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효의 마음혁명[마음혁명] 성욕과 에로티시즘

최은경
2026-08-30

[마음혁명]


성욕과 에로티시즘

 

 

20세기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푸코는 자신의 저서 『성욕의 역사』 3부작에서 성욕의 영역이 역사에서 어떻게 이성과 지식의 권력에 의하여 억압되었는지 분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을 『성의 역사』라고 옮겼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성(sex)과 성욕(sexuality)은 다르다. 전자는 중성적 의미를 띠고, 후자는 성을 통한 인간 욕망의 분출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는 성욕의 고고학적 계보를 추적하면서, 서양이 추구해 온 이성주의의 학문이 성욕을 광기와 유사한 위험스런 비이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한 이성적 사회의 권력을 비판한다. 그는 이를 통해 이성과 비이성이 분리되기 이전의 인간의 진실을 찾고자 했다. 또 그는 고대 그리스가 그런 분리 이전의 인간 이해를 이루었다고 평가하면서, 로고스logos(이성)와 히브리스hybris(몰이성)가 대립과 모순으로 나뉘기 이전에 원초적으로 통합된 인간을 찾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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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의 이러한 요청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아포리아aporia(풀리지 않는 난제)를 던진다. 의식의 표면에서 인간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은 무의식의 심층에서는 성욕이란 용암을 분출하고, 광란의 가능성을 몸속 깊은 곳에 은닉하고 있다. 때로는 저 이성적 훈련에 의한 억압보다 폭발하는 몰이성의 말에 따라 거짓 없는 진실을 통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욕의 말은 진실하기도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푸코가 남다른 해안으로 성욕과 비이시ᅟᅥᆼ의 지하 세계를 구조적인 인식론으로 발견했지만, 그는 동성애로 에이즈에 걸려 50대의 이른 나이에 죽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 이후로 20세기의 서양철학자들은 대개 이 성욕을 주요한 테마로 다루었다. 20세기 후반에 철학의 큰 화도는 몸과 그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이 주제를 가장 심도있게 다룬 철학자는 프랑스의 메를로퐁티다. 인간의 의식이 타자의 의식과 상호관계에서 구체화되듯이, 몸도 타자의 몸과 관계를 맺으며 잠을 깬다. 그 순간이 바로 에로틱한 느낌을 갖는 때다.

에로틱한 느낌은 꼭 성인 남녀의 몸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아기의 몸에 대한 가족의 사랑에서도 일어난다. 아기가 너무 귀여워서 발가락이나 뺨을 어루만지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인간의 몸은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살(肉)로서 나타난다. 내 몸과 타자의 몸 사이에 주관도 아니고 객관도 아닌, 그런 애매모호한 사이 세계를 공유하고픈 욕망을 각자의 몸이 느낀다. 메를로퐁티는 이 사이 세계가 바로 ‘살(flesh)’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성욕의 에로티시즘은 나의 몸이 타자의 몸과 일체를 이루고 싶은 욕망의 발로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성욕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성욕을 제외하고는 인간관계를 해명할 수 없다. 메를로퐁티가 그의 『지각의 현상학』에서 든 예를 보자. 어떤 처녀가 애인과 사귀는 것을 어머니에게 금지 당한 이후, 그녀의 몸은 스스로 먹고 자기를 거부하고 외출도 마다하다가 드디어 실성하여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처럼 성욕의 금지는 모든 다른 일반적 관계마저 스스로 차단시키는 결과를 빚는다.

   성욕의 에로티시즘은 좁은 의미의 성관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타자 지향적 운동을 거부하는 원동력으로 이어진다. 적어도 성욕이 인간관계의 모든 성취감을 가능케 하는 가장 저변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견해다. 그것이 없다면 모든 인간관계가 목석이나 얼음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몸의 성욕은 모든 것을 의미화한다. 메를로퐁티는 그것이 없어지면, 인간에게 의미마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모든 종교와 도덕은 성욕의 억압을 요구해 왔다. 푸코는 특히 서양의 기독교 율법이 성욕의 억압을 정상상태의 척도로 세워 놓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종교와 도덕은 에로티시즘의 적이다. 어느 종교 수행자는 자꾸 성욕이 발동되어 마음에 에로틱한 생각이 가득해져 자신의 성기를 잘랐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성자가 되려는 욕망도 차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의욕도 상실했다. 성욕은 성기를 자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무의식의 원동력인 성욕은 성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성기는 그 성욕을 실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성자나 현자는 이 성욕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메를로퐁티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성욕은 물건처럼 창고에 가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무화無化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성욕은 몸을 지닌 마음이 영구히 벗어나지 못하는 욕망이다.

   그럼 혹시 몸을 떠난 마음은 성욕을 갖고 있을까? 불교에서는 마음을 습관화된 업業으로 본다. 그 때문에 탈육脫肉한 마음도 그럴 수 있다. 그래서 그 업을 바꾸지 않으면, 윤회의 바퀴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불교도가 아닌 메를로퐁티가 자신의 저서 『지각의 현상학』에서 그 성욕이 우리 몸의 것도 아니고 우리 의식의 것도 아닌, 어떤 알 수 없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불교도처럼 짐작한다. 아무튼 성자와 현자도 성욕을 지우지 못하고, 그 성욕을 다른 방식으로 변용시켰을 뿐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성욕의 살을 철학적으로 언명하면서, 성욕은 몸이 타자의 몸과 일치하고픈 관여의 욕망이라고 표현했다. 이 일치의 욕망이 소유론적인가, 아니면 존재론적인가? 그는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그의 특유한 애매모호성(ambiguity) 이론으로 성욕의 본질을 기술한다.

   한편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였던 라캉은 성욕을 소유론적으로 해석했다. 아기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남근(phallus)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아기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탯줄로 연결되어 존재하다가, 어절 수 없이 세상에 나오면서 탯줄을 자르는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그와 동시에 아기는 자기 몸이 산산조각으로 갈라진다고 느낀다. 그런데 치유할 수 없는 정신병자도 자기 몸이 갈가리 찢겨진다는 환상을 떨치지 못하고 평생 괴로워하며 지낸다는 것이다.

   예컨대 15-16세기 벨기에 프랑드르 지방의 화가인 보슈Hieronymus Bosch의 그림 ‘성 안토니오의 유혹’에는 지옥의 고통과 에로틱한 분위기가 뒤섞여 있다. 거기에는 사지가 절단된 광인들의 환상이 그려져 있다. 라캉은 이 그림이 인간의 원초적 괴로움의 무의식을 반영한다고 본다. 정상적 아기는 거울을 통하여 자기 몸이 온전함을 보고 매우 기뻐하는 반면, 정신병자는 거울을 보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고 한다. 아무튼 정상적 아기는 자기가 그 어머니와 일치 상태에 있게 하는 남근이라고 착각하면서, 남근으로서 어머니를 소유하고픈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기를 남녀로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 착각을 깨는 것은 아기가 사회생활로 들어가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 착각을 깨고 아기가 사회생활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법’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무서운 상징적 법이 아기가 어머니를 소유하련느 욕망을 금지하기에, 아기는 직접 소유하기를 포기하고 간접적인 우회의 길을 밟아 언어를 배우면서 늘 상징적인 에로틱한 소유적 합일을 꿈꾼다. 아기는 스스로 ‘이상적 자아’가 되기를 멈추고, 아버지의 상징이 허용하는 ‘자아의 이상’을 찾아 자아실현의 길을 찾아간다. 그러므로 인간이 커서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모두 원초적 어머니와의 소유를 우회의 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이루려는 욕망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라캉의 소유론과 상징론은 이성의 노동으로서 일체의 모든 것을 의미와 지식으로 구성하려는 헤겔철학과 비슷한 데가 있다. 실제로 라캉은 철학적으로 헤겔을 좋아했다.

 

   그러한 헤겔적인 일체 의미와 논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20세기 프랑스의 헤체철학자 바타이유가 있다. 바타이유는 그의 저서 『에로티시즘』에서 심신의 모든 에로티시즘을 , 존재의 격리와 단절에 대하여 깊은 연속의 감정을 대체시키는 것으로 읽었다. 옷을 벗은 나체는 자기 폐쇄의 단절을 살아가는 인간이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교환 상태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성욕은 바다의 파도가 서로서로 주고 받듯이, 혼용의 새로움으로 합일하고자 하는 자기부정의 황홀과 같다는 것이다. 이 황홀감의 욕망은 곧 죽음에 몰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에로티시즘은 죽음에게 문을 열어 준다.” 여기서 말한 죽음은 자기 폐쇄적 고집이 소멸됨을 일컫는다.

   성욕은 자기를 무화시키는 황홀과 직결된다. 자기 무화인 죽음은 곧 모든 분별력을 넘으려는 욕망을 말한다. 여기서 바타이유는 성욕을 활홀감의 종교적 신비주의와 비교한다. 그는 성욕과 신학적 신비주의가 모두 자기를 잊는 황홀감이란 점에서 비슷하지만, 후자는 자기를 잃으면서 신에게 더 큰 것을 얻으려는 지배권(mastership)의 소유론을 버리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런 신학적 신비주의를 부정하면서, 에로티시즘과 자기의 비非신학적 신비주의(atheological mysticism)를 모든 지성의 파멸과 논리의 와해를 상징하는 무지無知와 무아無我와 비어있는 하늘을 닮은 자유의 저상권(sovereignty)에 비유했다. 바깥에 대하여 ‘오직 모를 뿐’이라는 20세기 한국의 고승 숭산 대사의 가르침은 곧 자아의 주체 의식을 해체시키고, 이 해체가 마음을 자유로운 해탈의 지상권으로 이끈다는 바타이유의 사유와 일맥상통한 데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성자는 육체의 성욕에서 일체 존재와 교환하는 마음의 황홀로 욕망의 자리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에로티시즘이 죽음으로 이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잘난 체하는 자아의 모든 분별적 지식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결국 그가 ‘무의 사유는 사유의 무’라고 말한 것은 모든 지성적 사고의 포기를 유도하는 허심虛心이 ‘비신학적 황홀(antheological ecstacy)’이라는 말과 같다. 허심의 비신학적 황홀은 세상을 인간이 부과하는 의미로 채우려는 의지의 철학이 아니라, 놀이로서 자기를 잊고 만물과 교감하려는 자기 죽음의 사유와 동의어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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