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이남곡 선생님이 나의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 '향당편' 이야기를 공유하신 것을 가져왔었다. 다시 '양화편' 해석의 한 부분을 올리셔서 여기에 또 가져온다.
이 양화편의 이야기는 공자가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간의 애도 기간을 가지는 일과 관련해서 제자 재아와 논쟁한 이야기가 나온다. 얼마 전 이곳 에세이철학회 방의 최은경 선생이 3백만원의 양육비 지원을 받고도 자식을 죽인 부모 이야기를 올렸다. 또 다른 15년 전의 원영이의 죽음이 생각났다.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 3년 간의 시간, 죽기 전의 마지막 3년의 시간도 배려받고 마중받지 못하는 삶이 과연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이런 것을 제도로써 보장받는다 해도 최은경 선생님의 에세이에서 보여주듯이 그 제도의 마지막 실행은 각자 인간적인 개인의 마음일 터인데 어떻게 그 마음(仁智信)을 기를 수 있을까의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오늘도 여전히, 아니 AI인공지능의 시대야말로 진정 첨예하게 제기되는 우리 삶의 핵심문제라서 다시 가져온다.
인공지능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잉여노동력, 잉여인간 이야기가 더욱 근심거리로 떠오르는데 이때 나라가 기본소득을 확실히 해서 그 남아도는 인간적인 힘을 3년간의 아이돌봄과 3년간의 떠나가는 부모 돌봄에 쓰게하면 어떨까? 거기서도 물론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생물학적 성은 고정되어서는 안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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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선생 페북글, 26.03.15
"삼년상에 대한 재아와 공자의 문답(논어 17/21)에서 공자의 답변이 고루하다는 느낌을 가졌는데, 다음과 같은 저자의 해석과 통찰을 접하니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댓글에 쳇티피티의 반응을 소개한다.
<오늘날 세상 풍속에서 삼년상은 이미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은 3년은커녕 1년, 아니면 49일, 또는 5일이나 3일도 제대로 지키기 어려운 상황도 속출한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우리가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날 때의 시간과 관련해서이다.
요사이 우리는 부모가 연로해서 병이 들면, 특히 치매나 노인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병을 앓게 되면 그 부모를 가정 밖의 노인요양소로 보내는 일을 낯설지 않게 본다. 또한 출산율 세계 최저의 나라라는 지적을 듣는 한국사회이지만 아이들은 거의 태어나자마자 집 밖의 공공 육아기관으로 보내진다.
공자의 말대로 하면 참으로 비인간적이고 불인한(不仁) 상황인데, 이것을 타개할 근거로 그의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 또한 단지 시대착오적이거나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오늘날 소위 서구의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그와 유사한 일을 이제 국가 복지의 차원에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이가 태어나면 그 부모 중 한 사람이 최소한 3년간은 유급으로 육아휴가를 받을 수 있게 하고,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나 또는 경력의 관리라는 명목으로 인간으로서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 사회처럼 아이를 그렇게 일찌감치 집 밖으로 떼어 놓지 않도록 국가와 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경우 여기에 더해서 전통적으로 효(孝)의 나라로 불렸던 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늙은 부모를 돌보는 일을 위해서 누구나 적어도 3년간은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어떨까? 그래서 그 인생의 마지막을 외롭지 않게, 뼛속까지 ‘죽어 가는 자의 고독’을 느끼지 않게 하고, 가족의 손으로 친히 돌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면 우리 인간으로서의 마음과 성품이 훨씬 더 순화되고 고양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우리 처지는 자식을 키우고, 부모를 돌보는 일을 스스로 하지 않고 집 밖으로 내어줄 때만 보조금을 받을 수 있고, 그래서 이제 보통사람들이 이 인간적인 일을 거의 손에서 놓고 사는 나라,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복지 수준이다.
이런 나라에서 일곱 살 원영이의 죽음(2016)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기대하는 일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후 상황이 나아져서 자격 있는 가족이 집에서 병든 부모를 간호해도 어느 정도 보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나서 적어도 3년간은 가까운 삶의 반경에서 긴밀하고 친절한 인간적인 보살핌과 배려를 받으면서 자라고, 몸으로서 이 세상을 마감하는 시간에 가장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에 의해서 애틋하고 정성 어린 돌봄과 미증을 경험하는 일, 나는 오늘날 이 일을 공자가 말한 부모 삼년상과 태어난 후 3년간의 부모 양육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인간적인 일들을 다시 회복할 때 지금 인공지능 알파고(Alpha Go)의 등장으로 인류에게 예민하게 다가오는 기계와의 공존이라는 거센 파도를 좀 더 용이하게 넘어설 수 있다고 여긴다.>"
https://www.facebook.com/share/p/1HWAXaUbHJ/
며칠 전 이남곡 선생님이 나의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 '향당편' 이야기를 공유하신 것을 가져왔었다. 다시 '양화편' 해석의 한 부분을 올리셔서 여기에 또 가져온다.
이 양화편의 이야기는 공자가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간의 애도 기간을 가지는 일과 관련해서 제자 재아와 논쟁한 이야기가 나온다. 얼마 전 이곳 에세이철학회 방의 최은경 선생이 3백만원의 양육비 지원을 받고도 자식을 죽인 부모 이야기를 올렸다. 또 다른 15년 전의 원영이의 죽음이 생각났다.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 3년 간의 시간, 죽기 전의 마지막 3년의 시간도 배려받고 마중받지 못하는 삶이 과연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이런 것을 제도로써 보장받는다 해도 최은경 선생님의 에세이에서 보여주듯이 그 제도의 마지막 실행은 각자 인간적인 개인의 마음일 터인데 어떻게 그 마음(仁智信)을 기를 수 있을까의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오늘도 여전히, 아니 AI인공지능의 시대야말로 진정 첨예하게 제기되는 우리 삶의 핵심문제라서 다시 가져온다.
인공지능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잉여노동력, 잉여인간 이야기가 더욱 근심거리로 떠오르는데 이때 나라가 기본소득을 확실히 해서 그 남아도는 인간적인 힘을 3년간의 아이돌봄과 3년간의 떠나가는 부모 돌봄에 쓰게하면 어떨까? 거기서도 물론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생물학적 성은 고정되어서는 안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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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선생 페북글, 26.03.15
"삼년상에 대한 재아와 공자의 문답(논어 17/21)에서 공자의 답변이 고루하다는 느낌을 가졌는데, 다음과 같은 저자의 해석과 통찰을 접하니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댓글에 쳇티피티의 반응을 소개한다.
<오늘날 세상 풍속에서 삼년상은 이미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은 3년은커녕 1년, 아니면 49일, 또는 5일이나 3일도 제대로 지키기 어려운 상황도 속출한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우리가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날 때의 시간과 관련해서이다.
요사이 우리는 부모가 연로해서 병이 들면, 특히 치매나 노인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병을 앓게 되면 그 부모를 가정 밖의 노인요양소로 보내는 일을 낯설지 않게 본다. 또한 출산율 세계 최저의 나라라는 지적을 듣는 한국사회이지만 아이들은 거의 태어나자마자 집 밖의 공공 육아기관으로 보내진다.
공자의 말대로 하면 참으로 비인간적이고 불인한(不仁) 상황인데, 이것을 타개할 근거로 그의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 또한 단지 시대착오적이거나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오늘날 소위 서구의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그와 유사한 일을 이제 국가 복지의 차원에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이가 태어나면 그 부모 중 한 사람이 최소한 3년간은 유급으로 육아휴가를 받을 수 있게 하고,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나 또는 경력의 관리라는 명목으로 인간으로서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 사회처럼 아이를 그렇게 일찌감치 집 밖으로 떼어 놓지 않도록 국가와 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경우 여기에 더해서 전통적으로 효(孝)의 나라로 불렸던 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늙은 부모를 돌보는 일을 위해서 누구나 적어도 3년간은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어떨까? 그래서 그 인생의 마지막을 외롭지 않게, 뼛속까지 ‘죽어 가는 자의 고독’을 느끼지 않게 하고, 가족의 손으로 친히 돌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면 우리 인간으로서의 마음과 성품이 훨씬 더 순화되고 고양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우리 처지는 자식을 키우고, 부모를 돌보는 일을 스스로 하지 않고 집 밖으로 내어줄 때만 보조금을 받을 수 있고, 그래서 이제 보통사람들이 이 인간적인 일을 거의 손에서 놓고 사는 나라,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복지 수준이다.
이런 나라에서 일곱 살 원영이의 죽음(2016)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기대하는 일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후 상황이 나아져서 자격 있는 가족이 집에서 병든 부모를 간호해도 어느 정도 보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나서 적어도 3년간은 가까운 삶의 반경에서 긴밀하고 친절한 인간적인 보살핌과 배려를 받으면서 자라고, 몸으로서 이 세상을 마감하는 시간에 가장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에 의해서 애틋하고 정성 어린 돌봄과 미증을 경험하는 일, 나는 오늘날 이 일을 공자가 말한 부모 삼년상과 태어난 후 3년간의 부모 양육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인간적인 일들을 다시 회복할 때 지금 인공지능 알파고(Alpha Go)의 등장으로 인류에게 예민하게 다가오는 기계와의 공존이라는 거센 파도를 좀 더 용이하게 넘어설 수 있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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