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를 포함해 많은 근대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사실은 당위가 될 수 없다고 믿어 왔다. 흄 이후 약 280년 동안 철학은 이 문제를 윤리학의 난제로 다루었다. “무엇이 있다”는 사실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근대 윤리학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들이 말한 사실은 정말 사실 전체였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들이 붙잡고 있던 것은 사실의 전체가 아니라 사실의 일부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정지된 사실, 잘라낸 사실, 명제 속에 갇힌 사실을 사실 전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좁은 사실 개념에서 당위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연한 일이다. 죽은 사실에서 살아 있는 당위가 나올 수는 없다.
“물이 끓는다.”
“사람은 죽는다.”
“이 문장은 참이다.”
이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사실은 아니다.
물이 끓는다는 사실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물이 끓는 모습까지를 포함한다. 사람이 죽든다도 마찬가지다. 죽어가는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한 순간의 어떤 시점만이 아니다. 호흡, 체온, 대사, 물, 산소, 회복 능력, 관계, 환경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유지되고 있다가 그것들이 기능을 잃어가는 과정을 겪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유지되어야 할 것들이 계속유지된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호흡, 체온, 대사, 물, 산소, 회복 능력, 관계, 환경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다.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뜻이 아니다. 신뢰, 협동, 규범, 책임, 기억, 제도, 다양성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유지될 때 사실이다. 유지되지 않으면 그 사실은 사라진다. 생명이 유지되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사라지고, 신뢰가 유지되지 않으면 공동체라는 사실이 사라지며, 생태계가 유지되지 않으면 문명이라는 사실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런데 근대 철학은 이 점을 충분히 보지 못했다. 사실을 명제, 사태, 대상, 속성, 참과 거짓의 문제로 잘라 내고, 마치 좌표 위의 한 점처럼 고정했다. 그 점에는 시간도 없고, 관계도 없고, 유지 조건도 없다. 그런데도 근대 철학은 그 잘라 낸 사실을 사실 전체라고 여겼다.
여기서 오류가 발생한다. 사실을 분석하기 위해 잠시 고정하는 것과, 사실이 본래 고정되어 있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방법이고, 후자는 착각이다. 근대 철학은 방법을 존재로 착각했다. 사실을 다루기 쉽게 만들기 위해 시간과 관계와 유지 조건을 제거해 놓고, 그렇게 남은 조각을 사실의 본래 모습이라고 여겼다.
이것은 섣부른 일반화다. 일부 사실은 정적인 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실이 정적인 명제 구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사실은 유지 조건을 포함한다. 그 조건을 제거한 사실은 사실의 껍데기일 뿐이다.
문제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흄 이후 약 280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가 사실과 당위의 간격을 해명하려 했다. 그들은 이 문제를 대충 지나치지 않았다. 칸트는 당위를 순수실천이성에 정초했고, 무어는 좋음을 자연적 속성으로 환원하는 것을 비판했다. 이후의 철학자들도 감정, 언어, 덕, 자연적 기능, 행동의 결과, 사실과 가치의 연관성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실과 당위를 연결하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일부 철학자는 생명과 기능에 가치 판단이 개입한다는 점을 검토했고, 일부는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 자체를 비판했다. 그러나 사실을 존재의 유지·갱신 과정으로 다시 정의하고, 그 유지 조건을 당위와 책임과 지속가능성의 공통 근거로 연결하는 체계는 세워지지 않았다. 문제는 철학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는 데 있지 않다. 여러 방향에서 출구를 찾으면서도, 사실을 정적인 명제나 사태로 보는 기초 자체를 충분히 흔들지 못했다는 데 있다.
모르는 것은 배움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더 위험한 것은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완전한 앎으로 굳히는 일이다. 어떤 관점이 오랫동안 반복되고 권위 있는 언어가 되면, 그것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로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 이때 무지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지식 체계의 폐쇄로 나타난다. 사실을 정적인 명제나 사태로 다루는 방식은 분석에는 유용했다. 그러나 그 유용성을 사실 전체에 대한 이해로 일반화하는 순간, 존재의 시간과 관계와 유지·갱신 조건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런 현상은 학문적 자기 확신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학문적 잘난 척이다. 이미 정교한 개념과 거대한 이론 체계를 만들었다는 자신감이 그 체계의 기초를 다시 묻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잘난 척은 더 큰 무지를 부른다. 개인도 그렇고 문명도 그렇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옳다고 믿고, 자신이 사용하던 개념을 보편이라고 착각하며, 자신이 만든 분류를 세계의 구조라고 믿는 순간 무지는 학문이 된다. 그 무지가 권위와 결합하면 더 위험하다. 좁은 이해가 보편적 철학으로 굳어지고, 그 철학은 다시 법과 제도와 경제와 기술을 거쳐 문명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철학은 논문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실을 유지 조건이 제거된 정적인 사태로 이해하면 인간도 고립된 개인으로, 자연도 이용 가능한 자원으로, 사회도 계산 가능한 관계로 축소되기 쉽다. 그리고 그 이해가 법과 제도가 되면 누군가는 실제로 피해를 입고, 생태계는 파괴되며, 문명의 존속 조건마저 약화될 수 있다. 부분적 앎을 완전한 진리로 믿는 무지는 단순한 지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와 생명의 미래를 위협하는 문명적 위험이다.
인류가 발전이라고 불러 온 과정의 많은 죄악은 모르는 무지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더 위험한 것은 일부를 알면서도 전부 안다고 믿는 무지였다. 갈릴레오에게 귀속되어 온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이를 상징한다. 권위가 현실을 부정하고 모두가 그 권위에 동조하더라도, 지구의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 안다고 믿는 사람들의 확신이 사실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근대 문명은 자연을 충분히 안다고 믿으며 자연을 이용 가능한 자원으로 환원했다. 사회를 안다고 믿으며 사람을 노동력과 소비자로 환원했다. 이성을 안다고 믿으며 감정과 몸과 관계와 환경을 낮게 보았다. 사실을 안다고 믿으며 사실이 성립하고 유지되기 위한 조건을 시야에서 지웠다. 문제는 지식이 부족했다는 데만 있지 않다. 부분적인 지식을 완전한 앎으로 착각한 데 있다.
이러한 무지는 개인의 착각으로 끝나지 않는다. 권위 있는 학문과 결합하면 철학이 되고, 철학이 법과 제도와 경제와 기술에 들어가면 문명의 방향이 된다. 그 결과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면서도 발전한다고 믿고, 사람을 소진하면서도 생산성이 높아졌다고 믿으며, 존재의 유지 조건을 무너뜨리면서도 사실에 충실하다고 믿게 된다. 안다고 믿는 무지는 모르는 무지보다 위험하다. 모르는 사람은 배울 수 있지만, 이미 다 안다고 믿는 문명은 파멸의 징후조차 자기 이론에 맞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지속가능성의 상실이었다. 인간은 자연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연을 이용 가능한 자원으로만 보았고, 사회를 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람을 노동력과 소비자로만 보았다. 이성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에 감정과 몸, 관계와 환경을 낮게 평가했다. 사실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실이 성립하고 유지되기 위한 조건을 보지 못했다. 부분적인 이해를 완전한 앎으로 믿은 결과, 인간은 존재의 유지 조건을 훼손하면서도 그것을 발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근대철학은 오랫동안 하나의 중요한 고리를 놓쳤다.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지되고 갱신되는 과정이다. 인식은 머릿속에 정보를 담는 데 머무는 일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상태와 환경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행동의 방향을 바꾸는 과정이다. 윤리는 아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앎이 행동으로 전환되고, 그 행동이 다시 자기와 타자와 세계의 유지·갱신에 기여할 때 비로소 윤리가 실천된다.
한편, 안다고 윤리가 실천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아도 사람은 그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이익이 걸리면 외면하고, 분노하면 무너지고, 조직 분위기가 다르면 침묵한다. 그래서 인식론은 단순한 지식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인식론은 행동 전환론이 되어야 한다. 알게 된 것이 몸, 습관, 관계, 제도, 책임으로 전환될 때 윤리는 비로소 현실이 된다.
여기서 존재론도 바뀌어야 한다. 존재론은 “무엇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데서 멈출 수 없다. 존재론은 “무엇이 어떻게 유지되고 갱신되는가”를 물어야 한다. 존재는 구성 요소의 집합이 아니라, 그 구성 요소들이 일정한 관계와 질서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유지되고 갱신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존재 유지·갱신론이 되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사실-당위 문제는 다르게 보인다. 정적 사실에서는 당위가 나오지 않는다. 이 점에서 흄은 옳았다. 그러나 문제는 흄이 너무 깊이 보았다는 데 있지 않다. 흄 이후의 철학이 흄이 전제한 좁은 사실 개념을 충분히 의심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사실을 유지 조건 없는 정적 사태로 이해했기 때문에 당위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존재 사실은 유지 조건을 포함한다. 생명이 생명으로 유지되려면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사회가 사회로 유지되려면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문명이 문명으로 유지되려면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이 조건이 훼손되면 존재는 무너진다. 그렇다면 당위는 사실 바깥에서 억지로 붙는 명령이 아니다. 당위는 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에서 나온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속가능성은 단순한 환경 구호가 아니다. 지속가능성은 최상위 존재론이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속가능성은 동적 존재론, 곧 존재 유지·갱신론의 핵심이다. 어떤 존재가 계속 존재하려면 무엇이 유지되어야 하는가. 무엇이 갱신되어야 하는가. 무엇을 훼손하면 존재가 무너지는가. 이 질문이 모든 윤리와 정치와 경제와 기술의 앞에 와야 한다.
기후위기도 이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기후위기는 단순히 탄소 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문명이 자기 유지 조건을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태계 파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자연을 보호하자는 감상적 요구가 아니다. 인간 사회가 자기 존재 기반을 파괴하고 있다는 존재론적 경고다. 불평등, 전쟁, 노동 소외, AI 시대의 판단 소외와 기억 소외도 모두 같은 구조를 가진다. 존재를 유지하고 갱신하게 하는 조건이 약화되는 것이다.
이제 철학은 달라져야 한다. 사실을 정지된 사태로 보는 철학, 앎을 머릿속 표상으로 보는 철학, 윤리를 말과 규칙으로만 보는 철학으로는 지속가능한 문명을 만들 수 없다. 존재는 유지되고 갱신되는 과정이며, 인식은 그 과정의 방향을 파악하는 일이고, 윤리는 그 인식이 행동으로 전환되어 존재의 유지와 갱신에 기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철학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사실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이 존재는 어떤 조건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남는가.
이 앎은 어떤 행동 전환으로 이어지는가.
그 행동은 존재의 유지와 갱신을 돕는가, 아니면 훼손하는가.

이 질문을 던질 때 사실과 당위는 더 이상 끊어진 두 세계가 아니다. 사실은 유지 조건을 포함하고, 당위는 그 유지 조건을 보존하고 갱신해야 한다는 요구로 드러난다.
근현대철학이 가졌던 인간에 대한 자기확신은 생물학, 진화론, 심리학과 신경과학이 발달하면서 더 이상 그대로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투명한 이성적 주체도 아니고, 환경과 관계에서 독립된 채 자유롭게 선택하는 존재도 아니다. 인간의 판단과 행동은 유전자와 몸, 감정과 기억, 성장 과정과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새로운 지식이 부족했던 시대의 인간관은 당시의 한계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충분히 드러난 뒤에도 과거의 인간관을 보편적 진리처럼 고수한다면, 과거의 자기확신은 현재의 무지로 전환된다. 그것은 단순히 모르는 무지가 아니다. 이미 안다고 믿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적 무지다. 이러한 무지는 철학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간을 환경과 관계에서 독립된 선택자로 규정하고, 그 전제 위에 윤리와 책임과 법을 세우면 구조가 만든 문제까지 개인의 선택과 잘못으로 돌리게 된다.
인류는 너무 오래 자신이 안다고 믿는 무지 속에 갇혀 있었다. 이제는 그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실은 시간과 관계가 제거된 정지된 조각이 아니다. 존재는 일정한 조건 속에서 유지되고 갱신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철학은 인간과 사회와 생태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만 물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어떻게 유지되고,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갱신되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지속가능성은 선택 가능한 정책 목표나 환경 분야의 하위 가치가 아니다. 자유와 권리, 정의와 평등, 경제와 기술도 인간과 사회와 생태계가 유지될 때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속가능성은 모든 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유지되고 갱신되기 위한 최상위 존재론적 원리다.

칸트를 포함해 많은 근대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사실은 당위가 될 수 없다고 믿어 왔다. 흄 이후 약 280년 동안 철학은 이 문제를 윤리학의 난제로 다루었다. “무엇이 있다”는 사실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근대 윤리학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들이 말한 사실은 정말 사실 전체였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들이 붙잡고 있던 것은 사실의 전체가 아니라 사실의 일부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정지된 사실, 잘라낸 사실, 명제 속에 갇힌 사실을 사실 전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좁은 사실 개념에서 당위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연한 일이다. 죽은 사실에서 살아 있는 당위가 나올 수는 없다.
“물이 끓는다.”
“사람은 죽는다.”
“이 문장은 참이다.”
이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사실은 아니다.
물이 끓는다는 사실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물이 끓는 모습까지를 포함한다. 사람이 죽든다도 마찬가지다. 죽어가는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한 순간의 어떤 시점만이 아니다. 호흡, 체온, 대사, 물, 산소, 회복 능력, 관계, 환경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유지되고 있다가 그것들이 기능을 잃어가는 과정을 겪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유지되어야 할 것들이 계속유지된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호흡, 체온, 대사, 물, 산소, 회복 능력, 관계, 환경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다.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뜻이 아니다. 신뢰, 협동, 규범, 책임, 기억, 제도, 다양성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유지될 때 사실이다. 유지되지 않으면 그 사실은 사라진다. 생명이 유지되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사라지고, 신뢰가 유지되지 않으면 공동체라는 사실이 사라지며, 생태계가 유지되지 않으면 문명이라는 사실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런데 근대 철학은 이 점을 충분히 보지 못했다. 사실을 명제, 사태, 대상, 속성, 참과 거짓의 문제로 잘라 내고, 마치 좌표 위의 한 점처럼 고정했다. 그 점에는 시간도 없고, 관계도 없고, 유지 조건도 없다. 그런데도 근대 철학은 그 잘라 낸 사실을 사실 전체라고 여겼다.
여기서 오류가 발생한다. 사실을 분석하기 위해 잠시 고정하는 것과, 사실이 본래 고정되어 있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방법이고, 후자는 착각이다. 근대 철학은 방법을 존재로 착각했다. 사실을 다루기 쉽게 만들기 위해 시간과 관계와 유지 조건을 제거해 놓고, 그렇게 남은 조각을 사실의 본래 모습이라고 여겼다.
이것은 섣부른 일반화다. 일부 사실은 정적인 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실이 정적인 명제 구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사실은 유지 조건을 포함한다. 그 조건을 제거한 사실은 사실의 껍데기일 뿐이다.
문제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흄 이후 약 280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가 사실과 당위의 간격을 해명하려 했다. 그들은 이 문제를 대충 지나치지 않았다. 칸트는 당위를 순수실천이성에 정초했고, 무어는 좋음을 자연적 속성으로 환원하는 것을 비판했다. 이후의 철학자들도 감정, 언어, 덕, 자연적 기능, 행동의 결과, 사실과 가치의 연관성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실과 당위를 연결하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일부 철학자는 생명과 기능에 가치 판단이 개입한다는 점을 검토했고, 일부는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 자체를 비판했다. 그러나 사실을 존재의 유지·갱신 과정으로 다시 정의하고, 그 유지 조건을 당위와 책임과 지속가능성의 공통 근거로 연결하는 체계는 세워지지 않았다. 문제는 철학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는 데 있지 않다. 여러 방향에서 출구를 찾으면서도, 사실을 정적인 명제나 사태로 보는 기초 자체를 충분히 흔들지 못했다는 데 있다.
모르는 것은 배움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더 위험한 것은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완전한 앎으로 굳히는 일이다. 어떤 관점이 오랫동안 반복되고 권위 있는 언어가 되면, 그것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로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 이때 무지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지식 체계의 폐쇄로 나타난다. 사실을 정적인 명제나 사태로 다루는 방식은 분석에는 유용했다. 그러나 그 유용성을 사실 전체에 대한 이해로 일반화하는 순간, 존재의 시간과 관계와 유지·갱신 조건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런 현상은 학문적 자기 확신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학문적 잘난 척이다. 이미 정교한 개념과 거대한 이론 체계를 만들었다는 자신감이 그 체계의 기초를 다시 묻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잘난 척은 더 큰 무지를 부른다. 개인도 그렇고 문명도 그렇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옳다고 믿고, 자신이 사용하던 개념을 보편이라고 착각하며, 자신이 만든 분류를 세계의 구조라고 믿는 순간 무지는 학문이 된다. 그 무지가 권위와 결합하면 더 위험하다. 좁은 이해가 보편적 철학으로 굳어지고, 그 철학은 다시 법과 제도와 경제와 기술을 거쳐 문명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철학은 논문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실을 유지 조건이 제거된 정적인 사태로 이해하면 인간도 고립된 개인으로, 자연도 이용 가능한 자원으로, 사회도 계산 가능한 관계로 축소되기 쉽다. 그리고 그 이해가 법과 제도가 되면 누군가는 실제로 피해를 입고, 생태계는 파괴되며, 문명의 존속 조건마저 약화될 수 있다. 부분적 앎을 완전한 진리로 믿는 무지는 단순한 지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와 생명의 미래를 위협하는 문명적 위험이다.
인류가 발전이라고 불러 온 과정의 많은 죄악은 모르는 무지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더 위험한 것은 일부를 알면서도 전부 안다고 믿는 무지였다. 갈릴레오에게 귀속되어 온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이를 상징한다. 권위가 현실을 부정하고 모두가 그 권위에 동조하더라도, 지구의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 안다고 믿는 사람들의 확신이 사실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근대 문명은 자연을 충분히 안다고 믿으며 자연을 이용 가능한 자원으로 환원했다. 사회를 안다고 믿으며 사람을 노동력과 소비자로 환원했다. 이성을 안다고 믿으며 감정과 몸과 관계와 환경을 낮게 보았다. 사실을 안다고 믿으며 사실이 성립하고 유지되기 위한 조건을 시야에서 지웠다. 문제는 지식이 부족했다는 데만 있지 않다. 부분적인 지식을 완전한 앎으로 착각한 데 있다.
이러한 무지는 개인의 착각으로 끝나지 않는다. 권위 있는 학문과 결합하면 철학이 되고, 철학이 법과 제도와 경제와 기술에 들어가면 문명의 방향이 된다. 그 결과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면서도 발전한다고 믿고, 사람을 소진하면서도 생산성이 높아졌다고 믿으며, 존재의 유지 조건을 무너뜨리면서도 사실에 충실하다고 믿게 된다. 안다고 믿는 무지는 모르는 무지보다 위험하다. 모르는 사람은 배울 수 있지만, 이미 다 안다고 믿는 문명은 파멸의 징후조차 자기 이론에 맞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지속가능성의 상실이었다. 인간은 자연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연을 이용 가능한 자원으로만 보았고, 사회를 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람을 노동력과 소비자로만 보았다. 이성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에 감정과 몸, 관계와 환경을 낮게 평가했다. 사실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실이 성립하고 유지되기 위한 조건을 보지 못했다. 부분적인 이해를 완전한 앎으로 믿은 결과, 인간은 존재의 유지 조건을 훼손하면서도 그것을 발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근대철학은 오랫동안 하나의 중요한 고리를 놓쳤다.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지되고 갱신되는 과정이다. 인식은 머릿속에 정보를 담는 데 머무는 일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상태와 환경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행동의 방향을 바꾸는 과정이다. 윤리는 아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앎이 행동으로 전환되고, 그 행동이 다시 자기와 타자와 세계의 유지·갱신에 기여할 때 비로소 윤리가 실천된다.
한편, 안다고 윤리가 실천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아도 사람은 그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이익이 걸리면 외면하고, 분노하면 무너지고, 조직 분위기가 다르면 침묵한다. 그래서 인식론은 단순한 지식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인식론은 행동 전환론이 되어야 한다. 알게 된 것이 몸, 습관, 관계, 제도, 책임으로 전환될 때 윤리는 비로소 현실이 된다.
여기서 존재론도 바뀌어야 한다. 존재론은 “무엇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데서 멈출 수 없다. 존재론은 “무엇이 어떻게 유지되고 갱신되는가”를 물어야 한다. 존재는 구성 요소의 집합이 아니라, 그 구성 요소들이 일정한 관계와 질서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유지되고 갱신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존재 유지·갱신론이 되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사실-당위 문제는 다르게 보인다. 정적 사실에서는 당위가 나오지 않는다. 이 점에서 흄은 옳았다. 그러나 문제는 흄이 너무 깊이 보았다는 데 있지 않다. 흄 이후의 철학이 흄이 전제한 좁은 사실 개념을 충분히 의심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사실을 유지 조건 없는 정적 사태로 이해했기 때문에 당위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존재 사실은 유지 조건을 포함한다. 생명이 생명으로 유지되려면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사회가 사회로 유지되려면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문명이 문명으로 유지되려면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이 조건이 훼손되면 존재는 무너진다. 그렇다면 당위는 사실 바깥에서 억지로 붙는 명령이 아니다. 당위는 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에서 나온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속가능성은 단순한 환경 구호가 아니다. 지속가능성은 최상위 존재론이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속가능성은 동적 존재론, 곧 존재 유지·갱신론의 핵심이다. 어떤 존재가 계속 존재하려면 무엇이 유지되어야 하는가. 무엇이 갱신되어야 하는가. 무엇을 훼손하면 존재가 무너지는가. 이 질문이 모든 윤리와 정치와 경제와 기술의 앞에 와야 한다.
기후위기도 이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기후위기는 단순히 탄소 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문명이 자기 유지 조건을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태계 파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자연을 보호하자는 감상적 요구가 아니다. 인간 사회가 자기 존재 기반을 파괴하고 있다는 존재론적 경고다. 불평등, 전쟁, 노동 소외, AI 시대의 판단 소외와 기억 소외도 모두 같은 구조를 가진다. 존재를 유지하고 갱신하게 하는 조건이 약화되는 것이다.
이제 철학은 달라져야 한다. 사실을 정지된 사태로 보는 철학, 앎을 머릿속 표상으로 보는 철학, 윤리를 말과 규칙으로만 보는 철학으로는 지속가능한 문명을 만들 수 없다. 존재는 유지되고 갱신되는 과정이며, 인식은 그 과정의 방향을 파악하는 일이고, 윤리는 그 인식이 행동으로 전환되어 존재의 유지와 갱신에 기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철학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사실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이 존재는 어떤 조건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남는가.
이 앎은 어떤 행동 전환으로 이어지는가.
그 행동은 존재의 유지와 갱신을 돕는가, 아니면 훼손하는가.
이 질문을 던질 때 사실과 당위는 더 이상 끊어진 두 세계가 아니다. 사실은 유지 조건을 포함하고, 당위는 그 유지 조건을 보존하고 갱신해야 한다는 요구로 드러난다.
근현대철학이 가졌던 인간에 대한 자기확신은 생물학, 진화론, 심리학과 신경과학이 발달하면서 더 이상 그대로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투명한 이성적 주체도 아니고, 환경과 관계에서 독립된 채 자유롭게 선택하는 존재도 아니다. 인간의 판단과 행동은 유전자와 몸, 감정과 기억, 성장 과정과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새로운 지식이 부족했던 시대의 인간관은 당시의 한계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충분히 드러난 뒤에도 과거의 인간관을 보편적 진리처럼 고수한다면, 과거의 자기확신은 현재의 무지로 전환된다. 그것은 단순히 모르는 무지가 아니다. 이미 안다고 믿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적 무지다. 이러한 무지는 철학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간을 환경과 관계에서 독립된 선택자로 규정하고, 그 전제 위에 윤리와 책임과 법을 세우면 구조가 만든 문제까지 개인의 선택과 잘못으로 돌리게 된다.
인류는 너무 오래 자신이 안다고 믿는 무지 속에 갇혀 있었다. 이제는 그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실은 시간과 관계가 제거된 정지된 조각이 아니다. 존재는 일정한 조건 속에서 유지되고 갱신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철학은 인간과 사회와 생태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만 물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어떻게 유지되고,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갱신되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지속가능성은 선택 가능한 정책 목표나 환경 분야의 하위 가치가 아니다. 자유와 권리, 정의와 평등, 경제와 기술도 인간과 사회와 생태계가 유지될 때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속가능성은 모든 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유지되고 갱신되기 위한 최상위 존재론적 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