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제3장(성인의 리더쉽)

이명권
2026-09-11

(본 글은 이명권박사의 『노자왈 예수 가라사대』의 책 내용 중 『도덕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한 글이다. 물론 저자는 책 속에 노자와 예수를 여러 곳에서 비교하였으나, 본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그 부분을 생략했다. 편집한 내용은 저작의 문장을 그대로 살렸으며, 편집자의 의견은 최소한으로 하였고, 편집자의 의견은 괄호로 표시했음을 밝혀둔다.)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해야 한다.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둑질하지 않게 해야 한다. 욕심낼만한 것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해야 한다.”

 

도가의 사상에는 자연 이외의 것에 대한 숭상, 숭배는 없다. 다만 자연과 하늘의 도를 본받아 살라는 교훈만 있을 뿐이다. 『도덕경』에서는 현명함보다는 오히려 어눌함을 소중히 여긴다. 현명함을 숭상하다 보면, 그 현명하다는 이유로 자칫 교만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재물에 관한 한 더욱 그러하다.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재물의 소중함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소중하지만 귀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는 현자를 소중히 알되 숭상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재물뿐만이 아니라, 무릇 욕심낼만한 것을 자랑스럽게 내보임으로써, 사람의 마음이 산란해지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虛其心) 그 배를 채우게 하며(實其腹),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한다.”

 

‘허기심虛其心 실기복實其腹’ 참으로 놀라온 역설이다.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운다 함은 무엇인가? 마음을 비우면서 배를 채운다는 것은 『도덕경』식의 철저한 안민(安民)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잔꾀를 부리지 말고 뱃속을 든든히 할 일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다음 구절인 ‘약기지弱其志 강기골强其骨’이라는 표현에서 또 한 번의 대조를 이룬다. 의지를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한다는 것은 잔꾀를 부리는 약골보다 차라리 어눌해도 강건한 채질을 키우는 것이 낫다는 표현이다.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의 대목은 왕필의 주를 덧보탠다. “마음은 꾀를 품고 배는 먹을 것을 찾는다. 그러므로 꾀를 비우고 순박함을 채운다. 뼈는 무지함으로써 골간이 되지만, 뜻은 쓸데없이 일거리를 일으켜서 어지러워진다.”

 

여기서의 心과 志는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我相과도 유사할 것이다. 불교에서 “아상을 버려라!”라고 함의 의미는 모든 것은 자연의 道(연기)에 따라 움직이는데 내가 만든 상에 집착하면 오히려 고통이 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허기심, 약기지’도 아상을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지나친 해석일까?-편집자 주)

 

“늘 백성으로 하여금 지식이 없게(無知) 하고 욕심을 내지 않게(無欲) 함으로써 대저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한다. 억지로 함이 없으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아는 것마저도 안다고 뽐낼 것을 염두에 두고 아는 것을 없이 하는 일은 그야말로 불가의 선불교에서 말하는 살불살조(殺佛殺祖)와 같은 맥락이다.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보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처럼, 한 치의 교만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무위의 세계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노자가 말하고 있는 역설의 극치는 무지를 강조하는 데 있다. 백성으로 하여금 무지하게 하고 무욕하게 함으로써, 지혜롭다 하는 이들을 무색하게 한다는 점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지란 무엇일까? 노자가 말하는 무지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대립적인 이원론적 사고에서 비롯되는 일체의 분별지를 넘어선 이른바 ‘무지의 지’를 말하는 것이다. 무지의 지는 개념적, 분석적, 분별적 지식이 아니다. 무분별지인 무지의 지가 맹목적인 지식과 다른 까닭은 무지의 지 속에 초월적인 사랑의 눈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의 지는 세상 지식이라기보다는 맑은 내면의 빛이요, 소리다. 이 내면의 소리와 직접 맞닿을 때만이 참된 지식이 된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견성성불이요, 직지인심이다.

이 무지의 지를 우리는 여러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길 없는 길이요, 소리 없는 음악이며, 마음의 등불이요, 맑은 어둠이며 우레와 같은 침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무지의 지를 경험하는 순간이아말로 얼굴 없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사랑으로 무위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장도 “무위하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라는 『도덕경』의 진면목을 반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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