은 이 두 가지를 시(始)와 모(母)로 해석한다. 이는 천지지시와 만물지모를 말할 때의 그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어순 상으로 볼 때는 무욕과 무욕으로 보아도 타당할 것이다. 천지를 무(無欲), 만물을 유(有欲)으로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욕과 유욕, 천지와 만물이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그 작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본체는 같지만 그 쓰임새가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는 무욕과 유욕은 선악의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밝히지만) 천지와 만물이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보면, 선악도 그 뿌리에서 형성되어 나가는 과정적 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마음 뿌리에서 선한 마음을 배양하기에 힘써야 한다.(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와 같이 선악도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과 유사한 해석이라고 보여진다.)

 

본체가 같으나 쓰임새가 다르다고 할 때, 쓰임새, 즉 용(用)을 주목해야 한다. 용의 성격은 다분히 목적 지향적이다. 목적 지향적인 만큼 개인의 삿된 생각이 들어설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도덕경』에서 배워야 할 바가 있다면, 바로 이런 점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필요한 자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체(體)는 같으나 용(用)이 달라지는 자리, 목적에 따라 천 갈래 만 갈래로 용이 달라지는 자리, 바로 그 자리를 위해 영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저자의 물음표는 영성이 추구할 바는 바로 체(體)의 자리임을 암시한다고 해석했다.)

 

“현묘하여 뭇 신묘함의 문이 된다 함은 무엇인가?” 현(玄)은 어둡고, 고요하고, 텅 빈 것이다. 여기서는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듯이, 이러한 상태에서는 감각적이고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하다.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이다.(카오스의 세계, 디오니소스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천지 만물, 무욕과 유욕이 아직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선악미정, 가치미정의 상태다. 이 상태야말로 모든 사물과 현상세계가 시작되는 원초적인 뿌리이자 근원이요, 출발점인 도(道)의 세계이다.

 

(노자의 사상은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기후 온난화와 생태파괴의 현실을 고려하면 지금 가장 필요한 사상일지도 모른다. 만물이 대지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생각은 현대 생물학에서 이야기하는 ‘가이아’의 개념과도 유사하다. 동양의 생명 사상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이다. 그만큼 동양의 사상은 자연 친화적이다.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만 여긴 서구의 사상과는 차이가 난다.)

52d01e83f28c6.jpg

 



4d0bdfa82be93.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