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제2장(무위의 길, 아가페의 길)

이명권
2026-09-07

(본 글은 이명권박사의 『노자왈 예수 가라사대』의 책 내용 중 『도덕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한 글이다. 물론 저자는 책 속에 노자와 예수를 여러 곳에서 비교하였으나, 본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그 부분을 생략했다. 편집한 내용은 저작의 문장을 그대로 살렸으며, 편집자의 의견은 최소한으로 하였고, 편집자의 의견은 괄호로 표시했음을 밝혀둔다.)

 

“천하 사람 모두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것은 흉함이 있다는 것을 뜻하며, (중략) 길고 짧음도 서로 비교되고. 높고 낮음은 서로 바뀌며, 소리와 울림이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가 서로 따른다.”

 

이는 『도덕경』이 우주 만물의 상대적 세계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각각 다를 수밖애 없고, 선의 기준 또한 보는 이에 따라 다르다. 길고 짧음도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긴 것이 더 긴 것에 비하면 오히려 짧은 것이 되고, 짧다고 생각되는 것도 더 빫은 것에 비하면 기 것이 되기도 한다. 높고 낮음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악기소리와 목소리가 서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기도 하는가 하면, 자연의 소리와 인간의 노래 소리가 서로 어울리기도 한다. 앞뒤의 문제도 따지고 보면 선후가 없어서 서로가 서로를 따르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이 대목은 들뢰즈의 차이를 연상케 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는 동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 형이상학을 넘어 차이를 긍정하고, 그 차이를 바탕으로 끊임없는 생성으로 나아간다는 측면에서 단순한 상대주의 관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노자가 말하는 이 대목도 단순한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상호 관계 속에 놓여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노자의 유위가 동일성을 의미한다면, 무위는 동일성 밖으로의 탈주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한다. 온갖 일이 생겨나도 마다하지 않고, 생기는 것을 소유하지 않으며, ... 공을 세우지만 그 공에 머물지 않고(공성이불거, 功成而弗居), 머물지 않으니 떠나감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적 세계관에 빠져서 판단을 그르치지 않는 성인의 경지를 목격하게 된다. 『도덕경』이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무위자연의 세계이다. 무의는 유위의 반대 개념이다. 유위는 인간의 자연스럽지 못한 인위적 행위를 말하는데, 모든 인위적 행위는 자연에 거스르는 행위라고 본다. 그러므로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런 행위를 일러 무위라고 할 수 있다.

 

성인은 바로 이러한 무위로써 모든 사물을 처리하기에, 행위에 있어서 비난받는 부작용이 없다. 그래서 성인은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고,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고, 소유하거나 기대지도 않고, 공을 세우지만 그 공에 머물지도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이 무위에 해당하는 것은 아가페라고 할 수 있다. 아가페 앞에서는 원수도 길을 잃는다. 아가페는 말 없는 가르침이고 온갖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수확이 생겨도 소유하려 하지 않으며, 공이 있어도 내세우지 않는다. 아가페적 행위는 진정 상대적 개념을 넘어선 초월적 포용과 관용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만큼,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롭다.

 

거룩한 성인의 삶은 무위의 아가페 삶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일’이야말로 ‘위이불시(爲而不恃)’, 즉 일을 하고도 기대지 않는 삶이라 할 것이며,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공을 세우고도 공을 내세우지 않는 삶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야말로 소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정신이다.

 

(이 대목에서 애완동물에 대한 인간의 자세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각종 수술을 하면서 아파트에서 애완견을 키우는 것이 진정 동물의 생명에 대한 존중일까?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 사유이지는 않은가? 무위의 길이 아가페의 길이라면, 그 길은 인위가 가미되지 않는 길일 것이다. 생명을 관리하고 규율하는 현대 생명정치철학이 일반인들에게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수많은 가축병원이 성행하는 자본의 논리가 생명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일반인들에게 그들의 논리를 주입시키는 것은 아닐까? 이 모든 의문이 오늘날에 노자 『도덕경』을 다시 읽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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