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타인즈게이트 본편 및 제로 전체 스포일러 있음. 안 본 사람은 뒤로가기 권장.
사르트르 강연록을 읽다가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1945년 파리에서 한 강연인데, 읽는 내내 2010년 아키하바라의 어떤 자칭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계속 떠올랐다.
작가가 사르트르를 읽고 썼을 거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그럴 근거는 없다. 다만 두 텍스트가 완전히 같은 문제를 붙들고 있고, 심지어 도달하는 결론까지 비슷하다는 게 흥미로워서 정리해봤다.
철학 쪽이 지루하면 슈타게 파트만 읽어도 되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1. 신은 이미 답을 정해놨다 — 어트랙터 필드와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페이퍼 나이프 이야기
사르트르는 종이 자르는 칼 얘기로 시작한다.
장인이 페이퍼 나이프를 만들 때, 머릿속에 먼저 "이건 종이를 자르는 물건이고, 이런 재질과 모양이어야 한다"는 개념이 있다. 그 개념에 맞춰 실제 물건이 나중에 만들어진다. 순서를 정리하면 이렇다.
본질(설계도·용도) → 실존(실제로 존재하게 됨)
전통적인 유신론적 세계관에서는 인간도 이와 같다. 신이 "인간은 이런 존재여야 한다"는 설계도를 먼저 갖고, 그에 맞춰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 인간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인간은 그걸 발견해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슈타게는 이 세계관을 SF로 구현했다
어트랙터 필드와 수렴이라는 설정이 정확히 이거다.
오카베가 D메일로 아무리 사소한 과거를 바꿔도, α 세계선 안에서는 마유리가 죽는 결말로 계속 되돌아온다. 죽는 방식만 바뀔 뿐이다. 개별 사건은 얼마든지 바뀌지만 큰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결말로 세계가 스스로 수렴한다.
이건 인과관계에 종속되는 일반적 결정론보다 오히려 운명(fate)에 가깝다. 결정론이라면 조건을 바꾸면 결과도 바뀌어야 하는데(나비효과), 슈타게의 수렴은 조건을 바꿔도 같은 결말이 나온다. 원인을 아무리 손봐도 결과가 안 바뀐다는 건, 세계 어딘가에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미리 쓰인 각본이 있다는 뜻이다.
작품 초반에 이 세계관을 통째로 선언하는 대사가 나온다.
"인간이 빛의 속도를 넘는 것은 물고기가 육지 생활을 시작하는 것보다도 우습다. 이것은 저항하는 자들에 대한 신이 전하는 최후통첩이다."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온 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불가능해 보였지만 결국 일어난 기적적 도약의 사례다. 그런데 광속을 넘는 건 그것보다도 우습다고 한다. 기적조차 비교가 안 되는 절대적인 벽이라는 것.
주목할 건 이게 단순한 물리학 서술이 아니라 "저항하는 자들에 대한 최후통첩"이라는 형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신이 굳이 통첩을 보낸다는 건, 이미 누군가 그 벽을 두드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 대사는 작품 초반부터 "정해진 각본 vs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이라는 구도를 통째로 깔아둔다.
2. 그런데 인간에게는 설계도가 없다 —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의 뒤집기
사르트르는 여기서 정반대를 주장한다. 신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미리 그려진 설계도가 없다. 인간은 그냥 먼저 세상에 던져져 존재하고, 그 다음에 스스로 무엇이 될지를 만들어간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당연히 반박이 나온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번식 욕구나 생존 본능 같은 게 이미 우리 안에 있지 않은가? 인간 본성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사르트르는 이걸 두 층위로 나눠서 답한다.
1)사실성(facticité): 어찌할 수 없이 주어진 조건들. 몸, 태어난 시대와 장소, 생물학적 충동. 사르트르는 이걸 부정한 적 없다.
2)본질/가치: 그 조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전적으로 자유라는 것.
배고픔이라는 본능이 있다고 해서 "그러므로 육식을 해야 한다/채식을 해야 한다"가 자동으로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 본능은 원재료를 줄 뿐이고, 그걸로 뭘 만들지는 다른 층위의 문제다.
오카베가 부정하지 못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오카베도 마찬가지다. 그가 뒤집을 수 없는 조건이 있다.
1)어트랙터 필드는 실재한다. 세계선의 수렴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2)D메일이 이미 보내졌다는 사실, SERN이 존재한다는 사실, 크리스가 그 시각 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
3)타임리프 머신의 물리적 제약. 몇 번을 되돌아가도 도착 지점은 정해져 있다.
이건 전부 사실성이다. 오카베는 이걸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 중반의 그는 이 벽을 뼈저리게 학습한 상태다. "몇 번을 해도 안 된다"는 걸 몸으로 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긴다. 그가 하는 건 물리법칙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법칙 안에서 다른 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조건 자체는 그대로 두고, 그 조건에 대한 응답을 바꾼다.
이게 사르트르가 말한 구조와 정확히 같다. 주어진 조건은 못 바꾼다. 하지만 그 조건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그것에 어떻게 응답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3. 마유리냐 크리스냐 —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사르트르 제자의 딜레마
사르트르는 이 강연에서 자기 제자 얘기를 한다. 나치 점령기, 한 제자가 찾아와 물었다. 레지스탕스에 합류해 싸울 것인가, 아니면 자기만 바라보는 병든 어머니 곁에 남을 것인가.
기존 윤리학은 답을 못 준다. 칸트식으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고 해봤자, 어머니를 목적으로 대하면 조국의 동포들을 수단으로 삼는 셈이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윤리도 마찬가지다. "이웃을 사랑하라"에서 누가 더 가까운 이웃인지는 안 나온다.
사르트르의 답은 잔인하다. "어떤 이론도, 어떤 선생도 대신 답해줄 수 없다. 너는 선택함으로써 답을 만들어낼 것이다."
오카베의 딜레마는 그보다 더 나쁘다
슈타게 후반부의 구조가 정확히 이건데, 사실 사르트르 제자보다 조건이 더 가혹하다.
제자의 선택은 추상적 대의(조국, 동포)와 구체적 개인(어머니)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래서 최소한 성격이 다른 두 가치를 저울에 올리는 형태였다.
오카베의 선택은 그게 아니다. 양쪽 다 그가 사랑하는,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크리스는 오카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툭탁거리며 쌓아온 시간이 있고, 서로에 대한 감정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 감정이 확인되는 장면들이 작품 안에 배치되어 있다. 그를 끌어안는 장면은 소유욕도 감상도 아니고, 곧 자기 손으로 지워야 할 사람을 붙잡는 인간의 몸짓이다.
그래서 이 딜레마에는 어떤 저울도 없다. 관계의 깊이로 잴 수 있나? 마유리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지탱해온 사람이고, 크리스는 그를 처음으로 대등하게 마주 본 사람이다. 종류가 다른 관계를 무슨 단위로 비교하나. 어떤 윤리 이론도 "이럴 땐 소꿉친구를 살려라" 같은 조항을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작품은 이 딜레마를 양쪽 방향으로 한 번씩 다 겪게 만든다. 1기의 오카베는 마유리를 택하고 크리스를 잃는다. 제로의 오카베는 반대편 끝에서 마유리를 놓는 쪽의 무게를 감당한다. 어느 쪽으로 가도 그는 잃는다. 이건 "정답이 있는데 주인공이 못 찾는" 구조가 아니라, 애초에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작품이 두 번에 걸쳐 증명하는 구조다.
사르트르가 말한 그대로다. 가치는 선택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카베는 "누가 더 소중한지 발견해서" 선택하는 게 아니다. 발견할 답 같은 건 애초에 없다. 그는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그 가치를 세계에 새겨 넣는다.
"우리는 결코 악한 것을 선택할 수 없다"의 진짜 의미
사르트르 텍스트에서 제일 오해받는 문장이 있다. 얼핏 "내가 선택한 건 다 선하다"는 자기 정당화처럼 읽힌다. 그런데 논증을 풀면 완전히 다른 얘기다.
- 내가 뭔가를 선택한다는 건, 그 순간 그것을 가치 있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 그런데 가치 판단은 본질적으로 보편성을 전제한다. "이게 옳다"고 규정하는 순간, 암묵적으로 "이건 나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 된다.
- 그래서 내가 선택할 때마다, 나는 사실 "모든 인간이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 따라서 나의 선택은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책임을 동반한다.
여기서 "선하다"는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선택 행위 자체가 함축하는 보편화의 논리 구조를 가리키는 기술적 표현이다. 이 논증이 노리는 결론은 면죄부가 아니라 정반대의 무게감이다.
오카베가 크리스를 포기하는 선택을 할 때 짊어지는 게 바로 이 무게다. 그건 "나는 마유리가 더 좋다"는 사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지우면서,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판단을 세계에 새겨 넣는 일이다. 그가 그토록 무너지는 이유는, 그가 이 무게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4. 리딩 슈타이너 — 자기기만이 봉쇄된 인간
불안과 자기기만
당연한 반문이 나온다. 매 선택에 인류 전체에 대한 책임이 걸려 있다면, 그건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형벌 아닌가?
사르트르는 맞다고 답한다. 책임과 자유는 대립하는 게 아니라 같은 것의 양면이다. 신도, 정해진 본성도, 사회도 나를 대신해 선택해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핑계 댈 곳 없이 매 순간 내 선택을 감당해야 한다. 이 무게는 자유를 제한하는 게 아니라 자유가 치르는 대가다. 그가 이걸 불안(angoisse)이라 부르고, 유명한 문장을 남긴 이유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그리고 이 무게를 회피하는 태도가 자기기만(mauvaise foi)이다. "나는 어쩔 수 없었어", "다들 이렇게 하잖아", "상황이 그랬어" 하면서 자기 선택의 무게를 못 본 척하는 것. 인간은 대부분 이렇게 산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카베만은 그럴 수 없다
리딩 슈타이너라는 설정을 실존주의 관점에서 보면 소름 돋는 장치다.
세계선이 바뀌면 모든 사람이 이전 세계선을 잊는다. 마유리도, 다루도, 크리스도, 그 세계에서 죽은 사람들도 전부 잊는다. 그들에게 이전 세계선은 존재한 적조차 없다. 오직 오카베만 기억한다.
이게 뭘 뜻하는가. 오카베에게는 자기기만이 원천 차단되어 있다.
1)그는 "그런 일 없었어"라고 말할 수 없다. 기억하니까.
2)그는 "어쩔 수 없었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는 걸 직접 겪어봤으니까.
3)그는 "내 탓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없다. D메일을 보낸 것도, 취소한 것도 전부 그의 선택이었으니까.
특히 잔인한 건, 그가 지운 사람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크리스가 사라진 세계선에서 그 관계를 기억하는 건 오직 그 혼자다. 상대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른다. 관계를 잃은 게 아니라, 관계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혼자 짊어지게 되는 것.
즉 리딩 슈타이너는 초능력이라기보다 실존적 조건의 시각화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기 선택에서 도망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을, 슈타게는 "이 남자만은 기억을 잃지 않는다"는 SF 설정으로 구현했다. 나머지 인물들이 잊는 것이야말로, 우리 대부분이 실제로 하고 있는 자기기만의 은유처럼 읽힌다.
5. 제로 — 자기기만에 빠진 오카베
여기서 『슈타인즈게이트 제로』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사실상 자기기만의 초상화다.
크리스를 구하는 데 실패한 오카베는 β 세계선에서 껍데기가 된다. 호오인 쿄우마라는 이름을 버리고, 타임머신 연구에서 손을 떼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학생 흉내를 낸다. 표면적으로는 "현실을 받아들인 성숙"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르트르 기준으로 보면 이건 성숙이 아니라 전형적인 자기기만이다.
"나는 이미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은 내 능력 밖이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문장들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한 mauvaise foi의 표본이다. 자기 선택의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놓고, 그걸 "상황이 그랬다"는 언어로 포장하는 것. 제로의 오카베는 자유를 포기한 게 아니라, 자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이 상태가 얼마나 지독한지를 작품은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는 편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망가진다. 자기기만은 고통을 없애주지 않고, 고통을 이름 없는 것으로 만들어 계속 안에서 곪게 만든다.
여기서 그를 다시 일으키는 건 이론이나 각성이 아니다. 미래에서 온 메시지, 즉 "너는 이미 그걸 해냈다"는 증거다. 이건 구조적으로 흥미로운데, 그를 설득한 게 "네가 할 수 있다"는 격려가 아니라 "네가 선택하기만 하면 그 길이 실재한다"는 확인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없어서 포기한 게 아니라,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성이 안 보였던 것이다.
6. 그리고 도달한다 — 저항이 만들어낸 세계선
딜레마의 전제 자체를 거부하기
여기가 이 작품의 진짜 결정적인 지점이다.
오카베가 최종적으로 한 일은 "마유리냐 크리스냐"에서 다른 쪽을 고른 게 아니다. 그는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는 전제 자체를 거부했다. 1기에서 잃은 것과 제로에서 잃은 것, 그 두 상실이 동시에 무효화되는 자리 — 그게 슈타인즈 게이트 세계선이다.
세계는 그에게 두 개의 선택지를 제시했고, 어느 쪽을 골라도 그는 무언가를 잃게 되어 있었다. 신의 최후통첩은 정확히 이런 형태였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이만큼이다. 그 안에서 골라라."
오카베는 그 목록 밖으로 나간다. 과거의 자신을 속여서 크리스의 죽음을 연출함으로써, 어트랙터 필드가 요구하는 조건(크리스는 그날 죽어야 한다)을 형식적으로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그를 살린다. 물리법칙을 위반한 게 아니다. 주어진 조건은 전부 지키면서, 그 조건이 강제한다고 여겨졌던 결론만 빠져나간 것이다.
이게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의 정확한 형태다. 상황은 주어진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는 상황이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도 해석이고, 해석이라면 뒤집을 수 있다. "둘 중 하나뿐"이라는 것조차 하나의 해석이었을 뿐이다.
감동의 정체
1기의 슈타인즈 게이트 세계선 도달, 그리고 제로를 거쳐 다시 그 지점에 도달하는 장면이 마음을 치는 이유가 있다.
그건 운명이 봐줘서 얻은 결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1)신이 자비를 베푼 게 아니다. 오히려 신은 끝까지 "안 된다"고 통첩을 보냈다.
2)세계선이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 것도 아니다. 수렴은 마지막까지 그를 방해했다.
3)우연도 아니다. 수백 번의 실패와, 포기했다가 다시 일어서는 과정 전체가 그 결말의 재료였다.
그 세계선은 끝까지 저항한 인간이 자기 손으로 뜯어낸 것이다. 주어진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 발견된 게 아니라 창조된 것.
그리고 이건 정확히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의 서사적 완성형이다. 미리 정해진 좋은 결말 같은 건 없었다. 오카베가 그걸 향해 계속 행동했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그런 결말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세계선의 이름이 하필 "슈타인즈 게이트의 선택"인 것도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건 운명의 이름이 아니라 선택의 이름이다.
작품 마지막에 오카베가 그 문장을 말할 때, 그건 "운명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가 아니다. "이건 내가 한 선택이다"라는 선언이다.
7. 그래서 뭘 해야 하는데 — 앙가주망, 그리고 매뉴얼의 부재
사르트르는 답을 주지 않는다
여기까지 읽으면 당연히 기대하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살라는 건데?
사르트르는 끝까지 구체적 매뉴얼을 주지 않는다. 대신 앙가주망(engagement)을 말한다. 자유는 머릿속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 속의 행동과 참여로만 실현된다는 것. "나는 자유롭다"고 생각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자유가 아니라 자기기만에 가깝다.
그는 이걸 말로만 한 게 아니다. 알제리 독립전쟁 반대, 베트남전 반전운동, 68혁명 지지, 그리고 "부르주아 제도에 편입되고 싶지 않다"며 노벨문학상(1964)을 거부한 것까지, 평생 자기 철학대로 살았다.
그런데도 이 텍스트 안에 완결된 윤리 체계는 없다. 사르트르는 이후 "자유가 어떻게 구체적 윤리로 이어지는가"를 풀어보려고 『윤리학을 위한 노트』라는 방대한 작업을 시작했지만, 끝내 미완성으로 남긴 채 생전에 출간하지 못했다.
오카베도 공략집 없이 한다
오카베가 하는 일도 정확히 이거다. 그에게는 공략집이 없다.
세계선 이론을 이해했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다. 다이버전스 미터가 알려주는 건 "지금 얼마나 벗어났는가"뿐이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다. 그는 매번 시도하고, 실패하고, 무너지고, 다시 시도한다. 답이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 개입했기 때문에 결국 길이 열린다.
그리고 그 개입은 전부 구체적 행동이다. 문자를 보내고, 사람을 만나고, 몸으로 뛴다. 앙가주망의 교과서적 사례라고 해도 될 정도다.
8. 남는 문제 — 현실에는 다이버전스 미터가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여기서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지점이 남는다. 그리고 이건 슈타게보다 사르트르 쪽의 문제다.
슈타게는 저항에 보상을 준다. 오카베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도달했다. 작품은 "그러니 저항할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과가 그걸 증명하니까.
사르트르에게는 그 보증이 없다. 현실에는 다이버전스 미터가 없고, 리딩 슈타이너도 없고, 몇 번을 다시 시도해도 실패하는 사람은 그냥 실패한 채로 끝난다. 자기 선택의 무게를 정직하게 짊어진 사람이 반드시 좋은 결말에 도달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왜 굳이 힘든 쪽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자기기만 속에서 사는 사람은 불안하지 않다. 매 선택에 인류의 무게를 얹지 않으니까. 사르트르의 답은 "그래도 회피 없는 삶이 더 진짜다(authenticité)"인데, 이건 "왜 진짜인 게 더 좋은가"에는 답하지 못한다.
다만 제로가 이 질문에 한 조각을 보태긴 한다. 자기기만은 편하지 않았다. 오카베가 모든 걸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려 했을 때, 그는 평온해지지 않았다. 도망친 자리에서 더 망가졌다. 자기기만이 주는 건 편안함이 아니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어쩌면 그게 답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회피가 실제로 편했다면 사르트르의 논증은 무너졌겠지만, 회피도 어차피 아프다면 — 최소한 자기가 선택한 아픔이 낫다는 것.
마지막으로: 작가가 의도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슈타게 제작진이 참고한 건 사르트르 같은 정통 철학서보다는 존 타이터 괴담, CERN 관련 음모론, 실제 물리학 이론 쪽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이라는 구도도 슈타게가 발명한 게 아니다. 그리스 비극부터 이어지는 인류 보편의 서사 원형이고, 실존주의 역시 그 원형을 20세기 철학 언어로 정식화한 것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건 영향 관계가 아니라 같은 문제에 각자의 방식으로 도달한 결과다. 인간이 자기 조건을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충분히 오래됐고 충분히 보편적이라, 1945년의 철학 강연과 2010년대의 SF 애니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다만 한쪽이 다른 쪽보다 나은 지점이 하나 있다. 사르트르는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거기서 멈춘다. 슈타게는 그 선택이 얼마나 아픈지, 도망치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다시 일어선 사람이 어디에 도달하는지를 끝까지 보여준다. 철학이 명제로 남긴 것을 이야기가 몸으로 살아낸 셈이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텍스트가 그렇게 읽힐 수 있다면 그 독해는 그 자체로 유효하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읽으며 정리한 글. 원문 논증을 나름대로 풀어쓴 것이라 정확한 표현은 번역서를 확인하는 걸 권함.

⚠ 슈타인즈게이트 본편 및 제로 전체 스포일러 있음. 안 본 사람은 뒤로가기 권장.
사르트르 강연록을 읽다가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1945년 파리에서 한 강연인데, 읽는 내내 2010년 아키하바라의 어떤 자칭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계속 떠올랐다.
작가가 사르트르를 읽고 썼을 거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그럴 근거는 없다. 다만 두 텍스트가 완전히 같은 문제를 붙들고 있고, 심지어 도달하는 결론까지 비슷하다는 게 흥미로워서 정리해봤다.
철학 쪽이 지루하면 슈타게 파트만 읽어도 되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1. 신은 이미 답을 정해놨다 — 어트랙터 필드와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페이퍼 나이프 이야기
사르트르는 종이 자르는 칼 얘기로 시작한다.
장인이 페이퍼 나이프를 만들 때, 머릿속에 먼저 "이건 종이를 자르는 물건이고, 이런 재질과 모양이어야 한다"는 개념이 있다. 그 개념에 맞춰 실제 물건이 나중에 만들어진다. 순서를 정리하면 이렇다.
본질(설계도·용도) → 실존(실제로 존재하게 됨)
전통적인 유신론적 세계관에서는 인간도 이와 같다. 신이 "인간은 이런 존재여야 한다"는 설계도를 먼저 갖고, 그에 맞춰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 인간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인간은 그걸 발견해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슈타게는 이 세계관을 SF로 구현했다
어트랙터 필드와 수렴이라는 설정이 정확히 이거다.
오카베가 D메일로 아무리 사소한 과거를 바꿔도, α 세계선 안에서는 마유리가 죽는 결말로 계속 되돌아온다. 죽는 방식만 바뀔 뿐이다. 개별 사건은 얼마든지 바뀌지만 큰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결말로 세계가 스스로 수렴한다.
이건 인과관계에 종속되는 일반적 결정론보다 오히려 운명(fate)에 가깝다. 결정론이라면 조건을 바꾸면 결과도 바뀌어야 하는데(나비효과), 슈타게의 수렴은 조건을 바꿔도 같은 결말이 나온다. 원인을 아무리 손봐도 결과가 안 바뀐다는 건, 세계 어딘가에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미리 쓰인 각본이 있다는 뜻이다.
작품 초반에 이 세계관을 통째로 선언하는 대사가 나온다.
"인간이 빛의 속도를 넘는 것은 물고기가 육지 생활을 시작하는 것보다도 우습다. 이것은 저항하는 자들에 대한 신이 전하는 최후통첩이다."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온 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불가능해 보였지만 결국 일어난 기적적 도약의 사례다. 그런데 광속을 넘는 건 그것보다도 우습다고 한다. 기적조차 비교가 안 되는 절대적인 벽이라는 것.
주목할 건 이게 단순한 물리학 서술이 아니라 "저항하는 자들에 대한 최후통첩"이라는 형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신이 굳이 통첩을 보낸다는 건, 이미 누군가 그 벽을 두드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 대사는 작품 초반부터 "정해진 각본 vs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이라는 구도를 통째로 깔아둔다.
2. 그런데 인간에게는 설계도가 없다 —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의 뒤집기
사르트르는 여기서 정반대를 주장한다. 신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미리 그려진 설계도가 없다. 인간은 그냥 먼저 세상에 던져져 존재하고, 그 다음에 스스로 무엇이 될지를 만들어간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당연히 반박이 나온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번식 욕구나 생존 본능 같은 게 이미 우리 안에 있지 않은가? 인간 본성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사르트르는 이걸 두 층위로 나눠서 답한다.
1)사실성(facticité): 어찌할 수 없이 주어진 조건들. 몸, 태어난 시대와 장소, 생물학적 충동. 사르트르는 이걸 부정한 적 없다.
2)본질/가치: 그 조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전적으로 자유라는 것.
배고픔이라는 본능이 있다고 해서 "그러므로 육식을 해야 한다/채식을 해야 한다"가 자동으로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 본능은 원재료를 줄 뿐이고, 그걸로 뭘 만들지는 다른 층위의 문제다.
오카베가 부정하지 못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오카베도 마찬가지다. 그가 뒤집을 수 없는 조건이 있다.
1)어트랙터 필드는 실재한다. 세계선의 수렴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2)D메일이 이미 보내졌다는 사실, SERN이 존재한다는 사실, 크리스가 그 시각 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
3)타임리프 머신의 물리적 제약. 몇 번을 되돌아가도 도착 지점은 정해져 있다.
이건 전부 사실성이다. 오카베는 이걸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 중반의 그는 이 벽을 뼈저리게 학습한 상태다. "몇 번을 해도 안 된다"는 걸 몸으로 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긴다. 그가 하는 건 물리법칙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법칙 안에서 다른 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조건 자체는 그대로 두고, 그 조건에 대한 응답을 바꾼다.
이게 사르트르가 말한 구조와 정확히 같다. 주어진 조건은 못 바꾼다. 하지만 그 조건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그것에 어떻게 응답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3. 마유리냐 크리스냐 —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사르트르 제자의 딜레마
사르트르는 이 강연에서 자기 제자 얘기를 한다. 나치 점령기, 한 제자가 찾아와 물었다. 레지스탕스에 합류해 싸울 것인가, 아니면 자기만 바라보는 병든 어머니 곁에 남을 것인가.
기존 윤리학은 답을 못 준다. 칸트식으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고 해봤자, 어머니를 목적으로 대하면 조국의 동포들을 수단으로 삼는 셈이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윤리도 마찬가지다. "이웃을 사랑하라"에서 누가 더 가까운 이웃인지는 안 나온다.
사르트르의 답은 잔인하다. "어떤 이론도, 어떤 선생도 대신 답해줄 수 없다. 너는 선택함으로써 답을 만들어낼 것이다."
오카베의 딜레마는 그보다 더 나쁘다
슈타게 후반부의 구조가 정확히 이건데, 사실 사르트르 제자보다 조건이 더 가혹하다.
제자의 선택은 추상적 대의(조국, 동포)와 구체적 개인(어머니)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래서 최소한 성격이 다른 두 가치를 저울에 올리는 형태였다.
오카베의 선택은 그게 아니다. 양쪽 다 그가 사랑하는,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크리스는 오카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툭탁거리며 쌓아온 시간이 있고, 서로에 대한 감정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 감정이 확인되는 장면들이 작품 안에 배치되어 있다. 그를 끌어안는 장면은 소유욕도 감상도 아니고, 곧 자기 손으로 지워야 할 사람을 붙잡는 인간의 몸짓이다.
그래서 이 딜레마에는 어떤 저울도 없다. 관계의 깊이로 잴 수 있나? 마유리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지탱해온 사람이고, 크리스는 그를 처음으로 대등하게 마주 본 사람이다. 종류가 다른 관계를 무슨 단위로 비교하나. 어떤 윤리 이론도 "이럴 땐 소꿉친구를 살려라" 같은 조항을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작품은 이 딜레마를 양쪽 방향으로 한 번씩 다 겪게 만든다. 1기의 오카베는 마유리를 택하고 크리스를 잃는다. 제로의 오카베는 반대편 끝에서 마유리를 놓는 쪽의 무게를 감당한다. 어느 쪽으로 가도 그는 잃는다. 이건 "정답이 있는데 주인공이 못 찾는" 구조가 아니라, 애초에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작품이 두 번에 걸쳐 증명하는 구조다.
사르트르가 말한 그대로다. 가치는 선택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카베는 "누가 더 소중한지 발견해서" 선택하는 게 아니다. 발견할 답 같은 건 애초에 없다. 그는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그 가치를 세계에 새겨 넣는다.
"우리는 결코 악한 것을 선택할 수 없다"의 진짜 의미
사르트르 텍스트에서 제일 오해받는 문장이 있다. 얼핏 "내가 선택한 건 다 선하다"는 자기 정당화처럼 읽힌다. 그런데 논증을 풀면 완전히 다른 얘기다.
여기서 "선하다"는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선택 행위 자체가 함축하는 보편화의 논리 구조를 가리키는 기술적 표현이다. 이 논증이 노리는 결론은 면죄부가 아니라 정반대의 무게감이다.
오카베가 크리스를 포기하는 선택을 할 때 짊어지는 게 바로 이 무게다. 그건 "나는 마유리가 더 좋다"는 사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지우면서,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판단을 세계에 새겨 넣는 일이다. 그가 그토록 무너지는 이유는, 그가 이 무게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4. 리딩 슈타이너 — 자기기만이 봉쇄된 인간
불안과 자기기만
당연한 반문이 나온다. 매 선택에 인류 전체에 대한 책임이 걸려 있다면, 그건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형벌 아닌가?
사르트르는 맞다고 답한다. 책임과 자유는 대립하는 게 아니라 같은 것의 양면이다. 신도, 정해진 본성도, 사회도 나를 대신해 선택해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핑계 댈 곳 없이 매 순간 내 선택을 감당해야 한다. 이 무게는 자유를 제한하는 게 아니라 자유가 치르는 대가다. 그가 이걸 불안(angoisse)이라 부르고, 유명한 문장을 남긴 이유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그리고 이 무게를 회피하는 태도가 자기기만(mauvaise foi)이다. "나는 어쩔 수 없었어", "다들 이렇게 하잖아", "상황이 그랬어" 하면서 자기 선택의 무게를 못 본 척하는 것. 인간은 대부분 이렇게 산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카베만은 그럴 수 없다
리딩 슈타이너라는 설정을 실존주의 관점에서 보면 소름 돋는 장치다.
세계선이 바뀌면 모든 사람이 이전 세계선을 잊는다. 마유리도, 다루도, 크리스도, 그 세계에서 죽은 사람들도 전부 잊는다. 그들에게 이전 세계선은 존재한 적조차 없다. 오직 오카베만 기억한다.
이게 뭘 뜻하는가. 오카베에게는 자기기만이 원천 차단되어 있다.
1)그는 "그런 일 없었어"라고 말할 수 없다. 기억하니까.
2)그는 "어쩔 수 없었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는 걸 직접 겪어봤으니까.
3)그는 "내 탓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없다. D메일을 보낸 것도, 취소한 것도 전부 그의 선택이었으니까.
특히 잔인한 건, 그가 지운 사람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크리스가 사라진 세계선에서 그 관계를 기억하는 건 오직 그 혼자다. 상대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른다. 관계를 잃은 게 아니라, 관계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혼자 짊어지게 되는 것.
즉 리딩 슈타이너는 초능력이라기보다 실존적 조건의 시각화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기 선택에서 도망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을, 슈타게는 "이 남자만은 기억을 잃지 않는다"는 SF 설정으로 구현했다. 나머지 인물들이 잊는 것이야말로, 우리 대부분이 실제로 하고 있는 자기기만의 은유처럼 읽힌다.
5. 제로 — 자기기만에 빠진 오카베
여기서 『슈타인즈게이트 제로』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사실상 자기기만의 초상화다.
크리스를 구하는 데 실패한 오카베는 β 세계선에서 껍데기가 된다. 호오인 쿄우마라는 이름을 버리고, 타임머신 연구에서 손을 떼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학생 흉내를 낸다. 표면적으로는 "현실을 받아들인 성숙"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르트르 기준으로 보면 이건 성숙이 아니라 전형적인 자기기만이다.
"나는 이미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은 내 능력 밖이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문장들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한 mauvaise foi의 표본이다. 자기 선택의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놓고, 그걸 "상황이 그랬다"는 언어로 포장하는 것. 제로의 오카베는 자유를 포기한 게 아니라, 자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이 상태가 얼마나 지독한지를 작품은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는 편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망가진다. 자기기만은 고통을 없애주지 않고, 고통을 이름 없는 것으로 만들어 계속 안에서 곪게 만든다.
여기서 그를 다시 일으키는 건 이론이나 각성이 아니다. 미래에서 온 메시지, 즉 "너는 이미 그걸 해냈다"는 증거다. 이건 구조적으로 흥미로운데, 그를 설득한 게 "네가 할 수 있다"는 격려가 아니라 "네가 선택하기만 하면 그 길이 실재한다"는 확인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없어서 포기한 게 아니라,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성이 안 보였던 것이다.
6. 그리고 도달한다 — 저항이 만들어낸 세계선
딜레마의 전제 자체를 거부하기
여기가 이 작품의 진짜 결정적인 지점이다.
오카베가 최종적으로 한 일은 "마유리냐 크리스냐"에서 다른 쪽을 고른 게 아니다. 그는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는 전제 자체를 거부했다. 1기에서 잃은 것과 제로에서 잃은 것, 그 두 상실이 동시에 무효화되는 자리 — 그게 슈타인즈 게이트 세계선이다.
세계는 그에게 두 개의 선택지를 제시했고, 어느 쪽을 골라도 그는 무언가를 잃게 되어 있었다. 신의 최후통첩은 정확히 이런 형태였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이만큼이다. 그 안에서 골라라."
오카베는 그 목록 밖으로 나간다. 과거의 자신을 속여서 크리스의 죽음을 연출함으로써, 어트랙터 필드가 요구하는 조건(크리스는 그날 죽어야 한다)을 형식적으로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그를 살린다. 물리법칙을 위반한 게 아니다. 주어진 조건은 전부 지키면서, 그 조건이 강제한다고 여겨졌던 결론만 빠져나간 것이다.
이게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의 정확한 형태다. 상황은 주어진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는 상황이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도 해석이고, 해석이라면 뒤집을 수 있다. "둘 중 하나뿐"이라는 것조차 하나의 해석이었을 뿐이다.
감동의 정체
1기의 슈타인즈 게이트 세계선 도달, 그리고 제로를 거쳐 다시 그 지점에 도달하는 장면이 마음을 치는 이유가 있다.
그건 운명이 봐줘서 얻은 결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1)신이 자비를 베푼 게 아니다. 오히려 신은 끝까지 "안 된다"고 통첩을 보냈다.
2)세계선이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 것도 아니다. 수렴은 마지막까지 그를 방해했다.
3)우연도 아니다. 수백 번의 실패와, 포기했다가 다시 일어서는 과정 전체가 그 결말의 재료였다.
그 세계선은 끝까지 저항한 인간이 자기 손으로 뜯어낸 것이다. 주어진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 발견된 게 아니라 창조된 것.
그리고 이건 정확히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의 서사적 완성형이다. 미리 정해진 좋은 결말 같은 건 없었다. 오카베가 그걸 향해 계속 행동했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그런 결말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세계선의 이름이 하필 "슈타인즈 게이트의 선택"인 것도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건 운명의 이름이 아니라 선택의 이름이다.
작품 마지막에 오카베가 그 문장을 말할 때, 그건 "운명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가 아니다. "이건 내가 한 선택이다"라는 선언이다.
7. 그래서 뭘 해야 하는데 — 앙가주망, 그리고 매뉴얼의 부재
사르트르는 답을 주지 않는다
여기까지 읽으면 당연히 기대하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살라는 건데?
사르트르는 끝까지 구체적 매뉴얼을 주지 않는다. 대신 앙가주망(engagement)을 말한다. 자유는 머릿속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 속의 행동과 참여로만 실현된다는 것. "나는 자유롭다"고 생각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자유가 아니라 자기기만에 가깝다.
그는 이걸 말로만 한 게 아니다. 알제리 독립전쟁 반대, 베트남전 반전운동, 68혁명 지지, 그리고 "부르주아 제도에 편입되고 싶지 않다"며 노벨문학상(1964)을 거부한 것까지, 평생 자기 철학대로 살았다.
그런데도 이 텍스트 안에 완결된 윤리 체계는 없다. 사르트르는 이후 "자유가 어떻게 구체적 윤리로 이어지는가"를 풀어보려고 『윤리학을 위한 노트』라는 방대한 작업을 시작했지만, 끝내 미완성으로 남긴 채 생전에 출간하지 못했다.
오카베도 공략집 없이 한다
오카베가 하는 일도 정확히 이거다. 그에게는 공략집이 없다.
세계선 이론을 이해했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다. 다이버전스 미터가 알려주는 건 "지금 얼마나 벗어났는가"뿐이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다. 그는 매번 시도하고, 실패하고, 무너지고, 다시 시도한다. 답이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 개입했기 때문에 결국 길이 열린다.
그리고 그 개입은 전부 구체적 행동이다. 문자를 보내고, 사람을 만나고, 몸으로 뛴다. 앙가주망의 교과서적 사례라고 해도 될 정도다.
8. 남는 문제 — 현실에는 다이버전스 미터가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여기서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지점이 남는다. 그리고 이건 슈타게보다 사르트르 쪽의 문제다.
슈타게는 저항에 보상을 준다. 오카베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도달했다. 작품은 "그러니 저항할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과가 그걸 증명하니까.
사르트르에게는 그 보증이 없다. 현실에는 다이버전스 미터가 없고, 리딩 슈타이너도 없고, 몇 번을 다시 시도해도 실패하는 사람은 그냥 실패한 채로 끝난다. 자기 선택의 무게를 정직하게 짊어진 사람이 반드시 좋은 결말에 도달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왜 굳이 힘든 쪽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자기기만 속에서 사는 사람은 불안하지 않다. 매 선택에 인류의 무게를 얹지 않으니까. 사르트르의 답은 "그래도 회피 없는 삶이 더 진짜다(authenticité)"인데, 이건 "왜 진짜인 게 더 좋은가"에는 답하지 못한다.
다만 제로가 이 질문에 한 조각을 보태긴 한다. 자기기만은 편하지 않았다. 오카베가 모든 걸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려 했을 때, 그는 평온해지지 않았다. 도망친 자리에서 더 망가졌다. 자기기만이 주는 건 편안함이 아니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어쩌면 그게 답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회피가 실제로 편했다면 사르트르의 논증은 무너졌겠지만, 회피도 어차피 아프다면 — 최소한 자기가 선택한 아픔이 낫다는 것.
마지막으로: 작가가 의도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슈타게 제작진이 참고한 건 사르트르 같은 정통 철학서보다는 존 타이터 괴담, CERN 관련 음모론, 실제 물리학 이론 쪽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이라는 구도도 슈타게가 발명한 게 아니다. 그리스 비극부터 이어지는 인류 보편의 서사 원형이고, 실존주의 역시 그 원형을 20세기 철학 언어로 정식화한 것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건 영향 관계가 아니라 같은 문제에 각자의 방식으로 도달한 결과다. 인간이 자기 조건을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충분히 오래됐고 충분히 보편적이라, 1945년의 철학 강연과 2010년대의 SF 애니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다만 한쪽이 다른 쪽보다 나은 지점이 하나 있다. 사르트르는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거기서 멈춘다. 슈타게는 그 선택이 얼마나 아픈지, 도망치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다시 일어선 사람이 어디에 도달하는지를 끝까지 보여준다. 철학이 명제로 남긴 것을 이야기가 몸으로 살아낸 셈이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텍스트가 그렇게 읽힐 수 있다면 그 독해는 그 자체로 유효하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읽으며 정리한 글. 원문 논증을 나름대로 풀어쓴 것이라 정확한 표현은 번역서를 확인하는 걸 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