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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석 손병철
라석 손병철


라석 손병철(羅石 孫炳哲)은 시·서·화를 비롯하여 유·불·선의 문사철(文史哲)을 두루 섭렵한 시인이자 서예가, 미학자, 철학자이며 예술운동가이다. 호는 라석(羅石)·모전(牟田)·계정(溪亭)·불한자(弗寒子)·라옹(羅翁), 자는 옥과(玉果), 법명은 경현지(景現智)이다.


손병철은 중국 베이징대학교에서 철학과 미학을 전공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베이징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박사후 과정) 및 중국 중앙미술학원 미술사학계 서화감정 석사를 거치며 동아시아 철학과 예술에 대한 깊은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그는 불교철학, 특히 승조(僧肇)의 사상 연구에 천착하여 북경대 박사학위논문 『조론통해 및 연구(肇論通解及硏究)』를 완성하였으며, 이는 이후 대만 불광사 법장문고(法藏文庫)를 통해 출간되어 동아시아 불교철학 연구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학문과 예술을 분리하지 않았던 그는 시·서·화와 철학을 하나의 정신적 흐름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그는 1990년대 후반 ‘물파주의(物波主義, Mulpaism)’ 예술운동을 주창하며 현대 예술의 새로운 정신적 지평을 제시하였다. 물파주의는 사물(物)과 파동(波), 정신과 물질, 존재와 생성의 상호 연동성을 탐구하려는 예술철학적 시도였으며, 그는 이를 바탕으로 서울과 베이징에 물파공간(Mulpa Space)을 설립·운영하며 1999년부터 2013년까지 국제적인 예술 교류의 장을 열었다. 물파공간은 단순한 갤러리가 아니라 동아시아 예술과 철학이 만나는 문화 플랫폼이었으며, 수많은 국제전과 기획전을 통해 한국 현대서예와 예술 담론의 확장에 기여하였다.


그의 예술세계는 서예와 문인정신의 계승 속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한국 근현대 서단의 거목인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과 동정 박세림(東庭 朴世霖)에게 사사하며 전통 서예의 법맥을 이었고, 이를 현대적 미감과 철학적 사유 속에서 재해석하였다. 손병철에게 서예는 단순한 필법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 정신과 우주의 리듬이 만나는 수행의 장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筆墨精神』과 「眞善美와 筆墨精神論」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또한 예술행정과 문화기획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부산예총·부산미술·한국서예협회에서 사무국장과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부산바다미술제, 서울서예비엔날레, 세계서예축제, 2002 월드컵기념 국제초서정신전 등 다수의 국제적 전시와 문화행사를 총감독 또는 기획자로 이끌었다. 서울·베이징·도쿄·싱가포르·파리·뉴욕을 무대로 펼쳐진 물파그룹과 태묵그룹의 활동 역시 그의 문화예술적 비전과 국제적 감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시인으로서의 손병철 역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다. 첫 시집 『정좌(正坐)』(1974)를 시작으로 『내 사랑은』, 『허황옥이 가락국에 온 까닭』, 『지상에 머무는 동안』, 『창가에 두고 온 달』, 『羅石心物詩』에 이르기까지 그는 존재와 자연, 역사와 문명, 사랑과 수행의 문제를 시적 언어로 탐구하였다. 그의 시는 단순한 서정에 머물지 않고 철학적 사유와 문명비평의 성격을 지니며, 특히 최근의 『羅石心物詩』는 동아시아 문명기행과 심물(心物)의 사유를 결합한 독창적 시세계로 주목받는다.


이와 함께 그는 『黃帝陰符經』, 『老子道德經解』, 『時中易』, 『達摩易筋經』, 『肇論通解』 등 동아시아 고전과 불교·도교 경전을 번역·해설하며 전통 사상의 현대적 이해에도 힘써왔다. 『물파주의』와 『물파전집』, 『라석문필집』, 『태묵전집』 등 방대한 저술은 그의 예술철학과 문화사적 성찰을 집대성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라석 손병철은 문경의 불한산방(弗寒山房)에 은거하며 시작(詩作)과 저술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평생 시·서·화와 철학, 동아시아 정신문화와 현대 예술의 접점을 탐구해온 예술가이자 사상가로서, 한국과 동아시아 문화예술계에 독자적인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