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다.” “우리가 남이가?” 젊었을 때부터 많이 들어왔던 말이다. 이러한 정서가 우리 문화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혈연, 지연, 학연을 중시하는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는 정치권을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모습을 보면 세대를 거치면서 전달되는 문화의 힘이 막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문화는 잘못된 공동체 의식을 낳는 계기가 된다. 허경의 논문에 의하면 우리가 말하는 공동체(共同體)라는 개념은 일본 메이지 시대 때 번역이 아무런 비판없이 사용되고 있는 결과이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인은 함께 共, 같은(하나) 同, 몸 體 세 글자를 결합하여 영어 community를 ‘공동체’로 번역하였다.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의 과제는 하나의 통일된 근대 민족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들이 번역한 공동체에는 차이와 다름을 억압하고, 획일적인 전체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 요소를 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본 메이지 시대의 번역에 담긴 정서는 그에 대한 아무런 반성 없이 사용하는 한 우리의 언어 속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게 됨을 부인할 수 없다.
진정한 공동체란 무엇일까?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회학적으로 통용되는 공동체인 community는 일반적으로 공통의 가치와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통의 가치나 정체성이다. 이것이 폐쇄적으로 될 때 배제와 인정 망각이 발생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 삶의 터전이기도 한 지구 차원에서의 심각한 생태적 위기를 겪고 있다. 지구 온난화, 다양성을 잃어가는 종의 멸종, 환경파괴 등 생태적 위기는 어쩌면 인류의 멸종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 며칠 전 발생한 네팔의 대홍수도 히말라야 산맥의 빙하 붕괴와 산사태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다. 기후 변화에 따른 재앙이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공동체(community)를 생태학적인 용어인 공생(symbiosis)의 관점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굴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와 『공생자 행성』, 러브록의 『가이아』, 카프라의 『생명의 그물』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의 공통적인 점은 “우리는 결코 개체(individual)였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생명은 본질적으로 관계 중심적이고 상호의존적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생명 진화에 대한 현대의 대표적 이론은 마굴리스의 세포내 공생이론과 신다윈주의를 들 수 있다. 마굴리스는 생명 진화의 주요 기제를 세포 간의 융합과 공생임을 강조하지만, 신다윈주의자들은 세포 내부의 유전자 변이에 초점을 맞추어 생물 종 분화를 설명하고 이를 진화의 역사로 대체한다. 본 글에서는 신다윈주의와 마굴리스의 공생이론을 비교 분석하는 것보다 마굴리스의 생각을 간략히 추적해 보기로 한다. 마굴리스는 생명을 ‘물질과 에너지의 창발적 작용’으로 본다. “지구의 생물은 창조된 계층 조직이 아니라 조합과 조정, 재조합이라는 자기 유도적인 시너지로 창발한 홀러키이다.” 이 문장 속에서 마굴리스의 생명에 관한 기본적인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홀러키(holarchy)는 ‘전체이면서 동시에 부분인 존재(holon)’들이 층층이 연결된 구조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전통적 위계(hierarchy)가 존재하지 않고, 각 개별 단위가 독립적이면서도 더 큰 전체의 일부로서 상호 의존하는 ‘중첩된 질서’만 있을 뿐이다. 마굴리스는 생명과 생명은 상호의존적이고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시스템적인 관점을 중시한다.
마굴리스는 칠레의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생명의 극히 기본적인 본질을 물질대사에서 찾았다. 그들은 이것을 ‘자기 생산(autopoiesis)’이라고 부른다. 자기(auto)와 만들기(poiein)를 의미하는 그리스 어근에서 나온 이 말은 생명이 끊임없이 자기를 만들어냄을 표현하고 있다. 자기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생명은 자신을 유지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살아 있을 수 없다.” 자기 생산은 진화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동일한 상태로 머물기 위해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자기 생산의 핵심이다. 이는 세포뿐만 아니라 생물권에도 적용된다. 종에 적용되면 진화가 일어난다.” 마굴리스는 생명은 고정되어 있는 명사가 아니라 항상 변화하는 동사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마굴리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인간은 특별하지도 않고 독립적이지도 않으며, 그저 지구를 에워싸고 있는 연속체인 생명의 일부일 뿐이다.” 마굴리스는 『공생자 행성』에서 자신이 평생 연구해 온 문제가 연속 세포 내 공생이론(SET, serial endosybiosis theory)과 가이아(Gaia)라고 밝히면서 그 둘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 말한다.
다음으로 러브록의 『가이아』에 나오는 몇몇 문장을 인용하면서 러브록의 생각을 추적해 본다. “지구는 다른 행성들과는 달리 생물들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항상 스스로 환경을 조절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구가 갖은 이런 속성이 지표면에서 생활하는 생물체들의 덕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지구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지구는 생물체 전제의 상호 작용에 의해 우리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 그는 지구를 표현하는 이름으로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차용했다. “가이아는 대기, 해양, 지표면의 암석 등과 밀접하게 결합된 모든 생물체들로 구성되는 초 생명체이다.” 지구는 스스로 자기 조절을 하는 하나의 살아있는 초 생명체란 말이다. “가이아는 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적당한 물리, 화학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나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총합체라고 할 수 있다. 능동적 조절에 의한 비교적 균일한 상태의 유지라는 것은 항상성(homeostasis)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이란 입력과 출력, 그리고 그것의 뒤먹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굴리스가 말하는 ‘자기 생산(outopoiesis)’과도 접목된다. 러브록은 책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가이아의 존재 안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는 아무런 규범도 법률도 필요치 않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그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인류가 절멸되어도 지구는 돌아갈 것이라는 암시를 담은 섬뜩한 경고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카프라의 『생명의 그물』을 따라가 보자. 이 책의 목적은 데카르트와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전일론적, 심층 생태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일론적이란 말은 모두가 내면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관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생태학을 표층 생태학과 심층 생태학으로 구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표층 생태학은 인간 중심적 또는 인간을 그 중심에 놓는 관점의 생태학이다. 이는 인간을 자연의 바깥쪽 또는 그보다 우위에 놓인 존재로 간주하며, 모든 가치의 근원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연을 도구적 가치 또는 사용 가치로 다룬다. 반면 심층 생태학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하지 않는다. 이 견해는 세계를 분리된 사물들의 집적으로 보지 않고, 근본적으로 상호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적인 현상들의 연결망으로 본다.” 즉 인간을 생명이라는 그물 속에 포함되어 있는 씨줄이나 날줄에 불과한 무엇으로 본다는 것이다. “설탕의 단맛은 설탕을 구성하는 탄소, 수소, 산소 원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1920년대 초 철학자 브로드는 특정한 복잡성의 수준에서 창발 되지만, 그보다 낮은 수준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특성들에 ‘창발적(emergent) 특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말하는 창발은 앞에서 마굴리스가 말한 ‘자기 유도적인 시너지로 창발한 홀러키’에서의 창발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생명과 관련된 마굴리스와 러브록, 카프라의 생각을 잠시 살펴보았지만,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자연 속에는 어떠한 위계적 질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서로 관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인간과 자연은 서로 공생적으로 존재한다.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우리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로서 공생적 삶이다. 지구적 생태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서의 지구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필요하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고, 네가 아프기에 내가 아플 수 있는 공생과 공감의 삶이 우리의 미래를 밝혀주는 등불이지 않을까?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다”라는 구호가 상징하는 전체주의적 자기 동일성만 고집하는 동일성의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라는 관계중심적이고 공생하는 공동체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가 남이가?” 젊었을 때부터 많이 들어왔던 말이다. 이러한 정서가 우리 문화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혈연, 지연, 학연을 중시하는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는 정치권을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모습을 보면 세대를 거치면서 전달되는 문화의 힘이 막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문화는 잘못된 공동체 의식을 낳는 계기가 된다. 허경의 논문에 의하면 우리가 말하는 공동체(共同體)라는 개념은 일본 메이지 시대 때 번역이 아무런 비판없이 사용되고 있는 결과이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인은 함께 共, 같은(하나) 同, 몸 體 세 글자를 결합하여 영어 community를 ‘공동체’로 번역하였다.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의 과제는 하나의 통일된 근대 민족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들이 번역한 공동체에는 차이와 다름을 억압하고, 획일적인 전체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 요소를 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본 메이지 시대의 번역에 담긴 정서는 그에 대한 아무런 반성 없이 사용하는 한 우리의 언어 속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게 됨을 부인할 수 없다.
진정한 공동체란 무엇일까?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회학적으로 통용되는 공동체인 community는 일반적으로 공통의 가치와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통의 가치나 정체성이다. 이것이 폐쇄적으로 될 때 배제와 인정 망각이 발생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 삶의 터전이기도 한 지구 차원에서의 심각한 생태적 위기를 겪고 있다. 지구 온난화, 다양성을 잃어가는 종의 멸종, 환경파괴 등 생태적 위기는 어쩌면 인류의 멸종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 며칠 전 발생한 네팔의 대홍수도 히말라야 산맥의 빙하 붕괴와 산사태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다. 기후 변화에 따른 재앙이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공동체(community)를 생태학적인 용어인 공생(symbiosis)의 관점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굴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와 『공생자 행성』, 러브록의 『가이아』, 카프라의 『생명의 그물』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의 공통적인 점은 “우리는 결코 개체(individual)였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생명은 본질적으로 관계 중심적이고 상호의존적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생명 진화에 대한 현대의 대표적 이론은 마굴리스의 세포내 공생이론과 신다윈주의를 들 수 있다. 마굴리스는 생명 진화의 주요 기제를 세포 간의 융합과 공생임을 강조하지만, 신다윈주의자들은 세포 내부의 유전자 변이에 초점을 맞추어 생물 종 분화를 설명하고 이를 진화의 역사로 대체한다. 본 글에서는 신다윈주의와 마굴리스의 공생이론을 비교 분석하는 것보다 마굴리스의 생각을 간략히 추적해 보기로 한다. 마굴리스는 생명을 ‘물질과 에너지의 창발적 작용’으로 본다. “지구의 생물은 창조된 계층 조직이 아니라 조합과 조정, 재조합이라는 자기 유도적인 시너지로 창발한 홀러키이다.” 이 문장 속에서 마굴리스의 생명에 관한 기본적인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홀러키(holarchy)는 ‘전체이면서 동시에 부분인 존재(holon)’들이 층층이 연결된 구조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전통적 위계(hierarchy)가 존재하지 않고, 각 개별 단위가 독립적이면서도 더 큰 전체의 일부로서 상호 의존하는 ‘중첩된 질서’만 있을 뿐이다. 마굴리스는 생명과 생명은 상호의존적이고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시스템적인 관점을 중시한다.
마굴리스는 칠레의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생명의 극히 기본적인 본질을 물질대사에서 찾았다. 그들은 이것을 ‘자기 생산(autopoiesis)’이라고 부른다. 자기(auto)와 만들기(poiein)를 의미하는 그리스 어근에서 나온 이 말은 생명이 끊임없이 자기를 만들어냄을 표현하고 있다. 자기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생명은 자신을 유지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살아 있을 수 없다.” 자기 생산은 진화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동일한 상태로 머물기 위해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자기 생산의 핵심이다. 이는 세포뿐만 아니라 생물권에도 적용된다. 종에 적용되면 진화가 일어난다.” 마굴리스는 생명은 고정되어 있는 명사가 아니라 항상 변화하는 동사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마굴리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인간은 특별하지도 않고 독립적이지도 않으며, 그저 지구를 에워싸고 있는 연속체인 생명의 일부일 뿐이다.” 마굴리스는 『공생자 행성』에서 자신이 평생 연구해 온 문제가 연속 세포 내 공생이론(SET, serial endosybiosis theory)과 가이아(Gaia)라고 밝히면서 그 둘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 말한다.
다음으로 러브록의 『가이아』에 나오는 몇몇 문장을 인용하면서 러브록의 생각을 추적해 본다. “지구는 다른 행성들과는 달리 생물들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항상 스스로 환경을 조절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구가 갖은 이런 속성이 지표면에서 생활하는 생물체들의 덕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지구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지구는 생물체 전제의 상호 작용에 의해 우리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 그는 지구를 표현하는 이름으로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차용했다. “가이아는 대기, 해양, 지표면의 암석 등과 밀접하게 결합된 모든 생물체들로 구성되는 초 생명체이다.” 지구는 스스로 자기 조절을 하는 하나의 살아있는 초 생명체란 말이다. “가이아는 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적당한 물리, 화학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나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총합체라고 할 수 있다. 능동적 조절에 의한 비교적 균일한 상태의 유지라는 것은 항상성(homeostasis)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이란 입력과 출력, 그리고 그것의 뒤먹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굴리스가 말하는 ‘자기 생산(outopoiesis)’과도 접목된다. 러브록은 책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가이아의 존재 안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는 아무런 규범도 법률도 필요치 않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그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인류가 절멸되어도 지구는 돌아갈 것이라는 암시를 담은 섬뜩한 경고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카프라의 『생명의 그물』을 따라가 보자. 이 책의 목적은 데카르트와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전일론적, 심층 생태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일론적이란 말은 모두가 내면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관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생태학을 표층 생태학과 심층 생태학으로 구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표층 생태학은 인간 중심적 또는 인간을 그 중심에 놓는 관점의 생태학이다. 이는 인간을 자연의 바깥쪽 또는 그보다 우위에 놓인 존재로 간주하며, 모든 가치의 근원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연을 도구적 가치 또는 사용 가치로 다룬다. 반면 심층 생태학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하지 않는다. 이 견해는 세계를 분리된 사물들의 집적으로 보지 않고, 근본적으로 상호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적인 현상들의 연결망으로 본다.” 즉 인간을 생명이라는 그물 속에 포함되어 있는 씨줄이나 날줄에 불과한 무엇으로 본다는 것이다. “설탕의 단맛은 설탕을 구성하는 탄소, 수소, 산소 원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1920년대 초 철학자 브로드는 특정한 복잡성의 수준에서 창발 되지만, 그보다 낮은 수준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특성들에 ‘창발적(emergent) 특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말하는 창발은 앞에서 마굴리스가 말한 ‘자기 유도적인 시너지로 창발한 홀러키’에서의 창발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생명과 관련된 마굴리스와 러브록, 카프라의 생각을 잠시 살펴보았지만,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자연 속에는 어떠한 위계적 질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서로 관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인간과 자연은 서로 공생적으로 존재한다.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우리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로서 공생적 삶이다. 지구적 생태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서의 지구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필요하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고, 네가 아프기에 내가 아플 수 있는 공생과 공감의 삶이 우리의 미래를 밝혀주는 등불이지 않을까?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다”라는 구호가 상징하는 전체주의적 자기 동일성만 고집하는 동일성의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라는 관계중심적이고 공생하는 공동체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