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원픽 무나카타[1], 일본의 고흐

박규태
2026-03-29

내게 가장 인상적인 근현대 일본화가 중 한 명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무나카타 시코(棟方志功, 1903-1975)를 들을 것이다(실은 이 화가밖에 모른다). 무나카타는 아오모리시(青森市)의 대장간 장인 집안에서 무려 15형제 중 여섯 번째 삼남으로 태어나 전적으로 조모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는 열두 살 때 초등학교 근처에 비행기가 불시착한 것을 구경하러 집을 나섰다. 그런데 도중에 길가에 핀 들꽃을 보고 비행기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꽃의 아름다움에 빠져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때로는 아주 작은 만남이 일생을 결정짓는 일도 일어나는가보다.

 

다음 해 아오모리시 심상소학교를 졸업한 무나카타는 곧바로 가업인 대장간 일을 도왔다. 그러니까 무나카타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셈이다. 그러다가 열일곱 살 때(1920년)부터 아오모리 지방재판소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급사로 일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한 중학교 미술교사가 그에게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 등이 창간한 잡지 <백화(白樺)>에 실린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보여주었다. 무나카타는 그 사진을 보고 크게 감명받아 ‘일본의 고흐’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당시 그는 고흐가 사람 이름인 줄도 모르고 그냥 막연히 유화 그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다.

 

인생의 길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몇 개의 우연이 겹치면서 그것이 삶의 순간을 통째로 흔드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지속 가능한 하나의 기적으로 만드는 자는 흔치 않다. 무나카타는 우연을 기적의 필연으로 바꾸어 현대 일본 최고의 판화 예술을 창출해낸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그가 태어나 청소년기를 지냈던 아오모리에서의 시간은 무나카타 예술의 준비기였다. 무나카타의 작품 세계는 그가 작업을 진행한 삶의 터전을 중심으로 이후 나카노(中野) 시대, 후쿠미쓰(福光) 시대, 스기나미(杉並) 시대의 세 시기로 대별할 수 있다.

 

<나카노 시대: 도약의 때>

무나카타는 1924년(21세) 아오모리를 떠나 도쿄에서 하숙하면서 독학으로 그림 공부에 열중했다. 다음 해부터 생활비를 위해 출판사에서 1년 반 정도 근무하면서 틈틈이 유화 습작품을 ‘제전(帝展)’에 출품했다. 하지만 계속 낙선하면서 자신의 재능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사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시력이 약해 원근법적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일본인으로 태어나 화가가 되겠다고 한 이상 무엇을 해야만 할까를 끊임없이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고뇌 끝에 문득 고흐가 한없이 동경하고 높이 평가해 마지않았던 우키요에(浮世絵) 목판화의 존재에 생각이 미쳤다. 무나카타를 유화의 세계로 이끈 고흐는 오늘날 세계적인 목판화가로 칭송받는 무나카타를 탄생시킨 부모이기도 했던 셈이다. 이리하여 무나카타는 판화야말로 일본인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몇 년 동안은 아직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926년(23세) ‘백일회전(白日会展)’에 유화 <정경청수곡(静景淸水谷)>을 출품하여 입선하고, 이어 1928년(25세) 제9회 ‘제전’에 유채화 <잡원(雑園)>을 출품하여 마침내 입선하는 데 성공했다. 상경 후 4년 동안 권위 있는 공식 미술 전시회에 다섯 차례나 출품한 끝에 처음으로 입선한 것이다. 이어 1930년(27세) 또 다른 공식 미술 전시회인 제5회 ‘국화회전(国画会展)’에서 <귀녀행로(貴女行路)> 등 유화 네 점이 입선하기도 했다. 그는 애초 유화를 동경했었다. 판화로 전향한 후에도 평생 유화를 사랑했으며, 최말년인 1972년에도 유화 그림을 많이 남겼다. 그가 유화가 아닌 판화작품으로 처음 입선한 것은 1932년(29세)에 이르러서였다. 제7회 ‘국화회전’에 판화 <구전・하세가와 저택의 뒤뜰(亀田・長谷川邸の裏庭)>을 출품하여 국화회 장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어 익년에는 『무나카타 시코 판화집(棟方志功版画集)』을 간행하기에 이른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신감을 얻은 그는 최종적으로 가장 일본적이고 민중적인 판화 장르를 자신의 소명으로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934년(31세) 그동안 아오모리시에 거주하던 아내가 어린 자녀 둘을 데리고 상경하여 도쿄 나카노구(中野区) 야마토정(大和町)에 마련한 집에서 네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 이렇게 열린 나카노 시대는 무나카타 예술의 골격이 형성된 비약의 시기였다. 당시 판화 작업 외에 생활을 위해 제작했던 책 표지화와 삽화도 다수 남아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나카타의 판화 인생에서 이 나카노 시대야말로 가장 중요한 기간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것은 나카노 시대를 대표하는 <야마토시 우르와시(大和し美し)>라는 작품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1936년(33세) 4월 제11회 ‘국화회전’에 출품하기 위해 제작한 에마키(絵巻) 형식의 연작 판화로, 『고사기(古事記)』에 나오는 일본인들의 영원한 영웅이자 로망인 야마토타케루(日本武尊)의 생애를 표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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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시 우르와시(大和し美し_藻草の柵), 출처: 東京新聞デジタル(2023年10月18日)


이 작품의 전시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너무나 유명하다. 가로 2미터 정도의 액자가 네 점이나 되는 대작인지라 ‘국화회전’ 공예 부문의 좁은 전시실에 전시하기에는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그래서 접수자는 액자 한 점만 접수하고 나머지는 다시 가지고 가라고 했다. 다소 괴팍한 성격의 무나카타가 이에 맹렬히 항의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때 우연히 공예 부문 심사위원인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와 도예가 하마다 쇼지(浜田庄司, 1894-1978)가 지나가다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전 작품을 전시하도록 선처해 주었다. 더 나아가 야나기는 당시 건설 중이던 <일본민예관>에서 이 작품을 구입하겠노라고 즉석에서 제안하기까지 했다. <일본민예관>은 그로부터 반년 후에 완성되었고 무나카타는 거기에 <야마토시 우르와시>를 판매하여 생애 처음으로 거금을 손에 넣었다. 야나기와의 이 첫 만남은 무나카타 작품 세계의 도약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1939년(36세) 4월 무나카타는 제14회 ‘국화회전’에 이면 채색(裏彩色) 기법을 사용한 <관음경 판화권(観音経版画巻)>을 출품했다. 이로써 무나카타 작품 세계 최초의 채색 시대가 시작된다. 또한 같은 해에 명작 <석가십대제자(釈迦十大弟子)>(1939, 전 10책)도 제작했는데, 이 작품은 다음 해 제15회 ‘국화회전’에 출품하여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3년 뒤인 1942년(39세)에는 무나카타 최초의 문집인 『판산화(板散華)』가 간행되었다. 이 책의 후기에서 무나카타는 이제부터 판화(版画)를 판화(板画)로 표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판화란 “나무판에서 태어난, 나무판에 의한 그림”이므로 그 나무판의 소리를 듣고 나무판의 생명을 조각하여 살려내겠다는 무나카타의 개성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선언이었다.

 

<후쿠미쓰 시대: 성숙의 때>

그 후 1945년(42세) 4월 전시에 무나카타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성지라 할 만한 도야마현(富山県) 난토시(南砺市)의 후쿠미쓰(福光)로 피난하여 광덕사(光德寺, 고토쿠지) 주지의 동생 집에 체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25일 도쿄 대공습으로 도쿄 요요기(代々木)에 있던 그의 집이 소실되면서 그간 작업했던 판목들이 거의 다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런 불운 중에 다만 가구를 받치는 데에 사용된 <석가십대제자> 판목만은 요행히 보존되었다. 패전 직후인 같은 해 9월을 전후하여 후쿠미쓰 시대 최초의 판화작품인 <종계송(鐘渓頌)>이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스승인 가와이 간지로(河合寬次郞, 1890-1966)를 예찬한 것인데, 이로부터 무나카타의 작품 세계에서 두 번째의 이면 채색 시대가 열리게 된다.

 

1946년 10월 무나카타는 제2회 ‘일전(日展)’에 <종계송>의 일부를 출품하여 오카다(岡田)상을 수상했다. 이해 12월 그는 후쿠미쓰에 주거를 마련하여 이사했다. 익년인 1947년(44세) 한 해 동안만 생애 가장 많은 190점의 판화작품을 제작할 만큼 후쿠미쓰 시대는 무나카타 작품 세계에 탄탄한 근육질이 형성된 성숙의 시기였다. 1949년(46세) 4월에는 제23회 ‘국화회전’에 오카모토 가노코(岡本かの子)의 시 「여인보살(女人ぼさつ)」을 소재로 취한 <여인관세음 판화권(女人觀世音板畫卷)>(1949, 전 11책)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3년 뒤인 1952년 제2회 스위스 르가노 국제 판화전에 출품하여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것은 일본 최초의 해외 수상이라 국내 매스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한편 1951년(48세) 5월에는 프랑스의 ‘살롱드메이전’에 초대 작품 출품이라는 영예를 획득했다. 같은 해 10월 브라질 상파울로시의 제1회 ‘국제 미술전’에 추천을 받아 <운명송(運命頌)>(전4책) 등을 출품했다. 이 <운명송>은 후쿠미쓰 시대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판화작품으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에서 주제를 취하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설 전문을 새겨 넣었다. 예컨대 거기에는 차라투스트라가 10년 동안의 산속 수행을 마치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기 직전,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며 건네는 “그대 거대한 별이여! 만약 그대에게 빛을 받는 자들이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와 같은 강렬한 인사말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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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송(運命頌_真昼の柵),  “그대 거대한 별이여! 만약 그대에게 빛을 받는 자들이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 등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새겨져 있다.  출처: 『棟方志功記念館 収蔵作品図録』


<스기나미 시대: 대성의 때>


1951년 11월 무나카타는 마침내 소개지 도야마현 후쿠미쓰를 떠나 도쿄로 귀환하여 스기나미구(杉並区) 오기쿠보(荻窪, 지금의 上荻)로 이사함으로써 스기나미 시대를 열게 된다. <유리초(流離抄)>(1953, 전 31책), <용연하는 여자들(湧然する女者達々)>(1953), <화수송(華狩頌)>(1954), <건 판화책(鍵板画柵)> 등 전후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이 대성의 시기에 제작되었다. 무엇보다 1954년(51세) 7월 브라질의 제3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국제 미술전에 <이대보살 석가십대제자(二菩薩釋迦十大弟子)> 등을 출품하여 판화 부문 최고상을 수상하고, 나아가 1956년 6월 제28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 미술전에 <우주송(宇宙頌)> 등을 출품하여 국제 판화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것은 스기나미 시대의 기념비적인 쾌거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무나카타의 삶에 그가 꿈꾸어온 ‘일본의 고흐’라는 우주의 송가가 울려 퍼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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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송(宇宙頌_南北の柵), 출처: 『棟方志功記念館 収蔵作品図録』 


이로 인해 무나카타는 항상 기자들의 취재와 방문객들에게 시달리면서 결국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가마쿠라의 아트리에에서 많은 시일을 보내기도 했다. 1956년(53세) 1월 무나카타는 거장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연재소설 『열쇠(鍵)』(중앙공론사)에 삽화를 그렸다. 이것이 일본 국내에 폭발적인 화제가 되어 무나카타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날로 급증했다. 무나카타와 다니자키의 교류는 이에 앞서 『치인의 사랑(痴人の愛)』(1946)의 표지화를 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다니자키의 서재명인 ‘센칸테이(潺湲亭)’의 표찰 글씨도 무나카타가 써주었다.

 

그 후 1959년 무나카타는 자신을 화가의 길로 이끌어준 고흐의 무덤을 방문한다. 그 다음해인 1960년(57세) 10월에 무나카타는 전술한 <운명송>의 베토벤을 연상시키듯 왼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사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시력이 지독하게 나빠서 데생이 생각대로 안 되어 작품을 제작할 때는 종이나 판목에 거의 얼굴을 붙이다시피 하면서 직관에 의존하여 작업했다. 그런데 이제는 오른쪽 눈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나카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기한테는 책임이 없고 모두 신불(神佛)이 책임져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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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나카타 시코, 출처: 『棟方志功記念館 収蔵作品図録』 


1965년(62세)은 아사히(朝日) 문화상 수상, 미국 다트머스대학에서의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 이탈리아 예술원 명예 회원의 칭호를 받는 등 무나카타가 일본과 세계로부터 널리 인정받은 해였다. 나아가 1970년(67세) 무나타카가 오사카 만국박람회에 <대세계의 책 건곤(大世界の柵 乾・坤)>을 발표한 공적을 인정받아 같은 해 11월 3일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늘 자신이 일본 미술계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소외감에 쓸쓸해하곤 했지만, 세상은 그의 작품 세계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2년(69세) 인도에 취재 여행을 갈 만큼 아직 무나타카는 건재했다. 그러나 결국 1975년(72세) 9월 13일 무나카타는 간암으로 타계하여 아오모리시 산나이 공원묘지(三內霊園)에 묻혔다. 그의 묘비는 그를 화가의 길로 인도한 고흐의 묘비 형태로 제작되었다. 같은 해 11월 아오모리시는 이전부터 착수해 온 <무나카타 시코 기념관>을 개관했다. 이는 생전인 1974년(71세) 9월 5일 무나카타의 생일날에 개관한 가마쿠라시의 <무나카타 판화관>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기념관이다. 이중섭의 고독한 죽음에 비하면 무나카타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무나카타를 기억하는 일본인들이 많이 있다. 아오모리시(탄생의 땅)・나카노구(도약의 땅)・구라시키시(倉敷市, 신뢰의 땅)・난토시(성숙의 땅)・스기나미구(대성의 땅) 등 5개 지자체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무나카타 시코 써밋(棟方志功サミット)’이 2017년 아오모리시에서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매년(2025년부터는 격년) 개최되고 있다. 작년(2025년) 9월 7일에는 서거 50주년을 기념하여 무나카타의 고향인 아오모리시에서 써밋이 열렸다.

 

무나카타는 한 권의 자서전을 남겼다. 1964년(61세)에 펴낸 『판극도(板極道)』가 그것이다. 환갑에 즈음하여 낸 이 자서전의 제목은 곧 무나카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판화의 궁극적인 길’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리하여 무나카타는 고흐가 흠모했던 우키요에 판화의 세계를 현대에 재현시킴으로써 ‘일본의 고흐’를 넘어서서 ‘고흐의 일본’을 완성한 판화 작가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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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나카타 시코 자서전 『판극도(板極道)』 표지

(이하 무나카타에 관한 글은 졸저 『한(恨)과 모노노아와레(物哀)_한일 미의식 산책』 제11장의 일부에 사진을 첨부하여 고쳐 쓴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