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혁명]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비판에 대하여
미국의 거대한 자본주의에 늘 정신적 대립각을 세워 온 유럽은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명제를 3세대에 걸쳐 시도했다. 1세대의 극복 시도는 마르크스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레닌Lenin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거대한 관료주의의 괴물로 치달음으로써 실패했다. 소련의 붕괴가 이를 입증한다. 2세대는 네오마르크시즘 운동으로서, 관료화에 빠지지 않고 도덕적 이성으로 인간을 소외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들은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마르쿠제Herbert Marcuse, 하버마스 등 이른바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 사상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철학 사상이 지닌 고매한 도덕적 이상주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가지 거리감을 지울 수 없다. 첫째로 60년 대 내가 유학생이던 당시의 한국은 아직도 고도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할 기미도 없었던 저개발 최빈곤국이었다. 하지만 신좌파운동은 그들 사회가 이미 맛보고 있는 풍요한 고도자본주의를 바탕으로 그것을 극복하자는 운동이다. 그래서 이들 사상을 그대로 한국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20세기 프랑스의 사상을 그대로 한국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20세기 프랑스의 사회학자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이 경고한 ‘지식인의 아편’인 혁명적 관념의 유희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둘째로 나는 이들이 주장하는 이상 사회를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현실성에 큰 의문을 가졌다. 관념적으로는 아무리 멋져도 현실적으로 실현할 가능성이 희박하면,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와 같다. 더구나 인간사회는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연습장이 아니기에, 나는 관념적 사유로 현실을 대체하겠다는 혁명적 발상을 저어했다. 특히 1세대 ‘사회주의=관료주의’의 실패가 늘 나로 하여금 2세대 신좌파운동의 사상에 선뜻 동의할 수 없게 했다.
더구나 그 당시 나의 철학 공부를 이끌어 주던 두 정신적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프랑스의 메를로퐁티와 가브리엘 마르셀이었다. 메를로퐁티는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가 소련의 스탈린주의가 실현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낭만적 허구를 보고서 이상주의 사상의 거짓을 고발한 철학자다. 그는 또 현실 역사가 이성의 빛과 의미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정리하지 못하는 애매모호성으로 엮인다는 것을 서술하면서, 인간 역사를 오직 의미의 역사로 환원하고자 하는 과잉 도덕적 명분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가브리엘 마르셀은 가톨릭 철학자로서 인류의 역사 세계가 이미 ‘깨어진 세계’인데, 그 세계에서 악을 박살 내겠다는 결심으로 굳어진 절대선을 지향하는 것은 결국 국가주의적 나치즘과 계급주의적 공산주의와 같은 광적인 격정의 정치체제를 만든다고 고발했다.
다름 3세대의 자본주의 비판 운동이 다시 등장했다. 마르크시즘을 해방적 이성의 자기소외 극복 운동으로 승화시키려는 2세대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한 마당에서 생긴 포스트모던적인 운동이 3세대다. 자본주의 사회가 이미 너무 농염하게 성숙하여 마르크스주의로 새 사회를 창조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비非마르크스적인 자본주의의 극복이 시도되었다. 이번에는 독일과 달리 프랑스의 푸코, 들뢰즈Gilles Deleuze, 알튀세르Louis Althusser,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를 중심으로 한 사회사상 운동이 생겼다. 이들 사상의 공통점을 몇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자본주의적 정치권력의 상품적 대중화를 비판하는 데 있다.
이들의 사상은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심어 놓는 무의미한 허무주의적인 흐름을 그대로 빨리 노출시켜, 자본주의가 허무주의로 종말을 맺게끔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조금씩 허무주의자들이다. 들뢰즈와 알튀세르는 자살로 삶을 마감했고, 푸코는 에이즈에 걸려 50대에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특이한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보드리야르의 사회사상을 훑어보자.
단적으로 보드리야르의 사회사상은 초월의 정신을 망각한 현대 소비사회의 정신 부재의 경박성을 슬퍼하면서, 그 원인이 바로 소비사회의 자본적 본질인 모든 것의 기호화(signalization)에 있다고 한다. 전통 사회에서 물건은 어떤 가치에 대응했다. 사용 가치든 교환가치든 물건은 인간의 구체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다.
예를 들어 집은 어떤 정신적이고 내면적 가치를 가족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제 집은 단지 상상적인 상품의 기호적 가치만을 지시해서, 헌 물건을 버리고 새로 사듯이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 품목에 지나지 않는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앉아서 리모콘으로 쉽게 바꾸듯, 모든 것은 소비자의 순간적 변덕에 따라 움직이는 기호(sign)와 같은 ‘환영幻影(simulacrum)’에 지나지 않는다.
고도소비사회에서는 자동차도 기능가치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유행이나 삶의 스타일이나 허세나 으쓱대고 싶은 욕망의 환영을 만족시켜 주는 일시적 대용물일 뿐이다. 그런 욕망의 환영은 마치 옛 소련의 한 청년이 서방 자본주의의 대명사인 청바지를 입고 다니거나, 아프리카 부시맨의 어떤 사나이가 비행기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무슨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청바지나 콜라병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차이의 기호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소비사회에서 모든 이들은 다른 이들과 다른 어떤 기호의 환영을 소비하고 싶어 한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본질은 노동과 정신적 가치 등 모든 것이 다 시장의 교환가치로 전환되어 상품화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마르크스의 비판 이론은 이미 지나간 시절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사회는 모든 것이 기호적 교환과 같은 ‘흉내 내기(simulation)’의 차원으로 전락하여 실재적 가치가 다 사라졌다. 보드리야르는 모든 흉내 내기의 환영이 소비사회가 부추긴 차이화의 조작 코드에 인간이 멋모르고 덩달아 춤추는 껍데기임을 연상시킨다고 진단한다.
차이화 코드는 소비사회가 소비자를 유혹하는 차별화 기호의 놀이에 해당한다. 그래야만 소비자가 차이의 환영 속에서 각각 섹시sexy해지기 위해 마구 돈을 쓴다. 섹시하다는 것은 소비 시장에서 상품으로 잘 전달되기 위하여 남들을 혹하는 기호이고, 각자는 대중사회에서 차이를 표시하기 위하여 더 섹시하게 튀어 보이게끔 과감히 스스로를 기호화한다. 모든 이는 다 섹시한 차이를 연출하기 위해 환영을 좇는다. 보드리야르가 『소비사회』에서 기술한 것처럼 “소비는 기호가 흡수하고 기호에 의하여 흡수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이 영상으로 보인다. 브라운관이나 컴퓨터의 화면이나 유리처럼 투명하면서 절연체처럼 차가운 매체의 통로를 통하여, 세상을 구경하거나 백화점의 상품을 훑어본다. 충격적인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고도 사람들은 자동차 유리를 통하여 감정이 절연된 상태에서 구경하는 정도의 감정만 갖는다. 서로 관여하는 진실이 우러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금방 지나가는 일시적 참상에 지나지 않는다.
먼 나라에서 전쟁이 터져도 그것은 텔레비전 화면의 그림으로 보는 환영일 뿐이다. 지하철에 사람들이 우글거리나 그들을 사람이라고 여기기보다 오히려 사람의 환영이라고 본다. 그냥 사람 비슷한 환영들이 득실거릴 뿐이다. 아무도 대중들을 사랑=a의 실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는 현실을 실제로 느끼지 않고, 차가운 기호로 대체해 실제로 느끼는 척 흉내 낼 뿐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소비사회를 형이상확적 근거를 상실한 ‘환영’의 사회, ‘흉내 내기’의 사회라고 불렀다. 또 그는 이런 사회를 실재가 증발하고 환영이 진짜보다 그 위에 살을 덧붙이는 ‘초과실재(hypereality)’의 사회라고 명명했다. 초과실재는 실재보다 과장된 환영의 허깨비와 같은 부피를 말한다. 이 초과실재가 바로 환영이고, 흉내 내기의 허상과 같다. 그는 이런 환영의 흉내 내기와 같은 기호가치(value-sign)만 비대해진 소비사회에서는 환영처럼 무수하게 지나가는 기호적 ‘초과실재’에 의하여 내부에서 인격의 파탄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런 파탄을 그는 ‘내파적內破的 폭력(implosive violence)’이라 불렀다.
예컨대 게임이나 쇼핑에 미친 사람이 상상적 초과실재를 현실로 착각하고, 자기 내부에서 환영으로 배가 불러 파열한다. 본디 내파는 음운론적으로 외파外破(explosion)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영어의 ‘탭tap’ ‘컷cut’에서 파열음의 음가인 ‘t’와 ‘k’가 첫 발음에서는 바깥으로 폭발하는 외파적 파열음이 되지만, 끝 발음의 파열음인 ‘p’와 ‘t’는 밖으로 폭발하지 않고 안으로 잠기는 그런 음가를 지닌다. 이것이 외파음에 대한 내파음의 의미다.
과거의 문명은 마르크스의 분석처럼 외부의 모순(계급투쟁)으로 외파하는 구조를 지녔지만, 현대 소비사회의 본질은 스스로 인간이 기호처럼 흉내 내기를 하다가 많은 기호에 헛배가 불러 내파하여 폭발하는 폭력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드리야르가 본 소비사회에 대한 허무적 진단이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마음혁명]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비판에 대하여
미국의 거대한 자본주의에 늘 정신적 대립각을 세워 온 유럽은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명제를 3세대에 걸쳐 시도했다. 1세대의 극복 시도는 마르크스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레닌Lenin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거대한 관료주의의 괴물로 치달음으로써 실패했다. 소련의 붕괴가 이를 입증한다. 2세대는 네오마르크시즘 운동으로서, 관료화에 빠지지 않고 도덕적 이성으로 인간을 소외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들은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마르쿠제Herbert Marcuse, 하버마스 등 이른바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 사상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철학 사상이 지닌 고매한 도덕적 이상주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가지 거리감을 지울 수 없다. 첫째로 60년 대 내가 유학생이던 당시의 한국은 아직도 고도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할 기미도 없었던 저개발 최빈곤국이었다. 하지만 신좌파운동은 그들 사회가 이미 맛보고 있는 풍요한 고도자본주의를 바탕으로 그것을 극복하자는 운동이다. 그래서 이들 사상을 그대로 한국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20세기 프랑스의 사상을 그대로 한국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20세기 프랑스의 사회학자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이 경고한 ‘지식인의 아편’인 혁명적 관념의 유희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둘째로 나는 이들이 주장하는 이상 사회를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현실성에 큰 의문을 가졌다. 관념적으로는 아무리 멋져도 현실적으로 실현할 가능성이 희박하면,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와 같다. 더구나 인간사회는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연습장이 아니기에, 나는 관념적 사유로 현실을 대체하겠다는 혁명적 발상을 저어했다. 특히 1세대 ‘사회주의=관료주의’의 실패가 늘 나로 하여금 2세대 신좌파운동의 사상에 선뜻 동의할 수 없게 했다.
더구나 그 당시 나의 철학 공부를 이끌어 주던 두 정신적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프랑스의 메를로퐁티와 가브리엘 마르셀이었다. 메를로퐁티는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가 소련의 스탈린주의가 실현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낭만적 허구를 보고서 이상주의 사상의 거짓을 고발한 철학자다. 그는 또 현실 역사가 이성의 빛과 의미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정리하지 못하는 애매모호성으로 엮인다는 것을 서술하면서, 인간 역사를 오직 의미의 역사로 환원하고자 하는 과잉 도덕적 명분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가브리엘 마르셀은 가톨릭 철학자로서 인류의 역사 세계가 이미 ‘깨어진 세계’인데, 그 세계에서 악을 박살 내겠다는 결심으로 굳어진 절대선을 지향하는 것은 결국 국가주의적 나치즘과 계급주의적 공산주의와 같은 광적인 격정의 정치체제를 만든다고 고발했다.
다름 3세대의 자본주의 비판 운동이 다시 등장했다. 마르크시즘을 해방적 이성의 자기소외 극복 운동으로 승화시키려는 2세대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한 마당에서 생긴 포스트모던적인 운동이 3세대다. 자본주의 사회가 이미 너무 농염하게 성숙하여 마르크스주의로 새 사회를 창조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비非마르크스적인 자본주의의 극복이 시도되었다. 이번에는 독일과 달리 프랑스의 푸코, 들뢰즈Gilles Deleuze, 알튀세르Louis Althusser,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를 중심으로 한 사회사상 운동이 생겼다. 이들 사상의 공통점을 몇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자본주의적 정치권력의 상품적 대중화를 비판하는 데 있다.
이들의 사상은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심어 놓는 무의미한 허무주의적인 흐름을 그대로 빨리 노출시켜, 자본주의가 허무주의로 종말을 맺게끔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조금씩 허무주의자들이다. 들뢰즈와 알튀세르는 자살로 삶을 마감했고, 푸코는 에이즈에 걸려 50대에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특이한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보드리야르의 사회사상을 훑어보자.
단적으로 보드리야르의 사회사상은 초월의 정신을 망각한 현대 소비사회의 정신 부재의 경박성을 슬퍼하면서, 그 원인이 바로 소비사회의 자본적 본질인 모든 것의 기호화(signalization)에 있다고 한다. 전통 사회에서 물건은 어떤 가치에 대응했다. 사용 가치든 교환가치든 물건은 인간의 구체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다.
예를 들어 집은 어떤 정신적이고 내면적 가치를 가족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제 집은 단지 상상적인 상품의 기호적 가치만을 지시해서, 헌 물건을 버리고 새로 사듯이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 품목에 지나지 않는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앉아서 리모콘으로 쉽게 바꾸듯, 모든 것은 소비자의 순간적 변덕에 따라 움직이는 기호(sign)와 같은 ‘환영幻影(simulacrum)’에 지나지 않는다.
고도소비사회에서는 자동차도 기능가치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유행이나 삶의 스타일이나 허세나 으쓱대고 싶은 욕망의 환영을 만족시켜 주는 일시적 대용물일 뿐이다. 그런 욕망의 환영은 마치 옛 소련의 한 청년이 서방 자본주의의 대명사인 청바지를 입고 다니거나, 아프리카 부시맨의 어떤 사나이가 비행기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무슨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청바지나 콜라병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차이의 기호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소비사회에서 모든 이들은 다른 이들과 다른 어떤 기호의 환영을 소비하고 싶어 한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본질은 노동과 정신적 가치 등 모든 것이 다 시장의 교환가치로 전환되어 상품화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마르크스의 비판 이론은 이미 지나간 시절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사회는 모든 것이 기호적 교환과 같은 ‘흉내 내기(simulation)’의 차원으로 전락하여 실재적 가치가 다 사라졌다. 보드리야르는 모든 흉내 내기의 환영이 소비사회가 부추긴 차이화의 조작 코드에 인간이 멋모르고 덩달아 춤추는 껍데기임을 연상시킨다고 진단한다.
차이화 코드는 소비사회가 소비자를 유혹하는 차별화 기호의 놀이에 해당한다. 그래야만 소비자가 차이의 환영 속에서 각각 섹시sexy해지기 위해 마구 돈을 쓴다. 섹시하다는 것은 소비 시장에서 상품으로 잘 전달되기 위하여 남들을 혹하는 기호이고, 각자는 대중사회에서 차이를 표시하기 위하여 더 섹시하게 튀어 보이게끔 과감히 스스로를 기호화한다. 모든 이는 다 섹시한 차이를 연출하기 위해 환영을 좇는다. 보드리야르가 『소비사회』에서 기술한 것처럼 “소비는 기호가 흡수하고 기호에 의하여 흡수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이 영상으로 보인다. 브라운관이나 컴퓨터의 화면이나 유리처럼 투명하면서 절연체처럼 차가운 매체의 통로를 통하여, 세상을 구경하거나 백화점의 상품을 훑어본다. 충격적인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고도 사람들은 자동차 유리를 통하여 감정이 절연된 상태에서 구경하는 정도의 감정만 갖는다. 서로 관여하는 진실이 우러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금방 지나가는 일시적 참상에 지나지 않는다.
먼 나라에서 전쟁이 터져도 그것은 텔레비전 화면의 그림으로 보는 환영일 뿐이다. 지하철에 사람들이 우글거리나 그들을 사람이라고 여기기보다 오히려 사람의 환영이라고 본다. 그냥 사람 비슷한 환영들이 득실거릴 뿐이다. 아무도 대중들을 사랑=a의 실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는 현실을 실제로 느끼지 않고, 차가운 기호로 대체해 실제로 느끼는 척 흉내 낼 뿐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소비사회를 형이상확적 근거를 상실한 ‘환영’의 사회, ‘흉내 내기’의 사회라고 불렀다. 또 그는 이런 사회를 실재가 증발하고 환영이 진짜보다 그 위에 살을 덧붙이는 ‘초과실재(hypereality)’의 사회라고 명명했다. 초과실재는 실재보다 과장된 환영의 허깨비와 같은 부피를 말한다. 이 초과실재가 바로 환영이고, 흉내 내기의 허상과 같다. 그는 이런 환영의 흉내 내기와 같은 기호가치(value-sign)만 비대해진 소비사회에서는 환영처럼 무수하게 지나가는 기호적 ‘초과실재’에 의하여 내부에서 인격의 파탄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런 파탄을 그는 ‘내파적內破的 폭력(implosive violence)’이라 불렀다.
예컨대 게임이나 쇼핑에 미친 사람이 상상적 초과실재를 현실로 착각하고, 자기 내부에서 환영으로 배가 불러 파열한다. 본디 내파는 음운론적으로 외파外破(explosion)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영어의 ‘탭tap’ ‘컷cut’에서 파열음의 음가인 ‘t’와 ‘k’가 첫 발음에서는 바깥으로 폭발하는 외파적 파열음이 되지만, 끝 발음의 파열음인 ‘p’와 ‘t’는 밖으로 폭발하지 않고 안으로 잠기는 그런 음가를 지닌다. 이것이 외파음에 대한 내파음의 의미다.
과거의 문명은 마르크스의 분석처럼 외부의 모순(계급투쟁)으로 외파하는 구조를 지녔지만, 현대 소비사회의 본질은 스스로 인간이 기호처럼 흉내 내기를 하다가 많은 기호에 헛배가 불러 내파하여 폭발하는 폭력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드리야르가 본 소비사회에 대한 허무적 진단이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