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효의 마음혁명[마음혁명]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것

최은경
2026-08-26

[마음혁명]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것

 

모든 것이 다 환영이고 환상이라고 한다면, 언뜻 보기에 매우 허무적이고 염세적인 세계관처럼 들린다. 모든 것이 환상이니 돈은 벌어서 무엇 하며, 살아서 무엇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동안 세상은 이런 생각을 허무적이고 염세적인 도피주의와 통한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저 말은 모든 소유를 마치 아침 이슬처럼, 번개처럼, 환상처럼, 물거품처럼 여기라는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지, 존재를 무상하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실체로 일체개환(一切皆幻모든 것이 다 환상)이란 생각을 허무론의 길잡이라고 주장했던 철학은 모두 소유론적 지성의 철학이다. 인생을 소유론적 관점에서 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에, 그 가치가 아침 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지는 꿈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체개환의 사유가 소유론적 인생관을 극복하는 존재론적 사유의 길잡이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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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체개환의 사유는 패배주의를 자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소유의 상실도 두려워하지 않고 일체 존재를 위하여 헌신하는 무사심의 용기가 솟아나게 한다. 우리는 그동안 가치라는 개념을 매우 숭고하게 생각하는 교육을 받아왔다. 그 가치는 상품이 시장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리는 것과 비슷한 성질을 지닌다. 따라서 가치와 가격은 상통한다. 내 인생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비싼 것을 소유해야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여긴다. 물론 그 가치가 정신적 가치이지만, 정신적 가치도 시장가격처럼 남들이 우러러보기를 바란다. 따라서 자연히 소유론적 으로 가치 있는 인생은 가치가 별로 없는 인생에 비하여 귀중품을 가진 인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가치론은 소유론이고 택일론이다.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가려서 전자를 선택하려는 욕망은 가치론의 심리학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가치는 인간의 지성이 좋다고 평가하는 값어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 값어치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두 소유하기를 바란다. 그런 값어치는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도구적 값어치고, 다른 하나는 목적적 값어치다.

    도구적 값어치는 생활을 윤택하고 편리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고, 목적적 값어치는 생활의 정신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일컫는다. 도구적 값어치는 주로 경제 기술적인 차원에서 편리의 가치와 연관되고, 목적적 값어치는 주로 정신의 형이상학적 가치와 직결된다. 도구적 가치는 그것을 사용해서 편리라는 혜택을 받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또 목적적 가치는 정신적으로 세상을 그런 가치로 전향케 하여, 사람들은 그런 가치를 갖고 살고자 한다.

    정신이 지향하는 바는 좋은 선이기 때문에, 그 선이 세상의 주인으로서 지배하기를 원하는 것이 목적의 가치다. 이런 목적의 가치론을 구원주의라고 부르기로 하자. 지금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성의 철학은 이런 가치로써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다. 아무튼 가치는 선이다. 그것이 도구적 가치든, 아니면 구원적 가치든 다 선임에는 틀림없다.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사유는 그러한 가치론에 집착하는 삶을 풀어 주는 해독제 역할을 한다. 이런 생각은 그동안 받은 일반적 교육 이념과는 다르다. 그동안의 일반적 교육론은 소유론적 삶의 방식에 집중된 의미론을 부각시켜 왔다. 그러나 가치론에 거리를 두려는 생각은 가치론이 필연적으로 반反가치의 배설물을 낳는다고 여긴다.

    모든 생명체는 타자의 것을 취득해야만 살 수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필연적 법칙이다. 타자의 것을 취득했으니까 배설하는 것은 어김없다. 자연의 배설물은 자연 스스로 다 정화시킨다. 이것은 자연 생태계에서 인간이 저질러 놓은 사고를 제외하면, 자연사한 주검을 거의 볼 수 없고 저절로 다 청소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에는 음식물을 가치로서 먹으면 필연적으로 반가치의 배설물과 찌꺼기가 쏟아져 나온다. 이것이 자동적으로 처리되지 않고 남아서 타자들을 괴롭힌다. 가치와 반가치가 자연에서처럼 자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도구적 가치든, 구원적 가치든 모두 반가치의 배설물을 낳는다. 이것을 지성의 철학은 외면해 왔다. 일체개환의 사유는 가치와 반가치를 다 환상으로 여겨, 거기에 너무 목숨을 걸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 점을 좀 더 살펴보자.

    도구주의의 배설물은 곧 기능주의와 물신숭배 사상과 상통한다. 기능주의의 어둠에 대해서는 앞글에서 이미 언급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물신숭배 사상만 언급하겠다. 본디 물신숭배주의(fetishism)는 종교인류학의 용어로서, 어떤 자연물에 주술적 능력이 있다고 믿는 원시 종교 사상을 가리킨다. 그 용어를 마르크시즘에서는 자본주의에 적용시켜, 인간이란 존재가 돈과 돈이 되는 일체에 의해 주술이 걸려 인간 존재가 그 물신숭배에 의해 소외된 상태를 말하는 개념으로 변용됐다. 말하자면 인간성이 소유물 때문에 소외되어 가는 상태를 물신숭배화되어 간다고 한다.

    이 물신숭배주의는 곧 배금주의(mammonism)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돈은 인간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의식주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귀한 가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때문에 돈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 돈을 물신으로 숭배하는 반가치가 반드시 도래한다. 이 도구주의의 반가치인 기능주의와 물신주의의 독성을 고발한 사람은 많다. 이것은 아마도 자본주의의 어둠을 극복하려는 사회주의나 도덕주의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목적주의인 구원주의의 허상을 말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것은 아마 목적 주의적 구원주의가 세상을 정신적 선으로 전회시키려는 숭고한 행위처럼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목적주의나 구원주의는 세상이 공동선의 목적을 지향하게끔 인간의 선의지를 발동한다든지, 아니면 인간의 선의지가 세상의 불의를 씻고 정의의 선으로 세상을 재편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고취시킨다.

    이러한 구원주의는 꼭 정치적 구원만을 말하지 않는다. 종교적 구원도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정치적 구원의식과 함께 간다. 구원도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정치적 구원 의식과 함께 간다.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이 구원주의의 법집에 빠져 투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이런 구원주의의 이상을 일컬어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명명했다.

 

    이 세상은 반드시 정의가 이기는 것도 아니고, 또 역사의 곳곳에 부조리가 도사리고 있어서 이 세상의 구원이 인간의 가장 성스러운 사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하여 두 가지 실존적 태도가 있다. 그 하나는 카뮈Albert Camus의 태도고, 다른 하나는 사르트르의 것이다.

    정자는 세상의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는 뾰족한 방도가 없기에, 양심의 이름으로 그에 항거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반항의 철학이다. 부조리를 철저히 의식하면서 죽자는 것이다. 그래서 카뮈는 『반항적 인간』에서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고 외쳤다. 카뮈는 철학적 사유의 질서에서 반항이 “나는 생각한다(cogito)”에 해당한다고 전재한다. 그러면서 이 반항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독에서 벗어나, 모든 인간에게 최초의 가치를 정립하게 하는 공통분모가 되기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의미를 낳을 수 있다고 한다. 반항이 부조리한 세상에 공동선의 존재를 정립한다는 것이다.

    후자는 사르트르의 사상이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와 무의미에 항거하되,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가자는 적극적 사상을 전재했다. 그래서 그의 만년은 계급 혁명을 찬양하는 마르크시즘으로 흘렀다. 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스스로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외쳤다. 이 말은 그의 또 다른 저서인 『상황 Ⅱ』에서 ”만든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을 계시한다“라는 말과 상통한다. 카뮈의 반항과 사르트르의 혁명적 행동은 뉘앙스가 다르다. 사르트르가 ‘만들어 간다는 것’은 ‘역사를 만들어간다(making history)’는 구원주의를 말한다. 이런 역사 만들기 작업이 사르트르를 마르크시즘과 만나게 했다.

    목적주의는 역사 속에서 구원주의로 나타난다. 카뮈와 사르트르, 마르크스가 모두 철학적 무신론자다. 그러나 나는 이들 무신론적 구원주의가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역사신학적 구원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모든 구원주의는 세상을 절대선의 목적의식으로 개조할 것을 발의한다. 그런 구원주의의 어둠과 배설물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투쟁주의라고 생각한다.

    투쟁주의는 역사를 철저히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보고, 선의 승리를 위하여 투쟁하는 성전을 독려하는 사상이다. 선을 위한 선전 선동기는 곧 투쟁가다. 카뮈만이 그런 투쟁의 대결구도를 불신했지만, 사르트르나 마르크스 그리고 역사신학은 택일적 선택 구조 속에서 의미와 선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권력의지인 강력한 진리의지를 펴고 있다. 마르크시즘은 세속의 역사신학이다.

    일체개환의 의미는 도구적 아집과 구원적 법집의 어리석음을 알리는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선의 혁명을 위한 고집으로 선의 세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지나간 동서고금의 역사가 말하듯 혁명이 낳은 신악이 구악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세상을 괴롭힌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21세기는 도구주의와 구원주의의 허상을 깨달아야 하는 시점이다. 그동안 지성주의가 이 세상을 만들어 왔으나, 이제 지성의 소유론이 지닌 배설물을 심각하게 생각해 볼 때다.

    일체가 환상이라는 생각은 허무를 부르지 않고, 바깥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이 헛된 꿈에 지나지 않음을 가르쳐준다. 승찬 대사가 『신심명』에서 ”일체 두 가지 생각은 사량 짐작에서 나온 것이니, 꿈속의 환영과 공화空華(헛꽃)를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고 언급했다. 저 말은 인생을 소유론에서 존재론으로 전향시키는 단초端初가 된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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