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혁명]
님이란 무엇인가
앞의 글들을 읽고 나면 저절로 생길 수 있는 주제가 님의 진리에 관한 문제다. 인격적 정신에서 자연적 사실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철학적 사색이 전개되면, 우리가 흔히 부르는 ‘부처님’, ‘하느님’ 같은 개념은 의미가 없는가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님(임)이란 낱말은 내가 아는 외국어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말의 독특한 존칭 명사다. 우리말의 님은 오로지 인격만을 존칭으로 높이는 말이 아니다. 해님, 달님, 별님처럼 자연 사물에도 붙인다. 님이 이처럼 인격과 비인격을 막론하고 두루 사용된다는 것은 한국인의 공통 무의식에 님의 존재에 대한 강렬한 귀소성이 숨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민간신앙에서 한국인들이 기도하고 경배하는 일체 존재가 다 한국인의 님이다.

본디 주자학은 매우 합리적 도리의 학문으로서 종교적 기도와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한국 주자학은 이런 도리의 학문을 넘어 은영중에 기도의 의미를 안고 사유한다. 예컨대 퇴계유학이 이런 님의 종교성을 풍긴다. 퇴계는 주자가 아주 소극적으로 쓰던 상제上帝(님)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주리主理유학의 거봉 퇴계는 만년에 상제 개념을 상징하는 이능자도설理能自到說(理가 스스로 나에게 내림함)을 제창한다. 퇴계가 만년에 말하는 태극지리太極之理는 추상적 우주의 철학적 원리인 태극보다, 오히려 우리의 경배 대상인 상제와 같은 인격적 님과 같은 뜻으로 보인다. 그래서 퇴계는 그 이가 능동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내림하여 우리를 성스러운 정신으로 초월케하는 그런 인격적 정신주의의 사유를 추구했다. 나는 이런 퇴계의 사상이 잠재적 신학 사상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퇴계의 유학 사상은 우리 사상사에서 저 인격적 정신주의의 전통이 가볍지 않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 인격적 정신주의의 신학 사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유명한 철학자로는 20세기 독일의 부버Martin Buber가 있다. 부버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에 바탕을 둔 철학자로서, 그의 저서인 『나와 그대』에서 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나/그것(I/it’과 ‘나/그대(I/Thou)’의 관계로 나누었다. 전자는 객관적 대상인 인격이 없는 사물과 나라는 인간 사이의 문제고, 후자는 영혼이 있는 정신과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
보버는 인격이 없는 사물과 인간 사이에는 진실한 의미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고, 나는 단지 그 사물을 바깥에서 바라보고 응시하고 판단하는 외로운 존재로 귀착된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인격이 있는 정신과 나 사이에는 진실한 대화 관계가 수립된다. 또 그 정신은 나에게 말을 건네는 2인칭 ‘그대’로서 치환되어, 그대는 객관적 사물처럼 나를 방관하는 자나 구경하는 자가 아니라 나의 모든 자유 안에서 현재의 나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인 젖ㄹ대자로 탈바꿈한다. 절대적 그대인 하느님은 사랑으로서 이 우주의 중심이 된다.
그런데 인격적 중심은 우주의 중심에 인격을 둠으로써, 은연중에 비인격적 존재들을 모두 인격의 도구로 여기게 하는 소유론적 사상을 뿌리내리게 한다. 인간이 신의 종이듯이, 다른 존재자들도 인간의 종으로 격하시킨다. 하이데거가 서구의 전통적 형이상학과 신학이 모두 존재론(ontology)이 아니라 존재자학(ontical science)으로만 구덨따고 진단한 이유는, 존재자학이 곧 소유론을 존재론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상사에서 님의 존재는 인격적 정신의 존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만해 스님의 유명한 시 「알 수 없어요」의 몇 구절을 인용하겠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듯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
여기서 님의 존재가 오동잎, 푸른 하늘, 고요한 하늘의 향기, 작은 시내의 노랫소리 등으로 다양하게 구체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님은 오직 인격적 존재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모습을 님의 화현化現으로 묘사하고 있다. 님은 한국사상에서 사랑하는 존재를 상징한다.
사랑하는 존재가 오직 인격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주관적 감상의 차원으로만 보려는 낭만주의에 너무 젖어 있다. 우리의 TV연속극은 인생에서 온통 남녀의 낭만적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화면을 꽉 채운다. 이런 사랑을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인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말(romantic lie)’이라고 그의 『낭만적 거짓말과 황당한 진실』에서 언급했다. 남녀 사이의 애욕은 동물적 본능의 감정적 소유욕에서 나오는 은유법에 불과하고, 그 애욕에는 감정에 뒤얽힌 경쟁과 질투와 환멸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그런데 인간 사회가 그런 애욕을 불멸의 사랑이란 이름으로 애드벌룬처럼 붕 띄우는 “낭만적 거짓말”을 지라르는 냉혹하게 분석한다. 한국인은 냉엄한 현실을 주관적 감상의 허구로 보지 못하는 낭만주의적 미숙아의 유치함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만해의 님은 낭만적 애욕의 상징이 아니다. 『님의 침묵』의 「가지 마서요」라는 구절에서 만해는 “달콤하고 맑은 향기를 꿀벌에게 주고 다른 꿀벌에게 주지 않는 이상한 백합꽃이 어데 있어요/ 자신의 전체를 죽음의 청산에 제사 지내고 흐르는 빛으로 밤을 두 쪼각으로 베히는 반딧불이 어디 있어요/ 아아 님이여 정에 순사하려는 나의 님이시여 걸음을 돌리서요 거기를 가지 마서요 나는 싫어요/ 그 나라에는 허공이 없읍니다”라고 묘사했다. 또 「님의 얼굴」이란 절구에서는 “님의 얼굴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한 말이 아닙니다/ 어여쁘다는 말은 인간 사람의 얼굴에 대한 말이요 님은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 만치 어여쁜 까닭입니다”라고 했다. 이상의 인용은 우리에게 만해의 님이 오로지 남녀 사이의 사랑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만해의 시를 이해하기 위하여 잠시 돌아가겠다.
조금 전 하이데거가 존재자학과 존재론을 구분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 말고 이 철학자는 또 재래의 서정시(poem=poesie)와 존재론적 시(ontological poetry=Dichtung)도 구분했다. 서정시는 자이의 주관적 감정이 느끼는 일체의 서정을 노래하는 낭만적 시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론적 시는 그런 주관적 자아의 사랑하는 서정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주관적 자아가 평온하게 사라진 무아의 마음에 비치는 존재의 사실을 그대로 현시하는 것이다.
서정시의 낭만적 말은 나의 말인데,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가 현시하는 말은 ‘그것(It=Es)’의 말이다. 자아의 감정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법이자 사실의 존재가 나에게 말한다. 그는 『숲길』에서 존재론적 시인과 존재를 사유하는 자는 그 존재의 말을 받아 모시는 ‘존재의 목자(shepherd of Being)’라고 언급했다. 또 존재론적 시와 사유는 존재의 집(house of Being)을 지어서 존재의 진리를 보호하는 사명과 맞물린다고 언명했다. 그 존재를 하이데거는 3인칭 단수인 ‘그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미 나는 앞글에서 14세기 독일의 신학자 에카르트가 신을 ‘그것(isness)’이나 ‘무(nothihngness)’나 ‘존재가 없는 존재(beingless Being-=존재자가 아닌 존재)’ 등의 개념으로 기술했음을 지적했다. 이 에카르트의 신관은 부버의 신관과 아주 다르다. 그의 신은 인격적 절대자가 아니라 우주의 사실적 존재 자체와 같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로서의 ‘그것’은 16세기 조선의 서산대사가 부처를 우주적 사실로서 지적한 ‘그것(渠)’과 다르지 않다. 존재론적 이법으로서의 ‘그것’과 합일하려는 존재론적 사랑을 욕망할 때 3인칭 ‘그것’이 2인칭 ‘그대’로 방향을 전환한다고 읽어야 한다. 자아도 그대와 합일하는 낭만적 사랑을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로 향하는 인간의 낭만적 사랑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자아가 지워지지 않는 인간의 모든 사랑은 다 소유론적 사랑의 심리를 떠나지 않는다. 오직 마음이 자아를 비우는 무아의 경지에 이를 때만, 무아의 마음이 ‘그것’을 ‘그대’로 탈바꿈시키는 일치가 일어날 수 있다.
정신적 인격이라는 자아의 의식을 소유하고 있으면, 인간은 만물과 일체감을 이루면서 우주의 법칙이요 사실인 ‘그것’과 한 몸을 이룰 수 없다. 마음이 빈 거울처럼 허정虛靜해야, 인간은 자기를 잊고 우주와 일기一氣를 이룬다. 이것이 공자가 『장자』에게 설파한 심재좌망心齋坐忘(마음이 재계해서 온갖 것을 잊고 만물과 일체가 됨)의 경지겠다.
만해가 『님의 침묵』에서 이런 무아의 시를 지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해의 시는 결코 낭만적 서정시가 아니다. 그의 시는 일본에 망한 조국과 멀리 떠난 부처님이 하나의 이중인화로 작용하면서, 부처님과 조국의 역사와 산하대지의 님이 그의 마음과 일치해 주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일치의 희망은 결코 자아의식이 님이라 불리는 ‘그대’를 소유적 자기화(appropriation)로 만들려는 감정이입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기화의 길과는 정반대로 님의 것으로 되기를 희망하는 말을 한다. 분명히 ‘님의 품에 안기는 길’과 ‘죽음의 길’ 둘 밖에 없다고 천명했다. 그는 전자의 길을 가겠다고 희구했다. 그는 「예술가」라는 절구에서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소질이 너무 없나 봐요/즐거움이나 슬픔이나 사랑이란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를 그대로 쓰고 싶습니다/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와 꽃 밭에 있는 작은 돌도 쓰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희망을 ‘하나가 되어 주서요’에서 술회한다. “님이여 나의 마음을 가져가라거든 마음을 가진 나에게서 가져가서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님에게서 하나가 되게 하서요.” 만해가 말하는 님이 곧 우주의 존재론적 사실을 가리키는 ‘그것’의 현시를 가리킨다는 대목은 안 보인다. 그 점에서 그의 시는 8세기 당나라 시대의 왕유의 선시와 대조적이다. 이 왕유王維의 시에서는 일체의 님이 안 보이고 오직 ‘그것’만이 조촐하고 해맑게 소묘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만해에게서 감상적이고 낭만적 서정시를 넘어서 님의 존재와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려는 강렬한 희망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아직도 만해의 마음에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깊은 정한情恨이 그로 하여금 초탈적이고 존재론적 시를 쓰는 것을 잡아당겼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것은 오히려 님과 하나로 일치하려는 기도의 시라고 읽어도 괜찮겠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마음혁명]
님이란 무엇인가
앞의 글들을 읽고 나면 저절로 생길 수 있는 주제가 님의 진리에 관한 문제다. 인격적 정신에서 자연적 사실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철학적 사색이 전개되면, 우리가 흔히 부르는 ‘부처님’, ‘하느님’ 같은 개념은 의미가 없는가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님(임)이란 낱말은 내가 아는 외국어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말의 독특한 존칭 명사다. 우리말의 님은 오로지 인격만을 존칭으로 높이는 말이 아니다. 해님, 달님, 별님처럼 자연 사물에도 붙인다. 님이 이처럼 인격과 비인격을 막론하고 두루 사용된다는 것은 한국인의 공통 무의식에 님의 존재에 대한 강렬한 귀소성이 숨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민간신앙에서 한국인들이 기도하고 경배하는 일체 존재가 다 한국인의 님이다.
본디 주자학은 매우 합리적 도리의 학문으로서 종교적 기도와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한국 주자학은 이런 도리의 학문을 넘어 은영중에 기도의 의미를 안고 사유한다. 예컨대 퇴계유학이 이런 님의 종교성을 풍긴다. 퇴계는 주자가 아주 소극적으로 쓰던 상제上帝(님)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주리主理유학의 거봉 퇴계는 만년에 상제 개념을 상징하는 이능자도설理能自到說(理가 스스로 나에게 내림함)을 제창한다. 퇴계가 만년에 말하는 태극지리太極之理는 추상적 우주의 철학적 원리인 태극보다, 오히려 우리의 경배 대상인 상제와 같은 인격적 님과 같은 뜻으로 보인다. 그래서 퇴계는 그 이가 능동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내림하여 우리를 성스러운 정신으로 초월케하는 그런 인격적 정신주의의 사유를 추구했다. 나는 이런 퇴계의 사상이 잠재적 신학 사상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퇴계의 유학 사상은 우리 사상사에서 저 인격적 정신주의의 전통이 가볍지 않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 인격적 정신주의의 신학 사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유명한 철학자로는 20세기 독일의 부버Martin Buber가 있다. 부버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에 바탕을 둔 철학자로서, 그의 저서인 『나와 그대』에서 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나/그것(I/it’과 ‘나/그대(I/Thou)’의 관계로 나누었다. 전자는 객관적 대상인 인격이 없는 사물과 나라는 인간 사이의 문제고, 후자는 영혼이 있는 정신과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
보버는 인격이 없는 사물과 인간 사이에는 진실한 의미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고, 나는 단지 그 사물을 바깥에서 바라보고 응시하고 판단하는 외로운 존재로 귀착된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인격이 있는 정신과 나 사이에는 진실한 대화 관계가 수립된다. 또 그 정신은 나에게 말을 건네는 2인칭 ‘그대’로서 치환되어, 그대는 객관적 사물처럼 나를 방관하는 자나 구경하는 자가 아니라 나의 모든 자유 안에서 현재의 나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인 젖ㄹ대자로 탈바꿈한다. 절대적 그대인 하느님은 사랑으로서 이 우주의 중심이 된다.
그런데 인격적 중심은 우주의 중심에 인격을 둠으로써, 은연중에 비인격적 존재들을 모두 인격의 도구로 여기게 하는 소유론적 사상을 뿌리내리게 한다. 인간이 신의 종이듯이, 다른 존재자들도 인간의 종으로 격하시킨다. 하이데거가 서구의 전통적 형이상학과 신학이 모두 존재론(ontology)이 아니라 존재자학(ontical science)으로만 구덨따고 진단한 이유는, 존재자학이 곧 소유론을 존재론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상사에서 님의 존재는 인격적 정신의 존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만해 스님의 유명한 시 「알 수 없어요」의 몇 구절을 인용하겠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듯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
여기서 님의 존재가 오동잎, 푸른 하늘, 고요한 하늘의 향기, 작은 시내의 노랫소리 등으로 다양하게 구체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님은 오직 인격적 존재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모습을 님의 화현化現으로 묘사하고 있다. 님은 한국사상에서 사랑하는 존재를 상징한다.
사랑하는 존재가 오직 인격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주관적 감상의 차원으로만 보려는 낭만주의에 너무 젖어 있다. 우리의 TV연속극은 인생에서 온통 남녀의 낭만적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화면을 꽉 채운다. 이런 사랑을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인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말(romantic lie)’이라고 그의 『낭만적 거짓말과 황당한 진실』에서 언급했다. 남녀 사이의 애욕은 동물적 본능의 감정적 소유욕에서 나오는 은유법에 불과하고, 그 애욕에는 감정에 뒤얽힌 경쟁과 질투와 환멸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그런데 인간 사회가 그런 애욕을 불멸의 사랑이란 이름으로 애드벌룬처럼 붕 띄우는 “낭만적 거짓말”을 지라르는 냉혹하게 분석한다. 한국인은 냉엄한 현실을 주관적 감상의 허구로 보지 못하는 낭만주의적 미숙아의 유치함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만해의 님은 낭만적 애욕의 상징이 아니다. 『님의 침묵』의 「가지 마서요」라는 구절에서 만해는 “달콤하고 맑은 향기를 꿀벌에게 주고 다른 꿀벌에게 주지 않는 이상한 백합꽃이 어데 있어요/ 자신의 전체를 죽음의 청산에 제사 지내고 흐르는 빛으로 밤을 두 쪼각으로 베히는 반딧불이 어디 있어요/ 아아 님이여 정에 순사하려는 나의 님이시여 걸음을 돌리서요 거기를 가지 마서요 나는 싫어요/ 그 나라에는 허공이 없읍니다”라고 묘사했다. 또 「님의 얼굴」이란 절구에서는 “님의 얼굴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한 말이 아닙니다/ 어여쁘다는 말은 인간 사람의 얼굴에 대한 말이요 님은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 만치 어여쁜 까닭입니다”라고 했다. 이상의 인용은 우리에게 만해의 님이 오로지 남녀 사이의 사랑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만해의 시를 이해하기 위하여 잠시 돌아가겠다.
조금 전 하이데거가 존재자학과 존재론을 구분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 말고 이 철학자는 또 재래의 서정시(poem=poesie)와 존재론적 시(ontological poetry=Dichtung)도 구분했다. 서정시는 자이의 주관적 감정이 느끼는 일체의 서정을 노래하는 낭만적 시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론적 시는 그런 주관적 자아의 사랑하는 서정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주관적 자아가 평온하게 사라진 무아의 마음에 비치는 존재의 사실을 그대로 현시하는 것이다.
서정시의 낭만적 말은 나의 말인데,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가 현시하는 말은 ‘그것(It=Es)’의 말이다. 자아의 감정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법이자 사실의 존재가 나에게 말한다. 그는 『숲길』에서 존재론적 시인과 존재를 사유하는 자는 그 존재의 말을 받아 모시는 ‘존재의 목자(shepherd of Being)’라고 언급했다. 또 존재론적 시와 사유는 존재의 집(house of Being)을 지어서 존재의 진리를 보호하는 사명과 맞물린다고 언명했다. 그 존재를 하이데거는 3인칭 단수인 ‘그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미 나는 앞글에서 14세기 독일의 신학자 에카르트가 신을 ‘그것(isness)’이나 ‘무(nothihngness)’나 ‘존재가 없는 존재(beingless Being-=존재자가 아닌 존재)’ 등의 개념으로 기술했음을 지적했다. 이 에카르트의 신관은 부버의 신관과 아주 다르다. 그의 신은 인격적 절대자가 아니라 우주의 사실적 존재 자체와 같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로서의 ‘그것’은 16세기 조선의 서산대사가 부처를 우주적 사실로서 지적한 ‘그것(渠)’과 다르지 않다. 존재론적 이법으로서의 ‘그것’과 합일하려는 존재론적 사랑을 욕망할 때 3인칭 ‘그것’이 2인칭 ‘그대’로 방향을 전환한다고 읽어야 한다. 자아도 그대와 합일하는 낭만적 사랑을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로 향하는 인간의 낭만적 사랑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자아가 지워지지 않는 인간의 모든 사랑은 다 소유론적 사랑의 심리를 떠나지 않는다. 오직 마음이 자아를 비우는 무아의 경지에 이를 때만, 무아의 마음이 ‘그것’을 ‘그대’로 탈바꿈시키는 일치가 일어날 수 있다.
정신적 인격이라는 자아의 의식을 소유하고 있으면, 인간은 만물과 일체감을 이루면서 우주의 법칙이요 사실인 ‘그것’과 한 몸을 이룰 수 없다. 마음이 빈 거울처럼 허정虛靜해야, 인간은 자기를 잊고 우주와 일기一氣를 이룬다. 이것이 공자가 『장자』에게 설파한 심재좌망心齋坐忘(마음이 재계해서 온갖 것을 잊고 만물과 일체가 됨)의 경지겠다.
만해가 『님의 침묵』에서 이런 무아의 시를 지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해의 시는 결코 낭만적 서정시가 아니다. 그의 시는 일본에 망한 조국과 멀리 떠난 부처님이 하나의 이중인화로 작용하면서, 부처님과 조국의 역사와 산하대지의 님이 그의 마음과 일치해 주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일치의 희망은 결코 자아의식이 님이라 불리는 ‘그대’를 소유적 자기화(appropriation)로 만들려는 감정이입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기화의 길과는 정반대로 님의 것으로 되기를 희망하는 말을 한다. 분명히 ‘님의 품에 안기는 길’과 ‘죽음의 길’ 둘 밖에 없다고 천명했다. 그는 전자의 길을 가겠다고 희구했다. 그는 「예술가」라는 절구에서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소질이 너무 없나 봐요/즐거움이나 슬픔이나 사랑이란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를 그대로 쓰고 싶습니다/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와 꽃 밭에 있는 작은 돌도 쓰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희망을 ‘하나가 되어 주서요’에서 술회한다. “님이여 나의 마음을 가져가라거든 마음을 가진 나에게서 가져가서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님에게서 하나가 되게 하서요.” 만해가 말하는 님이 곧 우주의 존재론적 사실을 가리키는 ‘그것’의 현시를 가리킨다는 대목은 안 보인다. 그 점에서 그의 시는 8세기 당나라 시대의 왕유의 선시와 대조적이다. 이 왕유王維의 시에서는 일체의 님이 안 보이고 오직 ‘그것’만이 조촐하고 해맑게 소묘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만해에게서 감상적이고 낭만적 서정시를 넘어서 님의 존재와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려는 강렬한 희망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아직도 만해의 마음에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깊은 정한情恨이 그로 하여금 초탈적이고 존재론적 시를 쓰는 것을 잡아당겼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것은 오히려 님과 하나로 일치하려는 기도의 시라고 읽어도 괜찮겠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