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효의 마음혁명[마음혁명] 일심과 일즉일체

최은경
2026-07-15

[마음혁명]


일심과 일즉일체

 


바로 앞글에서 나는 차연의 사상이 동기同氣의 사유를 이끈다고 말했다. 동기라는 것은 삼라만상이 형제와 같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미 11세기 북송의 유학자 장재張載가 그의 논설 『서명西銘에서 인간과 사물을 우주적 일기一氣의 다양한 나눔이라고 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효孝의 덕을 확장해서 건곤으로 우리의 부모처럼 모셔야 하고, 사람들을 우리의 형제로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백성은 나의 동포고, 만물은 나의 찍이다(民吾同胞 物吾與也)”라고 천명했다.

     본디 유가 사상은 도가 사상과 달라서 사회의 인륜적 가치를 매우 강조한다. 장재의 사상이 도가적인 요소와 닮았음에도 불구하고 유가로 인정되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효제충신과 같은 인륜적 가치를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내세우며 도가와 불가에는 인륜이 없음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장재의 유가 사상이 비록 도가적 자연철학에 함의하더라도 그가 유가인 한 맹자가 말한 별애別愛 사상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맹자의 별애 사상은 춘추시대 묵자墨子의 겸애兼愛 사상을 비판한 데에서 기인한다. 단적으로 묵자의 겸애 사상은 인류에 대한 평등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강조한 사상이다. 맹자는 그런 겸애가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공소한 이론이라고 비판하고, 자기와 가장 가까운 부모형제에게 효제하는 차등적 사랑부터 실천하자고 주장했다. 이 차등적 별애 사상은 모든 유가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사상적 특징이다. 별애 사상은 세월의 흐름을 타고 결과적으로 자기 혈연과 비혈연, 자기가 잘 아는 사람과 잘 모르는 사람을 차별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굳힌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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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친소와 혈연, 비혈연의 차별은 삼라만상을 동기로 느끼는 차연의 철학과 같이 가지 않는다. 맹자의 별애 사상은 양자 택일의 논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친소와 혈연, 비혈연에서 선후와 중심, 주변을 따진다는 점에서 결국 선택의 사상을 은닉하고 있다. 이런 사유는 결국 호/오와 선/악을 분별하는 지성의 판단을 벗어나지 않는다. 주자학이 도덕 판단을 중시하는 주지주의主知主義 경향을 띠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자학은 지성의 철학이다. 주자학은 물활론을 미신에 가까운 것으로 경멸한다. 삼라만상에 다 살아 있는 정령이 있다고 여기는 물활론은 원시인들의 무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유하는 존재론에서 보면, 물활론은 엄청난 의미의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난다. 물활론은 생명이 있는 일체가 공명 체계를 이루고 있어서 너와 나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남에게 끼친 불행과 기쁨은 결국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일체동기一切同期의 사유는, 단지 도덕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나온 덕담이 아니다. 나 개인이나 계급의 이익만 챙겨 남들에게 손해를 입히는 투쟁 행위는 결국 나와 내 계급에 몇 배로 더 큰 손해를 준다는 사실을 일체론적 물활론은 가르쳐준다.

     또 일체론적 물활론은 세상에 나와 남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그 차이는 상관적 차이일 뿐 대립각을 세워야 할 차별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존재론적 사실이지 교훈적인 덕담이 아니다. 이 우주의 존재 방식은 노자가 말한 바와 같이 자타自他가 함께 병작하는 공동 유대이다.

 

     장자는 이를 만물일지萬物一指(만물은 한 손가락), 만물일마萬物一麻(만물은 하나의 말)라고 불렀다. 또 만물제동萬物齊同(만물의 일체평등)이나 영녕攖零(연계되어 있는 편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장자가 무엇이라고 말했건 그 표현들은 만물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만물이 서로 다양하게 다르지만, 하나의 그물망처럼 서로서로 얽혀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장자가 말한 ‘영녕’의 뜻이다. 영녕은 우리가 앞에서 본 차연이란 뜻을 떠올리게 한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작은 풀줄기와 큰 기둥, 문둥병자와 미인 서시西施 등이 다르지만, 도의 입장에서 보면 서로 상통한다”고 설파했다. 다르기에 서로 상관적이라는 것을 뜻하는 차연의 의미와 장자의 말이 다르지 않다. 원효가 공空과 불공不空을 역공亦空의 이름 아래 한 쌍으로 읽고, 하이데거가 진리와 비非진리를 동전의 양면으로 보듯이 장자도 작은 풀줄기는 비非-큰 기둥, 문둥병자는 비非-미인 서시로 동시에 읽으라고 했다. 이것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생각하는 사유이지, 별애처럼 나를 중심으로 우선순위를 따지는 선택적 사고가 아니다.

     차연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생각하는 사유다. 7세기 당나라의 화엄학 3조인 현수賢首 법장法臧이 그의 논술 『화엄금사자장華嚴金獅子章』에서 말한 황금사자상의 비유가 여기에 해당한다. 황금사자상을 보면서 그것을 황금이라고 생각하면 사자라는 생각이 숨고, 사자라고 여기면 황금이라는 생각이 뒤로 물러난다. 이렇게 황금과 사자는 비동시적 동시성의 구조를 지닌다.

     이러한 법장의 비유를 장자의 비유와 다른 구조라고 생각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황금사자는 한 물건인데, 풀줄기와 큰 기둥, 문둥병자와 미인은 각각 떨어진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자가 말한 앞의 대조는 대소의 상관적 차이고, 뒤의 것은 미추의 상관적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쪽의 생각이 없으면 다른 쪽의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장자와 법장의 비유는 모두 차연적 사유를 의미한다.

     장자와 법장의 사유에는 어떤 중심도 없다. 그러나 맹자가 말한 별애는 자기 혈연부터 사랑한다는 중심이 있다. 이것이 유가적 사유의 역설이다. 맹자는 인의예지의 사단四端을 사회도덕의 기축으로 생각하면서 성선을 실현하자고 역설했다. 거기에는 사해동포의 보편성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은 자기 혈연부터 중심으로 잡고 서서히 물결처럼 넓혀 간다는 것이다. 유가의 고상한 도덕 명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는 혈연중심주의를 초탈한 적이 있었던가?


     장자의 철학은 삼라만상이 다 다르지만 서로 그물처럼 얽히고설켜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장자의 평등론적인 제물齊物 사상이다. 그의 평등사상은 일체가 똑같다는 동일 사상이 아니고, 7세기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법성게法性偈』에서 말한 “하나의 개체가 곧 일체이고, 다양이 곧 한 몸이다(一卽一切 多卽一)”라는 화엄 사상과 닮았다. 삼라만상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평등하게 서로 주고받는 상응 작용을 한다는 것을 말한다. 나의 행위는 가역可逆작용을 통하여 언젠가 나에게 되돌아온다. 이것이 불교의 화엄 사상과 노장 사상이 공통으로 생각하는 일체주의이다.

     의상은 “조그만 먼지가 온 우주를 머금고 있고, ....한없는 긴 시간이 곧 한 생각이다(一微塵中含十方, 無量遠劫卽一念)”라고 갈파했다. 조그만 먼지를 내 밥그릇의 밥알 하나라고 생각해보자. 밥알이 된 쌀 한 톨은 농부의 수고로 영글었다. 그와 함께 햇빛과 비와 적절한 구름과 땅 힘 등이 서로 어울려 작용했다. 내 밥으로 여기에 놓이기까지 물류를 도운 운전자와 도소매 상인과 아내의 노력이 들어갔다.

     그뿐만 아니다. 이 쌀 한 톨은 볍씨 하나를 심은 결과다. 그 볍씨는 우주 일체와 사람들의 협동으로 형성되었고, 또 자연과 인사의 무한 상응 속에서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게 보면 내가 먹는 밥알 하나가 엄청나게 많은 다른 것들과 상입상즉相入相卽(상호개입과 상호연계)의 존재 양식을 띠고 있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생각하고 있는 일념은 지난날 내가 바친 많은 공부 시간의 응축이기도 하고, 또 무의식적으로 내가 철학 공부를 좋아하게 한 전생의 기가 작용하는 것도 상관있다. 내가 마시는 이 한 방울의 물은 그동안 무수한 재생의 순환을 지나온 흔적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 한방울의 존재가 무시 이래로 지구에 있던 일체의 물과 상입상즉의 연관성을 지니듯이, 사회생활에서 한 개인의 생각과 행동은 전체 사회의 분위기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또 사회 전체 분위기는 자연환경과도 연관을 맺는다. 서로 미워서 적대감으로 엉킨 사회는 맑고 고운 자연을 일구지 않는다. 투쟁장으로 엉망이 된 일터가 정돈되어 있던가?

     우리가 살 길은 투쟁을 통해 미움과 한을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네 일이 곧 내 일이라고 여기는 일심의 사상이다. 사회는 다양한 인격들이 서로 직간접적으로 의존해서 통일된 그물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는 전체주의만큼 망상이고 허상이다. 사회 속에 개인이 독립된 단위가 아니듯이, 개인은 전체를 위하여 강압적으로 희생되어도 좋은 하찮은 부품이 아니다. 개인은 일심이다. 그 일심이 일체적인 일심을 돕는 일심일수도 잇고, 일체적인 일심을 파괴하는 일심일 수 있다.

     차연적 사유는 일체적인 일심을 돕는 길이다. 일체주의(holism)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와 다르다. 전자는 서로 다르기에 교응하는 자연적 사실주의와 닮았고, 후자는 모든 차이를 지우고 중심주의를 조작하여 그 중심을 열광적으로 경배하게 한다. 남은 나와 전혀 동떨어진 별개의 인물이 아니고, 타자는 비非-자기이고 자기는 비非-타자이다.

     이 자타의 차연이 상처를 받으면 자타가 모두 병들고 불행해진다. 그런 사회생활은 지옥을 방불케 한다. 마음에 정치적·종교적·계급적·민족적·성별적 생각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으면, 어떤 것도 올바르게 듣거나 볼 수 없다. 투사는 또 다른 적대적 투사를 낳는다. 투사의 문화는 투쟁적인 만큼 편파적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자. 우리는 투사의 말에 흥분하기보다 한 떨기 들꽃의 하찮은 모습도 고요히 응시하는 평정심을 귀하게 여기자.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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