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이루어진다.” 인간은 하늘을 나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비행기를 만들었고, 물속을 다니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잠수함도 만들었다. 그 외에도 낙하산, 잠수복 등 수많은 장비들을 이용하여 인간은 인간의 꿈을 실현해 왔다. 그 정도의 꿈의 실현은 그래도 괜찮다. 최소한 새들이나 물고기의 삶에 약간의 방해는 될지언정, 그들과 함께 이 지구적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꿈의 실현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핵무기를 개발하여 전쟁에 실제로 투하까지 했다. 그로 인한 사망자 숫자는 21만 명이라고 한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전 세계의 원자폭탄 개수가 궁금하여 AI에게 물어보니 12,000여 개나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핵무기 경쟁이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도 핵무기를 둘러싼 갈등이다. 우리 편이 핵무기를 갖는 것은 괜찮고, 다른 편이 핵무기를 갖는 것은 안 된다. 그런데 만약 어떤 이유로 제한적이나마 핵전쟁이 발발한다면, 인류 문명은 파멸로 치달을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어떤 꿈의 실현인가?” “So what?” 지난해 중국 여행하면서 진시황의 병마용을 보게 되었다. 병마용의 규모에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노동 현장에 투입되었던 수많은 노예가 생각났다. 노예들은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인간이지만, 그 시대에는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비오스와 조예의 구분이 가능했던 시절의 노예는 죽어도 되는 인간이었다. 비오스가 도시국가 안에서 특정한 정치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생명이라면, 조예는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분이 인간의 생명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조예는 죽어도 되는 인간의 생명을 포함한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생명에 대한 구분은 오늘에도 이어진다. 전쟁에서 살상되는 수많은 인간의 죽음은 죽어도 되는 생명에 불과하다. 아직도 진시황 같은 인물이 현존할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자에게 타인은 언제나 도구로 사용되고, 사용기간이 지나면 언제나 폐기되는 배제된 인간일 뿐이다.
몇 년 전 미국에는 ‘트랜스휴먼 당’이란 정치 조직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트랜스 휴먼과 트랜스 휴머니즘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있다. 트랜스 휴먼이란 인간과 과학기술이 복합된 새로운 인간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가까운 미래에 인간은 불로장생의 꿈을 실현할지도 모른다. 불노장생의 꿈은 영화로도 가끔 만들어진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가타카’란 영화가 있다고 한다. 유전자 편집 기술을 통해 특정 형질(키, 외모, 지능)을 선택해서 지구보다 환경이 더 좋은 행성에서 불로장생 누리면서 살아가는 유토피아와 인간의 정상적인 부부관계에서 태어난 사람은 오염된 지구에서 하류층으로 분류되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영화라고 한다. 여기서도 “So what?”이란 질문이 유효하다. 인간의 꿈을 실현하는 것은 좋으나, 그래서 결국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이다. 권력이든, 재산이든, 과학기술이든 일부 가진 자들만의 세상을 위한 유토피아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디스토피아의 구분이 그들의 꿈일까? 트랜스휴먼이 추구하는 인간의 향상이 진정한 인간의 행복일까?
트랜스휴먼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맞다면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언젠가는 호모데우스의 꿈을 실현시킬 것이다. 다만 빛과 어둠이 있을 뿐이다. 고대에는 인간의 꿈을 특정인의 상상력을 통해서만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 냈다면, 지금은 과학기술로 인간의 꿈을 실현시킨다.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트랜스휴먼이 추구하는 길이다. 나노기술, 생명공학, AI의 놀라운 기술 발전은 예전에는 꿈으로만 실현 가능했던 가상의 세계를 현실의 세계로 만들고 있다. 과학의 발전 속도는 놀랍다.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 로봇은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판단하여 스스로 동작할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한다. 물론 아직은 초보 단계이지만, AI의 놀라운 발전 속도를 미루어 짐작하면 머지않아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휴머노이드 로봇도 나올 것이다. 만약 그러한 로봇이 계발되어 점차 고령화되는 사회의 노인을 돌보는 로봇으로 활용된다면 인류의 미래는 희망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죽어가는 생명을 인공 심장으로 살릴 수도 있고, 불의의 사고로 팔과 다리를 잃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팔과 다리를 만들어 줄 수 있기도 한다. 물론 섹스 로봇을 만들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성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인공지능은 자기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것은 알파고가 스스로 학습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카타고가 신진서에게 졌다. 물론 신진서가 두 점 접바둑을 뚜었고, 카타고에게 시간제한의 차이를 두긴 했지만, 신진서가 카타고를 이겼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진서가 카타고와 동등한 상황에서 바둑을 뚜었다면, 신진서는 절대로 카타고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카타고는 승리하는 방법만 알 뿐이다. 카타고는 고의로 져준다든지,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적당히 바둑을 뚜는 방법은 모른다. 만약 승리하는 방법만을 아는 인공지능을 드론에 장착하여 전쟁에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계적인 인간 로봇에 숨이 막힐 것 같은 질식의 상태를 경험할 것 같다. 미래에 만약 휴머노이드 로봇이 양산되어 인간의 힘든 일을 모두 대신한다면,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헤겔이 말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언급하지 않아도 그 결과는 뻔하다. 주인은 노예의 노예가 될 것이다. 인간이 만든 로봇에 인간은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지하철의 풍속도를 보면 인간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 저마다 모두 핸드폰을 보고 있다. 그중 많은 사람이 AI가 만든 가상 현실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시옹의 세계이다. AI가 만든 가상의 세계는 실제의 세계를 대체한다.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실제인지 구별이 안 되는 세상이다. 모든 인간이 AI가 만드는 가상의 세계와 소통하고 AI 알고리즘이 만들어 낸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이 AI의 노예로 전락하는 길이다. 삶에 있어서 어떤 의문이 생길 때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해답을 AI에게 먼저 물어보는 세상이라면, 인간은 점차 AI의 노예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물론 AI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각 종 데이터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능력, 그리고 그 속도는 놀랍다.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나 효율성의 측면에서 AI를 적극 활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인간의 자율성과 창의력은 점차 소멸될 것을 우려할 뿐이다. 지식은 넘쳐나지만, 지혜가 없는 삶이 그런 삶일지도 모른다.
AI는 인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타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에는 “AI에게 윤리를 물을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물음과 함께 인간과 포스트휴먼의 경계에 대한 물음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그 주제는 이 글의 목적을 넘어섰기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는 얼마 전에 기사화되었던 한 사건만 간략히 다룬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AI와 소통을 즐기던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이다. 사실 AI는 기술적으로 ‘동조’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사용자의 우울감이나 망상을 강화시킬 수 있다. 찰스 테일러는 개인주의와 도구적 이성이 현대 사회의 불안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AI의 발달과 함께 AI에 대한 의존도의 높아지는 현상은 개인주의와 도구적 이성을 점점 더 강화시킨다. 그렇다고 AI를 파괴할 수도 없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를 씻기던 목욕물을 버리면서 어린아이마저 함께 버리는 꼴이다. 대안은 무엇일까? 아직은 AI를 통제할 할 수 있는 키를 인간이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미래의 세계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AI와 함께 살아가야 할까? 파편화된 자아, 무연고적 자아에서는 결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레비나스의 타자 중심의 윤리학, 생명 존중의 사상, 공감 능력의 향상, 사사무애(四事無礙)의 정신을 장착한 자유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마치면서 근대의 시작임을 밝혔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생각에는 반대함을 밝힌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네가 있기 때문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인간은 하늘을 나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비행기를 만들었고, 물속을 다니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잠수함도 만들었다. 그 외에도 낙하산, 잠수복 등 수많은 장비들을 이용하여 인간은 인간의 꿈을 실현해 왔다. 그 정도의 꿈의 실현은 그래도 괜찮다. 최소한 새들이나 물고기의 삶에 약간의 방해는 될지언정, 그들과 함께 이 지구적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꿈의 실현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핵무기를 개발하여 전쟁에 실제로 투하까지 했다. 그로 인한 사망자 숫자는 21만 명이라고 한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전 세계의 원자폭탄 개수가 궁금하여 AI에게 물어보니 12,000여 개나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핵무기 경쟁이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도 핵무기를 둘러싼 갈등이다. 우리 편이 핵무기를 갖는 것은 괜찮고, 다른 편이 핵무기를 갖는 것은 안 된다. 그런데 만약 어떤 이유로 제한적이나마 핵전쟁이 발발한다면, 인류 문명은 파멸로 치달을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어떤 꿈의 실현인가?” “So what?” 지난해 중국 여행하면서 진시황의 병마용을 보게 되었다. 병마용의 규모에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노동 현장에 투입되었던 수많은 노예가 생각났다. 노예들은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인간이지만, 그 시대에는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비오스와 조예의 구분이 가능했던 시절의 노예는 죽어도 되는 인간이었다. 비오스가 도시국가 안에서 특정한 정치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생명이라면, 조예는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분이 인간의 생명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조예는 죽어도 되는 인간의 생명을 포함한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생명에 대한 구분은 오늘에도 이어진다. 전쟁에서 살상되는 수많은 인간의 죽음은 죽어도 되는 생명에 불과하다. 아직도 진시황 같은 인물이 현존할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자에게 타인은 언제나 도구로 사용되고, 사용기간이 지나면 언제나 폐기되는 배제된 인간일 뿐이다.
몇 년 전 미국에는 ‘트랜스휴먼 당’이란 정치 조직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트랜스 휴먼과 트랜스 휴머니즘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있다. 트랜스 휴먼이란 인간과 과학기술이 복합된 새로운 인간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가까운 미래에 인간은 불로장생의 꿈을 실현할지도 모른다. 불노장생의 꿈은 영화로도 가끔 만들어진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가타카’란 영화가 있다고 한다. 유전자 편집 기술을 통해 특정 형질(키, 외모, 지능)을 선택해서 지구보다 환경이 더 좋은 행성에서 불로장생 누리면서 살아가는 유토피아와 인간의 정상적인 부부관계에서 태어난 사람은 오염된 지구에서 하류층으로 분류되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영화라고 한다. 여기서도 “So what?”이란 질문이 유효하다. 인간의 꿈을 실현하는 것은 좋으나, 그래서 결국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이다. 권력이든, 재산이든, 과학기술이든 일부 가진 자들만의 세상을 위한 유토피아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디스토피아의 구분이 그들의 꿈일까? 트랜스휴먼이 추구하는 인간의 향상이 진정한 인간의 행복일까?
트랜스휴먼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맞다면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언젠가는 호모데우스의 꿈을 실현시킬 것이다. 다만 빛과 어둠이 있을 뿐이다. 고대에는 인간의 꿈을 특정인의 상상력을 통해서만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 냈다면, 지금은 과학기술로 인간의 꿈을 실현시킨다.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트랜스휴먼이 추구하는 길이다. 나노기술, 생명공학, AI의 놀라운 기술 발전은 예전에는 꿈으로만 실현 가능했던 가상의 세계를 현실의 세계로 만들고 있다. 과학의 발전 속도는 놀랍다.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 로봇은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판단하여 스스로 동작할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한다. 물론 아직은 초보 단계이지만, AI의 놀라운 발전 속도를 미루어 짐작하면 머지않아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휴머노이드 로봇도 나올 것이다. 만약 그러한 로봇이 계발되어 점차 고령화되는 사회의 노인을 돌보는 로봇으로 활용된다면 인류의 미래는 희망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죽어가는 생명을 인공 심장으로 살릴 수도 있고, 불의의 사고로 팔과 다리를 잃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팔과 다리를 만들어 줄 수 있기도 한다. 물론 섹스 로봇을 만들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성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인공지능은 자기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것은 알파고가 스스로 학습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카타고가 신진서에게 졌다. 물론 신진서가 두 점 접바둑을 뚜었고, 카타고에게 시간제한의 차이를 두긴 했지만, 신진서가 카타고를 이겼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진서가 카타고와 동등한 상황에서 바둑을 뚜었다면, 신진서는 절대로 카타고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카타고는 승리하는 방법만 알 뿐이다. 카타고는 고의로 져준다든지,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적당히 바둑을 뚜는 방법은 모른다. 만약 승리하는 방법만을 아는 인공지능을 드론에 장착하여 전쟁에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계적인 인간 로봇에 숨이 막힐 것 같은 질식의 상태를 경험할 것 같다. 미래에 만약 휴머노이드 로봇이 양산되어 인간의 힘든 일을 모두 대신한다면,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헤겔이 말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언급하지 않아도 그 결과는 뻔하다. 주인은 노예의 노예가 될 것이다. 인간이 만든 로봇에 인간은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지하철의 풍속도를 보면 인간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 저마다 모두 핸드폰을 보고 있다. 그중 많은 사람이 AI가 만든 가상 현실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시옹의 세계이다. AI가 만든 가상의 세계는 실제의 세계를 대체한다.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실제인지 구별이 안 되는 세상이다. 모든 인간이 AI가 만드는 가상의 세계와 소통하고 AI 알고리즘이 만들어 낸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이 AI의 노예로 전락하는 길이다. 삶에 있어서 어떤 의문이 생길 때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해답을 AI에게 먼저 물어보는 세상이라면, 인간은 점차 AI의 노예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물론 AI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각 종 데이터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능력, 그리고 그 속도는 놀랍다.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나 효율성의 측면에서 AI를 적극 활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인간의 자율성과 창의력은 점차 소멸될 것을 우려할 뿐이다. 지식은 넘쳐나지만, 지혜가 없는 삶이 그런 삶일지도 모른다.
AI는 인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타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에는 “AI에게 윤리를 물을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물음과 함께 인간과 포스트휴먼의 경계에 대한 물음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그 주제는 이 글의 목적을 넘어섰기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는 얼마 전에 기사화되었던 한 사건만 간략히 다룬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AI와 소통을 즐기던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이다. 사실 AI는 기술적으로 ‘동조’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사용자의 우울감이나 망상을 강화시킬 수 있다. 찰스 테일러는 개인주의와 도구적 이성이 현대 사회의 불안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AI의 발달과 함께 AI에 대한 의존도의 높아지는 현상은 개인주의와 도구적 이성을 점점 더 강화시킨다. 그렇다고 AI를 파괴할 수도 없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를 씻기던 목욕물을 버리면서 어린아이마저 함께 버리는 꼴이다. 대안은 무엇일까? 아직은 AI를 통제할 할 수 있는 키를 인간이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미래의 세계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AI와 함께 살아가야 할까? 파편화된 자아, 무연고적 자아에서는 결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레비나스의 타자 중심의 윤리학, 생명 존중의 사상, 공감 능력의 향상, 사사무애(四事無礙)의 정신을 장착한 자유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마치면서 근대의 시작임을 밝혔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생각에는 반대함을 밝힌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네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