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 가정교육
-퇴계와 다산을 중심으로-
장승구(세명대)
1. 머리말: 전통 사회에서 가정교육의 중요성
2. 전통 가정교육의 덕목
3. 전통 가정교육의 특성
4. 퇴계의 가정교육
5. 다산의 가정교육
6. 맺음말: 전통 가정교육의 현대적 의미
1. 머리말: 전통 사회에서 가정교육의 중요성
한국의 전통 사회에서 가정은 모든 다른 가치나 조직에 선행하는 삶의 구심체였다. 개인은 가족의 일원으로 여겨지며, 가족으로부터 독립된 개인이란 생각하기 어렵다. 개인은 유구한 가문의 역사 속에서 자기 위치를 생각하며, 가통(家統)을 유지 발전시키는 것은 개인에게 중요한 과제이고, 책임이다. 또한 사람들은 자기의 가격(家格)에 의해 평가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가격을 높여야 자기도 존중을 받을 수 있었다. 가격을 높이기 위해서 각 가문에서는 자녀교육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가격(家格)을 높이기 위해서는 예의와 지조를 잘 지키는 일, 학문을 연구하고 예술을 연마하는 일,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하는 일, 부자가 되는 길 등이 있었다. 단순히 높은 벼슬을 했다거나 재산이 많은 것만으로는 명문가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명문가에는 나름의 가법(家法) 또는 가규(家規)와 가훈이 전통으로 전해지고 있었으며, 품격 높은 가풍을 유지하기 위해 가문의 명예를 걸고 가정교육에 힘썼다.
주자는 居家四本이라 하여 “讀書起家之本, 和順齊家之本, 順理保家之本, 勤儉治家之本 ”을 가훈으로 하였다. 훌륭한 가정을 위해서는 독서를 통해 학문과 교육에 힘씀으로써 가정을 일으키고, 부부가 서로 화합하고 순종함으로써 가정을 화목하게 하고, 도리와 법을 잘 지킴으로써 가정을 잘 유지 보존하고, 근면하게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함으로써 가정의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하는 것이 가정의 유지 발전을 위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가정교육이 매우 중요시 되었다.
가정은 인간의 인격을 도야하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관인 만큼 가정교육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진교훈 교수에 따르면 인간은 “이웃에 대한 이해와 친절과 융화와 정의, 연대의식, 효도, 염치, 순종, 관용, 충고, 긍지, 감사, 협동의 가능성 등 사회가 존립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사회 윤리의 근간을 우리는 가정에서부터 습득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오늘날 공교육과 사교육은 있어도 가정교육은 실종되어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한다. 전통사회에서 가정교육은 공교육보다 더욱 중시되었으며, 가정교육에서 인성과 지식교육의 중요한 기초가 형성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한국의 전통 가정교육에 대해서 첫째, 전통 가정교육의 주요 덕목. 둘째, 전통 가정교육의 주요 특성. 셋째 퇴계와 다산의 가정교육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2. 전통 가정교육의 덕목
1) 효도
전통 가정교육에서는 무엇보다 효에 대한 교육이 중시되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생명을 부여한 생명의 근원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도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의 근본이었다. 효는 모든 선행의 근원으로 존중되고 교육되었다. 효도는 단순히 물질적인 봉양만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살아 계실 때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좋은 일이 있거나 안 좋은 일이 있거나 사당에 가서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에게 알려야 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의 명예를 위해서도 나쁜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부모의 명예를 높이도록 힘써야 한다. 부모 사후에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무릇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해 지켜야 할 예절은,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드리며, 밤에 잠자리를 정해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피며, 나갈 때는 반드시 고하고, 돌아오면 반드시 안색을 살피며, 노는 곳에 반드시 일정함을 두며, 익히는 바를 반드시 힘써야 하며, 항상 말할 때 늙었다고 일컫지 말아야 한다.”(『예기』「곡례」)
2) 우애
효도 다음으로 우애가 중시된다. 같은 부모의 자식인 형제간은 기를 같이 하는 동기간으로서 항상 서로 믿고 존중하며 형은 동생을 아끼고 동생은 형을 공경하여야 한다. 결혼을 하고나서 분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형제간의 우애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형을 아버지처럼 섬겨야 했고, 형은 동생을 자식처럼 보살펴야 한다.
“楊津은 형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楊椿이 나이 늙어서 밖에서 술이 취해 돌아오면, 양진이 형을 부축하여 방으로 모신 다음, 자기는 옷도 벗지 않고서 방문 밖에 누워서, 때때로 형의 안부를 받들어 살폈다. 이들 형제는 나이가 60세가 지나서야 三公 벼슬에 올랐다. 그런데 양진은 날마다 아침과 저녁으로 형을 찾아 뵙고 문안을 드리면, 아들과 조카들은 뜰아래에 줄지어 늘어섰다. 그리고 형이 앉으라고 말하지 않으면, 양진은 감히 앉지를 못하고 선 채로 있었다.”(『소학』 「선행편」)
3) 공경
『논어』에서 공자는 “문밖을 나서면 큰 손님을 만난 듯이 공경해야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 듯이 공경하라.(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논어』「顔淵」)고 하였다. 예의 기본 정신은 “공경하지 않음이 없음(毋不敬)”이다. 전통 가정교육에서는 공경이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중시되었다. 공경의 대상은 부형, 친족이나 향촌의 어른과 연장자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공경하는 자세가 요구되었다. 사람을 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물을 대하거나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도 공경한 태도를 지녀야 하였다. 특히 언행을 조심해서 함부로 불필요한 말을 하거나, 부주의한 행동을 하지 않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책을 읽고, 글자 하나하나를 쓰는 데에 있어도 공경해야 하였다.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대하거나 크고 작은 일에 매사 공경하는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잘못을 예방하고 올바른 삶의 태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4) 화목
전통 가정에서는 가족성원 간에 화목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하였다. 형제나 친척 간에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기 보다는 믿고 사랑하며 서로 도와서 화목하게 살도록 어려서부터 교육하였다. 개인은 독립적 주체로서보다는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늘 타인을 배려하면서 화목하게 살아가도록 교육하였다. 가정의 화목은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인식되었다.(家和萬事興)
3. 전통 가정교육의 특성
1) 태교의 중시
가정교육의 시작은 출생에서 부터가 아니라 태아 때부터 시작하였다. 태아를 인격으로 인정하고 성심성의껏 태아를 소중하게 다루고 여러 가지 행동에서 모범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태교의 모범은 문왕의 어머니 太任(사임당은 태임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임)이었다.
“옛날에 부인이 자식을 임신하면, 잘 때 옆으로 눕지 아니하고, 앉을 때 변두리에 앉지 아니하고, 설 때 한 쪽 발로 서지 아니하며, 간사한 맛을 먹지 아니하고, 벤 것이 바르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아니하며, 눈으로 간사한 빛을 보지 아니하고, 귀로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밤이면 소경 악사로 하여금 시를 외우게 하고, 올바른 일을 말하였다.”(『열녀전』) 이와 같이 하면 자식을 낳음에 모습이 단정하고, 재주가 남보다 뛰어날 것이다고 하였다.
태교는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함께 하였다. 좋은 자식을 놓기 위해서 길일을 택하고, 최선의 조건을 갖추어서 합방하고, 수태 이후에도 먹거리부터 마음씀씀이, 행동거지에 대해서 세심하게 배려하여 태아에게 항상 최선의 좋은 조건을 제고하기 위해 부부와 가족이 합심하여 협력하였다.
2) 예절교육과 전통교육
지금처럼 핵가족이 아니라 대가족이 함께 살던 전통 사회에서는 조부모,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문중의 어른들이나 친족에 대한 예절의 학습을 중시하였다. 인사예절, 언어예절, 식사예절, 관혼상제 예절, 손님에 대한 예절 등등. 이러한 예절교육을 통하여 어려서부터 일상생활에서 좋은 습관을 키워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개인은 부모의 자식일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선조들의 생명의 연속선 위에서 존재한다고 인식하였다. 어려서부터 조상과 전통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가문의 역사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게끔 하였다. 자신의 가족사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다른 사람의 가족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했고, 그래서 보학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었다.
3) 공간적 상징을 통한 교육
전통 한옥에는 집안의 방안이나 마루, 기둥, 대문, 등 곳곳에 현판, 편액, 주련, 병풍, 민화 등을 걸어놓았다. 그래서 드나들면서 거기에 쓰여 있는 문구나 그림의 의미를 내면화 하도록 하였다. 좋은 문구나 그림은 자녀들의 무의식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주련, 편액과 액자의 교육적 효과는 무시할 수가 없다. 또한 집이나 서재에 당호를 부여함으로써 그 명칭을 통해 늘 의미를 상기하게 하였다.
4) 조부모(와 친족)의 역할
전통 가정교육에서는 부모뿐만이 아니라 조부모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대가족 제도 하에서 조부모는 손자 ․ 손녀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축적된 인생경험과 삶의 지혜를 일러주었다. 조부모뿐만이 아니라, 종조부모, 숙부와 숙모, 외숙부와 외숙모 등 친족이 서로 서로 종손자, 조카, 질녀, 생질, 종질을 친자녀처럼 관심을 가지고 교육하였다.
5) 이야기를 통한 교육
한국의 전통 가정교육에서 중요한 방법의 하나는 사랑방 또는 안방이나 대청마루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통한 교육이다. 동서고금의 역사와 위인들의 전기, 훌륭한 조상이야기, 향토에서 일어났던 고향마을 이야기, 고사성어, 야담, 우화, 가사, 해학 등 이야기를 통해서 손자 손녀와 자녀들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가치관과 지식을 전수하였다. 유아기와 아동기에 들은 이야기는 청장년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난간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지혜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6) 자식을 바꾸어서 교육하기(易子而敎)
오늘날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욕심이 오히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이것이 커다란 가정문제를 발생시키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가 자식을 직접 가르칠 경우에는 자식에 대한 기대와 애착이 크기 때문에 잘못되면 야단치고 책망하다가 보면 부자 사이에 관계가 나빠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전통 가정교육에서는 친구 사이에 또는 친척이나 친지 사이에 서로 자식을 맞바꾸어서 교육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이기 때문에 서로 간 관계에 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하였다.
7) 고난과 역경에 대한 인내 교육
집안의 경제력의 강약 여부를 떠나서 어려서부터 검소하고 절약하는 태도를 키워주고자 하였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속담처럼 고생과 역경 속에서도 서로 도우며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낙천적으로 살도록 교육하였다. 경제적 궁핍에 대한 감내, 추위 더위에 대한 인내와 적응, 고난에 대한 인내를 통해서 인격 성숙의 계기로 삼도록 하였다.
8) 관례의 중시
결혼하기 전 15-20세 사이에 관례를 치름. 남자는 상투를 틀고 관을 썼기 때문에 관례라 하고,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았기 때문에 계례(笄禮)라고 하였다. 관례 후 남자는 자, 여자는 당호를 불렀다. 일종의 성인식인 관례를 거행함으로써 성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더욱 책임있는 행동을 하도록 하였다.
9) 가훈을 통한 교육
이름 있는 집안에서는 명시적이든 아니든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가훈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그러한 가훈을 소중히 여기도록 교육하였다. 그리고 가장은 그러한 가훈을 솔선수범하여 지킴으로써 자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하였다. 12대 300년간 존경받는 부자(만석꾼)로서 명성을 유지한 경주 최부자집의 가훈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기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다섯째,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러한 가훈을 준수함으로써 경주 최씨는 수백년간 부와 명예를 누리며 명가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10) 인문 고전독서 및 과거 공부의 조화
어려서 부터 문자를 익히고 시와 글을 짓고, 경서를 암송하는 인문 고전교육이 중시되었다. 어려서부터 고전을 암송함으로써 고전의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 요구되는 인문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인문 고전교육은 과거공부와도 연결된다. 과거의 합격은 전통 양반 사회에서 지상의 과제여서 아주 어려서부터 과거를 염두에 둔 독서교육이 단계적으로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전통 가정교육에서는 현실적으로 과거공부를 매우 중시하였지만, 인문 고전교육과 과거공부의 조화를 이상으로 추구하였다.
한국의 효도와 인문교양 위주의 가정 교육은 일본과 비교된다. 일본은 영주에 대한 충성을 중시하는 데 비해서 한국은 부모에 대한 효도를 우선시 한다. 또한 일본은 어려서부터 휼륭하고 용감한 사무라이에 대한 전설과 설화를 이야기 해주는 데 반해서, 한국은 어려서부터 훌륭한 문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일본은 사무라이에게 요구되는 강인한 체력과 담력과 용기를 심어주고, 한국은 선비에게 요구되는 학문과 시문, 예절에 대한 교양을 길러주었다.
4. 퇴계의 가정교육
가. 퇴계가의 가문
퇴계는 1501년 11월 25일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보이씨 가문에서 아버지 이식(李埴)과 어머니 춘천 박씨 사이에서 팔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퇴계에게는 형이 여섯, 누나가 하나 있었다. 위로 두 형과 누나는 前母 의성 김씨에게서 태어났고, 아래 다섯 형제는 박씨 부인 소생이었다. 퇴계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고 홀어머니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 퇴계는 자랐다. 퇴계의 어머니 박씨는 남편 사후 농사와 양잠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어려운 형편 가운데도 박씨는 “과부의 자식은 배운 것이 없고 버릇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우려하여 자식교육에 매우 열성적이었고 엄하게 교육을 시켰다. 퇴계는 어려서 6살에 이웃집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12살 때에는 숙부 송재공으로 부터 논어를 배웠다. 34살에 과거에 합격하여 각종 벼슬을 하였지만, 만년에는 고향에 돌아와 교육과 학문에 몰두하였다.
퇴계는 자제와 제자들을 법도에 따라 교육했을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가 스승으로서 삶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퇴계의 교육의 감화로 본인 집안뿐만 아니라 주위의 제자나 지역 사람들에게 까지 명문가의 법도를 세울 수 있게 해 주었다.
나. 퇴계가의 가정교육
퇴계는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준(寯), 둘째 아들은 채(寀), 셋째는 적(寂)이었는데 둘째는 결혼 전에 죽었고, 첫째와 셋째에게서 일곱명의 손자와 두명의 손녀가 태어났다. 퇴계는 그의 장남인 준의 장남 안도에 대해서 할아버지로서 애정을 가지고 지속적인 가정교육을 실시하였다. 퇴계가 그의 손자 안도에게 보낸 글은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125편이 있다. 빈번한 서한을 통해 퇴계는 손자에게 과거공부, 인성교육, 대인관계, 집안일 처리 등등에 대해 매우 자세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교육의 결과로 퇴계 사후에 안도는 퇴계 연보의 작성과 퇴계문집을 발간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퇴계의 지적 유산이 잘 보존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다. 퇴계 가정교육의 특성
1) 지위 고하와 나이를 막론하고 인격적인 인간 대우
퇴계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지위의 고하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평등하게 인격적으로 대하였다. 아무리 연소한 사람이라도 뜰아래 내려가서 맞아들이고 갈 때도 역시 그러하였다. 신분이 종이라고 하더라도 예외 없이 인간적으로 대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였다. 손부가 젖이 부족하자 여종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퇴계는 여종도 딸린 어린 아기가 있으니 여종을 보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허용하였다. 풍기군수로 재직할 때는 유생과 함께 천민 대장장이 배순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그 후 배순은 퇴계선생의 철상을 만들어 모시고 열심히 공부하고 퇴계 사후에는 삼년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자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출신가문과 나이를 따지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우하였고, 이러한 퇴계의 평소 처신은 자손들과 제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끼쳤다. 퇴계는 성리학 이론의 대가일 뿐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도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지행일치의 삶을 구현하였다.
2) 여성에 대한 배려
퇴계는 도학자에 대한 일반적 편견과 달리 부인에 대해서도 인격적으로 잘 대우하였고, 부인 사후에도 장인과 장모를 비롯한 처가 식구의 생활, 건강, 장례, 제사 등에 대해서 지극히 자상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고, 자식들에게도 외손으로서 외가에 대한 책무를 다하게 하였다. 또한 며느리와 손부의 건강이나 안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돌보아 주었다. 그래서 퇴계의 큰 며느리는 죽으면서도 자기를 시아버지 묘아래 묻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지금도 퇴계의 후손 가운데는 “첫째, 부모에게 불효한 사람하고는 대화를 나누지 말 것. 둘째, 처가 향념이 없는 사람하고는 교제하지 말 것. 셋째, 댁을 쫓아낸 사람과는 사업을 같이 하지 말라”는 가규를 시행하는 집안이 있다.
3) 인맥 네트워크의 중시
퇴계는 자제나 손자들이 주위의 총명한 제자들과 같이 공부하고 어울리게 배려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인맥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서로 배우고 도울 수 있게 하였다. 친족과 비친족을 막론하고 인품과 학식이 훌륭한 젊은이들과 공동학습을 통해 접촉하고 교류할 기회를 갖게 함으로써 좋은 교육환경을 조성하고 인맥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도록 하였다. 퇴계의 문하에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던 것도 퇴계 문하생들 상호간에 형성된 인맥 네트워크가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4) 인격(도의)교육과 과거교육의 조화
퇴계도 당시의 다른 부모나 조부모처럼 자제나 자손의 과거급제를 강력히 희망하였다. 그래서 자기 아들이나 손자를 과거시험 준비 전문 기관(接)에 보내기도 하였다. 열심히 공부하여 급제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과거공부만을 위한 공부보다는 고전에 대한 이해와 학습을 통해 학식이 깊어지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과거에도 합격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퇴계는 인격도야와 과거공부를 모순으로 여기지 않고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즉 그는 교육에 있어서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5) 자연친화적 교육
퇴계는 수시로 기회가 퇴면 아름다운 명산과 명승지를 찾아서 공부하기를 좋아하였다. 특히 인근의 청량산에 머물면서 공부를 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자제도 역시 집을 떠나 조용한 절이나 청량산에 머물면서 수도하는 마음으로 공부에 열중하고 심신을 맑게 수양하도록 하였다. 맑고 아름다운 자연은 사람의 몸과 마음도 건강하고 맑게 치유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퇴계는 자손이나 제자들이 때로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섭리를 배우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하도록 하였다.
라. 퇴계 가정교육의 효과
퇴계의 가정교육은 후손들에게 인간됨의 도리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형성하였다. 퇴계사후 그의 수많은 저술을 모으고 정리하는 데는 그의 제자들의 노력과 함께 그의 손자의 공이 컸다. 또한 임진왜란 때 그의 저술과 유품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손부의 눈물겨운 정성 때문에 가능하였다. 일제시대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도 퇴계가의 후손(14대손)이다. 그리고 퇴계학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선양되게 된 계기도 퇴계의 후손인 이동준씨(인천제철 창업자)가 1970년대에 사재를 희사하여 퇴계학연구원을 설립하여 국내외학자들의 연구와 학회를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진성 이씨 퇴계 후손은 조선조에 걸쳐 문집을 세 번째로 많이 낸 가문으로 총 92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사람이 37명에 달한다. 이러한 빛나는 전통은 퇴계의 가정교육이 남긴 성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 다산의 가정교육
가. 다산의 가문과 그 전통
다산 정약용(1762-1836)의 가문은 본관이 압해로서 고려조에서 무관이 9세를 연이어 내려왔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8대를 연달아 부제학, 병조판서, 좌찬성, 대사헌 등의 벼슬을 하였고, 모두 옥당에 들어갔으니, 명문 중에도 흔하지 않은 명문이다. 다만 다산의 고조부에서 조부까지 3대 동안은 정치적 소용돌이 때문에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산의 부친인 재원은 음직으로 벼슬길에 올라 진주목사 등을 지냈다. 다산은 이처럼 화려하고 유서 깊은 명문가에 태어나 남달리 자부심이 컸다. 친가뿐만 아니라 외가쪽 역시 대단한 명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의 후손으로서 공제 윤두서의 손녀이다. 윤두서는 시서화 삼절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박학다식하였다.
다산의 가문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덕목을 가풍으로 유지해 왔다. 첫째는 삼가함(謹)이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목숨을 바쳐 순국한 열렬한 충절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힘있는 사람을 추종하여 나쁜 일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임금을 보필하는 어진 산하가 되는 데에는 손색이 없었다. 둘째는 범상함(拙)이다. 목숨을 걸고 권력투쟁에 앞장서지 않음으로써 큰 승리도 없었지만 큰 패배도 없었다. 그래서 출세하더라도 큰 벼슬은 없었고, 치산만 하더라도 큰 부자는 없었다. 셋째는 선량함(善)이다. 마음이 선량하여 독기가 없어서 남에게 원망을 품거나 악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았다. 넷째는 신실함(諒)이다. 허황된 말로써 남에게 낭패를 당한 적이 없다. 이러한 가풍은 다산의 인격형성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고, 가정교육을 통하여 전승되었다.
나. 다산의 가정교육
정약용의 가문은 신유옥사로 인해 폐족이 되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아들인 학연(1783-1859)과 학유(1786-1855)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식들이 폐족이 되었다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학문에 힘써서 가문의 중흥을 도모할 것을 간곡히 타이르고 있다.
특히 서울 부근을 떠나지 말 것을 당부, 학문에 힘써서 가문의 부흥을 대비할 것, 근검으로 가정을 다스릴 것, 가정의 화목을 위해 어머니 ․ 백부 ․ 조카와 그 외 친척이나 친지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자식들의 독서상황을 점검하고, 독서의 내용과 요령을 교육하고, 저술방법을 가르쳐주고 저술 과제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배지로 아들을 교대로 오게 하여 직접 자녀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다. 다산 가정교육의 특성
1) 실용교육
다산이 유배를 가면서 다산 일가는 하루아침에 폐족이 되었다. 생활이 어렵게 된 가족을 위해 다산은 자식들에게 과수와 채소를 기르는 법 등 생존에 필요한 실용적 교육을 실시하였다. 실학의 대가답게 다산은 자식들이 먹고 살고 생계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실용교육을 중시하였다.
2) 정보 접근성의 중시
다산은 자식들에게 서울 근처를 벗어나 살지 말라고 명령을 하였다. 당시 사회에서는 서울에 모든 문화와 정보가 집중되어 있음으로 해서 정보의 중심지인 서울을 벗어나지 말도록 함으로써 정보와 문화에 대한 접근성을 잃지 않도록 교육하였다.
3) 지식 정보 처리와 활용 기술
다산은 자식들에게 필요한 주제별로 정보를 수집하여 책을 만들고, 그것을 생활에 실용적으로 참고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자식들로 하여금 지식 정보 수집 및 정리와 활용 노하우를 가르쳐 주었다.
4) 어려울수록 가족의 화합 강조
신유옥사로 일가가 폐족이 된 위기 속에서 다산은 자식들로 하여금 가문의 재기를 위하여 학문에 힘쓰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효도와 우애와 공경과 인내로서 가족의 화합을 유지할 것을 간곡히 타일렀다.
5) 고난과 위기를 이기는 방법
신유옥사로 인해 다산의 가문은 최대의 위기를 겪는다. 다산의 셋째 형 약종이 사형을 당하고, 둘째 형 약전이 흑산도로 유배 가서 거기서 죽고, 큰형의 사위 황사영이 사형을 당하는 등 엄청난 위기를 맞는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다산의 자식들도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문가의 자부심도 내동댕이치고 아버지 다산의 구명을 위해 권문세가에 머리를 숙이고 청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위기 속에서도 아들에게 주의를 주어서 권문세가에 채신머리없이 굴하지 말고 자존심을 지키라고 당부하였다. 어려움 속에서도 가정의 화합에 힘쓰고 학문과 생업에 힘쓰면서 때를 기다림으로써 고난과 위기를 이길 수 있도록 다산은 자녀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갖도록 교육하였다.
라. 다산 가정교육의 효과
다산은 유배지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또한 세심한 가정교육을 통해 폐족으로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다산의 큰 아들 학연은 시인으로서 그리고 의술로서 유명하였고 『三倉館集』이라는 시집을 남겼으며, 학유도 시인으로서 「농가월령가」를 지었다. 다산의 사후 그의 저술들은 후손에 의해 잘 보존되고, 나중에 고종에게 다산의 저술이 알려짐으로써 고종은 다산에게 시호를 내리고 명예를 회복시켜주었으며, 그의 후손들이 다시 과거를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다산의 증손 정문섭은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과 교리와 승지를 역임하였다. 다산학이 크게 보급되는 계기가 된 여유당전서 편찬 작업에도 후손들의 기여가 켰다. 다산의 학문적 노력과 가정교육의 성공으로 다산은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실학자로 재평가되었고, 그의 후손들도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6. 맺음말: 전통 가정교육의 현대적 의미
한국의 전통 가정교육은 현대적으로 보아도 배울 것이 많이 있다. 무엇보다도 자기 정체성에 대해 확고한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자기가 속해 있는 가족의 역사와 전통을 알고, 또한 주위 가족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게 함으로써 정체성이 확고한 인간을 교육하는데 도움을 준다. 인간은 자기 정체성이 확고할 때 어려움에 처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예절교육을 통해 어려서부터 올바른 습관을 배양하게 함으로써 사회생활에 필요한 매너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하고, 이것은 성장 후 사회생활에 큰 자산이 된다.
조부모와 부모, 숙부, 숙모 등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듣는 풍부한 이야기들은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지식은 물론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의 원천이 된다. 어려서부터 친척과 친지들을 폭넓게 익히게 됨으로써 인맥 네트워크를 익히는 훈련을 쌓고, 이것은 후에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입시 또는 취직시험에 비유되는 과거공부도 중시하였지만, 어려서는 소학을 통해 인성교육의 기초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좋은 인성이 길러진 바탕 위해서 이론적 전문적 지식을 익혀서 사회에 봉사하는 수기치인의 인간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는 자녀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만 하고, 자녀들로 하여금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를 엄하게 준수하게 하는 데는 소홀한 경향이 있다. 전통 가정교육에서는 좋은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한편으로는 엄하게 법도에 따라 교육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으로 포용해줌으로써 균형을 유지하였다. 엄한 아버지의 법과 자상한 어머니의 모성이 결합하여 균형 잡힌 인격을 이룰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전통 가정교육에 문제점도 있다. 우애와 화합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온정주의로 흘러서 개인의 주체적인 독립정신이 약화될 소지도 있다. 또한 전통교육이 지나치게 되면 미래에 대한 창조적 개척정신을 함양하는데 소홀할 수도 있다. 가족주의가 잘못되면 가족 이기주의로 흘러서 건강한 시민정신 함양에 저해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정교육의 황폐로 인한 부작용을 고려한다면, 전통 가정교육이 가지고 있는 단점을 우려하기 보다는 장점을 현대적으로 되살리려는 의식적인 노력과 활동이 매우 긴요하다.
모든 이웃이, 모든 인류가 한가족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 평화를 누릴 수 있다. 한국의 전통 가정교육도 가정에서 효도와 우애와 공경심을 배양함으로써 가족의 화목을 달성하고, 나아가서는 사랑과 신뢰와 평화가 넘치는 국가와 세계를 실현함으로써 거룩한 천명을 땅에서 이루는데 그 궁극의 지향점이 있다고 하겠다.
장승구 세명대 교양대학 교수
한국의 전통 가정교육
-퇴계와 다산을 중심으로-
장승구(세명대)
1. 머리말: 전통 사회에서 가정교육의 중요성
2. 전통 가정교육의 덕목
3. 전통 가정교육의 특성
4. 퇴계의 가정교육
5. 다산의 가정교육
6. 맺음말: 전통 가정교육의 현대적 의미
1. 머리말: 전통 사회에서 가정교육의 중요성
한국의 전통 사회에서 가정은 모든 다른 가치나 조직에 선행하는 삶의 구심체였다. 개인은 가족의 일원으로 여겨지며, 가족으로부터 독립된 개인이란 생각하기 어렵다. 개인은 유구한 가문의 역사 속에서 자기 위치를 생각하며, 가통(家統)을 유지 발전시키는 것은 개인에게 중요한 과제이고, 책임이다. 또한 사람들은 자기의 가격(家格)에 의해 평가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가격을 높여야 자기도 존중을 받을 수 있었다. 가격을 높이기 위해서 각 가문에서는 자녀교육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가격(家格)을 높이기 위해서는 예의와 지조를 잘 지키는 일, 학문을 연구하고 예술을 연마하는 일,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하는 일, 부자가 되는 길 등이 있었다. 단순히 높은 벼슬을 했다거나 재산이 많은 것만으로는 명문가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명문가에는 나름의 가법(家法) 또는 가규(家規)와 가훈이 전통으로 전해지고 있었으며, 품격 높은 가풍을 유지하기 위해 가문의 명예를 걸고 가정교육에 힘썼다.
주자는 居家四本이라 하여 “讀書起家之本, 和順齊家之本, 順理保家之本, 勤儉治家之本 ”을 가훈으로 하였다. 훌륭한 가정을 위해서는 독서를 통해 학문과 교육에 힘씀으로써 가정을 일으키고, 부부가 서로 화합하고 순종함으로써 가정을 화목하게 하고, 도리와 법을 잘 지킴으로써 가정을 잘 유지 보존하고, 근면하게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함으로써 가정의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하는 것이 가정의 유지 발전을 위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가정교육이 매우 중요시 되었다.
가정은 인간의 인격을 도야하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관인 만큼 가정교육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진교훈 교수에 따르면 인간은 “이웃에 대한 이해와 친절과 융화와 정의, 연대의식, 효도, 염치, 순종, 관용, 충고, 긍지, 감사, 협동의 가능성 등 사회가 존립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사회 윤리의 근간을 우리는 가정에서부터 습득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오늘날 공교육과 사교육은 있어도 가정교육은 실종되어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한다. 전통사회에서 가정교육은 공교육보다 더욱 중시되었으며, 가정교육에서 인성과 지식교육의 중요한 기초가 형성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한국의 전통 가정교육에 대해서 첫째, 전통 가정교육의 주요 덕목. 둘째, 전통 가정교육의 주요 특성. 셋째 퇴계와 다산의 가정교육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2. 전통 가정교육의 덕목
1) 효도
전통 가정교육에서는 무엇보다 효에 대한 교육이 중시되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생명을 부여한 생명의 근원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도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의 근본이었다. 효는 모든 선행의 근원으로 존중되고 교육되었다. 효도는 단순히 물질적인 봉양만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살아 계실 때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좋은 일이 있거나 안 좋은 일이 있거나 사당에 가서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에게 알려야 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의 명예를 위해서도 나쁜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부모의 명예를 높이도록 힘써야 한다. 부모 사후에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무릇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해 지켜야 할 예절은,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드리며, 밤에 잠자리를 정해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피며, 나갈 때는 반드시 고하고, 돌아오면 반드시 안색을 살피며, 노는 곳에 반드시 일정함을 두며, 익히는 바를 반드시 힘써야 하며, 항상 말할 때 늙었다고 일컫지 말아야 한다.”(『예기』「곡례」)
2) 우애
효도 다음으로 우애가 중시된다. 같은 부모의 자식인 형제간은 기를 같이 하는 동기간으로서 항상 서로 믿고 존중하며 형은 동생을 아끼고 동생은 형을 공경하여야 한다. 결혼을 하고나서 분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형제간의 우애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형을 아버지처럼 섬겨야 했고, 형은 동생을 자식처럼 보살펴야 한다.
“楊津은 형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楊椿이 나이 늙어서 밖에서 술이 취해 돌아오면, 양진이 형을 부축하여 방으로 모신 다음, 자기는 옷도 벗지 않고서 방문 밖에 누워서, 때때로 형의 안부를 받들어 살폈다. 이들 형제는 나이가 60세가 지나서야 三公 벼슬에 올랐다. 그런데 양진은 날마다 아침과 저녁으로 형을 찾아 뵙고 문안을 드리면, 아들과 조카들은 뜰아래에 줄지어 늘어섰다. 그리고 형이 앉으라고 말하지 않으면, 양진은 감히 앉지를 못하고 선 채로 있었다.”(『소학』 「선행편」)
3) 공경
『논어』에서 공자는 “문밖을 나서면 큰 손님을 만난 듯이 공경해야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 듯이 공경하라.(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논어』「顔淵」)고 하였다. 예의 기본 정신은 “공경하지 않음이 없음(毋不敬)”이다. 전통 가정교육에서는 공경이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중시되었다. 공경의 대상은 부형, 친족이나 향촌의 어른과 연장자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공경하는 자세가 요구되었다. 사람을 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물을 대하거나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도 공경한 태도를 지녀야 하였다. 특히 언행을 조심해서 함부로 불필요한 말을 하거나, 부주의한 행동을 하지 않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책을 읽고, 글자 하나하나를 쓰는 데에 있어도 공경해야 하였다.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대하거나 크고 작은 일에 매사 공경하는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잘못을 예방하고 올바른 삶의 태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4) 화목
전통 가정에서는 가족성원 간에 화목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하였다. 형제나 친척 간에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기 보다는 믿고 사랑하며 서로 도와서 화목하게 살도록 어려서부터 교육하였다. 개인은 독립적 주체로서보다는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늘 타인을 배려하면서 화목하게 살아가도록 교육하였다. 가정의 화목은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인식되었다.(家和萬事興)
3. 전통 가정교육의 특성
1) 태교의 중시
가정교육의 시작은 출생에서 부터가 아니라 태아 때부터 시작하였다. 태아를 인격으로 인정하고 성심성의껏 태아를 소중하게 다루고 여러 가지 행동에서 모범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태교의 모범은 문왕의 어머니 太任(사임당은 태임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임)이었다.
“옛날에 부인이 자식을 임신하면, 잘 때 옆으로 눕지 아니하고, 앉을 때 변두리에 앉지 아니하고, 설 때 한 쪽 발로 서지 아니하며, 간사한 맛을 먹지 아니하고, 벤 것이 바르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아니하며, 눈으로 간사한 빛을 보지 아니하고, 귀로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밤이면 소경 악사로 하여금 시를 외우게 하고, 올바른 일을 말하였다.”(『열녀전』) 이와 같이 하면 자식을 낳음에 모습이 단정하고, 재주가 남보다 뛰어날 것이다고 하였다.
태교는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함께 하였다. 좋은 자식을 놓기 위해서 길일을 택하고, 최선의 조건을 갖추어서 합방하고, 수태 이후에도 먹거리부터 마음씀씀이, 행동거지에 대해서 세심하게 배려하여 태아에게 항상 최선의 좋은 조건을 제고하기 위해 부부와 가족이 합심하여 협력하였다.
2) 예절교육과 전통교육
지금처럼 핵가족이 아니라 대가족이 함께 살던 전통 사회에서는 조부모,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문중의 어른들이나 친족에 대한 예절의 학습을 중시하였다. 인사예절, 언어예절, 식사예절, 관혼상제 예절, 손님에 대한 예절 등등. 이러한 예절교육을 통하여 어려서부터 일상생활에서 좋은 습관을 키워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개인은 부모의 자식일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선조들의 생명의 연속선 위에서 존재한다고 인식하였다. 어려서부터 조상과 전통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가문의 역사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게끔 하였다. 자신의 가족사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다른 사람의 가족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했고, 그래서 보학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었다.
3) 공간적 상징을 통한 교육
전통 한옥에는 집안의 방안이나 마루, 기둥, 대문, 등 곳곳에 현판, 편액, 주련, 병풍, 민화 등을 걸어놓았다. 그래서 드나들면서 거기에 쓰여 있는 문구나 그림의 의미를 내면화 하도록 하였다. 좋은 문구나 그림은 자녀들의 무의식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주련, 편액과 액자의 교육적 효과는 무시할 수가 없다. 또한 집이나 서재에 당호를 부여함으로써 그 명칭을 통해 늘 의미를 상기하게 하였다.
4) 조부모(와 친족)의 역할
전통 가정교육에서는 부모뿐만이 아니라 조부모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대가족 제도 하에서 조부모는 손자 ․ 손녀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축적된 인생경험과 삶의 지혜를 일러주었다. 조부모뿐만이 아니라, 종조부모, 숙부와 숙모, 외숙부와 외숙모 등 친족이 서로 서로 종손자, 조카, 질녀, 생질, 종질을 친자녀처럼 관심을 가지고 교육하였다.
5) 이야기를 통한 교육
한국의 전통 가정교육에서 중요한 방법의 하나는 사랑방 또는 안방이나 대청마루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통한 교육이다. 동서고금의 역사와 위인들의 전기, 훌륭한 조상이야기, 향토에서 일어났던 고향마을 이야기, 고사성어, 야담, 우화, 가사, 해학 등 이야기를 통해서 손자 손녀와 자녀들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가치관과 지식을 전수하였다. 유아기와 아동기에 들은 이야기는 청장년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난간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지혜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6) 자식을 바꾸어서 교육하기(易子而敎)
오늘날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욕심이 오히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이것이 커다란 가정문제를 발생시키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가 자식을 직접 가르칠 경우에는 자식에 대한 기대와 애착이 크기 때문에 잘못되면 야단치고 책망하다가 보면 부자 사이에 관계가 나빠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전통 가정교육에서는 친구 사이에 또는 친척이나 친지 사이에 서로 자식을 맞바꾸어서 교육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이기 때문에 서로 간 관계에 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하였다.
7) 고난과 역경에 대한 인내 교육
집안의 경제력의 강약 여부를 떠나서 어려서부터 검소하고 절약하는 태도를 키워주고자 하였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속담처럼 고생과 역경 속에서도 서로 도우며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낙천적으로 살도록 교육하였다. 경제적 궁핍에 대한 감내, 추위 더위에 대한 인내와 적응, 고난에 대한 인내를 통해서 인격 성숙의 계기로 삼도록 하였다.
8) 관례의 중시
결혼하기 전 15-20세 사이에 관례를 치름. 남자는 상투를 틀고 관을 썼기 때문에 관례라 하고,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았기 때문에 계례(笄禮)라고 하였다. 관례 후 남자는 자, 여자는 당호를 불렀다. 일종의 성인식인 관례를 거행함으로써 성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더욱 책임있는 행동을 하도록 하였다.
9) 가훈을 통한 교육
이름 있는 집안에서는 명시적이든 아니든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가훈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그러한 가훈을 소중히 여기도록 교육하였다. 그리고 가장은 그러한 가훈을 솔선수범하여 지킴으로써 자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하였다. 12대 300년간 존경받는 부자(만석꾼)로서 명성을 유지한 경주 최부자집의 가훈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기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다섯째,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러한 가훈을 준수함으로써 경주 최씨는 수백년간 부와 명예를 누리며 명가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10) 인문 고전독서 및 과거 공부의 조화
어려서 부터 문자를 익히고 시와 글을 짓고, 경서를 암송하는 인문 고전교육이 중시되었다. 어려서부터 고전을 암송함으로써 고전의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 요구되는 인문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인문 고전교육은 과거공부와도 연결된다. 과거의 합격은 전통 양반 사회에서 지상의 과제여서 아주 어려서부터 과거를 염두에 둔 독서교육이 단계적으로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전통 가정교육에서는 현실적으로 과거공부를 매우 중시하였지만, 인문 고전교육과 과거공부의 조화를 이상으로 추구하였다.
한국의 효도와 인문교양 위주의 가정 교육은 일본과 비교된다. 일본은 영주에 대한 충성을 중시하는 데 비해서 한국은 부모에 대한 효도를 우선시 한다. 또한 일본은 어려서부터 휼륭하고 용감한 사무라이에 대한 전설과 설화를 이야기 해주는 데 반해서, 한국은 어려서부터 훌륭한 문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일본은 사무라이에게 요구되는 강인한 체력과 담력과 용기를 심어주고, 한국은 선비에게 요구되는 학문과 시문, 예절에 대한 교양을 길러주었다.
4. 퇴계의 가정교육
가. 퇴계가의 가문
퇴계는 1501년 11월 25일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보이씨 가문에서 아버지 이식(李埴)과 어머니 춘천 박씨 사이에서 팔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퇴계에게는 형이 여섯, 누나가 하나 있었다. 위로 두 형과 누나는 前母 의성 김씨에게서 태어났고, 아래 다섯 형제는 박씨 부인 소생이었다. 퇴계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고 홀어머니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 퇴계는 자랐다. 퇴계의 어머니 박씨는 남편 사후 농사와 양잠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어려운 형편 가운데도 박씨는 “과부의 자식은 배운 것이 없고 버릇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우려하여 자식교육에 매우 열성적이었고 엄하게 교육을 시켰다. 퇴계는 어려서 6살에 이웃집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12살 때에는 숙부 송재공으로 부터 논어를 배웠다. 34살에 과거에 합격하여 각종 벼슬을 하였지만, 만년에는 고향에 돌아와 교육과 학문에 몰두하였다.
퇴계는 자제와 제자들을 법도에 따라 교육했을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가 스승으로서 삶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퇴계의 교육의 감화로 본인 집안뿐만 아니라 주위의 제자나 지역 사람들에게 까지 명문가의 법도를 세울 수 있게 해 주었다.
나. 퇴계가의 가정교육
퇴계는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준(寯), 둘째 아들은 채(寀), 셋째는 적(寂)이었는데 둘째는 결혼 전에 죽었고, 첫째와 셋째에게서 일곱명의 손자와 두명의 손녀가 태어났다. 퇴계는 그의 장남인 준의 장남 안도에 대해서 할아버지로서 애정을 가지고 지속적인 가정교육을 실시하였다. 퇴계가 그의 손자 안도에게 보낸 글은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125편이 있다. 빈번한 서한을 통해 퇴계는 손자에게 과거공부, 인성교육, 대인관계, 집안일 처리 등등에 대해 매우 자세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교육의 결과로 퇴계 사후에 안도는 퇴계 연보의 작성과 퇴계문집을 발간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퇴계의 지적 유산이 잘 보존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다. 퇴계 가정교육의 특성
1) 지위 고하와 나이를 막론하고 인격적인 인간 대우
퇴계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지위의 고하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평등하게 인격적으로 대하였다. 아무리 연소한 사람이라도 뜰아래 내려가서 맞아들이고 갈 때도 역시 그러하였다. 신분이 종이라고 하더라도 예외 없이 인간적으로 대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였다. 손부가 젖이 부족하자 여종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퇴계는 여종도 딸린 어린 아기가 있으니 여종을 보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허용하였다. 풍기군수로 재직할 때는 유생과 함께 천민 대장장이 배순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그 후 배순은 퇴계선생의 철상을 만들어 모시고 열심히 공부하고 퇴계 사후에는 삼년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자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출신가문과 나이를 따지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우하였고, 이러한 퇴계의 평소 처신은 자손들과 제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끼쳤다. 퇴계는 성리학 이론의 대가일 뿐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도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지행일치의 삶을 구현하였다.
2) 여성에 대한 배려
퇴계는 도학자에 대한 일반적 편견과 달리 부인에 대해서도 인격적으로 잘 대우하였고, 부인 사후에도 장인과 장모를 비롯한 처가 식구의 생활, 건강, 장례, 제사 등에 대해서 지극히 자상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고, 자식들에게도 외손으로서 외가에 대한 책무를 다하게 하였다. 또한 며느리와 손부의 건강이나 안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돌보아 주었다. 그래서 퇴계의 큰 며느리는 죽으면서도 자기를 시아버지 묘아래 묻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지금도 퇴계의 후손 가운데는 “첫째, 부모에게 불효한 사람하고는 대화를 나누지 말 것. 둘째, 처가 향념이 없는 사람하고는 교제하지 말 것. 셋째, 댁을 쫓아낸 사람과는 사업을 같이 하지 말라”는 가규를 시행하는 집안이 있다.
3) 인맥 네트워크의 중시
퇴계는 자제나 손자들이 주위의 총명한 제자들과 같이 공부하고 어울리게 배려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인맥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서로 배우고 도울 수 있게 하였다. 친족과 비친족을 막론하고 인품과 학식이 훌륭한 젊은이들과 공동학습을 통해 접촉하고 교류할 기회를 갖게 함으로써 좋은 교육환경을 조성하고 인맥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도록 하였다. 퇴계의 문하에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던 것도 퇴계 문하생들 상호간에 형성된 인맥 네트워크가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4) 인격(도의)교육과 과거교육의 조화
퇴계도 당시의 다른 부모나 조부모처럼 자제나 자손의 과거급제를 강력히 희망하였다. 그래서 자기 아들이나 손자를 과거시험 준비 전문 기관(接)에 보내기도 하였다. 열심히 공부하여 급제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과거공부만을 위한 공부보다는 고전에 대한 이해와 학습을 통해 학식이 깊어지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과거에도 합격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퇴계는 인격도야와 과거공부를 모순으로 여기지 않고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즉 그는 교육에 있어서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5) 자연친화적 교육
퇴계는 수시로 기회가 퇴면 아름다운 명산과 명승지를 찾아서 공부하기를 좋아하였다. 특히 인근의 청량산에 머물면서 공부를 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자제도 역시 집을 떠나 조용한 절이나 청량산에 머물면서 수도하는 마음으로 공부에 열중하고 심신을 맑게 수양하도록 하였다. 맑고 아름다운 자연은 사람의 몸과 마음도 건강하고 맑게 치유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퇴계는 자손이나 제자들이 때로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섭리를 배우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하도록 하였다.
라. 퇴계 가정교육의 효과
퇴계의 가정교육은 후손들에게 인간됨의 도리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형성하였다. 퇴계사후 그의 수많은 저술을 모으고 정리하는 데는 그의 제자들의 노력과 함께 그의 손자의 공이 컸다. 또한 임진왜란 때 그의 저술과 유품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손부의 눈물겨운 정성 때문에 가능하였다. 일제시대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도 퇴계가의 후손(14대손)이다. 그리고 퇴계학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선양되게 된 계기도 퇴계의 후손인 이동준씨(인천제철 창업자)가 1970년대에 사재를 희사하여 퇴계학연구원을 설립하여 국내외학자들의 연구와 학회를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진성 이씨 퇴계 후손은 조선조에 걸쳐 문집을 세 번째로 많이 낸 가문으로 총 92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사람이 37명에 달한다. 이러한 빛나는 전통은 퇴계의 가정교육이 남긴 성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 다산의 가정교육
가. 다산의 가문과 그 전통
다산 정약용(1762-1836)의 가문은 본관이 압해로서 고려조에서 무관이 9세를 연이어 내려왔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8대를 연달아 부제학, 병조판서, 좌찬성, 대사헌 등의 벼슬을 하였고, 모두 옥당에 들어갔으니, 명문 중에도 흔하지 않은 명문이다. 다만 다산의 고조부에서 조부까지 3대 동안은 정치적 소용돌이 때문에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산의 부친인 재원은 음직으로 벼슬길에 올라 진주목사 등을 지냈다. 다산은 이처럼 화려하고 유서 깊은 명문가에 태어나 남달리 자부심이 컸다. 친가뿐만 아니라 외가쪽 역시 대단한 명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의 후손으로서 공제 윤두서의 손녀이다. 윤두서는 시서화 삼절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박학다식하였다.
다산의 가문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덕목을 가풍으로 유지해 왔다. 첫째는 삼가함(謹)이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목숨을 바쳐 순국한 열렬한 충절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힘있는 사람을 추종하여 나쁜 일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임금을 보필하는 어진 산하가 되는 데에는 손색이 없었다. 둘째는 범상함(拙)이다. 목숨을 걸고 권력투쟁에 앞장서지 않음으로써 큰 승리도 없었지만 큰 패배도 없었다. 그래서 출세하더라도 큰 벼슬은 없었고, 치산만 하더라도 큰 부자는 없었다. 셋째는 선량함(善)이다. 마음이 선량하여 독기가 없어서 남에게 원망을 품거나 악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았다. 넷째는 신실함(諒)이다. 허황된 말로써 남에게 낭패를 당한 적이 없다. 이러한 가풍은 다산의 인격형성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고, 가정교육을 통하여 전승되었다.
나. 다산의 가정교육
정약용의 가문은 신유옥사로 인해 폐족이 되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아들인 학연(1783-1859)과 학유(1786-1855)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식들이 폐족이 되었다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학문에 힘써서 가문의 중흥을 도모할 것을 간곡히 타이르고 있다.
특히 서울 부근을 떠나지 말 것을 당부, 학문에 힘써서 가문의 부흥을 대비할 것, 근검으로 가정을 다스릴 것, 가정의 화목을 위해 어머니 ․ 백부 ․ 조카와 그 외 친척이나 친지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자식들의 독서상황을 점검하고, 독서의 내용과 요령을 교육하고, 저술방법을 가르쳐주고 저술 과제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배지로 아들을 교대로 오게 하여 직접 자녀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다. 다산 가정교육의 특성
1) 실용교육
다산이 유배를 가면서 다산 일가는 하루아침에 폐족이 되었다. 생활이 어렵게 된 가족을 위해 다산은 자식들에게 과수와 채소를 기르는 법 등 생존에 필요한 실용적 교육을 실시하였다. 실학의 대가답게 다산은 자식들이 먹고 살고 생계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실용교육을 중시하였다.
2) 정보 접근성의 중시
다산은 자식들에게 서울 근처를 벗어나 살지 말라고 명령을 하였다. 당시 사회에서는 서울에 모든 문화와 정보가 집중되어 있음으로 해서 정보의 중심지인 서울을 벗어나지 말도록 함으로써 정보와 문화에 대한 접근성을 잃지 않도록 교육하였다.
3) 지식 정보 처리와 활용 기술
다산은 자식들에게 필요한 주제별로 정보를 수집하여 책을 만들고, 그것을 생활에 실용적으로 참고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자식들로 하여금 지식 정보 수집 및 정리와 활용 노하우를 가르쳐 주었다.
4) 어려울수록 가족의 화합 강조
신유옥사로 일가가 폐족이 된 위기 속에서 다산은 자식들로 하여금 가문의 재기를 위하여 학문에 힘쓰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효도와 우애와 공경과 인내로서 가족의 화합을 유지할 것을 간곡히 타일렀다.
5) 고난과 위기를 이기는 방법
신유옥사로 인해 다산의 가문은 최대의 위기를 겪는다. 다산의 셋째 형 약종이 사형을 당하고, 둘째 형 약전이 흑산도로 유배 가서 거기서 죽고, 큰형의 사위 황사영이 사형을 당하는 등 엄청난 위기를 맞는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다산의 자식들도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문가의 자부심도 내동댕이치고 아버지 다산의 구명을 위해 권문세가에 머리를 숙이고 청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위기 속에서도 아들에게 주의를 주어서 권문세가에 채신머리없이 굴하지 말고 자존심을 지키라고 당부하였다. 어려움 속에서도 가정의 화합에 힘쓰고 학문과 생업에 힘쓰면서 때를 기다림으로써 고난과 위기를 이길 수 있도록 다산은 자녀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갖도록 교육하였다.
라. 다산 가정교육의 효과
다산은 유배지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또한 세심한 가정교육을 통해 폐족으로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다산의 큰 아들 학연은 시인으로서 그리고 의술로서 유명하였고 『三倉館集』이라는 시집을 남겼으며, 학유도 시인으로서 「농가월령가」를 지었다. 다산의 사후 그의 저술들은 후손에 의해 잘 보존되고, 나중에 고종에게 다산의 저술이 알려짐으로써 고종은 다산에게 시호를 내리고 명예를 회복시켜주었으며, 그의 후손들이 다시 과거를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다산의 증손 정문섭은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과 교리와 승지를 역임하였다. 다산학이 크게 보급되는 계기가 된 여유당전서 편찬 작업에도 후손들의 기여가 켰다. 다산의 학문적 노력과 가정교육의 성공으로 다산은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실학자로 재평가되었고, 그의 후손들도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6. 맺음말: 전통 가정교육의 현대적 의미
한국의 전통 가정교육은 현대적으로 보아도 배울 것이 많이 있다. 무엇보다도 자기 정체성에 대해 확고한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자기가 속해 있는 가족의 역사와 전통을 알고, 또한 주위 가족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게 함으로써 정체성이 확고한 인간을 교육하는데 도움을 준다. 인간은 자기 정체성이 확고할 때 어려움에 처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예절교육을 통해 어려서부터 올바른 습관을 배양하게 함으로써 사회생활에 필요한 매너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하고, 이것은 성장 후 사회생활에 큰 자산이 된다.
조부모와 부모, 숙부, 숙모 등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듣는 풍부한 이야기들은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지식은 물론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의 원천이 된다. 어려서부터 친척과 친지들을 폭넓게 익히게 됨으로써 인맥 네트워크를 익히는 훈련을 쌓고, 이것은 후에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입시 또는 취직시험에 비유되는 과거공부도 중시하였지만, 어려서는 소학을 통해 인성교육의 기초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좋은 인성이 길러진 바탕 위해서 이론적 전문적 지식을 익혀서 사회에 봉사하는 수기치인의 인간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는 자녀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만 하고, 자녀들로 하여금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를 엄하게 준수하게 하는 데는 소홀한 경향이 있다. 전통 가정교육에서는 좋은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한편으로는 엄하게 법도에 따라 교육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으로 포용해줌으로써 균형을 유지하였다. 엄한 아버지의 법과 자상한 어머니의 모성이 결합하여 균형 잡힌 인격을 이룰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전통 가정교육에 문제점도 있다. 우애와 화합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온정주의로 흘러서 개인의 주체적인 독립정신이 약화될 소지도 있다. 또한 전통교육이 지나치게 되면 미래에 대한 창조적 개척정신을 함양하는데 소홀할 수도 있다. 가족주의가 잘못되면 가족 이기주의로 흘러서 건강한 시민정신 함양에 저해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정교육의 황폐로 인한 부작용을 고려한다면, 전통 가정교육이 가지고 있는 단점을 우려하기 보다는 장점을 현대적으로 되살리려는 의식적인 노력과 활동이 매우 긴요하다.
모든 이웃이, 모든 인류가 한가족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 평화를 누릴 수 있다. 한국의 전통 가정교육도 가정에서 효도와 우애와 공경심을 배양함으로써 가족의 화목을 달성하고, 나아가서는 사랑과 신뢰와 평화가 넘치는 국가와 세계를 실현함으로써 거룩한 천명을 땅에서 이루는데 그 궁극의 지향점이 있다고 하겠다.
장승구 세명대 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