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리안 해방기념비는 1962년 서이리안이 이전에 네덜란드에 의해 영유권을 주장했던 인도네시아 공화국 영토에 반환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서이리안은 서뉴기니(West New Guinea)를 뜻하는 말이다. 당시 서부 뉴기니는 1828년부터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인도네시아는 1945년에 독립했지만 네덜란드는 서부 뉴기니를 포기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중심부에 위치한 반텡 광장(Lapangan Banteng)의 서이리안 해방 기념탑(Monumen Pembebasan Irian Barat),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그러나 네덜란드는 1949년에야 서뉴기니의 주권을 인정했다. 반텡 광장 공원 중앙에 위치한 기념비는 35m의 높이로 우뚝 솟아 있다. 기념물 상단의 동상은 에디 수나르소(Edhi Sunarso)와 욕야카르타 아르차 페밀리 스튜디오(Yogyakarta Arca Family Studio) 팀이 건축을 수행했으며 기념물의 건축의 설계는 프리드리히 시라반(Friedrich Silaban)이 하였다. 기념비의 형성에 대한 아이디어는 수카르노(Soekarno) 대통령에서 나왔고 헹크 눈퉁(Henk Nuntung)은 이를 스케치 하였으며 그 당시 욕야카르타에서의 수카르노(Soekarno)의 연설에서 따왔다.
동상의 모습은 약간 뒤로 기대어 서서 다리를 쭉 뻗고 팔을 뻗어 사슬을 끊고 서 있는 셔츠를 벗은 남자다. 자유라는 단어를 외치려는 듯 그의 입이 벌어져 있다. 이 기념물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족쇄에서 벗어난 서부 이리안 사람들의 상징이다. 뉴기니 섬은 19세기까지 부족 사회였다. 서부의 항구에서는 몰루카 제도, 술라웨시 섬 등지의 상인들이 방문하여 교역을 했고, 명목상으로는 몰루카 티도레 섬의 티도레 술탄국이 서부 뉴기니를 지배했다. 그러나 티도레의 실질적 통치는 서부 지역 항구의 일부와 소규모 부속 도서에 그쳤다.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뉴기니 섬은 1885년 네덜란드, 영국, 독일이 셋으로 분할하였고 뉴기니 섬 서쪽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부가 되었다. 그 이후, 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후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인도네시아로 독립하였지만 서부 뉴기니는 1962년까지 네덜란드령 뉴기니로 남아있었다. 네덜란드는 서부 뉴기니를 인도네시아와는 별개로 독립시키려 하였으나 인도네시아의 요구로 인해 1969년까지 원로에 의한 간접 주민 투표로 인해 인도네시아로 통합될지를 결정하는 조건으로 통치권을 인도네시아로 넘기게 된다.
그러나 1969년에 인도네시아가 정부의 뜻대로 결정하여 대표를 뽑고 이에 반대하는 대표는 무력으로 제압하였기에, 인도네시아로 합병되기는 했지만 동시에 독립 운동이 발발한다. 국제법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영토가 아니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구르나 체첸, 아체 주(州)보다 명분이 강한 상태에 있다. 그라나 아직 많은 나라들이 서부 뉴기니의 독립파를 돕지 않고 있다. 강대국들이 굳이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이유도 있고, 자원에 대한 탐욕 때문인 이유도 있다.

서이리안 해방기념비는 1962년 서이리안이 이전에 네덜란드에 의해 영유권을 주장했던 인도네시아 공화국 영토에 반환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서이리안은 서뉴기니(West New Guinea)를 뜻하는 말이다. 당시 서부 뉴기니는 1828년부터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인도네시아는 1945년에 독립했지만 네덜란드는 서부 뉴기니를 포기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중심부에 위치한 반텡 광장(Lapangan Banteng)의 서이리안 해방 기념탑(Monumen Pembebasan Irian Barat),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그러나 네덜란드는 1949년에야 서뉴기니의 주권을 인정했다. 반텡 광장 공원 중앙에 위치한 기념비는 35m의 높이로 우뚝 솟아 있다. 기념물 상단의 동상은 에디 수나르소(Edhi Sunarso)와 욕야카르타 아르차 페밀리 스튜디오(Yogyakarta Arca Family Studio) 팀이 건축을 수행했으며 기념물의 건축의 설계는 프리드리히 시라반(Friedrich Silaban)이 하였다. 기념비의 형성에 대한 아이디어는 수카르노(Soekarno) 대통령에서 나왔고 헹크 눈퉁(Henk Nuntung)은 이를 스케치 하였으며 그 당시 욕야카르타에서의 수카르노(Soekarno)의 연설에서 따왔다.
동상의 모습은 약간 뒤로 기대어 서서 다리를 쭉 뻗고 팔을 뻗어 사슬을 끊고 서 있는 셔츠를 벗은 남자다. 자유라는 단어를 외치려는 듯 그의 입이 벌어져 있다. 이 기념물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족쇄에서 벗어난 서부 이리안 사람들의 상징이다. 뉴기니 섬은 19세기까지 부족 사회였다. 서부의 항구에서는 몰루카 제도, 술라웨시 섬 등지의 상인들이 방문하여 교역을 했고, 명목상으로는 몰루카 티도레 섬의 티도레 술탄국이 서부 뉴기니를 지배했다. 그러나 티도레의 실질적 통치는 서부 지역 항구의 일부와 소규모 부속 도서에 그쳤다.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뉴기니 섬은 1885년 네덜란드, 영국, 독일이 셋으로 분할하였고 뉴기니 섬 서쪽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부가 되었다. 그 이후, 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후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인도네시아로 독립하였지만 서부 뉴기니는 1962년까지 네덜란드령 뉴기니로 남아있었다. 네덜란드는 서부 뉴기니를 인도네시아와는 별개로 독립시키려 하였으나 인도네시아의 요구로 인해 1969년까지 원로에 의한 간접 주민 투표로 인해 인도네시아로 통합될지를 결정하는 조건으로 통치권을 인도네시아로 넘기게 된다.
그러나 1969년에 인도네시아가 정부의 뜻대로 결정하여 대표를 뽑고 이에 반대하는 대표는 무력으로 제압하였기에, 인도네시아로 합병되기는 했지만 동시에 독립 운동이 발발한다. 국제법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영토가 아니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구르나 체첸, 아체 주(州)보다 명분이 강한 상태에 있다. 그라나 아직 많은 나라들이 서부 뉴기니의 독립파를 돕지 않고 있다. 강대국들이 굳이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이유도 있고, 자원에 대한 탐욕 때문인 이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