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말레이 반도에 19세기 후반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경제적으로 지역의 주석을 획득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주석을 이용한 함석 제조 기술이 발전하고 수요가 증대함으로써 말레이 반도의 주석 광산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던 것이다. 주석 광산의 운영에는 세 집단이 관련되어 있었다. 첫째는 주석 광산을 보유한 술탄이었고, 둘째는 그것을 운영하는 영국의 자본가들이었으며, 셋째는 바로 주석 광산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었다.

17세기 프랑스의 전설적인 지리학자이자 현대 프랑스 지도학의 개척자인 니콜라 상송(Nicolas Sanson, 1600~1667)이 1652년에 제작한 "순다 열도 지도(Les Isles de la Sonde)", 출처 : David Rumsey Map Collection
이렇게 말레이 반도로 건너온 중국인들이 뛰어난 교육열과 부지런함으로 영국령 말레이시아의 중간 공무원들이 되기도 하고 말레이시아의 경제권을 장악하기도 하면서 소외된 말레이계 사람들과 점점 반목하게 된다. 주석 광산이 운영되던 초창기에는 중국인 이주 노동자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말레이인 현지인 여성과 결혼하면서 페라나칸 가정을 이루고 말레이인에 편입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 때문에 말레이인은 인도네시아인에 비해 외양이 동아시아인에 더 가까운 편이다.
이후 반목이 심해지면서, 중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고향에서 가족들을 데려오고 말레이인들과 더 거리를 두게 되었다. 당시 영국인들은 말레이 계열은 착하고 성실하지만 단순하고 게으르고, 중국인들은 능력있지만 영악하다고 평가했다. 화교의 급증으로 인해 원주민인 말레이인들은 농어촌으로 밀려났고, 이에 따라 민족 갈등이 점차적으로 진행했다. 사실 이러한 편향적인 말레이계-중국계 고정관념은 동남아시아에선 아직도 통한다.
심지어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통한다. 영국인 지주들은 말레이계 사람들을 하인으로 삼아 집안일을 시켰고 중국계를 부두나 시장에서 일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아직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구 통계 작성시에 '기타' 항목이 아닌 별도 항목으로 작성될 정도로 숫자가 많다. 한편 19세기 말부터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한 고무 플랜테이션 역시 말라야의 경제에 큰 역할을 했다. 20세기 초가 되면 고무가 말라야의 주 수출품목으로서 주석과 경쟁하게 되었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말레이 반도의 고무 농장 면적이 전 세계 고무 농장 면적의 절반에 달할 정도였다.
주석의 생산을 주로 중국계 광산 노동자들이 담당했다면, 고무 생산은 주로 계약이민으로 넘어온 인도인, 특히 남인도 출신 타밀족 농장 노동자들이 담당하였다. 20세기 초 고무 산업의 급성장에 발맞추어 말라야의 인도계 이민자 인구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고무 농장은 주로 페락, 슬랑오르, 크다, 조호르, 느그리슴빌란 5개 주에 집중되어 있었다. 19세기에 노예 무역이 국제적으로 금지되고 말레이 반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은 뒤에 주석 광산에서 일할 노동력이 필요해진데다가 아편전쟁에서 청나라를 격파한 영국이 말레이 반도 내 주석광산 노동력을 중국인으로 고용했고 당시 중국인들은 미숙련공 쿨리들이었기에 저임금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청나라 조정에서 자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을 얻어내기 전까지 이들의 처지는 노예보다 약간 나은 수준에 불과했다. 노예제로 돌아가던 농장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지도 못하는 영어로 된 사기 계약서에 서명하고 들어온 중국인 이주민들은 현지 농장주들에게 있어 노예나 다름없었다. 당시 북경조약 중에는 해외이주를 제한하던 청나라에 대해 백성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청나라인이 영국 식민지 등의 해외에 나가 일자리를 얻는것은 자유이며, 이를 위해 영국의 선박에 탑승하는 것은 완전히 자유이다'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이는 영국인으로서 중국인을 노예선에 태울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백인들이 자기네 식민지가 일손이 딸리니 중국인들을 농노 비슷하게 끌고 가고자 한 것이 이와 같은 사기 계약이었다.

영국이 말레이 반도에 19세기 후반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경제적으로 지역의 주석을 획득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주석을 이용한 함석 제조 기술이 발전하고 수요가 증대함으로써 말레이 반도의 주석 광산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던 것이다. 주석 광산의 운영에는 세 집단이 관련되어 있었다. 첫째는 주석 광산을 보유한 술탄이었고, 둘째는 그것을 운영하는 영국의 자본가들이었으며, 셋째는 바로 주석 광산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었다.
17세기 프랑스의 전설적인 지리학자이자 현대 프랑스 지도학의 개척자인 니콜라 상송(Nicolas Sanson, 1600~1667)이 1652년에 제작한 "순다 열도 지도(Les Isles de la Sonde)", 출처 : David Rumsey Map Collection
이렇게 말레이 반도로 건너온 중국인들이 뛰어난 교육열과 부지런함으로 영국령 말레이시아의 중간 공무원들이 되기도 하고 말레이시아의 경제권을 장악하기도 하면서 소외된 말레이계 사람들과 점점 반목하게 된다. 주석 광산이 운영되던 초창기에는 중국인 이주 노동자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말레이인 현지인 여성과 결혼하면서 페라나칸 가정을 이루고 말레이인에 편입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 때문에 말레이인은 인도네시아인에 비해 외양이 동아시아인에 더 가까운 편이다.
이후 반목이 심해지면서, 중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고향에서 가족들을 데려오고 말레이인들과 더 거리를 두게 되었다. 당시 영국인들은 말레이 계열은 착하고 성실하지만 단순하고 게으르고, 중국인들은 능력있지만 영악하다고 평가했다. 화교의 급증으로 인해 원주민인 말레이인들은 농어촌으로 밀려났고, 이에 따라 민족 갈등이 점차적으로 진행했다. 사실 이러한 편향적인 말레이계-중국계 고정관념은 동남아시아에선 아직도 통한다.
심지어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통한다. 영국인 지주들은 말레이계 사람들을 하인으로 삼아 집안일을 시켰고 중국계를 부두나 시장에서 일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아직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구 통계 작성시에 '기타' 항목이 아닌 별도 항목으로 작성될 정도로 숫자가 많다. 한편 19세기 말부터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한 고무 플랜테이션 역시 말라야의 경제에 큰 역할을 했다. 20세기 초가 되면 고무가 말라야의 주 수출품목으로서 주석과 경쟁하게 되었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말레이 반도의 고무 농장 면적이 전 세계 고무 농장 면적의 절반에 달할 정도였다.
주석의 생산을 주로 중국계 광산 노동자들이 담당했다면, 고무 생산은 주로 계약이민으로 넘어온 인도인, 특히 남인도 출신 타밀족 농장 노동자들이 담당하였다. 20세기 초 고무 산업의 급성장에 발맞추어 말라야의 인도계 이민자 인구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고무 농장은 주로 페락, 슬랑오르, 크다, 조호르, 느그리슴빌란 5개 주에 집중되어 있었다. 19세기에 노예 무역이 국제적으로 금지되고 말레이 반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은 뒤에 주석 광산에서 일할 노동력이 필요해진데다가 아편전쟁에서 청나라를 격파한 영국이 말레이 반도 내 주석광산 노동력을 중국인으로 고용했고 당시 중국인들은 미숙련공 쿨리들이었기에 저임금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청나라 조정에서 자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을 얻어내기 전까지 이들의 처지는 노예보다 약간 나은 수준에 불과했다. 노예제로 돌아가던 농장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지도 못하는 영어로 된 사기 계약서에 서명하고 들어온 중국인 이주민들은 현지 농장주들에게 있어 노예나 다름없었다. 당시 북경조약 중에는 해외이주를 제한하던 청나라에 대해 백성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청나라인이 영국 식민지 등의 해외에 나가 일자리를 얻는것은 자유이며, 이를 위해 영국의 선박에 탑승하는 것은 완전히 자유이다'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이는 영국인으로서 중국인을 노예선에 태울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백인들이 자기네 식민지가 일손이 딸리니 중국인들을 농노 비슷하게 끌고 가고자 한 것이 이와 같은 사기 계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