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스탄은 유라시아 동서를 잇는 교통로, 실크로드에 위치해 있다. 수많은 군대와 상인, 여행가들이 이 길을 지났다. 나가사와 카즈토시(長澤和俊)는 “쿠차(현 중국 위구르자치구) 서방의 악스로부터 베델嶺으로 천산산맥을 넘으면, 이시크쿨 주위를 지나 토크마크(碎葉 Suyab)에 달하고, 여기로부터 서방으로 탈라스, 침켄트를 거쳐 타슈켄트에 달하는 길”을 언급하며 “오래전부터 소그드인에게 이용된 중요한 실크로드의 한 分枝였다”고 소개했다.
7세기 인도로 멀고 먼 유학길에 올랐던 현장법사가 이식쿨을 거쳐 타슈켄트로 지나간 기록을 <대당서역기>에 남겼다. 8세기 고선지 장군이 탈라스 전투를 위해 행군하던 길 역시 현장법사가 밟은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3세기 프랑스 수도사 루브룩은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몽골제국 멍케카간을 방문했다. 그리고 21세기엔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키르기스스탄을 횡단하며 겪었던 즐거운 추억을 <나는 걷는다>에서 소상히 밝혔다.

우즈베키스탄의 유서 깊은 고도(古都) 부하라에 위치한 부하라 아르크 성채(Ark of Bukhara) 내부의 카라한 왕궁 고고학 발굴 현장, 출처 : Tripadvisor
그렇지만 키르기스스탄에서 살았거나 이 땅을 거쳐갔던 사람들이 수놓았던 빛나는 역사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은 대목이 많다. 키르기스 사람들의 연원조차 명확하지 않다. 키르기스’라는 집단 자체는 중앙유라시아 고대사부터 등장하지만 사실 그 집단과 현재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이 어떤 관계인진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키르기스스탄 역사를 물어보면 이곳 학자들조차 명확하게 대답을 못한다고 할 정도이다.
마흐무드의 죽음으로 인해 동부 카라한 왕조는 다시 권력의 내분이라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 마흐무드의 아들 우마르가 즉위했지만 단 2개월 정도 가한 제위를 차지했다가, 부그라 하산(1075~1103)이 새 가한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동부 카라한 왕조는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른 셀주크투르크의 왕 말리크샤(Malik-Shah)의 지배를 받았다.
부그라 하산을 승계한 아흐마드(1103~1128)의 통치 시기에는 또 다른 적대 세력인 카라 키타이(Kara Khitai), 즉 서요(西遼)의 서진을 봉쇄하는 것에 크게 주력하였다. 카라 키타이의 세력은 차츰 강성하여 아흐마드의 아들 이브라힘(1128~1158) 시대에는 발라사군이 그들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고, 동부 카라한 왕조 대가한의 칭호도 카라 키타이의 왕인 구르 칸(Gur Khan)이 차지했다는 기록도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이브라힘 이후 동부 카라한 왕조의 국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동부 카라한 왕조의 마지막 가한으로 알려진 무함마드 3세마저 카라키타이 궁정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마침 카라키타이 치하의 나이만 족이 반란을 일으켜 카라키타이의 왕 구르 칸이 사로잡힌 틈을 이용하여 무함마드는 카슈가르로 탈출해 일시 동부 카라한 왕조의 권위를 회복했다.

키르기스스탄은 유라시아 동서를 잇는 교통로, 실크로드에 위치해 있다. 수많은 군대와 상인, 여행가들이 이 길을 지났다. 나가사와 카즈토시(長澤和俊)는 “쿠차(현 중국 위구르자치구) 서방의 악스로부터 베델嶺으로 천산산맥을 넘으면, 이시크쿨 주위를 지나 토크마크(碎葉 Suyab)에 달하고, 여기로부터 서방으로 탈라스, 침켄트를 거쳐 타슈켄트에 달하는 길”을 언급하며 “오래전부터 소그드인에게 이용된 중요한 실크로드의 한 分枝였다”고 소개했다.
7세기 인도로 멀고 먼 유학길에 올랐던 현장법사가 이식쿨을 거쳐 타슈켄트로 지나간 기록을 <대당서역기>에 남겼다. 8세기 고선지 장군이 탈라스 전투를 위해 행군하던 길 역시 현장법사가 밟은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3세기 프랑스 수도사 루브룩은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몽골제국 멍케카간을 방문했다. 그리고 21세기엔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키르기스스탄을 횡단하며 겪었던 즐거운 추억을 <나는 걷는다>에서 소상히 밝혔다.
우즈베키스탄의 유서 깊은 고도(古都) 부하라에 위치한 부하라 아르크 성채(Ark of Bukhara) 내부의 카라한 왕궁 고고학 발굴 현장, 출처 : Tripadvisor
그렇지만 키르기스스탄에서 살았거나 이 땅을 거쳐갔던 사람들이 수놓았던 빛나는 역사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은 대목이 많다. 키르기스 사람들의 연원조차 명확하지 않다. 키르기스’라는 집단 자체는 중앙유라시아 고대사부터 등장하지만 사실 그 집단과 현재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이 어떤 관계인진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키르기스스탄 역사를 물어보면 이곳 학자들조차 명확하게 대답을 못한다고 할 정도이다.
마흐무드의 죽음으로 인해 동부 카라한 왕조는 다시 권력의 내분이라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 마흐무드의 아들 우마르가 즉위했지만 단 2개월 정도 가한 제위를 차지했다가, 부그라 하산(1075~1103)이 새 가한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동부 카라한 왕조는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른 셀주크투르크의 왕 말리크샤(Malik-Shah)의 지배를 받았다.
부그라 하산을 승계한 아흐마드(1103~1128)의 통치 시기에는 또 다른 적대 세력인 카라 키타이(Kara Khitai), 즉 서요(西遼)의 서진을 봉쇄하는 것에 크게 주력하였다. 카라 키타이의 세력은 차츰 강성하여 아흐마드의 아들 이브라힘(1128~1158) 시대에는 발라사군이 그들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고, 동부 카라한 왕조 대가한의 칭호도 카라 키타이의 왕인 구르 칸(Gur Khan)이 차지했다는 기록도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이브라힘 이후 동부 카라한 왕조의 국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동부 카라한 왕조의 마지막 가한으로 알려진 무함마드 3세마저 카라키타이 궁정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마침 카라키타이 치하의 나이만 족이 반란을 일으켜 카라키타이의 왕 구르 칸이 사로잡힌 틈을 이용하여 무함마드는 카슈가르로 탈출해 일시 동부 카라한 왕조의 권위를 회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