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혁명]
인격적 정신주의의 문제점
철학에는 각각 세상의 근본진리가 인격적이라고 보는 것과 자연적이라고 보는 것이 있다. 전자는 세상의 근본진리가 신과 인간의 정신에 의하여 현재적으로 늘 창조되는 것으로 여기는 정신주의와 상통한다. 후자는 세상의 근본진리가 자연적 필연성의 법칙으로 생기하고 소멸하는 세상의 여여한 사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주의를 천명한다.
진리의 인격성을 주장하는 정신주의 철학은 세상의 근본적 진리를 창조하는 인격적 저자가 있고, 그 저자의 의도에 따라 세상에 진리가 나타난다고 본다. 그 입장에서는 신은 정신이고 정신은 인격이며, 인간의 정신도 인격이고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통하여 신의 인격과 접목된다고 주장한다. 정신주의에서 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은 인격적 정신이 쓰고 있는 책과 같다. 그래서 그 줄거리가 역사의 전개 내용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18~19세기 독일의 헤겔George Wilhelm Friedrich Hegel은 신과 같은 절대정신이 자기 스스로 구체적인 역사의 시대정신으로 각각 구현했다가, 종국에는 자기의 절대정신으로 자각되어 되돌아오는 과정을 역사로 보았다. 이 헤겔의 정신주의는 능동적으로 말하는 절대정신과 각 역사 시대를 통하여 수동적으로 말하여진 시대정신의 통사적 일치를 겨냥하고 있다. 헤겔이 본 세상은 신과 같은 절대정신이 저자로서 스스로 쓴 자기 역사책과 다르지 않다.
인격적 정신주의 철학에서 등장하는 정신과 영혼과 의식의 관계에 대해 잠시 설명하겠다. 정신은 더 신학적 개념이고, 영혼은 정신이 인간학적 의미로 하강한 것이며, 의식은 영혼이란 종교적 의미를 철학적 사고의 주체로 변용한 것이다. 정신, 영혼, 의식의 개념을 중시하는 철학을 나는 인격적 정신주의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일단 인격적 정신주의에 대해 말하고, 그와 다른 자연적 사실주의는 다름에 언급하겠다.
서구에서 정신주의 철학의 전통은 오래되었다. 독일의 하이데거가 그의 『휴머니즘에 관한 편지』에서 지적했듯이, 정신주의 전통은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소크라테스부터 휴머니즘의 전통이 생기면서 흥기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이전의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공통적으로 영혼과 이성의 위대함을 드높인 정신주의 학을 펼쳤다.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지고의 진리로 여겼던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씌어진 문자와 같은 기록을 죽은 정신 또는 소피스트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판매하려는 지식으로 경멸하고, 오직 살아 있는 영혼의 숨결이 담긴 말의 대화를 진실한 정신으로 여겼다는 내용을 기술한다. 플라톤은 스승의 입을 빌어 문자 기록은 밗에서 들어온 정보를 기록하는 매체이기에 영혼의 내면적 자각이 없는 죽은 지식이고, 우리 영혼의 내면적 목소리인 말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의 얼이 살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말을 중시하는 정신주의가 기독교의 말씀(logos)의 신학과 결부되어, 말의 진리는 서양 정신주의 철학의 인격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이 말의 진리는 다시 아르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결부되었다. 정신주의 철학은 도덕을 말하면서 신의 말을 대변하는 내면적 영혼의 말로서 양심의 소리를 인격의 중심으로 등장시켰다. 또 지식을 설파하면서 이성의 논리를 지고의 기준으로 삼아 세상을 이성의 법칙으로 재편하려고 했다. 정신주의 철학에서 신은 곧 이성이기 때문이다. 영혼과 이성이 인격적 정신주의 신학의 생명이다.
프랑스의 해체철학자 데리다는 이 정신주의를 말씀중심주의(logocentrism) 소리중심주의(phonocentrism)라고 그의 저서 『표지와 차이』에서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데리다는 정신주의는 나의 인격과 신의 인격이 내면의 성역인 영혼에서 만나 내가 신의 말씀을 듣고 그에 순종하는 내면적 일치의 형이상학이므로, 그런 인격적 정신주의는 ‘스스로 말하나ᅟᅳᆫ 것을 듣기(hearing oneself speak)’의 철학이라고 지적했다. 신의 말씀이 나의 영혼의 말과 동일하고, 내가 그 말을 듣는 것이다. 이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의 철학이 강한 ‘자가 애정(auto-affection)’의 사상을 잉태하면서 자기와 다른 것을 배척하는 심리를 낳았다고 한다.
데리다는 20세기 독일의 현상학 창시자인 후설Edmund Hussed을 공부하면서 철학을 출발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목소리와 현상』에서, 후설은 절대적 진리의 명증성을 내면적 의식의 자기동일성인 ‘생각하는 의식(noesis)’과 ‘생각되는 의식(noema)’의 현존적(현재적으로 존재하는) 일치에서 발견하려고 시도했으나 완전히 실패했다고 논파했다. 그래서 그는 후설을 떠났다. 의식의 자기동일성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생생한 현재의 시각에서 신과 영혼의 합일처럼, 또는 헤겔이 겨냥한 절대정신과 역사의 합일처럼 명증하게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생각하기에 후설은 그런 현재적 시각에서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와 같은 자기 일치의 명증성을 찾을 수 없음을 예감했다.
자의식의 자기동일성이 정신주의 철학의 환상이라는 것이 데리다의 소견이다. 후설도 이 환상을 극복하기 위해 신과 인간이 만나듯 ‘생각하는 의식’과 ‘생각되는 의식’이 순수하게 일치하는 의식의 근원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헛수고했다는 것이다. 후설이 찾고자 한 의식의 자기동일성은 순수하게 지금이라는 생생한 영혼의 현재적 시각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데리다는 그 순수한 지금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며, 지금이라는 시각도 사실 시간적으로 조금 전의 내 생각과 조금 뒤의 내 생각 사이에 낀 간격과 차이에서 생기는 쉼표와 같은 빈틈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순수한 현재적 시각이라는 것은 하나의 환상인 셈이다.
순수 현재의 한 점으로서 지금 이 시각인 ‘딱’ 하는 순간도 내가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이미 조금 흘러간 과거에 해당한다. 기독교 신학과 후설의 현상학이 귀중하게 여기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는 순수 현존적 시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각은 실존하는 시가이 아니라, 의식이 근접한 과거에서 다시 당기는 기억(retention)과 근접한 미래에서 미리 당기는 예상(protention) 사이에 있는 차이와 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동일성의 절대적 근원을 찾기 위한 순수 지금이 정신과 영혼과 의식의 자기동일성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의식의 자기동일성이란 무수한 차이와 간격들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데리다가 지적한 후설의 자기동일성에 대한 착각은 불교의 유식학에서 말하는 폭류瀑流처럼, 빨리 거세게 물이 흐를 때 사람들은 사실 앞의 물과 뒤의 물이 다른 물인 줄 모르고 똑같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물의 흐름이나 의식의 흐름도 순간적으로 표변하고 달라지는데, 마치 영화필름처럼 각각 다른 장면들을 짤리 돌리면 연속으로 동일한 것이 흐른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데리다가 분석한 것은 의식이 동일하게 지속하기는커녕 찰나마다 무상하게 변한다는 것이다. 물도 같은 물이 흐르지 않고 새 인연을 찰나적으로 만나면서 앞의 물과 단절되지만, 워낙 빠르게 흐르니까 연속적인 것처럼 보인다.
데리다는 자기동일적 정신주의의 거를 찾기 위한 후설의 현상학적 모색은 결국 그 근거를 부정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정신주의는 후설의 실패로 막을 내리지 않았다. 서구 사회에서는 정신의 인간학적 샘터인 인격과 영혼의 자기동일성을 사랑하는 낭만주의 철학이 워낙 강하게 남아 있어서, 하루아침에 정신과 인격의 동일성이란 근거가 무너졌다고 인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금은 해체주의가 등장하여 서구에서 인격적 정신주의의 철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즉 불변적 인격 정신과 그 정신의 인간학적 현상인 영혼이라는 인격적 존재자가 있다는 믿음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격적 정신주의는 자기 영혼과 이성이 자기 안에서 정신적으로 분비한 자기의 목소리 듣기처럼 강력한 인격적 자가 애정의 자부심을 금과옥조로 여겨 왔다. 영혼의 내면적 말은 나의 자의적인 말이 아니라 정신인 신의 말과 같고 논리적 이성의 법칙에 타당한 소리이기에, 정신과 영혼의 이성적 말과 소리는 현재에서 보편적 의식의 자기동일성을 줄곧 창조하고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보편적 의식의 자기동일성이 곧 절대 진리가 된다. 데리다는 서구의 역사에서 인격적 정신주의는 늘 절대 진리의 추구에 모든 노력을 경주한 역사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서구 역사와 서구 지성이 굳세게 견지하고 있는 배타적 자가 애정의 원천이 되는 ‘백색신화(white mythology)’의 뿌리다.
정신주의가 귀하게 여겨 온 영혼의 말과 소리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표현하지 못한다. 지금 내가 “밖에 비가 온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참과 거짓 가운데 하나가 된다. 즉 내가 참을 말했든지, 아니면 거짓을 말했든지 둘 중 하나다. 여기에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양면을 다 고려하는 이중성의 생각이 스며들 여기자 없다. 즉 인격적 정신주의가 이끄는 철학은 이성주의가 언표하는 양자택일적 판단의 양식과 다르지 않다. ‘인격의 정신은 선하든지 악하든지, 참이든지 거짓이든지 둘 중 하나로 귀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절대주의적 진리를 신봉하는 인격적 정신주의의 철학 사상이 여기서도 하나의 역설을 만난다. 왜냐하면 절대주의는 자기와 상반되는 어떤 가치나 실재를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주의를 따르는 말과 소리의 현상은 뜻밖에도 늘 절대적이지 않은 양자택일의 현실 앞에 서 있다. 즉 의식은 늘 참이든지 거짓이든지, 선이든지 악이든지 양자택일 판단의 기로에 놓여 있다. 이것이 절대주의적 진리의 역설이다.
현실적으로 세상은 양자택일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기에, 정신주의는 절대 진리의 이름으로 세상을 절대 진리에 맞도록 판단하고 구성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절대주의와 정신주의는 늘 세상이 인격적 절대 진리와 합치될 때까지 투쟁의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절대적 정신주의는 인간에게 거짓이나 악과 투쟁하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여기서 인격적 정신주의와 다른 자연적 사실주의의 습이 새로 떠오른다. 이것은 다음에 음미할 것이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마음혁명]
인격적 정신주의의 문제점
철학에는 각각 세상의 근본진리가 인격적이라고 보는 것과 자연적이라고 보는 것이 있다. 전자는 세상의 근본진리가 신과 인간의 정신에 의하여 현재적으로 늘 창조되는 것으로 여기는 정신주의와 상통한다. 후자는 세상의 근본진리가 자연적 필연성의 법칙으로 생기하고 소멸하는 세상의 여여한 사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주의를 천명한다.
진리의 인격성을 주장하는 정신주의 철학은 세상의 근본적 진리를 창조하는 인격적 저자가 있고, 그 저자의 의도에 따라 세상에 진리가 나타난다고 본다. 그 입장에서는 신은 정신이고 정신은 인격이며, 인간의 정신도 인격이고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통하여 신의 인격과 접목된다고 주장한다. 정신주의에서 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은 인격적 정신이 쓰고 있는 책과 같다. 그래서 그 줄거리가 역사의 전개 내용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18~19세기 독일의 헤겔George Wilhelm Friedrich Hegel은 신과 같은 절대정신이 자기 스스로 구체적인 역사의 시대정신으로 각각 구현했다가, 종국에는 자기의 절대정신으로 자각되어 되돌아오는 과정을 역사로 보았다. 이 헤겔의 정신주의는 능동적으로 말하는 절대정신과 각 역사 시대를 통하여 수동적으로 말하여진 시대정신의 통사적 일치를 겨냥하고 있다. 헤겔이 본 세상은 신과 같은 절대정신이 저자로서 스스로 쓴 자기 역사책과 다르지 않다.
인격적 정신주의 철학에서 등장하는 정신과 영혼과 의식의 관계에 대해 잠시 설명하겠다. 정신은 더 신학적 개념이고, 영혼은 정신이 인간학적 의미로 하강한 것이며, 의식은 영혼이란 종교적 의미를 철학적 사고의 주체로 변용한 것이다. 정신, 영혼, 의식의 개념을 중시하는 철학을 나는 인격적 정신주의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일단 인격적 정신주의에 대해 말하고, 그와 다른 자연적 사실주의는 다름에 언급하겠다.
서구에서 정신주의 철학의 전통은 오래되었다. 독일의 하이데거가 그의 『휴머니즘에 관한 편지』에서 지적했듯이, 정신주의 전통은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소크라테스부터 휴머니즘의 전통이 생기면서 흥기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이전의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공통적으로 영혼과 이성의 위대함을 드높인 정신주의 학을 펼쳤다.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지고의 진리로 여겼던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씌어진 문자와 같은 기록을 죽은 정신 또는 소피스트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판매하려는 지식으로 경멸하고, 오직 살아 있는 영혼의 숨결이 담긴 말의 대화를 진실한 정신으로 여겼다는 내용을 기술한다. 플라톤은 스승의 입을 빌어 문자 기록은 밗에서 들어온 정보를 기록하는 매체이기에 영혼의 내면적 자각이 없는 죽은 지식이고, 우리 영혼의 내면적 목소리인 말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의 얼이 살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말을 중시하는 정신주의가 기독교의 말씀(logos)의 신학과 결부되어, 말의 진리는 서양 정신주의 철학의 인격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이 말의 진리는 다시 아르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결부되었다. 정신주의 철학은 도덕을 말하면서 신의 말을 대변하는 내면적 영혼의 말로서 양심의 소리를 인격의 중심으로 등장시켰다. 또 지식을 설파하면서 이성의 논리를 지고의 기준으로 삼아 세상을 이성의 법칙으로 재편하려고 했다. 정신주의 철학에서 신은 곧 이성이기 때문이다. 영혼과 이성이 인격적 정신주의 신학의 생명이다.
프랑스의 해체철학자 데리다는 이 정신주의를 말씀중심주의(logocentrism) 소리중심주의(phonocentrism)라고 그의 저서 『표지와 차이』에서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데리다는 정신주의는 나의 인격과 신의 인격이 내면의 성역인 영혼에서 만나 내가 신의 말씀을 듣고 그에 순종하는 내면적 일치의 형이상학이므로, 그런 인격적 정신주의는 ‘스스로 말하나ᅟᅳᆫ 것을 듣기(hearing oneself speak)’의 철학이라고 지적했다. 신의 말씀이 나의 영혼의 말과 동일하고, 내가 그 말을 듣는 것이다. 이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의 철학이 강한 ‘자가 애정(auto-affection)’의 사상을 잉태하면서 자기와 다른 것을 배척하는 심리를 낳았다고 한다.
데리다는 20세기 독일의 현상학 창시자인 후설Edmund Hussed을 공부하면서 철학을 출발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목소리와 현상』에서, 후설은 절대적 진리의 명증성을 내면적 의식의 자기동일성인 ‘생각하는 의식(noesis)’과 ‘생각되는 의식(noema)’의 현존적(현재적으로 존재하는) 일치에서 발견하려고 시도했으나 완전히 실패했다고 논파했다. 그래서 그는 후설을 떠났다. 의식의 자기동일성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생생한 현재의 시각에서 신과 영혼의 합일처럼, 또는 헤겔이 겨냥한 절대정신과 역사의 합일처럼 명증하게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생각하기에 후설은 그런 현재적 시각에서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와 같은 자기 일치의 명증성을 찾을 수 없음을 예감했다.
자의식의 자기동일성이 정신주의 철학의 환상이라는 것이 데리다의 소견이다. 후설도 이 환상을 극복하기 위해 신과 인간이 만나듯 ‘생각하는 의식’과 ‘생각되는 의식’이 순수하게 일치하는 의식의 근원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헛수고했다는 것이다. 후설이 찾고자 한 의식의 자기동일성은 순수하게 지금이라는 생생한 영혼의 현재적 시각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데리다는 그 순수한 지금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며, 지금이라는 시각도 사실 시간적으로 조금 전의 내 생각과 조금 뒤의 내 생각 사이에 낀 간격과 차이에서 생기는 쉼표와 같은 빈틈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순수한 현재적 시각이라는 것은 하나의 환상인 셈이다.
순수 현재의 한 점으로서 지금 이 시각인 ‘딱’ 하는 순간도 내가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이미 조금 흘러간 과거에 해당한다. 기독교 신학과 후설의 현상학이 귀중하게 여기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는 순수 현존적 시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각은 실존하는 시가이 아니라, 의식이 근접한 과거에서 다시 당기는 기억(retention)과 근접한 미래에서 미리 당기는 예상(protention) 사이에 있는 차이와 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동일성의 절대적 근원을 찾기 위한 순수 지금이 정신과 영혼과 의식의 자기동일성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의식의 자기동일성이란 무수한 차이와 간격들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데리다가 지적한 후설의 자기동일성에 대한 착각은 불교의 유식학에서 말하는 폭류瀑流처럼, 빨리 거세게 물이 흐를 때 사람들은 사실 앞의 물과 뒤의 물이 다른 물인 줄 모르고 똑같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물의 흐름이나 의식의 흐름도 순간적으로 표변하고 달라지는데, 마치 영화필름처럼 각각 다른 장면들을 짤리 돌리면 연속으로 동일한 것이 흐른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데리다가 분석한 것은 의식이 동일하게 지속하기는커녕 찰나마다 무상하게 변한다는 것이다. 물도 같은 물이 흐르지 않고 새 인연을 찰나적으로 만나면서 앞의 물과 단절되지만, 워낙 빠르게 흐르니까 연속적인 것처럼 보인다.
데리다는 자기동일적 정신주의의 거를 찾기 위한 후설의 현상학적 모색은 결국 그 근거를 부정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정신주의는 후설의 실패로 막을 내리지 않았다. 서구 사회에서는 정신의 인간학적 샘터인 인격과 영혼의 자기동일성을 사랑하는 낭만주의 철학이 워낙 강하게 남아 있어서, 하루아침에 정신과 인격의 동일성이란 근거가 무너졌다고 인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금은 해체주의가 등장하여 서구에서 인격적 정신주의의 철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즉 불변적 인격 정신과 그 정신의 인간학적 현상인 영혼이라는 인격적 존재자가 있다는 믿음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격적 정신주의는 자기 영혼과 이성이 자기 안에서 정신적으로 분비한 자기의 목소리 듣기처럼 강력한 인격적 자가 애정의 자부심을 금과옥조로 여겨 왔다. 영혼의 내면적 말은 나의 자의적인 말이 아니라 정신인 신의 말과 같고 논리적 이성의 법칙에 타당한 소리이기에, 정신과 영혼의 이성적 말과 소리는 현재에서 보편적 의식의 자기동일성을 줄곧 창조하고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보편적 의식의 자기동일성이 곧 절대 진리가 된다. 데리다는 서구의 역사에서 인격적 정신주의는 늘 절대 진리의 추구에 모든 노력을 경주한 역사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서구 역사와 서구 지성이 굳세게 견지하고 있는 배타적 자가 애정의 원천이 되는 ‘백색신화(white mythology)’의 뿌리다.
정신주의가 귀하게 여겨 온 영혼의 말과 소리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표현하지 못한다. 지금 내가 “밖에 비가 온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참과 거짓 가운데 하나가 된다. 즉 내가 참을 말했든지, 아니면 거짓을 말했든지 둘 중 하나다. 여기에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양면을 다 고려하는 이중성의 생각이 스며들 여기자 없다. 즉 인격적 정신주의가 이끄는 철학은 이성주의가 언표하는 양자택일적 판단의 양식과 다르지 않다. ‘인격의 정신은 선하든지 악하든지, 참이든지 거짓이든지 둘 중 하나로 귀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절대주의적 진리를 신봉하는 인격적 정신주의의 철학 사상이 여기서도 하나의 역설을 만난다. 왜냐하면 절대주의는 자기와 상반되는 어떤 가치나 실재를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주의를 따르는 말과 소리의 현상은 뜻밖에도 늘 절대적이지 않은 양자택일의 현실 앞에 서 있다. 즉 의식은 늘 참이든지 거짓이든지, 선이든지 악이든지 양자택일 판단의 기로에 놓여 있다. 이것이 절대주의적 진리의 역설이다.
현실적으로 세상은 양자택일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기에, 정신주의는 절대 진리의 이름으로 세상을 절대 진리에 맞도록 판단하고 구성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절대주의와 정신주의는 늘 세상이 인격적 절대 진리와 합치될 때까지 투쟁의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절대적 정신주의는 인간에게 거짓이나 악과 투쟁하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여기서 인격적 정신주의와 다른 자연적 사실주의의 습이 새로 떠오른다. 이것은 다음에 음미할 것이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